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스크랩] 바이칼호와 개벽과 한국.배달국.조선

설레임의 하루 2011. 1. 3. 05:29

바이칼호와 개벽 및 환국. 배달국.고조선

 

주요 목차
1. 인류의 시원과 개벽(開闢) 및 환국(桓國,B.C 7,199~3,898)
2. 환국(桓國)과 인류 4대 문명 (B.C 3,000년 전후)
3. 환국(桓國) 시대와 천산(天山) 및 바이칼호
4. 바이칼호는 남부 시베리아의 진주(珍珠)
5. 바이칼호(Baikal lake)와 배달민족의 동남쪽 이동
6. 바이칼호 주변의 토속 신앙과 문화
7.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의 출현과 웅족(熊族) 및 호족(虎族)
8. 배달국의 신시(神市)시대 : 배달 환웅의 만주 요녕성 홍산문화
9. 배달국의 청구(靑邱)시대 : 치우 천황의 산동반도 용산문화
10. 사대주의에 의해 농락된 단군신화(檀君神話)
11. 광역(廣域)국가인 고조선과 47대 단군 계보(系譜)
(1)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수도에 따른 변천사
(2) 고조선(古朝鮮)의 광역 국가 체계 구축과 삼한(三韓) 관경제(官境制)
(3) 고조선은 고대의 한민족사에서 최대로 번성한 국가였다.
(4)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47대 단군 성조 계보(系譜)


1. 인류의 시원과 개벽(開闢) 및 환국(桓國),
(B.C 7,199~3,898)
약 300~400만년 전부터 최초의 인류라고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출현했으며, 약 250~150만년 전에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가 나타났다. 이들의 화석은 아프리카의 남부와 동부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편, 인류의 구석기 문화가 등장하는 것은 “호모 하빌리스” 때부터이고 구석기 전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불을 사용하고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약 150~50만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곧선사람)”가 출현했고 이들도 구석기 전기의 문화를 누렸다. 그리고, 약 20만년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슬기사람)”가 출현하는데, 이들은 구석기 중기의 문화를 지녔다. 네안델탈인, 자바인, 베이징인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여러 종류의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도 가지고 있었다. 약 4만년전에는 현생(現生)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슬기슬기사람)”가 출현했는데, 이들은 구석기 후기에 출현하였다.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들의 체질상의 특징이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똑같다. 특히, 크로마뇽인은 프랑스 남부와 에스파냐 북부일대에 훌륭한 동굴 벽화를 많이 남겼다.

현생 인류는 약 4만년 전부터 1만2천년 전까지에 걸쳐 구석기 후기 문화를 이룩하였다. B.C 10,000년 경에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점차 신석기 시대가 전개 되었다. 신석기 시대는 농경과 목축을 하기 시작했으며, 토기를 사용하고 정착 생활과 촌락을 형성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신석기 시대의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 생산 및 경제활동은 제 1차 산업혁명으로 까지 불리워지는 생활의 큰 변화였다. 또한, 신석기 시대의 집단 생활과 공동체 생활은 상당한 수준의 국가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점점 집단화 되고, 갖가지 유용한 문명이 개발되었으며, 대규모의 종교의식도 행해졌다. 제단(祭壇)을 쌓고 제천의식도 행해졌다.

그런데, 지구상에 갑자기 큰 변화가 생겨났다. 즉 약 B.C 8,800년 경에 지구상에 개벽(開闢)이 발생한 것이다. 약 10,800년 전에 발생한 하늘과 땅이 무너질 만큼의 큰 변화였다. 일정한 주기로 찾아오는 개벽(開闢)은 우주변화의 원리에 의해 약 10,800년 마다 발생한다. 지구상의 큰 대륙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갈 만큼 강력한 지각(地殼) 변동이 있었고, 동시에 인류문명도 변하게 되었다. 대서양의 아틀란티스(Atlantis) 대륙과 태평양의 무(Mu)대륙과 인도양의 레무리아(Lemuria) 대륙이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미국 플로리다(Florida)주 남부의 대서양 해저 탐사에서 발견되는 대규모의 건물, 성벽, 도로, 240m나 되는 해저 피라미드 등등은 개벽(開闢)으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Atlantis) 대륙의 남방문명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집트의 파피루스 고문서에 따르면, 아틀란티스 최초의 왕은 “포세이돈(Poseidon)”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나온다.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은 개벽(開闢)으로 인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무(Mu)대륙의 짜투리 땅들이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황해, 동해, 대한해협을 육지로 다닐 수 없게 된 것도 이 때부터라고 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은 이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10,000~6,000년전의 중앙아시아와 세계의 기후는 지금보다 따뜻했고, 인간이 생활하기에 적당했다고 한다. 온난한 기후와 적당한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중앙 아시아에 문명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고, 신석기 문명을 바탕으로하는 인류 최초의 국가가 생겨났다. 북방에서 다시 북방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처음 생긴 나라가 환국(桓國, B.C7,199~3,898)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천산(天山) 산맥과 파미르 고원의 동쪽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중국의 북서부 지역이다. 이것이 북방문명의 출발인 것이다.

