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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페셜 시대의 경계인-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

설레임의 하루 2011. 5. 13. 01:27


  시대의 경계인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


 

▣방송 : 2011. 5. 12 (목) 22:00~22:45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임기순 PD
▣글, 구성 : 최미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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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중국 전선을 시찰하는
일본 육군 중장 신분의 조선인

그는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망국한의 상징
그는 왜 일본 여성과 결혼했나?
그리고 왜 일본 군인이 되었나?

 

조선총독부 최선의 선택, 대한제국의 황태자!

▲ 조선총독 사이토 마고토가 보낸 극비문서

지금까지 국내엔 공개된 바 없는 1926년 일본 육군성에서 작성한 『밀대일기(密大日記)』. 조선 총독 사이토 마고토가 급히 본토로 보낸 이 극비문서에 남아 있는 충격적 기록. 순종의 승하는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 최대 위기였다!

  “순종이 승하한 후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통치상 이왕(영친왕)을 당분간은 조선에 두어 민심을 위문할 필요가 있다“
                        <육군성 밀대일기> 중


10살의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끌려가 일본육군사관학교 등을 거치며 일본 땅에서 군인의 길을 걷고 있던 영친왕. 조선 총독은 그런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급하게 요청한다. 순종의 승하가 또 다른 독립운동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7년 전 발생한 3.1 독립만세운동은 고종의 붕어(崩御)가 가져온 결과였다. 사이토 총독은 순종의 승하로 독립운동이 반복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불안한 조선 민심을 달래줄 적임자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계승자 영친왕을 선택한다.

 

영친왕은 누구인가?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 영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영친왕 이은은 고종과 엄귀비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로, 순종과 덕혜옹주는 그의 배다른 형제다. 고종의 황제 양위식이 강행된 1907년, 그는 10살의 나이에 황태자에 책봉됐다. 그리고 4개월 뒤, 이토 히로부미는 신학문 교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강행한다. 사실상의 볼모 요구였다.

   “일본 전국시대 때 ‘인질’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유능한 무가의 자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양육하는 관행인데,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을 그러한 존재로 중요하게 인식했다“
                 - 오타베 유지, 시즈오카 복지대학 교수

 

분노한 조선 백성, 황태자를 금수(禽獸)라 비난하다.

▲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발표 기사

1916년 8월 3일, 영친왕과 일본 황족 여성 이방자의 결혼이 발표된다. 당사자인 이방자도 몰랐던 갑작스런 발표였다. 그로부터 2년 뒤에 구체적인 결혼식 일정이 공개된다. 1919년 1월25일이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시점이었다. 세계열강이 모이는 한자리에서, 내선일체의 상징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예상 밖에 일이 발생한다. 결혼식 불과 나흘 전,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이 갑작스레 승하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듬해 영친왕의 결혼식을 강행한다. 고종의 3년상도 마치기 전이었다. 황태자와 일본 여성의 결혼소식에 조선은 분노했다.
 

  ‘금일부터 영친왕으로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이던 이은은 부모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이므로‘
                      <독립신문 1920.5.8>


치밀하게 진행된 정략결혼, 그 이면에 숨겨진 일제의 의도와 전개 과정을 밝힌다!

 

일본 육군 중장 영친왕 이은, 그는 왜 침묵했나?

▲ 일본 방위성 연구소

▲ 중국 전선을 시찰하는 영친왕의 모습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군사 관련 자료가 총망라돼 있는 일본 방위성 연구소. 제작진은 이곳에서 낡은 사진첩을 발견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 중국 전선을 시찰하던 육군 중장 영친왕의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왜 일본 육군 장성이 되었나?
당시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황태자를 바라보는 조선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긴 침묵 속, 그의 속내는 무엇이었나?

 

역사의 격랑 속에 쓸쓸히 사라져 간 마지막 황태자

▲ 창덕궁 낙선재

▲ ‘의민황태자’가 새겨진 비석

1945년 일본 패망 직후 신헌법 시행으로 영친왕 내외는 왕족에서 평민으로 전락한다. 생활고가 심해지면서 결혼 후 살았던 저택도 헐값에 매각했다. 환국 또한 쉽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영친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해방 후 18년 동안 일본에 머물러야만 했다.
결국, 1963년 영친왕은 고국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끌려간 지 56년 만이었다. 그러나 이미 반신불수 상태로 고국의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그는 7년간 실어증과 뇌일혈로 투병하다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 22일 동안 살았던 창덕궁 낙선재에서 영면한다.

大韓帝國 懿愍皇太子

대한민국 망국한의 상징, 영친왕. 그의 무덤 옆에 세워진 비석에는 위와 같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 의민황태자! 의민이란 ‘일생 동안 고난의 길을 걸은 사람‘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