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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치우천자 유물과 가림토문

설레임의 하루 2011. 2. 26. 13:14

치우천자 유물과  가림토문


4334년 8월 27일 연변대학에서 있었던 제2회 치우학술대회 자료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 송호상씨는 동이민족의 유적을 찾아 중국전역을 3년반 동안 헤매었던 사람으로서,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따위에 적힌 내용들이 사실임을 믿는 분입니다. 중국 동포 학자들은 연구를 하지 못하고, 하지 않고 있는 상고시대의 유물을 제 돈을 들여가며 확인한 결과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4334년 연변대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려 했었다면서 내놓은 자료입니다."  <박정학 회장님의 글>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글입니다!  ☞ 출처 : 치우학회(박정학)


< 東夷民族 論說(동이민족 논설) >


길림성 연길시 개발구 송호상(0443-2856131)


(운영자 주)

  최근 송호상 선생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문시작)


   고대 우리 민족에 대한 학술대회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나는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동이민족 문화, 즉 우리 조선민족의 옛 문화와 역사에 관련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선민족은 옛날 동이민족으로 이름을 날렸고, 동이민족은 만년의 빛나는 유구한 문화와 역사가 있으며, 환국 제1조(桓國 第1朝)인 환인으로부터 천부삼인, 천신·지신·인신(天賦三印, 天神·地神·人神)의 삼신일체, 천부경 81자(三神一體, 天符經 81자)와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철학적 경전으로 이어져온 훌륭한 민족이나, 동족상잔과 외래침략으로 아직도 정통의 올바른 국사 하나 없는 겨레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조선민족의 책임이며 민족의 수치이므로, 일제의 비뚠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 올바른 우리의 국사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역사에서 어제를 알고 앞날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 사학자들의 급선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세의 사학자들은 비뚠 역사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를 않으며, 재야학자들의 논설을 비판마저 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오늘날까지 그릇된 역사의 전통 관념이 만연하여, 온갖 종교는 없는 조상을 무조건 믿고 숭상하면서도 실존한 조상은 신화, 전설로 인식하여 서울에서는 서로가 골이 터지도록 싸우고 있으며, 이는 올바른 국사가 없는 탓이며, 따라서 사학자들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역사란, 역사기 적힌 고대 문헌과 고고의 물증, 시간, 장소 등이 확인될 때 비로소 정확하게 성립될 수 있으며, 만인의 공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세의 사학자들은 문헌과 문헌의 이론적 연구만을 거듭하여 현실 고증이 적은 史冊을 써왔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소생은 증거 있는 역사를 쓰고자 3년 반 동안 우리 동이민족 시조 역사의 발원지인 중국 땅 960만 ㎢의 넓은 광야 속에서 유적을 찾아 4만 2천km를 헤매면서 고고 관찰을 진행한 결과, 만년(萬年)의 동이역사가 어제의 일인 듯 허다한 새 발견과 문헌의 의문을 풀었습니다.


① 배달환국 환웅시대의 제 14대 왕이었던 자오지 치우천황의 묘를 상고 문헌을 보고 현재의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山東省 汶上縣 南旺鎭)에서 찾았으며, 그곳에 치우사당을 짓고 동상을 세우기로 1997년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금년 5월에는 이 문상현(汶上縣)에서 수리공사(水利工事) 중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치우총(蚩尤塚)' 비석(사진1 : 입수 즉시 게재예정)과 화강암에 석각된 된 길이 1.1m, 넓이 0.55m, 두께 0.15m의 '치우사' 표지석(사진2 : 입수즉시 게재 예정)이 발견되었으며, 소생은 지난 8월 1일 제4차의 산동성 문상현 고찰과 함께 치우사와 동상을 수복하기로 협의서를 정식 작성하여 2002년부터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② 산동성 미산현(微山縣)에는 환웅시대 제5대 왕인 태호의(太儀)의 아들인 복희(伏羲)씨 묘가 있고 '인론지시(人論之始)'라고 써여져 있으며, 지금은 신령을 모시고 있는 절당이 되었습니다.


③ 호남성 형산시(湖南省 衡山市)에는 동이족인 소전지자 염제신농씨 묘(小典之子 炎帝神農씨 廟)가 있고,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는 문장에 그 역시 절당이 되어 있습니다.