2000년 07월 03일 중국 톈진天津일보에 의하면, 러시아 고고학 발굴단이 티베트 서쪽의 강런보치(岡仁波齊)봉 주변지역에서 세계 최고(最高)의 피라미드와 100개가 넘는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군(群)을 발견했다고 한다. 환국(桓國)이 초창기에 도읍을 정한 위치와 일치한다. 이들 피라미드군(群) 가운데 가장 높은 피라미드는 1백80m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로 알려졌던 이집트의 케옵스왕의 피라미드(높이 1백46m)를 능가하는 규모이다.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도 수 천년 앞서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들 피라미드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도 이들 피라미드는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고구려의 건축 양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고(上古)시대의 유적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국가인 환국(桓國)의 존재와 위치는 책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실제적인 유적과 유물 발굴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서구의 실증사관(洋毒)과 중국인의 역사말살 및 왜곡(中毒) 그리고 일본의 식민사관(倭毒)에 의해 고대사(古代史)에 대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환국(桓國)의 존재가 베일에 가려져 왔다. B.C 3,000년경의 황하문명, 인더스문명, 수메르(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들이 모두 B.C 7,199~3,898년에 실제했던 중앙 아시아의 환국(桓國)의 신교(神敎)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환국(桓國)의 문명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세계 4대문명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 환국(桓國)과 인류 4대 문명
(B.C 3,000년 전후)
최근에 발견된 정통 사서(史書)인『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인류의 시원(始原)과 동방 고대(古代)문명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의하면, “옛날 시베리아에 환국桓國, B.C7,199~3,898의 환인(桓仁)이 살고 있었는데, 환웅(桓雄)으로 하여금 무리 3천을 이끌고 백두산으로 내려가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의 신시(神市)를 열도록 하였으며, 그 후 단군(檀君)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해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을 개국하였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수 천년간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한민족의 기원은 환국(桓國)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는데, 『삼성기(三聖記)』상권을 보면, “우리 환국(桓國, B.C7,199~3,898)의 건국은 가장 오래되었는데, 일신(一神)이 있어 사백력(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神)이 되시니, 광명은 우주를 비추고, 우주의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이에 환국(桓國, B.C7,199~3,898)의 환인(桓仁)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문명을 가르치셨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사백력”은 시베리아의 한자식 표기이다. 환국(桓國, B.C7,199~3,898)은 천산(天山)에서 바이칼 호(Baikal lake)에 이르는 곳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국가를 말한다. 환인(桓仁)의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보면,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삼성기(三聖記)』하권에서는 그에 대해 더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파나류산(천산) 밑에 환인(桓仁)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바이칼호)의 동쪽 땅이다. 땅이 넓어 남북 5만리요 동서 2만리니 환국(桓國)이요, 모두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인(桓仁)은 7대를 전하여 역년이 3,301년(B.C7,199~3,898)이다.” 라고 적혀 있다. 천해(天海)는 지금의 바이칼호(Baikal lake)를 말한다. “바이칼(Baikal)”이란 이름도 한민족에서의 ‘밝(밝다)'이란 명칭의 연음화 현상과 관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태백일사』를 보면, “옛날 환인(桓仁)이 있었는데 천산(天山)에 내려와 거하시며, 천신(天神)에 제사지내고 정명인민(正明人民) 섭치(攝治)하시고 들에 사시매, 곤충과 짐승의 해독(害毒)이 없어지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성밀기』를 보면, 파나류산(천산) 밑에 환인(桓仁)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바이칼호)의 동쪽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환인(桓仁)에 대한 유사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파나류”는 알타이어 계통의 말로 천산(天山)으로 말한다고 한다. 언어학적 연구가 따라야 하겠지만, 실제로 1만년 전 신석기문화가 중앙 아시아와 남부 시베리아일대에서 전개되었는데,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다. “곤충과 짐승의 해를 당한때”는 구석기 시대를 말하며, 신석기 문명의 출발과 함께 사라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위의 기록은 매우 타당성있는 적절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정착과 함께 신석기 시대의 국가 체제였던 환국(桓國)의 통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빛이 도는 구멍이 숭숭 뚫려진 돌을 "송이"라고 부르는데 제주에만 있다(표선해수욕장 인근)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Sumer) 문명의 진면목을 밝혀 주는 무수한 점토판들은 영국 대영박물관과 프랑스 루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수메르인들은 검은 머리의 용모에 한국어(한글)와 같은 교착어인 수메르어를 사용했었다. 또한 종교 신앙 가운데 지구랏(Ziggurat)이라는 제천단과 그들이 남긴 유적들에게서 우리 문화와 같은 문화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있다. 이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니, 환국(桓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한편, 중국의 황하문명은 B.C3,000~2,500년경에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발해 연안의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북만주와 발해 연안의 문명은 천산(天山)에서 자연 자원이 풍부한 바이칼호에 이르는 환국(桓國)의 중심세력이 광명의 근원지를 따라 따뜻한 기후와 풍요한 생활 환경을 찾아 자연스럽게 동남쪽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의 환웅(桓雄)족이 바이칼호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바이칼호의 부리야트족과 같은 토템 신앙을 가졌었고, 또한 석곽이라는 돌매장 풍습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은 말(馬)을 길들여 사용하였고, 여러 가지 유물과 유적들이 그들의 이동 경로를 말해주고 있다. 북만주와 발해 연안의 니우헤량(牛河梁), 동산취(東山嘴), 후투구(胡頭溝) 등 유적지에서 B.C 3,600년 경의 돌무지 무덤과 여신묘가 발견되고, B.C 3,500년 경의 대형 석조건물과 제단 돌상자 무덤 옥기 등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중국의 황하문명(B.C3,000~2,500) 보다 500~1,000년 앞선 것이다. 또한 이들의 유적과 유물은 부족 연맹체 사회를 뜻하는 것이며, 신석기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고대문화의 기원』이라는 책에 의하면, 지금까지 중국 황하문명의 전유물(專有物)로 여겨졌던 갑골(胛骨)문화는 본래 황하 유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발해 연안 북부에서 B.C 3,500년 경에 기원하였다는 것이다. 동북아의 빗살무늬 토기와 적석총, 석관묘, 지석묘 등의 기원지도 발해 연안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고 한다. 발해 연안과 만주 요녕성 일대는 중국의 정사(正史)에서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하는 조선족의 활동 영역으로 고대(古代)에는 한국 민족의 활동 영역이었다. 이들 배달국의 홍산(紅山) 유적지에서는 지금까지 황하 유역에서 나타나지 않던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빗살무늬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바로 천산(天山) 동쪽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환국(桓國, B.C7,199~3,898)의 환족(桓族)인 것이다. 이들은 광명의 근원지를 따라 따뜻한 기후와 풍요한 생활 환경을 찾아 자연스럽게 동남쪽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환족(桓族)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중추세력 즉 환웅(桓雄)과 그가 거느린 문명 개척단 3,000명이 해 뜨는 동쪽 땅으로 이주해 와서 개창한 나라가 배달국(倍達國)이다. 오늘의 한국인은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의 배달민족이며 그들의 후손이다.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자식들의 수장(首長) 이름은 환웅(桓雄)이었다. 환웅(桓雄)은 널리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천산산맥의 동남쪽에 있는 삼위산(三危山, 중국 서부 돈황현敦煌顯)과 백두산(白頭山)을 두루두루 살펴본 후, 동방 땅의 백두산(白頭山)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환인(桓仁)에게 알렸다. 환인(桓仁)은 아들 중의 장자(長子)인 환웅(桓雄)의 뜻을 마침내 허락하여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을 건설하게 했다. 그래서, 한국(韓國)은 인류문화의 시원국가이다. 우리나라 문화가 인류문화의 모태이다. 즉 환국(桓國)의 중추세력이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배달국(倍達國)을 건설했고, 배달국의 중추세력이 다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국가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통성과 우리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7,199~3,898),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에 이르기 까지 무려 9,200년이나 된다.

