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스크랩] 金나라, 고려에게 宋을 치기위해 길을 비켜달라는 高麗史 기록 ( Jin requested to Goli yield path way to assault Song )

설레임의 하루 2011. 1. 25. 00:42

누가 고려를 반도국가로 쪼그라들게 만들고 번역하였는가?

고려사절요를 보면 고려는 반도국가가 아니라 거란에서 낙타를 선물하고 ,안서도호부를 관할하는

내용이 나온다.안서도호부는 당이 망할때까지 투르판 전투 ,위구르등의 민족이 할거하던 서부지역

이며 바로 천산북로의 거점 지역이다. 안서도호부지역(식민사학계에서는 평안도라함)의 대형 지진

내용 등이 고려사절요등에 기록되고 있다면 자기땅도 아닌곳에 오지랍이 넓어서 였을까요? 평안도는

 지진 활동대가 아닙니다.

고려사 절요 인종 14년조를 보면 국제관계및 국내관계가 모두 복잡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국외로는 북송(하북남,산동북부),남송(절강성),거란(위구르자치구 및 동부), 고려,하국(감숙성 지역

국가)등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이자겸 이 죽고,묘청등이 천도설을 주장하는

등 국내상황의 주요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금에 의해 망하여 금나라에 포로가 되어 잡혀간 와중에 남송의 사신이 고려에

 길을 비켜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 입니다.

북송은 하북성남쪽,산동성 북쪽에 위치한 나라고,남송은 강소성 남쪽 과 절강성의 일부분에 존재했던

나라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내용대로 라면 반도고려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합니다,지리학상으로

 정말로 이상합니다.그러나 고려는 남송에게 길을 비켜주면 또 금이 남송을 치기 위해서 길을 비켜달라

고 하게되고 와중에 고려국의 백성이 다치게 되므로 그리하지 못한다고 거부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기존 사학계의 사기극이 들통 납니다.얼마나 엉터리 번역인지를 말입니다.CD번역본 사서

보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재미 있는것은 하기 국문번역은 기존 사학계에서 번역한것이고, 원문은 본인이 끌어다 맞춘것인

데 이전 페이지에는  모든 지명의 주석을 국내에있는 지명을 끌어다 썻는데 이 글부분은 차용하지 못했

다는 것 입니다. 내용을 보시면 왜 그리하지 못했는지 아시게 됩니다.

그리고 상국(외교상 상대국의 존칭)을 전부 중국으로 번역하였다는 것 그리고 아국을 소국으로 번역했

으니 이 얼마나 사대주의적 번역이란 말 입니까?

<고려인종 14년조 기록>

○전략 - 가을 8월에 <왕이>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 9월에 김치규(金稚規)와 유대거(劉待擧)를 송나라 명주(明州)에 보내어 첩(牒)을 전하기를,


今來夏國差到使人欲同使臣前去高麗議事差遣陳舒往高麗於本國掌管事務官處密諭此意仍

“근일 상객 진서(陳舒)가 와서 말하기를, 하국(夏國)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일을 비밀스럽게 의논하고

자 한다 하니,

惟三韓自漢唐以來世事中原易其衣裳習其禮義, 我祖宗內附二百年于玆受累聖待遇之恩至深? ?

厚豈不欲一心以守藩臣之度哉

삼한(三韓)은 한(漢)·당(唐) 이래로 대대로 중국을 섬겼고, 더욱이 우리 조종께서는 내부(內附)한 지

 2백 년이 되어 역대 황제의 대우하신 은혜를 받았은즉, 어찌 한결같은 마음으로 번신(藩臣)으로서의

 법도를 지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중원을 중국으로 번역했습니다 중국이란 국명은 1912년에야 등장하는 것입니다.의상과 습속을 배웠다

고 했는데 섬겼다고 번역 했습니다 우습지요 ?)

而與金國疆域相接不得已請和設聞遣使與夏人偕來議事必爲陰與爲謀,因此猜怒兵出有名則小國成敗未可得知.

