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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배들은 6 종류로 모두 도형강선으로 황해횡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돛도 없이 보트식 도를 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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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배 모양은 위 사진과 같이 대개 6 종류로 나뉜다. 이런 배의 형태는 B.C 500년 ~ A.D 1,621년까지 지속되는데, 한결같이 돛이 없고 보트형 도(櫂)를 장착하고 있다. 이런 배를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 한다. 이는 중국은 강에서만 배를 운영했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필자가 맨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바다 항해가 필요 없었던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중국의 <무비지>에 따르면 중국 수군을 대표하는 누선의 경우에도 “만약 바람을 만나면 인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櫂)형을 가진 배는 아무리 커도 연안 항해만 가능하지 횡단항해가 불가능한 법이다. 중국의 전선은 주로 정크선이나 판옥선(누선)과 같은 배로 대부분 돛이 없고 보트식으로 양쪽에서 도를 젓는 식이다. 만일 소정방이 산동성에서 이런 배로 출발했다면 당나라 군대 13만은 아마 전부 연안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표류되었거나 수장되었다고 봐야한다.
백제가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 된 것은 보트식 도(櫂)가 아닌 우리식의 노(櫓)를 발명해 노형해선(櫓型海船)의 형태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식 노에다 돛을 달면 장거리 횡단 항해도 가능하다. 돛과 키와 우리식 노를 사용하여 아라비아까지 간 조상(백제)의 슬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국 배는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다를 끼고 대륙 동쪽에 살았던 민족이고, 중국은 고대부터 산악지대에서 바다 구경을 못한 민족이었다. 중국인들은 진짜 바다가 아닌 큰 평야, 큰 강, 큰 호수 등을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선이 잡히는 바다를 동경하고 또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산적(山賊)일 뿐이었다.
그들의 배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海戰)이 아니라, 강에서 싸우는 수전(水戰)용 배이다. 그래서 사진처럼 돛이 없고 보트식 도인 것이다. 보트식 도는 강에서나 통하지 바다에 나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게다가 중국 배는 돛도 없는데 어떻게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단 말인가? 돛도 없이 도를 저어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 있다고 보는지? 중국인들은 팔 힘이 무척 강했나보다!!!
이렇게 바다에 열악한 중국배로 황해바다를 건너오려면 해류를 3번 지나야 한다. 하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중국연안해류요, 둘째는 황해바다 가운데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주 해류이다. 세 번째는 한반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연안해류이다. (참고로 중국의 연안해류는 한반도연안해류보다 강하다) 황해를 횡단하려면 해류가 내려갔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해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바닷물이 빙글빙글 돈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황해를 횡단할 배가 당시에 중국에 있었다고 보시는지!!!
하물며 현대의 철 동력선이 연안해류에서 ‘걸프스트림’을 만나도 안간힘을 쓰는데, 1,350년 전의 중국의 목선이 버틸 수 있겠는가? 만일 황해 한 가운데에서 사나운 주 해류를 만나고 바람까지 불어 파도까지 높으면 전원 수장(水葬)이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처럼 기상 예측을 못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다.
고려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다가 2번이나 실패한 것도 태풍(神風)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해탄의 울렁이는 해류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바다를 건너는 원정은 무섭고 겁나는 것이다. 부산과 일본 사이의 바다보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바다가 훨씬 거리가 길고 해류가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
소정방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려면 배가 몇 척이 필요한지 계산을 해보자. 원래 전투 병력이 100이라면 지원 병력은 200인 법이다.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올 수 있는지는 고대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일언지하에 불가능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 10만이 조선에 올 때 700척으로 6번에 나누어 왔다. 그것은 병력을 수송할 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도 상륙작전은 몇 번에 나누어 실시한다. 수송선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 때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수송선은 261척에 한번에 병력 25,000명을 3번에 걸쳐 실어 상륙시켰다.
현실이 이러한데,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13만 대군과 지원부대를 배 만 척에 실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보냈다는 사학계의 이론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백제부흥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했는데, 이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과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과 임존성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떠들고 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김성호씨의 설에 의하면
연안항해(바다에 인접한) 능력 및 강상항해(양자강, 황하)능력에 능했던 중국민족이 이정도의 규모로 한반도로 올 수 있었는가?
(2) 윤O철씨의 의견도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육전이 아닌 수군의 동원은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뗏목탐험으로 유명한 분. 필자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리비정이 잘못된 것으로 본다.)
