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스크랩] 배달국의 역사요약

설레임의 하루 2011. 1. 3. 05:41

* 배달국 역대 천왕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
2대 거불리 (居佛理, 86, B.C.3803, 102세 )
3대 우야고 (右耶古, 99, B.C.3717, 135세 )
4대 모사라 (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제 1 장 : 신시 배달국


의 말기에 천제께서 삼위와 태백을 둘러보시고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수 있는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보낼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사람들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이 용맹함과 더불어 어질고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다스리게 함이 좋을 듯 합니다.” 라고 하여,
께서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 사람과 만물의 업이 이미 다 마련되었으니 그대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3000의 무리를 이끌고 가서 하늘의 뜻을 펼치고 가르침을 세워,
께 제를 올리는 것을 주관하며 어버이의 권능을 세워 다스리고 이끌어서 평화로운 하나(一)로 돌아가게 하며, 스승의 도를 세워 세상을 조화로운 이치로 살게 하여(재세이화) 만세의 자손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라.”고 하셨다.

이리하여 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로 오시어, 이곳을 신시(神市-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곳)라 하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 정하니 이분을 천왕이라 한다.

그때 반고라는 자가 있었는데 괴상한 술법을 좋아하며 과 길을 나누어 가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반고는 재물과 보물을 꾸리어 십간과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묘,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납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한다.

천왕께서는 하늘을 열어 백성들을 살게 하고 교화하였으며 천경(天經-천부경)과 신고(神誥-삼일신고)를 가르쳐서 백성들을 크게 훈계하여 바로잡았으며,
천하가 커서 한 사람이 능히 이치로 교화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오가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선악을 주관하게 하여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온갖 일을 주관 하였으며,
스스로의 마음속에 이미 내려와 계신 을 깨닫고(성통광명),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재세이화), 두루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홍익인간)하여 세상을 이치에 맞고 조화롭게 다스리시니 널리 인간 세상에 이로움이 있었다.


천왕이 나라를 세우기 이전, 의 말기에 풍속이 점점 갈라지고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종족으로 웅족과 호족이 있었는데, 천왕께서 천하를 위해 삼신일체 의 가르침을 베풀어 무리들을 모아 맹세토록 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응징하는 법을 지니도록 하였으나,
호족의 성품은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약탈을 일삼았고, 웅족의 성품은 어리석고 고집이 세어 잘난체 하기를 좋아하며 화합하려 하지 않아, 서로 의좋게 지내질 않았다.

웅족과 호족은 천왕의 덕이 널리 퍼져 나가자, 신시의 신단수에 와서 천왕께 신계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청하므로,
천왕께서는 먼저 사람으로서의 본 바탕을 갖추려면 영통함으로서 고요함을 더하고 신묘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시며, 불가사의한 주문과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수행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웅족과 호족은 모두 이를 지키면서 21일간을 삼가며 수련하였으며, 웅족은 끝까지 이를 지켰으나 호족은 이를 지키지 않아 사해로 내쫓기었다.

마침내 웅족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고 예법을 세우니 이로부터 한족(桓族)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개 우리 한족은 모두 천왕이 거느린 3000의 무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후세에 비록 여러 갈래로 나뉘어 졌으나 실은 한 근원인 한단(桓壇)의 자손인 것이다.



천왕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갖추어졌음을 보고 고시씨에게 곡식을 주관토록 하였으며, 풍백 석제라를 시켜 새와 짐승 등의 해를 없애고, 우사 왕금영에게 사람이 살 곳을 만들게 하였으며, 짐승을 모아 기르는 것을 관장토록 하였다.

운사 육약비에게는 남녀의 예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는 대대로 병마와 도적을 막는 직책을 맡겼다.

대개 신지씨는 대대로 생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아 출납과, 옳은 것은 권하고 옳지 못한 것은 막는 일을 관장하였으나, 말로만 하였을 뿐 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이에 천왕은 신지 혁덕에게 문자를 만들도록 명을 내렸다.

어느 날 무리와 함께 사냥을 하던 중 암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뒤 쫒다가 홀연히 깨달아 여러 물건의 모양을 살피고 연구하여 문자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태고 문자인 녹도문자의 시작이다.

이로부터 치우와 고시와 신지의 자손들이 가장 번성하였다.

