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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 흉노와 훈족, 民族 大移動의 시대

설레임의 하루 2011. 5. 18. 21:16
▲ 훈족과 고트족을 묘사한 스케치.

한족과 신흥 선비족에 쫓겨간 흉노 2세기 후 훈족으로 유럽사에 등장
4세기 중반 흑해 동고트족 공격하며 유럽 공포로 몰아넣어
피란민 로마제국 변방에 수십만명 몰려들어 대혼란 게르만 대이동과 서로마 붕괴 불러
452년 아틸라, 알프스 넘어 로마시까지 파죽지세로 진격
피란민들 해안가로 도망가 ‘바다도시’베네치아 등 건설 ‘훈족의 영웅’ 아틸라, <黃禍論> 상징
숱한 신화 남기고 결혼식날 급사… ‘니벨룽겐의 반지’주인공으로
서고트족 반란 등 내부 분열로 유럽 흔든 100여년 정복 역사 막 내려

 

376년 다뉴브 강가의 전방초소에 배치된 로마제국의 군관에게 긴급한 보고가 접수되었다. 북방 야만인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동요가 감지되고 있으며, 어디에선가로부터 출현한 무서운 민족의 공격을

받아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군관들은 처음에 이같은 보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

이지 않았으나, 곧 많은 수의 야만인이 다뉴브강 북안에 밀려들어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흑해 북방에 거주하던 고트족이었고, 그들을 밀어낸 새로운 민족은 바로 역사상 유명한 훈족이

었다. 훈족은 370년경부터 휘하의 알란족을 이끌고, 돈강과 드니에스터강 사이 지역에 있던 동고트

(Ostrogoth)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고트의 국왕 에르마나릭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고 훈족

의 말발굽에서 피신한 잔중(殘衆)은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쫓은 훈족이 강을 건너

서고트(Visigoth)를 압박하자 수많은 고트족이 가재도구를 챙겨서 다뉴브강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변경으로 밀려든 피란민의 수가 2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훈족과 훈제국은 453년 아틸라의 죽음으로 그 세력이 와해될 때

까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이동을 격발시키고 결국은 (서)로마제국의 붕괴라는 사태까지 초래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와 같은 학자는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이

유럽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고, 이러한 주장은 그 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렌에 의해 비판되면서 유럽사의 시대구분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훈족은 누구였으며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4세기 후반

동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의 생김새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훈족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뺨에 쇠붙이로 깊은 상처를 내어, 어른이 된 다음에 수염이 날 때에도 주름진 상처

로 인해 털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수염이 없는 그들은 흉물스럽게 되고, 내시처럼 보기

에도 역겨운 모습이다. 그들은 지저분할망정 그런대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 어찌나 강인한지 음식

에 맛을 내지도 불에 굽지도 않고… (생고기를) 자기 허벅지와 말 등 사이에 끼워 넣어 따스하게 한 뒤에

그냥 먹는다.” 448년 아틸라의 캠프에 직접 다녀온 적이 있는 또 다른 역사가 프리스쿠스도 훈족의 외모

에 대해서 넓은 어깨와 가슴, 키는 작지만 말 위에 앉으면 커 보이는 인상, 납작한 코, 작고 찢어진 눈 등

을 기록하여 몽골로이드적인 특징을 지적한 바 있다.


▲ 훈족의 이동 경로
그래서 드 기네(De Guines·1721~1800) 같은 프랑스 학자는 일찍이 훈족은 바로 몽골초원에서 이주해온
흉노족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이며, 그 근거로 훈과 흉(노)이라는 명칭의 유사성, 양자 모두 몽골로이
드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유목민족이라는 점, 중국 측 문헌에 보이는 기록 등을 지적했다. 그 후 여러
학자들이 흉노·훈 동족론에 대해 찬반의 뜨거운 논쟁을 벌였는데, 현재는 동족론을 지지하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서 간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흉노가 서방으로 이주하여 훈족으로 나타난 과정은 이렇게 정리된다.
기원후 48년경 흉노는 누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두 조각으로
분열되고, 남흉노는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보호를 받고 북흉노가 초원을 호령하는
사태가 되었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압박을 받는 한편 초원 동부지역에서 흥기
하기 시작한 선비족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화되어,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는 그곳을 근거로 인근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
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경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
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포착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듯했
지만, 4세기 중반 갑자기 ‘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유럽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훈족의 출현에 대해 기이한 설화들을 지어내어 이해
하려고 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고트족 사이에 유포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옛날에 필리메르라는 이름의 고트족 왕이 있었는데 어떤 마녀를 스키타이인이 사는
황무지로 추방했는데, 황야를 떠돌던 한 악령이 그 마녀를 발견하고 결합하여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민족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초자연적일 정도로 가공할 훈족의 잔인성과 파괴성을 경험한 고트
족의 심리를 잘 반영하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인은 다른 설화를 유포시켰다. 즉 훈족은
원래 흑해 북단의 크리미아 반도 부근에 있는 소택지 건너편 동쪽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이
기르던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물려 놀라서 서쪽으로 도망치자 그것을 잡으러 온 목동이 소택지 서쪽에
펼쳐진 풍요로운 초원을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훈족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다. 이 설화는 환경과 생태적 요인을 지적하고 있으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훈족의 이동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70년대 훈족의 침입과 고트족의 이동이 벌어진 뒤 로마제국의 변경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로부터 30년 뒤인 400년경 훈족의 제2차 파도가 덮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울딘(Uldin)이라는 수령이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받은 고트족 집단이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도망쳐 왔다가, 404년에는 알프스
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지만, 울딘도 그들을 추격하여 로마와 합세하여 격파하였다. 훈족의 활동
은 게르만족의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판노니아 지방에 살던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 등이 이동을 시작하여 406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프랑크족과 전쟁을 한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왕국들
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 반달족은 428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북안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반달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에 서로마제국도 안전할 수는 없었다. 훈족에 쫓긴
서고트족은 알라릭이라는 수령의 지도하에 알프스를 넘어 410년에는 제국의 심장이요, ‘영원한 수도’였던
로마시에 돌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울딘이 사망한 뒤 훈족을 통솔했던 인물은 옥타르(Octar), 루아(Rua), 문디욱(Mundiuc) 삼형제였는데
가장 강력했던 인물은 루아였다. 그는 426년 동로마를 공격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서 막대한
보상금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루아가 죽자 문디욱의 아들인 블레다(Bleda)와 아틸라(Attila) 형제가 지배
권을 장악했지만, 블레다가 사망함으로써 드디어 아틸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443년 그는 훈족 기마군단을 이끌고 동로마 영내로 들어가 70개가 넘는 도시를 약탈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영토의 반을 할양해주고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과 세폐(歲幣·공물)를 바치기로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틸라는 450년경부터 공격의 예봉을 서로마로 돌렸다. 그는 서로마 황제의 여동생인 호노리아
(Honoria)를 신부로 줄 것과 결혼지참금으로 영토의 반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거절되자 451년
그는 예속된 게르만 부족들을 소집하여 50만 대군을 편성한 뒤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갔다. 당시
번영하던 도시인 메츠(Metz)를 잿더미로 만든 뒤 센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 최대의 요충이던 오를레앙
(Orlean)을 포위했다. 때마침 아에티우스(Aetius)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테오도릭(Theodoric)이 이끄는
서고트 연합군이 도착하여 훈족과 일대 결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카탈라우눔(Catalaunum)
평원의 대회전이다.
 
