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한 산골마을에 여인왕국 유적
오리온좌에서 온 인간들은 지금의 유럽의 대지 위에 내려졌다. 이들은 백인의 모습이었다.
사자좌와 천칭좌, 그리고 북두칠성에서 온 인간들은 황인종의 모습으로 아시아대륙으로 내려왔다. 염소좌와 카시오페이아좌에서 온 인간들은 흑인의 모습으로 아프리카에 내려지게 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한웅 천황이 강림하기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던 일이었다.
이들은 나반과 아만처럼 언어도 없었고, 생소한 지구성에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망각당한 채 뱀, 곰, 여우, 범 등을 우상으로 섬기며 원시인으로서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흘러 어느덧 BC3897년에 이르니, 새로운 신시개천의 역사를 열고자 영혼의 스승이 강림했다. 많은 무리의 한인들은 새로운 영혼의 스승 한웅 천황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미 몇 세대 전부터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많은 스승을 안타깝게 여기던 한인들은 서로 약속한 바도 없이 한웅 천황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다. 누가 모이라 말한 것도 아니며 목표를 정한 것도 아니지만, 한인들 모두는 새로운 스승을 보기 위하여 찾아갔다.
천황은 한인들을 이끌고 넓은 평야로 나갔다. 그곳은 멀리 동쪽으로 백두산#2)이 위치에 있는 곳이며, 매우 기름진 땅이었다. 90만이 운집한 가운데 위대한 스승은 한인들을 위하여 고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1) 3천 단부(團部)라는 기록이 있다. 1단부가 300명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구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연구가 있길 바란다.
한웅 천황과 선군 왕검의 개국 http://www.pyramid-hiranya.com/column/img/3taegecuk.jpg); a: #D2B48C">
"한인들이여! 나는 너희들 모두에게 축복을 주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왔다. 바로 이 순간부터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스승인 내가 깃들일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 오랜 세월 윤회의 수레바퀴를 타고 돌며 지구성의 온갖 곳에 태어날 것이다. 이제 먼 미래에 이 땅의 많은 무리가 그대들과 같은 "한"의 상태에 이르는 날, 나는 여기 모인 그대들을 저 아름다운, 그러나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 역사의 주역들이다. 인종을 넘어선,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주역들이다. 사람의 무리가 머물며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대들이 태어날 것이다. 백색의 인종으로, 흑색의 인종으로, 황색의 인종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의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어느 곳에 태어나든, 어느 인종으로 태어나든, 그대들은 성숙한 마음을 잃지 말지어다. 그러나 방관하지 마라. 그대들이 태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그대들과 반대의 뜻을 가진 자들도 함께 하느리라. 신의 뜻은 곧 나의 뜻이니 이 자리. 이 순간에 나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비의 마음으로 저 미숙한 인격을 지도하라. 그대들은 곧 나의 뜻과 함께하게 되리라. 그대들이 힘써 행함으로써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한인들이여, 후세에는 반드시 나의 축복을 받으리라. 하늘의 뜻이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1) 이때 한웅 대성존께서는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희 어린 신들에게 묻노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고? 요동을 치면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이로 소용돌이치며 치솟기 시작하더니 그 물기둥이 천지에 널려 있는 물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눈부신 휘광에 휩싸인 한웅 대성존께서는 물기둥의 조화를 보며 곰족과 범족 앞에 나타나게 된다. 단군신화의 의미를 생각해보라.
