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 상대(上代) 일식 관측의 최적지
한국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가 쓴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라는 저서에 나오는 신라 상대(上代)의 일식
관측의 최적지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했다.
결국 그는 일신상 이유로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를 그만두고 한국 고등과학원으로 옮겼다.
박창범 교수가 주장하게된 방증 자료를 이 책에 수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 사학자들의 반격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추론일 뿐이다. 그러나 인터넷 상으로는 무성한 말이 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신라 상대의 일식 기록중 한반도 경주에서 관측할 수 없는 기록을 살펴보자.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은 한반도에 없었다.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은 신라 7대 왕으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큰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8년
(141) 가을 9월 그믐 신해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秋九月辛亥晦 日有食之)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성 이사금(逸聖尼師今) 8년에 일어난 일식은 절대 한반도 동쪽의 경주(慶州)에서는 관측할 수
없는 기록이다. 이날 서울의 식분은 0.00이다. 이날의 일식을 제대로 관측하려면 서쪽에 있는 중국 대륙
으로 갈수 밖에 없다.
지금부터 1900여년 전에 일식이 일어났다고 한반도 동쪽 끝에 있는 신라로 통지해 준다는 것은 언어도
단(言語道斷)이고, 결론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은 한반도에 없었다." 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 신라의 대륙경영설의 탄생인가? 또 다른 기록을 보자.
벌휴이사금도(伐休尼師今)도 한반도에 없었다.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은 신라 9대 왕으로 탈해왕의 아들 구추(仇鄒) 각간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11년(194) 여름 6월 그믐 을사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夏六月乙巳晦 日有食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날의 일식도 한반도에서는 관측할 수 없는 일식이다. 서울의 식분이 0.00이기 때문에 서울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을 한반도 경주에서 관측하였다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계속 한반도에
있던 신라왕이 중국 대륙으로 휴양을 갔을까?
또 다른 기록을 보자.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은 왜 한반도에 없을까?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은 벌휴이사금의 손자로 신라 10대 왕이다.
삼국사기에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5년(200)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려 풀
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五年 秋七月 太白晝
見 隕霜殺草 九月庚午朔 日有食之 大閱於閼川)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날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문 기록이 독자 기록임을 박창범 교수는 그의 명저(名著)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증명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일식 기록은 중국의 기록에도 나오므로
일본(日本)학자는 신라 상대(上代)의 기록이 중국 대륙에 나타나니까 남의 것을 베낀 것 아닌가 주장하
는 때문이다.
그런데, 박창범 교수는 이날의 기록에 나타나는 태백주견(太白晝見)과 같은 많은 기록이 실제로 그 시기
에 나타난 천문현상인데, 삼국사기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 기록임을 증명했다. 정말로 놀라운
발견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안되는 신라의 일식은 독자 기록이다.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한반도
에 있다면 특급 코미디 소재감이다.
하대(下代) 신라 일식의 평균식분도
가운데 그림은 박창범 교수가 밝힌 신라 하대(下代) 일식의 평균식분도이다. 이 그림을 보면 하대(下代)
신라가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도 하대(下代) 신라는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고사학회 이중재님에 의하면 신라는 물론 고려도 한반도에 없었다고 그의 저서 "새고려사
(高麗史)" 등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이란 말인가?
신라 하대(下代)를 검증해 보기로 한다.
신라 하대(下代)의 일식도 - 어디라해도 지장 없다. -
신라 중기 500여년간은 일식 기록이 없다가 AD787년 원성왕부터 AD911년 효공왕까지만 일식 기록이
나타난다. 가운데 그림은 신라 하대 원성왕(AD787년)의 일식도이다. 일식을 잘 기록하던 신라가 왜 일식
기록이 500여년간 없는 것일까?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게다가 고려(高麗)도 태조 신성대왕부터 목종
선양대왕까지 일식 기록이 없다. 이 시기에 일식을 기록하지 못할 피치못한 사정이 있는 것일까?
신라 하대(下代)의 기록은 총 10번의 기록이 나온다. 자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기록이 대륙이든
한반도 경주이든 어느 곳에서든지 관측 할 수 있는 기록 뿐이다. 따라서 신라 하대는 일식 기록만 가지고
는 어느 쪽이 신라인지는 밝힐 방법이 없다.
효공왕15년(AD911년)의 일식
삼국사기에 효공왕1 "15년(911) 봄 정월 초하루 병술에 일식이 있었다."(十五年 春正月丙戌朔 日有食之)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있는 일식 기록은 효공왕15년의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없다.
그런데 효공왕 15년의 기록도 좀 이상하다. 서울의 식분이 0.11 인데 그 보다 훨씬 남동 쪽인 경주에서
3~4%의 1100년전 기술로 기록할 수 있었을지... 그러나 일식이 있었으니까 인정하기로 한다.
그런데 상대 신라가 한반도에 없었으니 하대에 없었을 것이 당연하다고 추정하지만, 혹 마지막에 들어
오지는 않는지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신라(新羅)의 평균식분도
상고사학회 이중재씨에 의하면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에 의하면 신라 하대(下代)는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컴퓨터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에 따라
결과가 엉뚱하게 나타날 수 있다. 즉, 한 국가의 평균식분도는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모든 일식에
대한 평균식분도를 나타내야 한다.
박창범 교수는 세계적인 천문학자이지만, 역사학자 또는 사회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간과한 것
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의 평균식분도는 상대와 하대를 모두 통털어서 나타내본 후에 검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상대와 하대의 평균식분도는 있는데, 상하대(上下代)를 함께 나타낸 식분도가 빠져 있어 아쉬움
을 더한다. 그리고, 하나 하나 한 국가의 영역과 비교 검증해 보아야 한다. 만약 상하대(上下代) 모두를
함께 나타낸 신라의 평균식분도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궁금하다
신라의 평균식분도 (예측)
고등과학원 박창범교수에게 e-mail과 편지를 보냈으나 연락이 없어 신라의 평균 예측도에 대한 예측도
를 그려 본 것이 가운데 그림이다. 교육부 당국자께서는 필요하시면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에게 신라
전체의 평균식분도를 요청하시면 신라의 최적 관측지가 중국 쪽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측 할 수 있다.
이 것은 필자만의 예측이 아니라 천문학을 하는 학자에 자문을 구하면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결과이다.
따라서 신라의 평균식분도를 통한 신라의 최적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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