이 전투에서 테오도릭은 전사하고 고트족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로마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아틸라의 승리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평원으로 돌아가버렸다. 말하자면 무승부로 끝난 셈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하루의 전투에서
사망한 인원이 30만명에 달하여 그 흘린 피로 강물이 불어넘치고 밤에는 전사자의 망령이 적을 찾아 헤매
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인은 아틸라의 철수를 자신들의 승리로 착각했지만 그러한 환상은 다음해인 452년 아틸라의 침공
으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그는 곧장 알프스 동부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그는 동북
부에 위치한 아길레야(Aguileia)를 3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는데, 당시 거기서 빠져나와 해안가 섬
과 소택지대로 도망간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가 후일 베네치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틸라는 이어
서 포(Po)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는데 밀라노, 파비아 등의 도시에 무혈입성한 뒤 남하하여 로마시로 진격
하였다. 궁지에 몰린 시민들은 사신을 보내 화평을 제의했고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여 철군을 결정했다.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아틸라가 이미 넘칠 정도로 많
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또 초원을 떠난 지 오래된 병사와 군마가 지친 상태에 역병까지 돌았기 때문이었
다. 더구나 그는 황제의 여동생 호노리아와 결혼지참금에 대한 약속까지 받았으니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이처럼 로마를 무릎 꿇게 하고 번영과 발전의 미래를 펼치려던 훈제국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버렸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아틸라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453년 그는 일디코(Ildico)라는 미녀를 맞아들여 혼례
를 올린 뒤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 아틸라는 코에 피를 흘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고 신부는
그 옆에서 울고 있었다. 그가 여인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긴 했지만 시신
에서는 아무런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은 그 전날 밤 과음한
상태에서 잠에 들었다가 자는 도중 코피가 터져 기도가 막혀버리는 바람에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훈족은 고대 유목민이 그러했듯이 칼로 얼굴을 그어서 상처를 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애통
을 표시했다. 그의 시신은 초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비단 천막 안에 안치되었고, 유목전사들은 그 주위로
말을 달리면서 아틸라를 위한 애가를 불렀다고 한다.
 
아틸라의 죽음과 함께 훈제국은 급속하게 분열되었고 뒤이어 예속된 고트족의 반란으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훈족의 침공이 남긴 역사적 기억은 오랫동안 유럽인에게 남았다. 흔히 헝가리(Hungary)도
음이 비슷하여 훈족의 후예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직접적 연관은 없다. 헝가리라는 말은 ‘온 오구
르(On Oghur·열 개의 부족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훈족의 기억은 게르만족의 서사전승(saga) 가운데 녹아 들어 아틸라는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프랑크족
과 부르군드족의 왕을 격파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에첼(Etzel)의 원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틸라는
‘신의 채찍’으로 불리며 후일 ‘황화(黃禍·Yellow Peril·황인종이 일으키는 재앙)’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이 되기도 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가로질러 유럽에 등장한 유목민족 훈은 이렇게 해서 유럽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고 유럽인의 기억 속에 깊은 각인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
 

▲ 훈족의 영웅 아틸라를 새긴 로마제국의 화폐.
아틸라를 위한 애가

훈족의 수령이요 왕인 아틸라여!
아버지 문디욱에게서 출생한,
가장 강력한 민족의 영주여!
그에 앞서 어느 누구도 갖지 못했던 강력한 힘으로
스키타이와 게르만의 땅을 장악하고
심지어 두 개의 로마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노라.
(중략)
행운을 입어 이 모든 일을 성취했으니,
나라는 평안한 가운데
적의 찌름이나 벗의 배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복 속에서 아무런 고통없이 쓰러지고 말았도다.
그의 죽음이 복수 때문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하는가.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도불원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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