3. 환국(桓國) 시대와 천산(天山) 및 바이칼호

B.C 10,000년 경에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점차 신석기 시대가 전개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을 하기 시작했으며, 토기를 사용하고 정착 생활과 촌락을 형성하여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원시 형태의 국가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환국(桓國,B.C7,199~3,898)이다. 환국(桓國)과 관련하여 바이칼호 주변의 유적지 발굴이 1960년대 이후에야 본격화되었는데, 극히 최근에야 구체적으로 알려졌다.『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환국(桓國)의 기록은 유적지 발굴 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환단고기(桓檀古記)』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와『환단고기(桓檀古記)』기록의 정황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남부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의 유적지에서 고대(古代)의 유물과 유적지 및 반지하식 주거지가 발굴되고 있다. 이 지역의 유골을 조사해 본 결과, 이 유골이 황인종에 속하는 몽골리안의 것이라고 한다. 환인(桓仁)에 대한 기록과 관련해서, 남부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의 유적들 중에서 한민족의 선조들이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 의하면, 천산(天山)에 거(居)하며 득도(得道)하여 장생(長生)하신 인물이 환국(桓國)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는데, “만인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안파견(安巴堅) 환인(桓仁)이라 하였다. 인(仁)은 임(任)의 뜻으로 이것은 자신이 맡은 소임(所任)을 다한다는 뜻이다.