신시의 음악을 공수(貢壽), 혹은 공수(供授)라 하며, 두열(頭列)이라고도 하였는바,
백성들이 열을 지어 돌며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면서 삼신일체 을 기쁘게 하여 나라의 복을 빌고 백성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삼랑은 본래 삼시랑을 말하며 배달국의 신하로서 삼신일체 을 수호하는 관직으로 세습되었다.
농사와 재물의 이익을 주관하는 자를 업이라 하며, 교화를 주관하는 자를 랑이라 하며, 공덕을 비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이라 하였다. 모두 신령스러운 도로서 성령이 임해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삼신 의 이치에 맞는 일이 많았다.
또한 칠회제신의 책력에 맞춰 제를 올렸으니 각종 책력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왕으로부터 다섯 번을 전하여 태우의 (배달국 제 5 대 천왕)이 계셨다.
천왕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숨을 고르게 하여 정기를 보전토록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불로장생의 비결이다.

천황께서는 아들이 열둘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다의발 (배달국 제 6 대 천왕)이며 막내를 태호라 하고 또는 복희라고도 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우사의 직책을 세습하며 지내던 어느 날 삼신일체 께서 자신에게 강림하시는 꿈을 꾸고 만 가지 이치를 꿰뚫어 하늘에 제를 올리고 천하(天河)에서 괘도를 얻고,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었으니,
그 획이 세 번 끊어지거나 세 번 이어지면서 바뀌는 위치로 그 이치의 묘함을 헤아렸으며 삼극을 포함한 변화가 끝이 없었다.


이에 한역(桓易)을 지으니 한(桓)은 곧 희(羲)와 같은 뜻이고 역은 곧 옛 용(龍)의 본래 글자이다.
또한 복희와 같은 문하에 선인 발귀리가 있었는데 도를 이미 통달하여 저(渚)와 풍산사이에서 얻은 명성이 널리 퍼졌다.

후에 발귀리 선인의 후손으로서 청구국 대풍산 삼청궁에 살던 자부 선생은 일곱 번 제사 지내는 역법을 새로이 만들었으며 치우 천왕께 삼황내문을 지어 바쳤다.
이를 가상히 여긴 천왕께서 삼청궁을 지어 살게 하였으며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에 윷놀이를 만들어 한역을 전하게 하였으며 신지 혁덕에게서 전해져 내려온 천부의 뜻을 새로이 기록하도록 하였다.
자부 선생은 헌원의 마음을 수양토록 신시의 녹서로 기록되고 세 편으로 나누어진 삼황내문경을 전해 주었다.

복희는 그 뒤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 수인, 유소와 함께 서쪽 변방의 땅에 봉함을 받아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 지역을 교화하고 복종시켜 나라를 세웠으며 마침내 수인(燧人)을 대신하여 멀리까지 호령하게 되었다.
또한 신시 배달국에서는 계해(癸亥)로 시작되던 세수를 고쳐 갑자(甲子)로 시작토록 하였다.

후에 갈고 (배달국 제 10 대 천왕)때에 복희의 뒤를 이은 염제 신농의 나라와 경계를 획정하여 공상 동쪽까지 배달국의 땅으로 하였다.

또한 복희의 후손이 풍산에 살았는데 성을 풍이라 하였고 후에 파가 나뉘어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의 여덟 성씨가 되었다. 복희의 능은 산동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았고 신농(주양)은 옛 문자를 사용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


안부련 (배달국 제 8 대 천왕)의 말년에 소전(고시씨의 후손)은 천왕의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군사를 감독하였으며 소전의 아들 신농은 수많은 풀을 가지고 혀로 맛을 보아 약을 만들었다.
신농은 뒤에 열산으로 옮겼는데 낮에는 사람들에게 교역을 하도록 하게하여 많은 사람들을 편하게 하였다.
소전의 다른 갈래를 공손이라 하는데 헌구로 쫓겨났으며 헌원의 무리가 모두 공손의 후손이다.


사와라 (배달국 제 13 대 천왕) 초기에 웅족의 후손 여(黎)라고 하는 자가 처음으로 단허의 왕으로 임명을 받아 덕으로서 다스리니 여러 곳의 족장들이 특산물을 바치며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난 후 왕검이라는 자가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으로서 섭정을 한지 24년 만에 마침내 왕위를 이어받아 구한(동이족)을 통일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니 이 분을 단군 왕검이라 한다.