말은 이어졌다. 오랫동안 쉼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동서양에 걸친 아득한 미래세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때 서로 다른 모습, 남자 혹은 여자, 흑인·백인·황인…… 이념을 달리하며 체제를 달리하는,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한 한인들의 그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성이 걸어야 할 길, 드디어 새로운 역사의 막은 올랐다. 역사였다. 이제 마음이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 파도처럼 몰아치는 무지스런 마음의 존재들을 위하여 시작하는 그 순간순간을 그들은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한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밝히기를 원치 않고 있다. 그것은 역사라기 보다 역사 시작 이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기간이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지식…… 천문, 지리, 의술, 문자 그 밖에 정신추구에 관한 수많은 이론들, 쇠를 다루는 연금술,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던 때였다. 그리고 문화와 예술도 시작되던 시대였다. 지식의 이론은 다의발 한웅 이전에 완성이 되었다. 그 후 한인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인들은 대륙을 횡단하고 바다를 건너서 인간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에든 찾아가 그들의 머리를 일깨워웠다. 신시시대의 한인들은 모두가 신통력의 대가들이었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신으로 추앙받기도 하며 신화로 남겨지기도 했다.#2)
#2) 다의발 한웅시대에 복희 태자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뱀족과 범족·곰족의 시조가 되어 중원으로 건너가 중원의 역사를 열었으며, 그와 함께 그들의 문화도 일어서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의 여신 헤라를 비롯하여 제우스 신·지혜의 여신 미네르바·태양의 신 아폴로 등의 신화는 한웅시대의 초인들이 이주하여 그들에게 문자를 심어주고, 지식을 주고 의술을 베풀면서 오직 신화로 남겨지게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대부분 한웅시대의 초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각국의 신화에 대하여 진실된 역사가 드러나리라.
이것이 신시개척시대의 한인들의 발자취이다. 신시시대의 모든 일들,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열쇠라고 이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한인들은 밝히기를 거부한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 스스로가 말하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시시대의 한인사회에서 마지막 한웅이자 영혼의 스승이신 단웅시대에 이르자 한인은 더 이상 한인이 아니었다. 고요한 한의 의식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이들은 이제 명상 그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이 흐를수록 고요했던 마음은 파도가 밀려오듯 번뇌와 방황의 감정이 한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믿었던 단웅에 의해 제3의 눈과 능력에 일순간 흑막이 쳐진 사태는 한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스승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저마다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믿었고, 실제로 세우고 있었다. 고요하였던, 그리고 위엄스러웠던 한인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좋아라한 민족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원의 민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넓은 강역과 기름진 옥토는 모두 한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BC2453년에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시니 그 이름을 삼한 조선#1)이라 하였다. 왕검은 위대한 영혼의 스승이었다. 대대로 이어져내려온 한웅 천황도 황제라기보다는 만인의 스승처럼 행동하였다.
#1) 조선이란 말의 참뜻은 곧 '하늘나라'를 이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안에서, 마음 밖에서 살아가고 있다. 저 푸른 하늘 밝은 빛은 본래의 우리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 할 나라이다. 당시의 언어로는 '섯타'라고 불렀다. 광명, 그리고 하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검께서는 한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가 왔으니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라. 이 드넓은 강역 속에서 모두가 저마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9나라로 나뉘었는데, 혈통과 민족의 얼을 잊지 않고 지키기 이전에 그대 자신을 잊지 말라. 그대 자신을 망각한다면 민족의 얼은 사라지며, 내가 그대들의 가슴속으로 깃들일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하노니, 잊지 말라. 그대들의 몸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몸이며, 그 몸을 이루게 한 부모 또한 하늘로부터 내려온 몸이니라. 부모를 공경함은 하늘을 모시는 길이요 그대 마음을 올바르게 닦는 길이니, 수많은 우리 천민(天民)들이 모두가 그와 같이 한다면 하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뜻과 같을 것이며, 그 어떤 화도 미치는 일이 없을 것이니라. 각 나라와 무리들, 그리고 개인 모두에게 이르노니, 서로가 미워하지 말 것이며 지극한 사랑을 이루며 살아가야 함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니라. 저 곰족의 무리를 보아라! 언제나 힘만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범족의 무리들은 얼마나 포악스러운가. 그들은 언제나 싸움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그대들과 같이 신령스러운 데가 없다. 그대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눈이 있지만 저들은 그 어느 것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저 무리들도 그대들과 같이 될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한웅시대처럼 그렇게 따르는 무리가 없었다. 더 이상 위대할 수 없는 스승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통치자로서는 더 나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 한인들은 그 옛날의 한인들이 아니었다. 않았었다. 있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들의 마음을 일깨워주기까지 하였다. 때론 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들어가 부족을 다스리는 족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에게는 한인들이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 옛날 12연방에서 조금씩 변화하여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나라였다. 바로 왕검의 등장을 전후하여 이 땅 위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의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만주에 거주하던 민족을 내쫓음 http://www.pyramid-hiranya.com/column/img/3taegecuk.jpg); a: #D2B48C">