④ 강소성 운운항(江蘇省 運雲港)에는 신라촌과 신라정(新羅村과 新羅井)이 있고, 천하제일서(天下第一書)라 하는 장군애암(將軍崖岩)에 있는 200여 평방미터의 암화(岩畵)에는 5000여 년 전의 천문기상의 연구와 고대의 각종 석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⑤ 광동성 광주시(廣東省 廣州市)에는 제3대 환검(단군)의 현손{桓儉(檀君)의 玄孫}인 번우(番 )씨가 세운 번우국(番 國)이 지금의 번우시(番 市)로 되어있고, 광주(廣州)에서 200km 나가 신흥현 육조당(新興縣 六朝堂)에는 동이조상의 영상(靈像)을 모시고 있는 신라촌과 양씨촌(新羅村과 楊氏村)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비록 한족화(漢族化) 되었으나 고려(高麗)라고 대답합니다.


⑥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발굴된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옛 한글)}는 조선의 한글이 세종대왕의 발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으며,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가림토문자는 C14 측정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전 중국각지에는 동이민족의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음을 학자들이 공인하는 바이며, 하기에 동방의 역사는 동이선조 구환족(또는 구려족){九桓族(또는 九黎族)}의 문명사로서 만년(萬年)의 유구한 역사가 감숙성 돈황과 금악, 태백산 흑수, 요녕성 서납목론하(甘肅省 燉煌과 金岳, 太白山 黑水, 遼寧省 西拉沐 河)(또는 서요하西遼河, 서압록강西鴨綠江) 일대에서 발생·발전하였으며, 9000여 년 전 적봉시 오한기 흥륭와(赤峰市 敖漢旗興隆 )에서 북경의 연산남북(燕山南北)을 중심으로 발전한 홍산문화(기저, 「홍산고국문화론」){紅山文化(己著, 「紅山古國文化論」)}가 있고, 산동성에는 후이, 북신(后李, 北辛) 문화 등 8000여 년 전의 동이족 역사를 증명하는 허다한 유물, 유적과 문헌이 있습니다.


   동이민족의 연원을 말하자면 소련의 저명한 인류역사학자인 오과라기야부(奧科羅基耶夫)의 《인류의 발생과 이동》이란 논문에 의하면 "지금부터 만여 년 전에 파미르 고원에는 능가선무(能歌善舞)의 황색인종이 녹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민족이 햇빛을 따라 동으로 이동하여 천산(天山)과 아이태(阿爾泰)산맥에 살았기에 아이태어계 족(阿爾泰語系 族)"이라 하며, 차츰 동으로 이동하여 바이칼(패가이 : 貝加爾)호, 몽고사막으로 분산(分散)한 그 일파가 9000여 년 전에 적봉시 오한기흥융와 보국토향(赤峰市 敖漢旗興隆 保國吐鄕)에서 살았고, 6000여 년 전에 적봉시 홍산(赤峰市 紅山)에서 홍산고국(紅山古國)(즉, 배달환국 桓國)을 세운 것이 환국 제2조(第2朝) 한웅시대로서 이 배달환국 문화가 홍산문화이며, 홍산문화 계열은 지금부터 8000여 년 전 흥륭와(興隆 )문화에서 - 홍산문화 - 하가점 문화까지 계속 발전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 국가문물국이 고도로 중시하여 1993년 8월 14일∼24일간에 미, 영, 일, 대만 등 세계 11개국 100여명 학자들이 참가한 "중국북방 고대문화 국제학술연토회"를 적봉시(赤峰市)에서 개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이 문화가 동이족 토착인의 문화로서 동방고대 문화의 발원지이며 세계문명의 창시문화라고 학자들이 공인하였습니다.