신시 배달국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달랐으니, 그 신령스러운 가르침과 성스러운 풍속이 천하에 널리 퍼졌다.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 하였고 삼신이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든 을 말함이니, 오로지 삼신일체 을 추앙하고 섬기는 것이 지극하여, 신시 배달국은 동북쪽 신령한 광명이 머무는 곳이라 칭송하였으나 말기에 이르러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으며,
다만 천경(天經-천부경)과 신고(神誥-삼일신고)는 계속 후세에까지 전해져 모든 사람들이 말없이 조용한 가운데 숭상하고 믿었다.




제 2 장 : 청구 배달국


자오지 (배달국 제 14 대 치우 천왕)에 이르러 사람들은 정착하여 점점 번성하였으니 모든 것이 넉넉해지고 낮에는 시장을 이루어 교역을 하기도 했다.

이에 치우 천왕이 신시의 공덕을 계승하여 도읍지를 청구(산동성)에 정하고 무리들과 더불어 다시 배달국을 일으키어 백성들과 호족(虎族)을 나누어 다스리고 하삭(河朔-황하 이북의 땅)을 근거지로 하여,


자부 선생의 천부의 도법을 이어받아 하늘(天)을 통달하여 천성을 알게 하고, 땅(地)을 통달하여 천성으로 다스리게 하였으며, 사람(人)을 통달하여 천성을 숭상토록 하였으니,
만물을 근원에서 다스려 덕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고 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방법을 갖추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치우 천왕이 구리와 쇠를 캐어 큰 칼과 큰 활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하고, 토지를 개척하여 산업을 일으켰다.

신농(고시씨의 후손인 소전의 아들)의 8 대 후손인 유망이 주변의 모든 고을을 급하게 정벌하여 하나로 합치려 하자 백성들이 두 갈래로 흩어져 세상이 어지러워 졌다.

유망이 덕이 없어 나라가 쇠해지고 주변을 어지럽히자 치우 천왕은 천병(天兵)을 일으켜,
형제와 일족 중에 장수가 될만한 자를 뽑아 81부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갈로산의 쇠를 녹여 투구를 만들어 쓰고, 칼과 창, 활 등을 만들어 탁록(하북성 서북쪽)을 치고, 구혼에 올라 연이어 싸워 이기니 질풍과 같았고, 천하에 위세를 떨쳐 모두가 두려워 떨며 항복하였다.

치우 천왕이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여 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 해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함락시키고 옹호산에 웅거하며, 쇠를 다듬고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창 등 갈라진 창을 만들고 다시 군사를 정돈해서 친히 양수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진류-산동성 곡부일대)에 이르렀다.
공상은 유망이 도읍지로 삼고 있던 곳이다.

이때에 유망은 소호(고시씨의 후손)로 하여금 천병군과 대항하여 싸우게 하였는데,
천왕이 예과와 옹호창을 휘두르며 큰 안개를 일으켜 적들을 혼미하게 만들자 적들은 스스로 혼란에 빠져 소호는 크게 패하고 공상으로 쫒겨들어간 뒤, 유망과 함께 공상에서 도망하였다.

이 해에 열 두 제후의 나라를 병합하였으니 서쪽 땅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며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때의 서쪽 사람들은 한낱 돌과 화살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 등의 사용법을 모르는데다가 치우 천왕의 높고 강한 법력을 보자 놀라고 간담이 서늘해져 변변히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서쪽에서 토착민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공손 헌원(8 대 안부련 의 관리였던 소전의 후손, 따라서 멀리는 고시씨의 후손)이 있었는데,
치우 천왕이 공상에 입성하여 널리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는,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될 뜻을 품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싸우려 하였다.
이에 먼저 항복하여 귀순했던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몰아냈으나 헌원은 감히 계속 싸우고자 하였다.

이에 치우 천왕은 하늘에 제를 올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할 것을 맹세하고, 격문을 만들어 81 종당의 대인을 불러서 맹세할 것을 명하였다.

치우 천왕이 명하기를 “너 헌구는 짐의 경고를 들어라, 태양의 아들은 오직 짐 한 사람뿐이니 만세토록 공명정대한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씻는 맹세를 하노라.
너 헌구는 우리 삼신일체 의 가르침을 경시하고 삼륜구서의 행함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일체 께서 오랫동안 그 더러움을 싫어하시어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토벌토록 하셨다.
너는 마음을 깨끗이 씻고 행동을 고쳐 너의 본 성품에서 의 자손 됨을 깨달으라.
너의 머리 속에 이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니라.
만일 네가 하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성하지 못할 것인즉 네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치우 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아홉 제후의 군대에게 동원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누어 진격토록 하면서 스스로는 보병과 기병 3 천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큰 안개를 일으키며 싸움을 독려하자 적군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쳐 100 리 사이에는 병마를 볼 수가 없었다.

