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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단재 신채호의 백제 이야기, 근구수대왕 때 지나 동남해안 지역을 완전히 공략

설레임의 하루 2011. 4. 5. 22:02




근구수대왕은 태자시절부터 아버지 근초고대왕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면서 영토확장에 힘써 고국원왕을 전사시켜 한반도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나 동남부해안지역을 차지하며 단군3조선 중 요서.산동지역에 속하는 번조선 영역을 회복했다.


[자료]단재 신채호 선생이 들려 주는 백제 이야기



근구수대왕,지나대륙을 완전히 공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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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가 들려주는 백제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밝혀둘 게 있다. 단재는 백제의 해외 진출을 강조해 들려주고 있는데, 이 ‘해외경략설`의 많은 부분이 교과서엔 나오지 않는다. 국사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단재의 이런 주장이 고증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앞으로 심도 있는 연구를 거쳐 확인되어야 할 부분이 많음을 밝혀둔다. 이 글은 ‘조선상고사`하면 대개가 고구려를 떠올리는데, 고구려에 가려진 백제 이야기를 도드라지게 살펴보자는 의미다.

단재에게 백제는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양분했던 강국이었다. 백제가 강성하던 시기 신라는 소국이었다. 단재는 백제가 두 차례에 걸쳐 해외 경영에 나섰다고 들려준다. 첫 번째가 근구수왕(近仇首王) 때다.

“대개 근구수는 근초고왕(近肖古王)의 태자로서 군국대권을 대신 행사하여 침입해 오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병탄하였다. 그리고는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국 대륙을 침입하여 모용씨(慕容氏. 선비족 족장)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진평 두 개 군을 설치하고, 녹산(지금의 하얼빈)까지 쳐들어가서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부여가 지금의 개원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에서는 진왕(秦王) 부견(이 또한 선비족이다)이 강성하므로 근구수가 또 진과 싸웠는데, 지금의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들이 도망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으로는 지금의 강소·절강 등지를 차지하고 있던 진(晋)을 쳐서 또한 다소의 주와 군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이 대략 이와 같이 된 것이다.“

여러 사서란 어떤 사서를 말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가 신라사관론자 김부식의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양서(梁書)`와 ‘송서(宋書)`에서 “백제가 요서의 진평군을 쳐서 차지하였다”라고 한 기사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부여가 녹산에 터를 잡고 있었으나 백제에게 밀려 서쪽으로 옮겨 연 가까운 곳으로 갔다”고 한 기사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백제의 직접적인 공략을 받았던 진의 ‘진서(晋書)`나 같은 시기 ‘위서(魏書)`나 ‘남제서(南齊書)`엔 이런 사실이 없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단재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나국 역사책이 뺀 건 부끄럽기 때문

 

“이는 다름이 아니라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지나국에게 수치스런 일은 감춘다)`가 공자의 ‘춘추(春秋)` 이래 지나 사가들이 떠받드는 유일한 원칙, 즉 종지(宗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썼다간 참형을 면치 못하기에 그게 두려워 진실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백제를 증오해 백제의 공로와 업적을 삭제한 신라의 기록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므로 적지 못했고.

백제의 두 번째 해외 경영은 동성왕(東城王) 때다. 단재는 위(魏)나라가 백제를 침공했다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성왕은 위나라 10만 대군을 물리치고 지나영토를 더욱 확장해 나간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광대하였기 때문에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서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여 이르기를,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월주는 지금의 회계(會稽)이니,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월왕 구천(句踐)의 고도(古都)를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의 땅”이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이서, 곧 지금의 봉천 서부가 다 백제의 소유였다.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 “금주 의주 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왜`는 지금의 일본으로, 위에서 인용한 ‘구당서`의 상기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제가 아시아 해상강국 시기에 일본열도는 백제의 담로지역이였다

단재가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는 고구려 못지않게 웅혼하다. 백제인들이 바다를 건너 지나대륙을 호령했고 일본을 식민지로 거느렸다는 그의 이야기는 듣는 이의 심장을 뛰게 한다. 앞서 밝혔듯 단재의 백제 해외경영설은 많은 부분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단재의 백제사는 지나측 문헌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어 고증이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단재는 왜 그렇게 해서라도 백제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 단초는 일본의 쇼토쿠(聖德)태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사적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의 사적은 거의 근구수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구수의 근(近)은 그 음이 ‘건`으로 백제 때는 ‘성(聖)`을 ‘건`이라 하였다…근구수의 구수(仇首)는 그 음이 ‘구수`인바, 구수는 마구라는 뜻이다. 일본 성덕태자의 ‘성덕`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을 가져간 것이며, 성덕태자가 마구간 옆에서 탄생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구호`라고 지었다고 하였는바, 이것은 근구수의 구수를 본뜬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성덕태자가 헌법 17조를 제정하였다고 한 것과 불법(佛法)을 수입하였다고 한 것도 다 일본인이 근구수의 공업을 흠모하여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전 가운데다 넣은 것이 명백하다.” 백제로 일제의 ‘식민사관`을 깨부수다 .

단재의 백제이야기는 일본과 조선의 같은 조상, 같은 민족, 같은 지역에서 출발했다는 ‘일선동조론`과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쪽을 경영했다는 ‘남선경영론` 등 식민사관을 통쾌하게 꺾어 버린다.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서기`에 의거해 주장하던 신공황후의 신라정복과 임라일본부 설치 등을 오히려 백제의 해외경략지로서의 일본 고대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말도 되지 않는 망발은 그만두라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단재는 백제이야기로 보듯 역사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민족사를 제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역사에 대해 긍지심 대신 좌절감을 갖고 있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사의 긍지를 회복시키는 한편 그런 긍지심을 바탕으로 민족자주의 강건한 앞날을 펼쳐보이려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단재의 역사학은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건강성을 이렇게 담보했던 것이다.

백제의 해외 진출은 정설로 자리 잡았고 학계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단재가 주장했던 요서와 산동반도 지역 경략설은 아직까지 강단사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역사학자는 요서와 산동반도 백제 경략설은 그간 보완적 연구들이 있어 학계에서 진지한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해줬다.

단재가 들려주는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강한 나라였고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던 선진 국가였다. 물론 단재의 백제이야기엔 한계성도 있고 문제점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백제이야기가 후학들에게 많은 깨우침과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재의 고대사 인식, 그가 제기한 고대사의 여러 문제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다.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단계에 있는 것도 있다. 단재사학의 재조명. ‘지금 왜 단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도 있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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