   동이족이 창립한 홍산(紅山)문화는 이집트나 바빌론문화보다 근 2000년을 앞선 세계 태초의 문화였으나 그 발견이 늦어 세계사에 적어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홍산(紅山)문화는 절대 신화나 전설이 아니며, 9500년 전 사람의 손으로 가공한 옥월(玉鉞)이 오한기 천근영자(敖漢旗 千斤營子)에서 발견된 이래, 8000년 전의 흥륭와(興隆 )문화로부터 시작한 유물과 유적은 전 중국 각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상고의 문헌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었다고 역력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이민족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므로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의 비준으로 '동이고국 전문(전업:專業)위원회'가 산동성 제령시(濟寧市)에 설치되었으며, 1998년 4월 28일∼31일간에 이 제령시에서 전국의 동이역사학자 30여명이 참가하여 창립경축대회와 동이고국사연토회(東夷古國史硏討會)를 열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동이민족은 9000년 전부터 중국 땅의 토착인으로서, 옛날에는 구환족(九桓族)(또는 구려족 : 九黎族)이라 하였고, 4700년 전 환웅시대 14대 왕 치우(蚩尤)의 전성시대 해양문화시기부터는 치우(蚩尤)족, 삼묘(三苗)족이라 불렀으며, 2700년 전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는 구이, 팔만, 칠융, 육적(九夷, 八蠻, 七戎, 六狄)의 민족으로 부르는 등 또다시 동서남북 이만융적(夷蠻戎狄)으로 갈라 수십 종의 민족명칭이 존재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구환족을 분해하여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종족이름이었습니다.


   동이민족을 말할 때 세계적으로 북극의 에스키모, 남미주의 인디안족이 다 동이족의 후손이며, 중국의 조, 만, 묘, 려, 악륜춘, 악온극족(鄂倫春, 鄂溫克族) 역시 동이족의 후칭(後稱)입니다. 또한 중국의 삼황 - 천황·지황·인황 - (三皇 - 天皇·地皇·人皇 -) 이 동이족의 상고 시조이며, 환웅, 복희, 신농, 치우, 헌원, 고신, 환검과 요, 순, 우의 전체가 동이족의 선조였음을 고대문헌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이족의 습속(習俗) 특성을 말하자면, 옛날 어린아이의 베개를 돌, 모래로 베웠기에 뒷골이 납작하며, 소위 문신, 몸단장으로서 앞 이빨을 뚜 대씩 뽑아버리기도 했고, 머리는 짧게 후에는 남녀 막론하고 외가닥으로 땋았습니다.


   고고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수천 년 후에 남은 두골(頭骨)이 톱으로 베어버린 모양이라 거치형 두골(鋸齒形 頭骨)이라 하며, 이러한 두골(頭骨)은 요령성(遼寧省)과 산동성(山東省)에서 제일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상고 문헌에 동이민족은 쌍각지( 脚趾)라 하여 새끼발톱이 두 조각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근세에 남경(南京) 남쪽 남향 우수산(南鄕 牛首山)과 구용시, 광동(句容市, 廣東) 사람들의 대다수, 강소성 일대 등의 한족들이 쌍각지( 脚趾)인 사람이 많다고 하기에 각별히 조사한 결과 사실로 흔히 볼 수 있었으니, 이들은 동이족이 동화된 한족으로 보이며, 현재에도 역시 민족으로 말하면 100%라고는 못하나 조선족, 만족, 묘, 여, 악온극, 악륜춘족(朝鮮족, 滿족, 苗, 黎, 鄂溫克, 鄂倫春족) 등에 쌍각지( 脚趾)가 많았는데 역사의 기록대로 동이족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종족의 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같이 서기전 근 8천년 동안 중국 땅을 휘몰아치던 동이민족은 제1차 치우(蚩尤)와 헌원(軒轅)의 영토 분쟁, 제2차 후국(候國)인 서주(西周)의 상(商) 침략, 3차로 이상(夷商)의 전쟁 등 민족의 내부 분열과 동족 상전(相戰)으로 중화족에게 멸망을 면치 못하였고 차츰 한족화(漢族化)되었으나, '조상이 누구냐?' 물으면 고려(高麗)라 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땅에는 없애버릴 수 없는 수천 년 전의 역사 유물과 유적이 중국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지금 땅속 4∼5m의 깊이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이민족 역사의 발생지가 동방의 중국이며, 역사의 상고문헌이 중국에 있는 이상 올바른 역사를 찾으려면 그 발원지인 중국 땅에서 찾아야 설득력이 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의 학자들은 국내에 있는 기존 사책(史冊)의 문헌만을 거듭 연구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올바른 역사가 나올 수 없고, 심지어는 동이족이 조선족이 아니라는 일부학자들도 있으니 이런 성급한 결론은 삼가함이 좋을 듯 합니다.