한인들의 땅에서 이민족을 강제로 몰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만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이민족을 설득이 아닌 강제로, 지금의 중원의 삭막한 땅으로 밀어버렸다. 그리고 남만주 일대에 있던 이민족까지 모조리 밀어냈다. 이 밀어내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서로간에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고, 이민족들은 강제도 내쫓기게 되니 분노를 느꼈다. 기름진 만주 전역은 이제 오로지 한인들만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번한땅으로 몰려온 이민족들은 그곳에서 또다시 한인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매우 불안하였다. 또한 번한땅에 먼저 들어와 살고 있던 이민족들도 한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던 판국인데, 갑자기 만주 일대에 퍼져 있던 이민족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무저건 또다시 저 삭막한 내륙으로 쫓아낸다면 그들에게 굶어죽으란 말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 전쟁은 너무나 무서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칼이나 그 어떤 무기도 들지 않은 무술의 싸움이었다. 이것이 한인들간에 치러진 최초의 전쟁이며 영토 싸움이었다. 그러나 한인들 사회에 있어서는 치욕적인 일이기도 하였다. 때는 BC 2513년(왕검 개국 60여 년 전) '모가에테 의식'#1)이 시작되기 전 독로국이 있을 때이다. 독로국 하면 어느 나라 보다도 무예가 특출난 나라였다. 이때에 무예에 있어서는 남방보다는 북방쪽 한인들의 무예가 강하였는데, 꼭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무예라기보다 정신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방편이었다.
#1) 한웅의 집도 아래 제3의 눈과 능력을 지워버리는 의식. 이것은 '각자(覺者)', 깨달은 자만이 행할 수가 있다. 모가에테 의식을 치른 목적은 '한인'과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이민족과의 의식수준을 맞추기 위한 것이다.
북방쪽에서도 만주에 있었던 한인들이 가장 강하였다. 독로국인들의 무술은 주로 발을 많이 사용하는 편이었고, 매구여국은 주로 손을 많이 사용하는 무술이었다. 이들 두 나라가 전쟁을 시작한 발단은 매우 사소한 일이었다. 발보다는 손기술의 우월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일부에서는 양국의 무술을 합친 새로운 무예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들은 싸움이 일어날 소지가 있는 일에 있어서도 협조가 잘 이루어졌다. 양국은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서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무술시범을 보이는 등 마치 자매국같이 지냈다. 의식이 치러지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독로국과 매구여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제 한인들은 보통인이었다. 양국의 특산물은 전과 다름없이 교환되었고,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 사랑하였으며, 하루의 일과와 그 모든 삶에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한 것은, 바로 마음이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손발은 공기를 가르는 등 시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것은 정말 고도의 기술이었다. 그러고는 독로인에게 자신들의 행위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 후에 서로 사과를 하게 되었다. 다음번에 독로국의 사절단이 매구여국에 왔을 때 그 이튿날 시비를 걸어 사절단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왕검시대가 열리기 25년 전 드디어 한인들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매구여국은 독로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여 마침내 무술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고도로 숙련된 양국의 무술인들은 지금의 내몽고 벌판에서 그 기량을 발휘했다. 아! 그것은 상상을 뒤엎는 묘기였다. 처음에는 매구여국이 우세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로국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독로인은 승리한 조건으로 매구여인들에게 그들의 땅을 버리고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싸움에 진 매구여인들은 독로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어 지금의 소안령산맥 너머로 이주했다.
왕국 개국 25년 전 한인들 간의 최초전쟁 http://www.pyramid-hiranya.com/column/img/3taegecuk.jpg); a: #D2B48C">
바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몽고 남쪽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구막한국인들도 분열하여 두 편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들이 분열된 배경은, 같은 한인들이라도 많은 수가 이미 비리국과 선비국·청구국과의 혼인에 의해 이루어진 자들이 많았으므로 혈통을 지키지 위한 방편으로 순수 구막인들만이 분리됐다. 순수 구막인들은 전통을 보존키 위하여 북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곳이 지금의 캄차키와 파바로프스크 지방이었다. 일군국의 일부와 독로에게 패한 매구여국의 일부도 함께 포함되었다. 이들은 후세에 '인디오'라 불리게 되었는데, 인디오 종족이 여럿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후 독로국은 북옥저가 되고, 객현한국과 청구, 일군국의 일부가 건너와 남옥저를 이루게 되었다. 양운국의 일부는 지금의 인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수메르인과 우르국인들이 함께 인도로 가게 되었다. 인도인이 정신의 나라가 된 배경은 시리우스의 토토의 영향이 컸지만, 그 옛날 무우 대륙에 있었던 정신문명의 일부가 대륙 붕괴 이후 살아남게 되어 하나는 인도로 가게 되었고, 또 하나는 마야문명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에 양운인들은 내륙의 땅을 이민족에 넘겨주고 더욱더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때 미리 기름진 땅을 차지하고 있던 이민족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이 훗날 구려국이 되었다. 가게 되었다.