그러나, 금나라와 국토가 서로 접해 있어 부득이 서로 화친(和親)하고 있는데, 그들이 만일 우리가 사신

을 보내어 하인(夏人)과 함께 같이 와서 일을 의논한다는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음모했다하여 이로 말미암아 시기하고 성내서 군사를 출동하는 핑계가 될 테니, 소국(小國)의

성패는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국이라함은 의전상 자기의 나라를 낮추어 부름에도 번역을 이상하게 했습니다)


(중요)
若微我爲之藩屛則淮浙之濱與金爲隣固非上國之利也.

만약 중국의 울타리인 우리 나라가 없어진다면, 회남(淮南)·절강(浙江)의 언저리가 금나라와 인접될

것이니, 진실로 상국(上國)의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
又上國因興師取道於我則彼亦由此以行然則沿海諸縣必警備之不暇矣

또 상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로 길을 향한다면 저쪽도 역시 이 곳을 경유하여 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연해(沿海)의 모든 고을은 경비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頃楊尙書至只欲與彼講好非有兵革之事尙不能副稱使旨,至今擧國待罪者豈有他哉其勢如前所陳耳.

伏望執事熟計之無使小國結怨於金上國亦無唇亡齒寒之憂幸甚

바라건대, 집사(執事)는 깊이 생각하여 소국으로 하여금 금나라와 원한을 맺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상국도 역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려가 없도록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명주(明州)의 회첩(回牒)에, “조정(朝廷)에서 모든 나라를 매우 후한 은의(恩義)로 대우하였는데 정강

(靖康)의병란이 있은 뒤로는 사절(使節)의 왕래가 어렵게 되었더니, 근일에 오돈례(吳敦禮)를 진서

(陳舒)와 함께 보내어 옛날의 우호(友好)를 다시 찾았습니다.

또 듣건대, 금나라와 매우 가깝게 인접해 있다 하니, 사절의 왕래로 인하여 양궁(兩宮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안부(安否)를 응당 들었을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응원(應援)을 한다든지,

<귀국의 땅에> 길을 빌어 <금나라를> 정벌(征伐)을 한다는 말은 모두 돈례 등이 자기의 의사로 한 말이

요, 조정(朝廷)이 지시한 것은 아니니, 마땅히 깊이 양해하여 스스로 의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왕이 일찍이 변방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송나라 신종(神宗)이 문언박(文彦博)·왕안석(王安石)과

함께 변방의 일을 의논하니, 언박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먼저 자치(自治)를 잘 할 일이니, 가까운 곳을

소홀히 하고 먼 곳에 힘을 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안석이 아뢰기를, ‘언박의 말이 참으로 지당

합니다’ 하였습니다. 만약 능히 자치만 한다면 70리로도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는것인데, 이제 만 리의

천하를 가지고도 외국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치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삼한(三韓)의 땅이 어찌 7십 리뿐이겠습니까. 그러나, 남을 두려워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

허물이 스스로 먼저 잘 다스리지 못한데 있을 따름입니다. 싸움 잘하는 기병(騎兵)으로 들판에서

덤비어 칼과 화살로 접전해서 즉시에 승부를 결하는 것은 오랑캐[戎狄]들의 소장(所長)이요, 중국인은

못하는 단점(短點)이며, 강한 소뇌[弩]로 성을 타고 굳게 수비하여 적의 세력의 쇠함을 기다리는 것은

중국인의 소장이요, 오랑캐의 못하는 단점입니다. 마땅히 소장을 먼저하여 그 사세의 변동을 볼 것이니,

이는 실로 오늘의 급무입니다. 마땅히 서울과 모든 주(州)·진(鎭)으로 하여금 성을 높이고 못[池]을

깊이 파게 하여, 강한 소뇌와 독한 화살과 뇌석(雷石)과 화전(火箭)을 저축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어서

 그 맡은 관리를 독찰하여 상벌을 시행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심제(도불원인) .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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