(3) 고대전쟁사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도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의견을 말하고 있다. 즉 군사 40만이 오기위해서는 수많은 보급품(군량미, 말, 각종무기)이 동시에 수송이 되어야 전쟁수행이 가능한데, 그 당시 정황으로 도저히 맞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지리 비정을 엉터리로 해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과연 소정방과 김유신이 백제와 전쟁을 벌인 곳은 한반도인가 중국대륙인가? 아래에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 전함의 최대승선 가능인원(최대인원 추정)을 최대 약100명과 50명으로 추정 시
(소정방) : 당군 13만 / 100명 = 1,300척 ~ 2,600척 = 당군 13만 / 50명
(부흥군) : 당군 40만 / 100명 = 4,000척 ~ 8,000척 = 당군 40만 / 50명
과연 이 규모의 배가 산둥반도에서 금강하구로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전투병력 말고 지원부대(말,무기,식량,수레)까지 합치면 2~3배의 배가 필요한데 그게 과연 가능했다고 보는지. 세계 어디 해전사에도 이런 병력이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이만 척이 넘는 배로 40만 대군이 황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태연히 말하고 있으니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설사 그런 숫자의 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대군을 전혀 가 보지도 않은 바닷길로 배를 태워 보낸다는 것을 허락할 왕이나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13만 ~ 40 만 전투 병력이면 국가 전투력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전원 물귀신을 만들지도 모를 무모한 작전을 진행할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소정방과 당 고종이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40만 대군더러 도형강선(櫂型江船)인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릴 리가 상식적으로 없는 것이다.
웬만큼 상식이 통하는 말을 해야지, 그런 병력이 황해 바다를 횡단하여 건너왔다고 태연히 말하는 식민사학자들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횡단이 어려우면 연안으로 붙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릴 사학자도 있을 것이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연안을 따라 오려면 고구려 앞바다를 지나와야 하는데 고구려 수군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식민사학자들이 중국 가는 배를 한 번 타보면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백제는 분명 산동성에 있었고, 소정방은 황해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중국 배는 죽어도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가 없는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모든 기록과 정황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즉 백제의 멸망은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작은 보트같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기습 침투작전을 폈기 때문으로 보인다. 22담로까지 해외에 건설한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해군과 소정방 군대와의 해전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즉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고 중국 대륙 산동성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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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이외에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다음 3부 연재에는 “흑치상지의 백제부흥 운동과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에 대한 글이 실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황해도 못 건넜을 것이라는 성훈님의 논리는.. | 윤복현 | 08/05/09 [05:53] | ![]() ![]() | |
해상제국 백제가 동남아시아와 일본열도까지 경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땅먹기만 한 백제라면 해상제국이라는 닉네임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노저어서 건너겠습니까? 돛달고 큰 바람타고 가는 것입니다. 노는 필요시만 젖겠지요. 근초고왕.근구수왕 등이 일찍이 진출한 중국동남해 지역이 백제땅이였으니 한반도본국의 지명들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명만을 가지고 주장하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개로왕이 강을 따라 토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유적지의 경우 한강이남의 풍납토성이 고증하고 있습니다. 백제초기 교류했던 동진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고, 침류왕 시절의 사찰터도 최근에 발굴되었습니다.
온조백제는 [한단고기]나[삼국사기]에 보면 공통적으로 "서해로 바다를 접하고 있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서쪽에 어디에 바다에 있습니까? 지중해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비약이구요. 서해는 중국위치로는 동해요, 한반도위치로는 황해입니다. 중국위치로 기록했다면 동해라고 했겠지요?
그리고, [비류백제가 땅를 가지고 온조백제로 귀순했다]는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서 '땅'은 비류가 고구려에 대항하다가 만주에서 밀려난 중국대륙(요서)으로 보아야 합니다. 전연에 대패하여 위축된 비류백제세력이 온조백제에 합류한 기록이라고 보아야 하고, 여기서도 서해를 건너 온조백제까지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아마도 마한에 밀붙어 마한왕에게 조공까지 하면서 겨우 살아가던 온조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진 근초고왕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전역을 복속했으니까요. 여기서 마한은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해당하는 마한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지-동이지전]에 기록을 보면 지금의 읍단위 정도에 해당하는 소국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마한50여개국에 '백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백제는 온조백제입니다.
