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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원형 치우기(둑기) 복원되었다!

설레임의 하루 2011. 7. 13. 05:01

기사입력: 2011/06/05 [23:12]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성훈 컬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6/05 [23:12]

 

 

 

 

태극기의 원형은 박영효가 그린 것이 아니라 둑신사에 있었던 둑신기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고 있기로는, 원래 조선시대 때는 국기가 없었는데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그려 가져간 것이 현 태극기의 원형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태극기는 박영효의 창작물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태극기는 친일파 박영효의 창작물이 아니라 원래 조선시대 때까지 전해 내려오던 둑기(치우기)를 간단하게 개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태극기의 원래 원형인 둑기(치우기)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으며, 우주를 나타내는 형상들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깃발이었다.

4일(토) 오후2시 구리시에 있는 구리역광장에서 거행된 추모대제 고주몽 탄신연에서 치우천왕과 고주몽의 존영과 함께 치우기가 원형대로 복원돼 주목을 받았다. 

▲ 좌측에 8괘가 그려진 치우기가 원래 태극기의 원형인 치우기이다. 치우천왕과 추모대제 고주몽의 존영도 공개되었다.     © 편집부


치우천왕은 동방의 군신(軍神)

배달국(구리)의 14대 자오지환웅인 치우천왕은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방의 군신(軍神)이며,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의 시조(始祖)이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적혀 있기를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兵主)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武神)으로서 용맹하고 강함의 조상(勇强之祖)이라 할지니, (중략), 이로서 태시(太始)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대대로 치우천왕을 군신 또는 무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치우천왕에게 제를 올리는 풍속이 생긴 것은 치우천왕이 전쟁에서 연전연승하여 패배를 몰랐고,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도 73번 모두 승리했기 때문이다. 한(漢)고조 유방도 치우천왕을 군신(軍神)으로 받들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사당에 들러 제를 올렸다 한다. <사기 봉선전>에는 “축관에게 명하여 장안에 치우사(蚩尤祠)를 세우도록 하고 사관(祠官), 축관(祝官), 여무(女巫)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가 과대망상소설인 <삼국연의>를 보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방의 군신(東方軍神)이라는 지위는 관우에게로 넘어간다. 관우는 오나라 장수 여몽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린 촉한의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 의해 정책적으로 군신으로 추앙된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에도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關王廟: 현 동묘)가 생겼다. 역사왜곡을 위해 명나라가 건축비용 모두를 부담했다. 

비록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라 동묘에 제사를 올리면서, 조상이며 진정한 군신(軍神)인 치우천왕에게도 제사를 올렸다. 그 제사의 이름은 둑제(纛祭)로 둑소제(纛所祭)의 준말로 일 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고 그리고 무장(武將)들이 임지로 떠가기 전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조선시대 때의 둑신(纛神)도 치우천왕인 것이다. 왜냐하면 치우천왕만이 이 나라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동방의 군신인 치우천왕께 둑제를 지냈던 것이다. 

둑제, 둑기(치우기)와 관련된 사서의 기록들

1) “기사일에 군대 사열이 끝난 후에 왕이 친히 궁문(宮門)에서 기(纛旗)를 제사지냈다.”(『고려사』〈충렬왕 정해 13년(1287)〉조)
2) “영안군에게 명하여 둑신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 차림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2년 1월 16일 >
3) “삼군(三軍)의 둑(纛)을 강안전(康安殿)의 간락청(看樂廳)에 옮겨 두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종 1년 8월 25일〉
4) “군기(軍機) 때문에 율(律)을 범하여 둑기(纛旗) 밑에서 참형을 받게 되었다.”<조선왕조실록 중종 27년〉
5) “(1593 癸巳年 2月 初4日, 1594 甲午年 9月 初8日, 1595 乙未年 9月 20日) 둑제를 지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
6) 비변사가 아뢰기를 “군사를 출동시킬 적에 둑제(纛祭)를 지내는 것은 고사(古事)이나 다만 출동한 후에 제사하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 제사는 기원(祈願)을 고하는 것이니 종묘사직을 버려두고 둑(纛)에만 제사하는 것은 경중의 순서를 잃는 일입니다. 물리어 종묘사직과 함께 제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선조 >
7) 둑[纛]은 “검은 비단으로써 이를 만드는데, 치우(蚩尤)의 머리와 비슷하며, 군대가 출발할 적에 둑에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이의실록(貳儀實錄)>
8) “마제단(禡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으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하였는데, 강무(講武)하기 하루 전날에 제사를 지낸다. 신위(神位)에는 웅석(熊席)을 깔고, 활과 화살을 앞에 두고 활꽂이를 뒤에 세우고, 큰 기(大旗) 두 개를 남문 밖에 세웠었다.” <연려실기술 제4권>
9) “<송서(宋書)>에… 둑(纛)이라는 기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쓰는 대조기(大早旗) 이름인데, 군사가 출발할 때에 이 기(旗)에 제사 지내며, 검은 비단으로 치우(蚩尤) 머리와 같이 만들었다고 하였다. <성호사설 제9권>