환국(桓國) 사람들은 처음에 천산(天山) 동쪽에서 바이칼호(Baikal lake)에 이르기까지 신석기 문명을 건설하였으며, 대규모 공동체 생활과 집단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집단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종교의식이 행해졌으며 제단(祭壇)을 쌓고 제천의식도 행해졌다. 몇 천년이 지난 후 환국의 말기에, 이들은 바이칼호(Baikal lake)에서 따뜻한 기후와 풍요한 생활 환경을 찾아 자연스럽게 동남쪽으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이들은 동남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북만주와 백두산 및 발해 연안에 자리를 잡았고, 환웅(桓雄)이 거느린 문명 개척단 3,000명에 의해 배달국(倍達國)이 건설되었다. 또한, 북만주와 백두산 및 발해 연안의 발달된 문명은 다시 고조선(古朝鮮)을 세웠으며,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및 발해(渤海)로 이어졌다.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韓)』이란 책에 의하면 환국(桓國, B.C7,199~3,898)의 환족(桓族)이 광명의 근원지를 따라 따뜻한 기후와 풍요한 생활 환경을 찾아 동남쪽으로 이주해 오면서, 환(桓)이 한(韓)이란 언어로 바뀌고 환(桓)의 정신이 한(韓)의 정신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한”이란 말은 7,000년 이상된 언어로서 인류 문명의 시원(始原)과 함께해 온 언어로서 원시문명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어느 곳이나 예외없이 발견되고 있다. “한”이란 말은 신의 이름, 군장(君長), 거룩한 지명 등에 나타나며, 그 퍼져있는 지역도 매우 넓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칸(Kan), 인도 산탈어의 한스한신, 수메르어의 안(An), 몽골어의 칸, 버마 친족의 한, 필리핀 이고로트어의 한 등, 문명이 오래된 민족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한”을 자기들 신(神)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은 7대의 환인(桓仁)에 의해 다스려졌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제1세 안파견(安巴堅) 환인(桓仁), 제2세 혁서(赫胥) 환인(桓仁), 제3세 고시리(古是利) 환인(桓仁), 제4세 주우양(朱于襄) 환인(桓仁), 제5세 석제임(釋提壬) 환인(桓仁), 제6세 구을리(邱乙利) 환인(桓仁), 제7세 지위리(智爲利) 환인(桓仁). 또한, 환국(桓國)은 모두 12개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수밀이국(須密爾國), 2) 객현한국(客賢汗國), 3) 우루국(虞婁國), 4) 구막한국(寇莫汗國), 5) 구다천국(勾茶川國), 6) 구모액국(勾牟額國), 7) 선비국(鮮裨國), 8) 비리국(卑離國), 9) 양운국(養雲國), 10) 일군국(一群國), 11) 매구여국(賣勾餘國), 12) 사납아국(斯納阿國).


4. 바이칼호는 남부 시베리아의 진주(珍珠)
흔히 “남부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바이칼호(Baikal lake)는 몽고와 러시아의 국경지대 바로 위에 있으며, 넓이는 세계 7번째이다. 그리고, 담수량을 기준으로 할 때는 세계 최대의 호수이다. 최대 수심 1642m인 이 호수에는 전세계 민물의 25%(1/5) 가 담겨 있을 정도로 깊은 호수이다. 북동에서 남서로 길게 뻗은 바이칼호(Baikal lake)는 길이 640km, 평균 너비는 48km로, 면적이 남한의 3분의 1이나 된다. 호수의 최대 투명도는 42m이다. 42m까지 물밑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맑아서 그냥 마셔도 될 정도이다. 주변의 숲과 초원에서 365개의 강이 바이칼호로 흘러들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뿐인데, 북극해와 연결된 앙가라강이다.

바이칼호(Baikal lake)는 3,000만년 전부터 호수 북쪽의 땅은 융기하고 남쪽은 벌어지면서 단층 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바이칼호 주변에서는 매년 3천번 이상의 지진이 일어난다. 지금도 호수 주변은 1년에 1㎝씩 융기하고, 호수는 매년 2㎝씩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바이칼호에는 2500종의 동식물이 산다. 이 중 상당수가 바이칼호에만 사는 고유종이다.