치우 천왕이 군대의 진용을 가다듬고 사면으로 진격하며 10년 동안 헌원과 73 회나 싸웠음에도 장수들과 군사들의 용맹함은 그침이 없었다.

헌원은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탁록의 북쪽 대요와 동쪽의 창힐에게 의지하려 하면서
배달국을 본받아 무기와 갑옷을 만들고 군마를 일으켜 대항하면서 지남거를 만들어 감히 계속 싸우고자 하였으니,
이에 치우 천왕은 크게 노하여 헌원의 군사가 다시는 감히 습격할 뜻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불시에 쳐들어가 진영을 모조리 없앤 뒤에야 비로소 싸움을 그치고자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의 장수 치우비가 큰 공을 세우기 위해 헌원을 끝까지 뒤쫓아 베려다가 불행히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천왕은 불같이 노하여 새로이 오구장(돌을 날려 보내는 무기), 태노(큰 활) 등을 만들어 탁록의 들판으로 나아가 안개술법과 새로운 무기로 계속 공격하자,
헌원은 지남거를 이용하여 대항 하였으나 끝내 더 이상은 저항하지 못하고 헌구의 군사는 평정되어 복종하였다.

이에 정예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보내어 탁예를 지키고 기, 연(산동성과 하북성 경계지역)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또한 색도(산동성 동남쪽)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남쪽으로 회, 대(하남성,산동성)의 땅을 모조리 평정하고 성읍으로 삼아 헌원이 동쪽으로 쳐들어 올 길을 막았으며 산을 뚫고 길을 통하게 하니, 땅의 넓이가 만 리나 되었다.

탁록에 성을 쌓아 지키고 회, 대에 집을 짓고 차지하니 헌원의 종족이 모두 신하가 되고자 하면서 공물을 바쳤다.
이윽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뒤에 오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서쪽 고신의 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이후 300년 동안 평화로움을 누리었으니 다만 전욱과 한 번 싸워 이를 크게 무찔렀음이다.


치우 천왕 당시에는 탁록의 북쪽에는 대요가 있었고 동쪽에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에는 헌원이 있었다.
헌원이 치우 천왕보다 뒤늦게 일어나 싸울 때마다 이기지 못하여 대요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창힐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대요와 창힐 두 나라는 모두 치우의 무리로서, 대요는 일찍이 간지의 술(천간과 지지를 말함이니, 곧 60 갑자의 도리를 말한다)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녹도문으로 기록된 천부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모두 치우 천왕을 섬기던 것도 이 때문이다.

뒤에 제나라의 여상 강태공도 치우의 후손으로 성이 강씨 인 것은 치우가 강수에 살면서 두었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 반고(盤固) : 중국에서는 반고가 세상을 창조 했다는 반고 창조신화가 전해진다. 또한 14대 인 치우 천왕을 군주로 모셨다는 구려국 백성들 가운데 한 갈래를 묘족 또는 삼묘 라고도 하는데,
그 후손이라 하는 중국 남방의 묘족에도 <반왕서-盤王書>가 전해지고 있으며, 여기서도 반고는 모든 문물과 기구의 창조자로 표현되어있다.
또한 이들의 역사서인 <묘족사>에도 ‘묘족의 먼 조상이 치우다’라고 되어있다.


* 창힐 : 자부 선생에게서 부도의 글을 받아 같다는 구체적인 우리의 기록과는 달리,
중국의 문헌에서는 창힐을 눈이 네 개가 달렸다고 괴물처럼 묘사하면서, 문자의 시조로서 새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고 신화로 표현하였으며,
또한 우리의 사서인 <신시본기>에 의하면 ‘중국 진나라의 기록인 <통지>에서 이르기를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며, 대극성에서 태어나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 지방으로 가서 살았다’라고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있다.