둑신기(치우기)는 태극기의 원형 

둑제는 대가(大駕)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軍旗祭)라고도 하며, 둑제를 지내는 사당이 바로 둑신묘(纛神廟 또는 둑신祠)로 둑도(纛島) 즉 뚝섬에 있었다. 둑제 때 집사(執事)들은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서 예(禮)를 행하는 것이 법도였다.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大將旗)에 지내는 군기제(軍旗祭)를 둑제라고도 하는데 그 대장기 즉 군기(軍旗)가 바로 치우기(蚩尤旗)로 이 깃발이 바로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치우기 가운데 음양인 태극이 들어있고 주위로 8괘가 둘러싸고 있었다. 박영효가 일본으로 갈 때 8괘는 너무 많다는 이유로 4괘로 줄여 간 것이 지금의 태극기이다.

故조자용 박사는 <三神民考(삼신민고)>에서 “둑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둑신이 곧 치우신이고, 둑신을 표상하는 둑신기(纛神旗)가 있는데 치우기라고도 하는 이 둑신기가 태극기의 원형입니다. 둑신기에는 괘가 여덟 개 다 들어있고 가운데에 음양이 있는데 이것이 치우기입니다.”라고 말하며, 둑신기는 안곽(安郭)의 <황제전쟁의 전설 벽화>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둑신기는 계간 한배달 43호에 게재)  
 
▲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는 치우기(둑기)의 8궤를 4궤로 줄이고 천체표시를 생략한 것이다.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사라진 둑신사 

한강의 뚝섬은 본래 치우장군의 사당을 모셨기 때문에 치우기(蚩尤旗)를 뜻하는 둑字를 써서 둑도(纛島), 곧 둑섬이라고 일컬었던 것인데 경음화되어 뚝섬이 된 것이다. 그렇게 전해 내려오던 둑제가 없어진 것은 바로 일제시대였다.

조선을 식민지배한 일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일왕의 특명으로 단군을 신화화하고, 우리 삼국의 역사를 반도내로 몰아넣었고, 민족의 혼을 자르기 위해 많은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뚝섬에 있던 치우천자의 사당인 둑신묘(纛神廟 또는 纛神祠)도 수난을 당하게 된다.

치우천왕의 사당을 부셔버리고 그 자리에는 말을 키우는 장소로 사용하다 나중에 경마장이 들어서게 된다. 일제의 이런 짓은 원구단 자리에 철도호텔을 짓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집어넣고, 남산 국사당자리에 식물원을 만들고, 경희궁을 학교로 사용하는 것과 다 일맥상통하는 행위이다. 다 민족정기를 끊자는 것이었다. 

당시 둑신사에는 높이가 6자 길이가 36자나 되는 큰 벽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도 분명 있었는데 그 이후로 종적을 감쳐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일제가 패망 시 가지고 갔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누군가가 깊이 감춘 것 같다.

뚝섬 경마장은 과천으로 가버리고 그곳은 현재 시민공원으로 변해있고 성동구청이 관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뚝섬이란 지명이 치우천왕을 모시던 둑신사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태극기의 원형이 둑기 즉 치우기였다는 것을 아는 국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금서룡(이마니시 류)과 이병도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식민사학이 아직도 이 나라의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