세계 유일의 민물 바다표범을 비롯해 철갑상어, 오물, 하리우스 등 어종이 이곳의 명물이다. 이처럼 생물 다양성이 높은 것은 바이칼이 생성된지 오래된 호수이고, 일반적인 호수와 수심 깊은 곳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자체 정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호수 주변에는 온천이 많다. 1990년 미.소 합동 조사단은 잠수함을 타고 수심 420m 까지 들어가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했다고 한다. 바이칼호(Baikal lake)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호수 중의 하나이다.
한편, 바이칼호(Baikal lake)의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은 한국인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얼굴이 비슷하다. 바이칼호 주변의 북방 아시아인들은 언어 문화 뿐만 아니라 생김새와 유전적 특징까지도 한국인과 비슷하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북방 아시아인은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얼굴이 평평하며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늘다. 이런 생김새는 동상과 찬바람을 견디고, 흰 눈 속에서 지내는데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과 한국인들은 추위에 잘 적응해온 체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시베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와 유전적으로 비슷한 미국의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이다.

 

5. 바이칼호와 배달민족의 동남쪽 이동
바이칼호(Baikal lake)의 고아시아족 (Paleo Asiatic)의 주도세력이 바로 배달민족의 뿌리였다. 요즘,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고증(考證)의 근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한국 상고사의 쟁점』이란 책을 보면, 배달민족(倍達民族)은 고아시아족 (Paleo Asiatic)으로서 본래 고(古)시베리아 인종이라고 한다. 북방에서 만주벌판으로 이주해온 고(古)시베리아족의 후손을 예맥족(濊貊族)이라고 하는데, 이들 예맥족(濊貊族)이 자리를 잡아 세운 나라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이다.
저명한 러시아의 시로코고로프(Shirokogorov) 교수는 그의 저서,『북방 퉁구스의 사회 조직』이라는 책자에서, 동방의 배달민족은 바이칼(Baikal) 호숫가에서 발생한 고아시아족의 한 지파(支派)가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밝혔다.

중국의 능순성(凌純聲) 교수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도 고아시아족의 주도세력이 동남쪽으로 이동했고, 그들이 바로 배달민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북만주와 발해 연안의 문명은 천산(天山)에서 자연 자원이 풍부한 바이칼호로 이동했던 환국(桓國)의 중심세력이 동남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북만주와 발해 연안에 자리잡아 발달된 문명을 일구어 놓은 것이다.

또 옛날의 중국 역사 기록자들은, 북방에서 이동해온 고아시아족들의 후손을 예맥족(濊貊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주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바로 예맥족(濊貊族)이다.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에 자리잡았던 고조선(古朝鮮)과 송화강 중류에 자리잡았던 부여(夫餘), 그리고 압록강 중류에 자리잡았던 고구려(高句麗)가 이들 예맥족(濊貊族)이 건설한 나라이며, 다시 그 후예가 말갈과 연합하여 세운 발해(渤海)가 바로 이들 예맥족(濊貊族)이 건설한 나라이다.

한반도의 6배가 넘는 광활한 대지에 역사를 꾸려갔던 주인공들은 아쉽게도 발해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발자취가 한반도로 좁혀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에 중원(중국의 황하)의 한족(漢族)들이 그 자리를 메워버렸다. 그리고 1천년이 흐른 뒤인 19세기 후반에 다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오늘날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아시아족 학설의 근거가 되는 유적으로서는 시베리아의 시르카(Shilka) 동굴이 있다. 시르카 동굴은 시베리아 남부 바이칼호(Baikal lake) 부근에 있는 동굴인데, 인간 두개골과 깨어진 즐문토기 여섯 개, 118점의 세석기 등 시르카 유물이 발굴되어 시베리아 치타(Chita)시의 치타 박물관과 러시아 학술원 물질문화사 연구소에 현재 보관되어 있다


시르카 동굴에서 발굴된 인간무리의 두개골은 고아시아족의 것으로 밝혀졌고, 또한 여기에서 발굴된 즐문 토기는 바이칼 호수, 중국, 몽고, 한반도, 일본등으로 연결되는 동북아시아의 지역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것이다. 특히 즐문토기의 구연부문과 빗살무늬 형태는 한반도 서해안의 것과 동일한 형태였다.

 

6. 바이칼호 주변의 토속 신앙과 문화
바이칼호(Baikal lake) 주변과 남부 시베리아에는 여러 아시아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 중 최대의 소수 민족은 인구 40만의 부리야트족으로 바이칼호 주변에서 자치 공화국을 이루며 살고 있다. 특히, 부리야트족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많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원래, 바이칼의 주인인 부리야트족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되었고, 지금의 부리야트족 형태로 존속되어 오고 있다. 유목민인 이들은 모두 자신을 징기스칸의 후예로 믿고 있다. 남쪽 국경 너머 몽골과 중국 북부의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바이칼호 주변에는 많은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고 있으며 지금도 옛날의 문화 전통과 고유의 풍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부리야트족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민족 설화를 갖고 있다. 한 노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온 선녀에 반해 옷을 숨겼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 열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방심하는 틈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얘기이다.