이 온조백제가 갑자기 강성해져 마한전역을 복속하는 시기가 근초고왕시기니 이 때 비류백제가 합류한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온조백제와 비류백제가 통합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진출에 나섰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조세력(십제)이 한강변으로 이동해 오기 전에 소서노가 비류.온조와 함께 남하하여 일시 정착한 지역이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남쪽으로 내려와 땅이 좋고 살기 좋은 패수....진.번 사이에 있고, 북쪽으로는 대수, 서쪽으로 바다로 접해 있는..바다와 가까운 외진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은 아래 지도속의 위치처럼 지금의 발해만 지역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가 정착한 발해만 지역에서 왕위에 즉위하지만,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소수만 발해만(만주지역)지역에 남고, 대다수는 나머지는 온조를 따라 남하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류는 만주에서 고구려에 저항하면서 세력을 키워 부여까지 서쪽으로 밀어내기도 하다가 결국 고구려와 전연에 패하여 요서지역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전연에 대패하여 온조백제에 합류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 소서노가 비류.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정착한 곳으로 추정되는 패수지역 -
[한단고기-고구려본기]"진.번 사이,바다와 가까운 외진 곳,북쪽이 대수('대수'라는 지명은 엄리대수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큰 강"으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서쪽이 바다"인 위치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남쪽"이라고 했으니 지금의 만주 집안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가 아니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즉, 집안지역의 피라미드 무덤군들은 고구려 유적이 아니라는 의미와 동일하죠.중국이 고구려유적지로 왜곡함으로써 홍산문명에 앞선 백두산문명(중국은 '여명문화'라 부르고 있다)의 진실을 감추려는 것이죠..또한 연대가 올라갈수록 세계최대 최초의 유적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한반도문명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북한 예성강.대동강 지역에서 백제관련 토성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어 온조가 남하하여 초기수도를 정한 지역이 대동강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는데, 고구려의 남하로 인하여 북에서 계속 남으로 수도를 정한 온조백제였다는 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어 논쟁이 야기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비류는 만주에 남았고, 온조는 비류.소서노와 발해만 지역(패수)에 함께 있다가 비류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남하하여 한반도지역에 속하는 마한지역에다가 십제를 건국했고, 비류백제는 고구려에 저항하여 만주에서 요서까지 밀려나 결국 전연에 대패하여 근초고왕시기에 온조백제에 합류하게 되었고, 비류계의 북방 군사력을 기반으로 갑자기 강성해진 백제가 근초고왕시기에 마한전역을 통일하고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일본열도까지 지배하게 되는 강성한 해양제국으로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성훈님의 열정적인 연구는 가상하오나, 너무 문헌에만 치중한 듯한 관념적인 연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고학과 문헌들과의 검증분석이 함께 동반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반도을 제외하고 지나치게 중국대륙에다만 고정시키려는 편향성이 문헌을 바로보는 관점도 흐리게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반도와 중국을 하나로 보는 역사인식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땅속에서 출토된 무녕왕 지석에 표기된 사망일시와 [사마]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상호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향성은 객관성을 결여한 역사연구라고 보고 싶군요. 동성왕과 무녕왕의 나이차이로 보아서 결코 아들관계가 될 수 없음에도 부자관계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벌써 연구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三國史記, 魏書, 宋書, 日本書紀를 비교해 보면, 개로왕은 동생 곤지(여곤)에게 병권을, 여도(문주왕)에게는 국무총리(상좌평)직을 맡겼습니다.그리고 고구려에 한성이 점령당하고 죽음을 당한 개로왕이 개로왕의 친아들인 무녕왕(사마)를 임신한 왕비를 곤지에게 맡기게 되고, 동생 여도(문주왕)는 백제재건을 맡았습니다. 평소 위급해져 가는 백제정국상황에서 개로왕이 평소 동생들에게 부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무녕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한 건 백제 개로왕 당시 북방족의 풍습인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우가 데리고 살아야 하는 풍습"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유교학자 김부식의 입장에서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헌가지고는 진실을 알 수 없고, 같은 사건과 상황을 기록한 문헌내용들을 비교분석해서 공통적인 내용을 진실로 보아야 하는 차원에서 무녕왕은 사촌형제사이인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 개로왕의 아들입니다.
40세에 왕위에 오른 무녕왕(462년 - 523년)과 15세에 왕위에 올라(일본서기 기록) 22년간 재위(재위 479~501년)한 동성왕의 나이 차이는 동성왕의 재위년인 479에서 15을 빼면 출생연도가 464년 되니 2살 차이입니다. 동성왕이 2살때 무녕왕을 낳았다는 소리밖에 안되니 부자관계는 전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로왕의 아들 사마가 일본 '각리섬'에서 출생한 2년후에 동성왕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곤지의 형님되는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이 15세에 암살당하자, 곤지의 양아들이자. 곤지의 형 개로왕의 아들인 사마보다는 곤지자신의 친아들(동성왕)을 왕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상황을 [일본서기]는 日本書紀는 동성황제의 즉위에 대해 “무령왕(사마)의 아버지 곤지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의 차남인 동성왕의 경우 큰 아버지 문주왕의 아들인 三斤王(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왜국의 군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선박 모형도(돛을 달고 있다)
장보고의 무역선 모형도(돛을 달고 있다)
서양배: http://www.kordi.re.kr/chongseo/vol8/vol8_03.asp
한국배 :http://www.kordi.re.kr/chongseo/vol8/vol8_04_02.asp
* 서양배나 한국배 모두 돛을 달고 있다..
기본사항이다! 어찌 노를 저어서 먼 바다로 나서겠나!
고대부터 개척된 해로와 해풍을 최대한 이용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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