왕국 개국 20여 년 전 분열 http://www.pyramid-hiranya.com/column/img/3taegecuk.jpg); a: #D2B48C">
우르국 역시 메소포타미아와 티벳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에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인보다는 조금 늦게 가게 되었다. 그리고 대다수가 티벳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티벳으로 가게 된 것은 전통을 보존키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정착하게 되자 남아 있던 구막한국인들도 찾아오게 되었고, 사납아국에서도 찾아오게 되었다. 구모액국은 옛 치우천황이 세운 청구로 이동을 하였고, 이민족들이 모여 사는 남국으로 이동하여 양운국의 후예들이 세운 구려국으로 이동을 했다.
남 · 북옥저국 형성 http://www.pyramid-hiranya.com/column/img/3taegecuk.jpg); a: #D2B48C">
남옥저에는 객현한국과 일군국이 모여들어 나라를 세웠다. 이들은 결국 한인들의 나라이기는 하였지만 순수한 연방국이었을 때의 전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두 패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12연반의 전통국은 오랬동안 지속된다. 이미 나라는 이루어졌다. 왕검께서 다스리기 이전에 벌써 부여국이 탄생되었다. 북에도 거대한 북부여가 있었고, 옥저라는 이름의 두 나라가 있게 되었다. 동으로는 숙신국이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매구여국인과 사납아국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상당수가 혼혈이 이루어지게 되니 조선국에서는 한인이기를 거부하게 되었다. 남으로는 청구와 남국과 구려가 있었지만 왕검시대가 이루어졌어도 혼혈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국인들은 한인들을 가리켜 "예맥"이라 부르기도 했다.
12연방의 전통을 지키는 나라와 이동하여 새롭게 세운 나라까지 합하니 왕검이 직접 다스릴 수 없는 너무 분산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왕검은 '진한', '마한', '번한'의 삼황제를 두고 모든 나라를 제후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삼황제를 만든 것은 세 황제국마다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한의 황제국이 해야 할 사명은 드넓은 북방의 이민족들의 싸움을 평정함과 동시에 모두 교화하여 제후국으로 만든다는 정책이었다. 그것은 역사를 뒤엎을 엄청난 선군들의 사명이었다.
한국(桓國)의 분열
부여 · 북부여국의 형성
한인들의 이동
#삼한(9조선)시대
용장의 후예(p121) http://www.pyramid-hiranya.com/column/img/3taegecuk.jpg); a: #D2B48C">
선군 왕검께서는 아사달〔하얼빈과 장춘(長春) 사이〕에서 조선의 개국(BC 2453년)을 만방에 알리고 새로운 역사를 여셨다. 존재와 대중들과 만나 삶을 이루어 나가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선군 이전 시대가 한인들이 대중들과 좀더 친밀감을 도모하던 시대였다면, 선군시대는 대중들과 함께 호흡한 시대를 말한다.
중화민족과 함께 역사를 열었다. 진한은 선군이라는 황제가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황제였으며 대중을 다스리던 존재였다. 자재신은 삼한인들의 정신적 스승이며, 타민족들에게 있어서도 스승이었다. 모든 선군들은 자재신의 가르침 속에서 정치를 펴나갔고, 자재신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들의 마음은 자재신의 말씀이 귀에 들어가리만큼 열려 있지 않았다. 특히 북방의 민족들과 중화민족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이때가 선군 여울시대였다.
