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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KOREA광개토태왕,임나(대마도)정벌하고 임나연정 설치하다

설레임의 하루 2011. 4. 5. 22:04

KOREA광개토태왕, 왜인들의 본거지 임나(대마도)정벌하고 임나연정 설치

 

개혁을 단행하여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한 법흥왕이전까지 신라는 사치스러운 황금장식으로 국가재정이 축나고 군대가 국군으로 단일화되지 않은 부족체제로 외침에 시달리는 매우 허약한 나라였다. 

 

광개토태왕은 백제세력인 가야와 왜(해=부여.흉노.선비족 등 북방의 조선유민세력의 대거 한반도 이주에 밀려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선주민=마한세력/본토회복심리가 군국주의와 침략주의로 승화)가 신라를 삼키려 하자 국가존망이 위태롭게 된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어 광개토태왕이 개마무사 5만 군사를 보내어 왜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 내고 임나연정을 설치한 후 고구려 후예인 안라인이 관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임나를 대마도로 이해하지 못한 기존 사학자들의 무지가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료]KOREA고구려 광개토태왕 비문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 동황성에서 하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태왕은 신라가 충성함을 치하하고, 사자를 보내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5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유리왕 때 남한으로 망명한  협보의 후예인 안라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辭○○○○○○○○○○潰○○○○安羅人戌兵


아직 신라왕이 직접 고구려 도성을 찾아와 태왕을 알현하지 않아 불러 들였다. 국강상광개토경평호태왕 앞에 신하로서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昔新羅寐錦未有身來,○○○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新羅寐錦○○僕勾○○○○朝貢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5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1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 왔다. 돌아 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나○성 등을 다시 빼앗았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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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三韓)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이였다."[환단고기-고구려본기]

여기서 삼한(三韓)은 단군3조선붕괴이후 요서.만주지역에서 한반도남부지역으로 유입된 조선유민들을 마.번.진한으로 나누어 나라를 세운 후에 선주민 마한을 중심국가로 삼고 3한 체제로 다스려지던 마한국을 의미한다.

 

대마도(쓰시마)가 바로 '임나'다. KOREA광개토태왕은 백제.신라.가야를 완전히 복속한 후에 대마도에 임나연정을 세우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을 통제관리했다.그리고,일본사학계가 한반도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광개토태왕이 파견한 임나연정의 책임자에게 당시 일본열도 나라들이 고구려에 정사를 보고하기 위해 관리들이 머물던 관청이였다. 

광개토태왕은 임나(대마도)에 KOREA(고려=고구려)연정을 설치하여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통제했다.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나라들의 관리들이 고구려가 설치한 임나연정에 정사를 보고하기 위해 머물던 관청이름인데 임나일본부에 대한 개념정리가 한.일간에 안 되고 있다. [환단고기-고구려본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개념정리가 안 된 임나는 대마도고, 임나 일본부는 고구려에 정사를 보고하기 위해 일본열도 나라들의 관리들이 머물던 관청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역사적 진실이 기록되어 있다.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三韓)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가 또 나뉘어 세 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그 지방에서 중심되는 마을을 일컫는다..임나는 대마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명칭이며, 동과 서에 마을들이 있어 치소(治所)가 있고 조공하기도 하며 배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대마도섬이 드디어 임나에 지배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모두 임나를 대마라고 일컬었다(東西各有墟落 或貢或叛 後 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故 自是任那 乃對馬全稱也...영락 10년에 의 세 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대마도)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400∼479년)(永樂十年 三加羅盡歸我 自是 海陸諸海悉統於任那 分治十國 號爲聯政)이들 연정(대마도·일기도·말로국·규슈·세도연안·야마토왜)은 고구려에 직할되어 열제(광개토대왕)의 명령 없이는 제멋대로 행할 수 없었다(400∼479년). 그 후엔 백제가 관할하였다(然 直轄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

일본제국주의는 그러한 역사적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해민족사를 축소하여 날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나 나라나 민족이나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날조.왜곡의 업보는 반드시 비참한 결과를 낳고 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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