< 중국의 문헌에 기록된 헌원 황제와 치우 천왕 관련 기록 >


* 후대에 중국인 사마천은 헌원이 치우비를 죽인 것을 치우 천왕을 죽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전쟁을 승리했다고 하면서도
<사기>에 이르기를 “헌원이 탁록의 강가로 도읍을 옮겼으나 정해진 곳이 없이 항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군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고 고백했으니 헌원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던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사기>와 <한서>에 이르기를 “치우 천왕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가운데 있으며 높이가 7 장이고,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도 그곳의 백성들은 항상 10월이 되면 제를 올렸는데 반드시 붉은 기운이 나타나 마치 진홍색 비단처럼 펄럭이니 이것을 치우의 깃발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한나라의 시조인 유방은 출전 시에는 항시 치우 천왕에게 제를 올렸으며, 건국 후에는 사당을 세워 받들었다고 한다.
치우 천왕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어찌 이러한 기록이 남을 수 있었겠는가.


황제가 응룡에게 명하여 치우를 공격하자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청하여 큰 비바람을 일으켰다. --- <산해경>

치우는 옛날의 천자(天子)다. --- <사기>

구려의 군주를 치우라 한다. ---<사기><서경><상서>

치우는 갈로산(盧山)의 쇠로 다섯 가지의 무기를 만들었는데 ~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먹는다. --- <사기>

황제는 소전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이며 이름은 헌원이다. ~ 제후가 모두 와서 복종하였는데 치우가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이를 벌할 자가 없었다.--- <사기>

천자라는 호칭은 동이족에게서 비롯되었다. --- <독단>

치우는 칼과 창, 병장과 큰 활을 만들었다. --- <중화고금주>

치우는 여러 현란함으로 비바람을 부르고 연기와 안개를 만들어 황제의 무리들이 크게 헤메었다. --- <광전물지>

황제와 치우가 탁록의 들판에서 싸울 때, 치우가 큰 안개를 3 일 동안 만들어내었다. --- <태평어람>

황제가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앞세우자 ~ 천하가 두려워하고 모두가 복종했다. --- <삼조기대재기>

황제 헌원이 동쪽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 선생을 뵙고 삼황내문을 받았다. --- <포박자>


* 중국문화의 뿌리를 염제, 황제, 치우로 정하여 삼조당(三祖堂)을 세우고, 탁록 일대의 유적지를 연구하는 <탁록 중화 삼조 문화연구회>의 자료에 따르면
‘탁록의 벌에서 나온 유물이 대문구 문화(B.C.4300~2200년)의 홍도규와 같은 동이 문화다’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단군의 역사를 가지고 설전을 벌이고 있을 때 저들은 고조선(단군조선)이전부터 유지되어 왔던 우리의 옛 동이 문화를 중국의 문화 중의 하나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옛 문화 유적들이 그들에 의해 더 이상 유린당하기 전에 우리의 학자들도 깊이 있게 반성하고 각성하여 유적지의 발굴 조사에 관심을 갖고, 역사의 공정성을 위하여 정부차원의 협상을 통해서라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최근(2003년)에는 동북공정사업과 함께 고구려도 자기들 역사의 일부라는 터무니 앖는 주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쟁의 신으로서 치우 천왕을 상징하는 도깨비 문양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상징’ 또는 ‘투혼의 상징’ 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오늘날 까지도 치우 천왕을 상징하는 각종 도깨비 문양의 유물이 전해지고 있으며,
“단오 날에는 치우의 이름과 형상을 부적으로 만들어서 집집마다 붙였다”라고 하는 기록이 조선 정조시대의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에서도 확인 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유물과 문헌 자료가 남아 있는데도 우리의 조상과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려 하고 있고, 중화족은 여지껏 동이족의 수장이라 하는 치우 천왕은 커녕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황제까지도 신화적 인물로만 취급하다가,

막상 문헌대로 탁록에서 유물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이제와서는 치우 천왕까지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당시의 문화유적이 모조리 중화족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특히 치우 천왕은 동이족임이 확실하므로 여지껏 악의 화신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나 탁록의 유적이 발견된 후에는 저희들의 조상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2002년 한ㆍ일 월드컵축구대회 때, 붉은 악마 응원단의 상징인 배달국 제 14 대 치우 천왕의 깃발아래 붉은 옷과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우리 가락 엇 3 박자 응원과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전 국민이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이루어 하나가 되었던' 응원문화, 이런 것이 바로 집단적 무의식으로 우리민족에게 유전적으로 전해져왔던 것이며, 다시 되살려야 할 우리민족의 뿌리정신인 것이다.

출처 : 천부도. 역사와 천부경, 홍익인간
글쓴이 : 천부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