그것은 자재신이 있을 때도 없지 않았던 일이지만, 자재신이 열반에 든 이후부터는 더욱 각박하게 인심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 있었던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던 무리들은 서로간에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선군 색불우에 이르러서는 여자선군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여자선군이 사라지면서 남자선군만이 정치를 펴나가게 되었다. 정치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성은 그 힘을 상실하였고 남자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묘한 흐름이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통치자에게 있어서 이미 유연성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온갖 신화와 전설을 낳았던 선군시대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과 같으며 인류의 흐름을 움직였던 위대한 역사였다. 있었다. 또한 서남방으로 이동한 샤카족들 모두가 위대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낸 흔적들이었다. 이같은 흔적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1)
#1) 선군 가륵과 오사구시대 때 객현한국인과 구막한국인이 건너가서 개척을 하였다.(훗날 상세히 받아적을 인재가 나오리라.) 부족의 시조를 열었던 용장도 하나의 개척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용평은 언제나 청렴결백하였고, 선군의 말이라면 조금도 거역함이 없이 따르는 장수였다. 이때의 용평은 우호위 장군이었고 나이는 예순다섯 살이었다. 용평은 젊은 대장 시절에는 웅갈손과 함께 곰족과 범족의 후예들을 쳐부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본래 몸 전체가 잔꾀로만 뭉쳐진 자로서 머리싸움으로는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 지수는 어린 시절부터 신하가 된 지금까지 임금이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런 꿈을 언젠가는 실천에 옮길 것을 늘 다짐하고 있었다.
#2)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한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선군들은 모두 초인들로서 온몸에는 언제나 휘광이 둘러져 있었다. 때문에 한웅시대의 성존들은 그 밝기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한웅의 웅은 양을 뜻하는 말이며, 양은 하늘이고, 하늘은 천기이니 온 세상에 존재하는 기를 말한다. 선군의 선은 음을 말함이요. 음은 땅이고 지기이니 온 세상 대지에 흐르는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웅시대는 하늘의 시대를 뜻하며, 선군시대는 땅의 시대를 말한다. 때문에 웅씨라 함은 온몸에 천기가 뒤덮여 있는 한인을 가리키며, 웅녀라 함은 지지가 뒤덮인 여인을 가리킨다. 웅상나무는 한인들 시대를 거쳐서 한웅시대를 지나 선군시대에까지 매우 희귀하게 백두산에서 서식하였다. 모양을 보면, 위에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하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고, 밑에는 여인의 성기 모양을 하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남성 모양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즉, 이 나무는 하나의 나무에 2개의 모양이 솟아나 있어 아침에 웅상이 교접이 이루어지고 저녁해가 넘어갈 때에 또 한 번의 교접이 이루어진다. 아침에는 남성 모양이 밝은 빛을 내며 삽입하고 저녁에는 여성 모양이 밝은 빛을 내며 남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무의 생명이 다해 죽을 때에는 완전 교접상태에서 죽게 되는데, 반드시 씨앗을 떨구고 죽는다. 이 나무는 후일 한인들이 천지를 되찾게 될 때에 천지의 어느 곳에서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지수는 이런 선군 아흘의 자리를 탐내면서 무려 29년 동안을 겉과 속이 다른 신하로서 지냈다. 사실 선군 아흘은 지수의 이런 마음을 진작부터 읽고 있었지만 모르는척 하였던 것이다. 지수는 우선 일을 꾸미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조세력부터 끌어모아야 했다. 그러나 동조세력을 끌어모으다 보니 자연 주위에서 눈치를 채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용평이 지수의 행각을 추적해 보았지만 본래 잔꾀가 많은 지수는 완벽하여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용평은 충성을 다하는 장수로서 증거만 없다뿐이지 지수가 선군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지수를 자지 집에 초대한 후, 술자리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칼을 치켜들고는 그대로 내리쳐 목을 베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지수의 동생 주수는 형의 세력과 자신의 추종자들을 불러모아 용평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용평은 산책을 하며 나라의 앞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기습공격을 받았다. 단숨에 이들을 물리치고 갑옷과 투구를 걸친 후에 주수마저도 없애버리려고 말을 타고 주수의 거처를 향해 달렸다. 형 못지않게 잔꾀로 뭉쳐진 주수는 용평이 쫓아올 줄 미리 짐작하고는 예상되는 길목에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