부리야트족은 수천년 내려온 자신들의 고유한 정신체계와 문화적 상징 코드들을 잘 보존해 오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부리야트족의 샤머니즘(shamanism)이다. 시베리아 최고의 성지인 바이칼호의 올혼섬으로 향하다 보면, 길가에서 오색 천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을 수없이 만나게 된다. 샤머니즘의 상징인 이 말뚝들은 오리를 조각해 나무 꼭대기에 꽂아놓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과 상징적 의미와 형상이 거의 비슷하다. 이는 한국의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리야트족도 우리처럼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이 있다. 우리의 풍습과 비슷하다. 또한, 부리야트족의 샤만이 부르는 애잔한 노래 가락과 북소리는 우리 정서와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모여서 추는 춤은 우리의 강강술래와 흡사하다. 예전의 샤만(shaman)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생겼고, 신라 시대의 왕관과 모습이 매우 닮아 있다.

바로 얼마전 타계한 전통 샤만(shaman)은 정말로 도력(道力)이 뛰어났다고 한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술(醫術)이 매우 높았고, 한번 사람을 보면 무슨 병이 있는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단숨에 알아냈다고 한다. 부리야트족 마을의 제일 웃어른은 모두가 샤만(shaman,영적 지도자)이었다. 그런데, 스탈린(Stalin) 시대 때, 많은 브리야트족 샤만(shaman)들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한편, 애니미즘(animism)은 모든 물체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원시 문화이다. 애니미즘은 석기시대의 모든 지역의 공통된 문화였지만, 바이칼 호수 지역은 특별히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도 유교와 불교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기 훨씬 이전에는 애니미즘(animism)에 근거하여 정신세계를 이루고 세상을 살았다고 한다. 애니미즘의 증거물로는 시르카 동굴의 동굴벽화와 그 외의 수많은 바이칼 호수 주변 동굴의 동굴벽화가 있다. 이들 바이칼 호수의 동굴벽화에는 당시의 생활과 풍습을 알리는 원시문자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7.배달국(倍達國)의 출현과 웅족(熊族) 및 호족(虎族)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자식들의 수장(首長) 이름은 환웅(桓雄)이었다. 환웅(桓雄)은 널리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천산산맥의 동남쪽에 있는 삼위산(三危山, 중국 서부 돈황현敦煌顯)과 백두산(백두산)을 두루두루 살펴본 후, 동방 땅의 백두산(白頭山)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환인(桓仁)에게 알렸다. 환인(桓仁)은 아들 중의 장자(長子)인 환웅(桓雄)의 뜻을 끝내 허락하여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을 건설하게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시베리아와 연결된 발달된 문화를 지닌 환족(桓族)의 환웅(桓雄)이 보수적 문화 성격에 머무르고 있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동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모계 사회였는데, 환웅(桓雄)이 거느린 환웅(桓雄)족이 남하 하면서, 모계(母系)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환웅(桓雄)은 환국(桓國)의 환인(桓仁)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가지를 받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의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개창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이라 하였다. 「삼성기」상권을 보면, “환웅(桓雄)은 팔괘(八卦)를 그어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상(象)을 잡아 신(神)을 움직였다. 그는 웅(熊)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고, 혼인(婚姻)의 예법을 정하여 짐승가죽으로써 폐물을 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市場)을 열어 물물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경농과 목축은 신석기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경제 형태로서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환웅(桓雄)이 ‘혼인의 예법을 정했다' 라는 말은 가족단위 사회에로의 전환을 뜻하는 신석기 시대적인 표현인 것이다. 시장(市場)을 열고 교역이 이루어진 것도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실제의 내용을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록인 것이다.

태백일사의「신시본기편」을 보면, “풍백 석제라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 동굴 속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 와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일으켰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가 반지하식 움집이고, 동굴유적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연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일치하는 내용들이다.