   중국의 허다한 고대 문헌에서 동이족은 조선족이라는 논설과 문장을 어렵잖게 볼 수 있으며, 내가 쓰고 있는 「동이민족사」에는 왜 동이족을 조선족이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학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일부의 학자들 중에는 왜곡된 역사를 조선어로 옮겨 그의 저작인 것처럼 책을 출판하는 경우까지 있는데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학자들은 힘을 모아 올바른 민족사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불철주야로 쓰고 있는 동이사, 민족사, 고고사, 문화사 등은 내가 알든 모르든, 남이냐 뭐라 하건 말건 내 나름대로 쓰고 있으며, 우리 제2세가 없어지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니 여생의 숙원이라면 올바른 역사를 완성하여 후손에게 남기려는 것뿐입니다.


2001년 8월 20일 길림성 연길시 개발구 송호상(0443-2856131)


( '치우총' 비석 및 '치우사' 표지석)


(치우총(蚩尤塚)' 비석)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치우총(蚩尤塚)' 비석


('치우사' 표지석)

 

 

화강암에 석각된 된 길이 1.1m, 넓이 0.55m, 두께 0.15m의 '치우사' 표지석


(산동성 지도)

 

 

(치우천자의 비석 및 표지석" 발굴시 같이 나온 "연호"가 새겨진 유물)

 

 

- "元和" 연호는 후한(84 ~ 86), 당(806 ~ 820)때 사용


(가림토 사진)

 

 

 

 

 


② 산동성 미산현(微山縣)에는 환웅시대 제5대 왕인 태호의(太儀)의 아들인 복희(伏羲)씨 묘가 있고 '인론지시(人論之始)'라고 써여져 있으며, 지금은 신령을 모시고 있는 절당이 되었습니다.


< 참고 : 한웅 역 대 기 >


- 1세 (B.C3898) : 거발한 한웅, 재위 94년, 120세

- 2세 (B.C3804) : 거불리 한웅, 재위 86년, 102세

- 3세 (B.C3718) : 우야고 한웅, 재위 99년, 135세

- 4세 (B.C3619) : 모사라 한웅, 재위 107년, 129세

- 5세 (B.C3512) : 태우의 한웅, 재위 93년, 115세

- 6세 (B.C3419) : 다의발 한웅, 재위 98년, 110세

- 7세 (B.C3321) : 거 련 한웅, 재위 81년, 140세

- 8세 (B.C3240) : 안부련 한웅, 재위 73년, 94세

- 9세 (B.C3167) : 양 운 한웅, 재위 93년, 139세

-10세 (B.C3071) : 갈 고 한웅, 또는 독로한 한웅 재위 100년, 125세

-11세 (B.C2971) : 거야발 한웅, 재위 92년, 149세

-12세 (B.C2897) : 주무신 한웅, 재위 105년, 123세

-13세 (B.C2774) : 사와라 한웅, 재위 67년, 100세

-14세 (B.C2707) : 자오지 한웅, 일명 치우천왕이라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15세 (B.C2598) : 치액특 한웅, 재위 89년, 118세

-16세 (B.C2509) : 죽다리 한웅, 재위 56년, 99세

-17세 (B.C2453) : 혁다세 한웅, 재위 72년, 97세

-18세 (B.C2381) : 거불단 한웅, 혹은 단웅, 재위 48년, 82세

 

 

 

 

 

 

 


③ 호남성 형산시(湖南省 衡山市)에는 동이족인 소전지자 염제신농씨 묘(小典之子 炎帝神農씨 廟)가 있고,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는 문장에 그 역시 절당이 되어 있습니다.

 

 

 

 


(2003-03-15 23:50:16, Hit : 20664, Vote : 591

동이민족 논설 - 길림성 송호상, 치우천자 유물 및 가림토 - 송준희

 

출처 : 이파랑
글쓴이 : 이파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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