구덩이 속에는 예리한 창살이 하늘을 향해 수십개가 세워져 있었고, 용평은 어이없이 구덩이 속에서 죽고 말았다. 감춘 뒤였다. 용장은 아버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복수할 것을 약속하였다. 주수는 용평을 살해한 후에 이 나라에 있는 한 언젠가는 용장에게 잡혀 죽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은나라로 도망쳤다. 그런데 이자의 소행은 참으로 유치한 것이어서, 도망치면서도 용장의 집에 몰래 들어가 불을 질러 결국 용장의 아내와 딸만이 살아남고 아들 셋은 모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에 은왕은 즉시 허락하였다. 그 다음 주수는 선군 나라의 상황과 분위기, 조건들을 낱낱이 말하고는 은왕의 귀가에 대고 아예 이번 기회에 쳐들어가 선군의 맥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입을 놀려댔다. 주수에게서 이 말을 들은 은왕은 옛날 웅갈손으로부터 당했던 수모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그대로 결단을 내려버렸다. 이렇게 해서 주수는 은왕의 신하게 되어 신변을 보호받게 되었다. 야음을 틈타 성내로 잠입한 용장은 한 손에는 두터운 헝겊을, 한 손에는 작은 단검을 들고는 은왕과 여자만을 제외하고 궁전에 있는 사내들은 모조리 죽여 나갔다. 주수는 말할 것도 없이 처참하게 죽었고, 은나라 장수도 6명이나 목이 베였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어서야 불타버린 집에 도착하여 아내아 딸을 데리고 선군 아흘 앞에 이르렀다. 그는 그간에 일어났던 일의 전모를 밝히고 선군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은왕은 이 당시 30개의 제후국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70만이 넘었고 기마병도 2만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은나라의 병력이 수적으로는 엄청났지만, 이때 은왕은 선국에 대하여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병력에 있어서는 은나라는 전부를 긁어모은 수였지만, 선국은 많은 대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은나라와의 싸움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는 은나라 병사들이 선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남김없이 몰살시키려는 용장의 의지였다. 선국의 병사들이 은나라 병사들을 사방에서 공격하자 적병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나머지는 선국의 무서운 무기 중의 하나인 화살에 맞아 거의 전멸당하였다. 은왕이 남은 병력을 이끌고 퇴각하니 전쟁은 거의 일방적으로 끝났고, 은나라는 다시는 선국을 넘볼 기력을 잃고 말았다. 장군으로서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다 하여도 일생 동안을 싸워야 하는 고달픈 일은 더 이상 하기가 싫었다. 그는 다시 선군에게 아뢰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BC 1333) 못하다가 용장이 길을 떠나자 이 기회에 죽이려고 뒤를 밟게 했다.
9척이 넘는 큰 키에 벌어진 어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용장 옆에는 이제 갓 소녀티를 벗어난 듯한 예쁜 모습의 처녀가 황색 빛깔의 말을 타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핏기없이 창백한 모습에 배는 불러 만삭이 된 여인이 달리고 있었다. 이때 용장의 딸이 용장에게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는 도적떼와 같은 무리를 손짓으로 가르켰다. 용장은 이들이 누구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고 큰 칼을 뽑아들고 다가오고 있는 무리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잠시 이어지는 듯 싶더니 쫓아온 무리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눈을 감고 죽은 자들에 대한 명복을 빌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에, "나는 나의 순수한 혈통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1)
#1) 용장은 옛 청운국의 후예이니 부족국은 청운국의 후예라 볼 수 있으며, 동인국의 대부분은 비리국의 후예라 할 수 있다. 서인국은 양운국과 구막한국인의 후손들이다. 양운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서인국의 문화가 중원을 가로질러 인도에 이르러 '아리안족'에게 넘어가니, 이것이 곧 인도문명의 탄생이다.
강을 건너자마자 용장의 아내는 진통을 시작했다. 사공의 집에서 아이를 낳은 용장의 아내는 너무도 지친 나머지 죽고 말았다. 일으켜세울 생각뿐이었다. 용장은 딸(시애)을 데리고 새로운 미지의 땅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용장은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찾는 곳은 이같은 곳이 아니었다. 드넓은 대륙의 끝없이 펼쳐진 황야였다. 그런데 갈수록 숲이요 골짜기뿐, 산이 가려 앞의 지형조차도 보기 어려웠으니 용장의 기질에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앞으로 칼을 들지 않으려면 오히려 이런 곳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체념하고 말았다.