『신시본기』에서는 환웅(桓雄)이 처음 내려왔을 때, 그 지역에 두 족속(族屬)이 있었다고 한다. 웅족(雄族)과 호족(虎族)인데, 새로 살기 시작한 어리석고 자부심 높은 웅족(熊族)과 옛부터 있었던 난폭하고 탐욕스러우며 약탈을 일삼는 호족(虎族)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종족들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았고, 통혼(通婚)조차 없었다고 한다. 환웅(桓雄)이 두 종족을 교화시켜 같이 살게 하였는데, 웅족(雄族)은 교화되어 동화되고, 호족(虎族)은 끝내 깨우치지 못하여 이들을 사해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환웅(桓雄)에게 쉽게 동화되어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데 성공한 웅족(熊族)과 동화되지 못하고 차츰 사라지는 호족(虎族)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래서, 한반도에는 호랑이 토템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웅족(熊族)과 결합하면서, 호족(虎族)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작은 돌을 깎아 수렵에 활용했던 세석기(細石器) 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후, 중국북부지역과 발해연안, 요동반도, 남만주 일대에서 농경과 목축을 하는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B.C.6,000년경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이들 신석기 문화는 주변지역의 중심 문화권으로 계속 발전해 가고 있었다. 두 문화는 지역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발해 북안, 만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수렵생활 위주의 호족(虎族)과 농경생활 위주의 웅족(熊族)이 그 대표적인 예(例)였다. 그리고, 호족(虎族)과 웅족(熊族) 모두 모계(母系) 사회였는데, 환웅(桓雄)이 거느린 환웅(桓雄)족이 남하 하면서, 모계(母系)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B.C8,000~4,000년까지 모계(母系)씨족사회의 신석기인들이 황해 내륙과 만주 및 발해 연안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었다. 이들은 반지하식 수혈(竪穴) 움막에 살았으며, 죽어서는 수혈식 토갱(土坑)에 묻혔다. 그들은 모계(母系)의 근원인 할머니를 수장(首將)으로 삼았었다. 흥륭와(興隆窪) 유적지에서 나오는 돌조각 여인상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여자들은 농사도 짓고 곡식을 저장하고 또 익혀 먹기 위해 질그릇을 만들었는데, 주로 지자문(之字文) 문양의 빗살무늬를 새겨 넣었고 이것이 지자문(之字文) “빗살무늬 토기”인 것이다.

지자문(之字文)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전에 시작되었고, 한반도와 산동반도 대문구(B.C5,000~3,000년), 압록강 접안, 요동 대련반도의 소주산, 심양의 신락(B.C5,500년), 길림시 서단산, 장춘시 좌가산, 그리고 서요하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紅山,B.C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부신시(阜新市) 사해 문화 유적지는 대릉하(大凌河)의 가지인 청하(淸河) 부근에 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되는 옥도끼는 매우 특이한 의미를 지닌다. 옥도끼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옥병(玉兵)으로 등장하였고,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에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B.C6,000년의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에서 옥병(玉兵)의 출현은 중원(中原,중국 황하)의 B.C3,000년 보다 빠른 것이다.

배달국(倍達國)은 B.C3,898~2,333년의 기간 동안, 18대의 환웅 계보를 갖고 있으며,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 진다. 첫째, 배달국(倍達國)의 신시(神市,1~13대 환웅)시대의 환웅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제1대 배달 환웅(居發桓,B.C3,898~3,804년 재위,일명 거발한 환웅), 제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B.C3,804년 즉위), 제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B.C3,718년 즉위), 제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B.C 3,619년 즉위), 제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3,512년 즉위), 제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B.C3,419년 즉위), 제7대 거련 환웅(居連, B.C3,321년 즉위), 제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B.C3,240년 즉위), 제9대 양운 환웅(養雲, B.C3,167년 즉위), 제10대 갈고 환웅(葛古, B.C3,071년 즉위), 제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B.C2,971년 즉위), 제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B.C2,879년 즉위), 제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B.C2,774년 즉위).

둘째, 배달국(倍達國)의 청구(靑丘,14대~18대 환웅)시대의 환웅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제14대 치우 천황(蚩尤, B.C2,707년 즉위, 일명 자오지慈烏支 환웅), 제15대 치애트 환웅(蚩額特, B.C2,599년 즉위), 제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B.C2,544년 즉위), 제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B.C2,453년 즉위), 제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B.C2,380~2,333년 재위).


8.배달국의 신시(神市)시대

 

- 배달환웅의 만주 요녕성 홍산문화

 

배달국(倍達國,B.C3,898~2,333년)은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제1대 배달(倍達) 환웅(桓雄)께서 B.C 3,898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건국이념을 가지고서 백두산 신시(神市)에 개국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蚩尤) 천황께서 B.C.2,707년에 재위에 오른 후, 청구(靑丘) 즉 지금의 만주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불리다가 서라벌(서불의 사투리)로 바뀌다가 오늘날의 서울이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청구(靑丘)라고 불렀는데,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원동중의『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桓國)의 말기에 환인(桓仁)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종을 주어, 환웅(桓雄)은 3000명을 이끌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니,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신불역대기(神市歷代記)』에는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倍達國)은 환웅(桓雄)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神市)이다. 뒤에 배달국(倍達國) 14세 치우(蚩尤)환웅이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다.” 라고 적혀 있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족은 처음에는 곡류와 어족(魚族) 자원이 풍부한 바이칼호 부근에서 살다가 기후와 환경이 점점 변하자, 동남쪽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보인다.『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배달국(倍達國)의 시대가 고고학상의 신석기문화의 단계인 것으로 그려져 있다. 발해 북부의 신석기 문화중 가장 주목할 만한 문화가 B.C 3,500~2,200년경의 유물로 보이는 중국 만주 요녕성 지역의 홍산(紅山)문화이다.