부족국의 시작은 이렇게 용장과 시애가 시조였으며, 6남매로부터 출발한 인구는 200여 년 동안을 순수하게 그 혈통으로 이어져내려 무려 800여 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대가족을 넘어 하나의 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부족이라 부르고는 '알신'이라 이름지었다. 그 후 300여 년이 지나자 용장과 시애의 후손은 2만 명이 훨씬 넘는 수로 불어나게 되니, 아무리 한 조상의 자녀들이라 하여도 그 마음은 같을 수가 없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어떤 일이든 시키는 입장에 있었고, 남자들은 언제나 따르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 여자가 부족사회를 통치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느낀 남자들이 적잖이 반기를 들고 일어섰고, 결국 한 무리의 후손들이 나뉘어져 또 하나의 부족이 생기게 되었다. 새 부족의 이름은 '공명'이었다.(BC 797)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여도 이웃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알신 부족과 공명 부족에서는 모두가 용장과 시애의 후손이라는 자긍심 때문에 결코 타국인과는 피를 섞지 않았다. 타국인들이 부족 내에 살 수는 있어도 혼인은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런 이유로 타국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또 하나의 부족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곳에서도 부족을 만들기 위하여 작은 씨족사회가 형성되었다.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여인들 중 불만을 가진 소수의 집단이 알신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공명 부족에 사는 여인들은 남자들이 조금이라도 불편을 줄 경우에는 말없이 알신으로 도망을 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알신에 있을 때에는 모든 일이 남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여인들은 손 끝에 흙을 묻여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부족이 나뉘어 공명에서 살게된 여인들은 삶의 방식이 남자 위주로 변해버리자 모두가 알신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소수의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신으로 빠져나가버렸으니 남자들로서는 생각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알신 부족의 여족장은 토주였고, 공명의 남족장은 샤후였다. 샤후가 토주에게 찾아와 여인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하자 토주가 말했다. 그리하여 공명 부족은 여인들을 이끌고 갈 수는 있었으나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이렇게 여존남비의 사상이 뿌리내린 가운데 세대를 거듭하니 이런 삶의 어느덧 자연스런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울사'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각현'이 생기게 되니 이로써 6부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알신과 공명 같은 인구수는 아니었고, 모두가 한두 군데에서 모여 사는 부락 정도였다. 듯 꿈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니 알신과 공명을 제외한 4개의 부족도 인구가 불어나 자연 작은 나라의 정치 형태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강력한 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여인들이 남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무시해 버렸다. 여인들은 일손도 완전히 놓은체 남자들에게 도전을 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 완전히 여인국을 이룩하려는 생각에서 주위의 4부족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점점 더 부채질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말로써 대립하던 것이 차츰 행동으로 변해 급기야는 싸움으로 번져갔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얻어맞는 쪽은 여자였으나, 그 주장만큼은 굽힐 줄 몰랐다. 처 음에는 자신들의 부족도 알신, 공명과 같이 여인천국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으킨 행동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양측의 주장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것이 감정적으로 변해 나중에는 서로간에 분노를 폭발시키니 그야말로 엉뚱한 싸움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알신 부족의 여족장은 우징으로 여병을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우징 부족의 여인들이 여병과 합세하여 난투극을 벌이자 남자들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여인들이 남자들에게 항복하고 마는 사태가 되었다. 이들은 여인들을 굴복시킬 계획을 꾸몄다. 전부족의 남자들이 합세하여 한날 한시에 일제히 몽둥이를 들고 여인들을 두들겨패기로 하였다. 6부족 전체의 남자들은 제각각 몽둥이를 들고 자기 부족의 여인들을 두들겨패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를 팔뚝만한 몽둥이를 가지고 도끼로 나무를 내리찍듯 여인들의 머리와 가슴 등 닥치는 대로 휘둘러대며 쓰러뜨렸다.
결국 여인들은 남자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는데, 이때 죽은 여인들의 숫자는 수천 명에 달하였다. 이때가 진녀(무린) 탄생 146년 전(BC 272)이었으니, 우리나라에 여인국이 등장하기 전에 부족의 형태가 갖추어지고 부족국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
*출처: 동아일보 글쓴이-안 영 배 신동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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