홍산문화는 우리민족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문화 유적지이다. 북만주와 요녕성 일대는 중국의 정사(正史)에서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하는 조선족의 활동 영역으로 고대(古代)에는 한국 민족의 활동 영역이었다. 이들 배달국의 홍산(紅山) 유적지에서는 지금까지 황하 유역에서 나타나지 않던 대형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빗살무늬 토기 등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홍산(紅山)문화』라고 한다.

배달국의 신시(神市) 문화 유적지는 북만주의 요녕성 적봉시 홍산(紅山) 유적지와 하가점(夏家店) 유적지가 있다. 내몽고 적봉시의 동북쪽에 홍산(紅山,665m)이 있는데, 이곳에 홍산(紅山)문화 유적지가 있다. 하가점(夏家店) 유적지는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홍산(紅山)문화의 특징은 석관묘의 발생과 채도문(彩陶文) 토기의 중흥을 볼수 있다. 복골(卜骨)의 발현은 왕도(王都)로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부장품에 도기(陶器)를 이용한 조형물들이 있다. 석관묘(石棺墓)의 발생은 강력한 왕권 국가 형태가 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나온 복골(卜骨)은 중국 은(殷)나라의 복골(卜骨)이 바로 홍산문화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을 시대적 자료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즉 은(殷)나라의 갑골(胛骨)문화는 바로 배달국(倍達國) 홍산(紅山) 문화의 후손인 것이다.

홍산(紅山)문화는 적봉시(赤峰市)의 노하하(老哈河)와 조양시(朝陽市)의 대릉하를 따라서 형성되었으며, 노하하의 지주산(蜘蛛山), 오한기(傲漢旗)의 소하연(小河沿), 대릉하의 우하량(牛河梁), 능원(凌源), 부신(阜新), 내몽고의 부하(富河)가 홍산(紅山)문화의 중심지이다. 서쪽으로는 북경시 서쪽의 장가구(張家口), 동쪽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요동반도까지 분포하고 있다.

적봉 동남쪽의 노합하 상류에는 흑수(黑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적봉(赤峯), 홍산(紅山)은 둘 다 우리말의 밝산이란 말이 변한 것으로서 그 의미는 백산(白山)을 가리킨다. 홍산문화는 B.C3,500~2,200년경으로 여겨지고 있고, 배달국(倍達國) 환웅(桓雄)시대가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이므로 서로 일치한다. 한편, 하가점(夏家店) 유적지에서는 구리로 만든 송곳(銅錐), 동촉, 연주상 동식(連珠狀 銅飾), 쌍미형 동식 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배달국(倍達國) 신시(神市) 시대의 최초 구리 유물에 해당하며, 청동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들이다.

 

9.배달국의 청구(靑邱)시대

- 치우천황의 산동반도 용산문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치우 천황(蚩尤, B.C2,707년 즉위)은 중국의 유망(楡罔)과 유망의 뒤를 이은 황제 헌원(軒轅)과 탁록(꟔鹿)에서 결전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며, 도읍을 청구(靑丘)로 옮기고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청구(靑丘)는 현재 산동반도의 태산(泰山)아래를 가리킨다.『대변경(大辯經)』을 보면, 치우(蚩尤) 천황은 천하를 평정하고 회대(淮岱)를 점령했는데, 그의 능(陵)이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고 하였다.『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서도, 동평국(東平國) 수장현(壽張縣)에 치우사(蚩尤祠)라는 사당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신시본기』의 기록에는, 치우(蚩尤) 환웅은 갈로산(葛盧山)의 쇠(金)를 캐고, 옹호산(雍狐山)에서 야금(冶金)을 하여, 도개. 모극. 대궁. 호시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蚩尤) 환웅이 공상(空桑)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경기장과 거리가 온통 붉은 물결로 장식되는 도깨비 형상의 “붉은 악마”가 고대사(古代史)에 등장하는 치우(蚩尤) 천황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치우(蚩尤) 천황은 중국 민족의 시조(始祖)인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제압하고 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한 배달국의 14대 환웅(桓雄)이라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치우(蚩尤)천황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용장이었으며, 신의(信義)와 인의(仁義)로써 백성을 다스렸고, 신력(神力)과 정의(正義)를 만고(萬古)에 떨쳤던 배달국(倍達國)의 왕이었다. 치우(蚩尤)천황은 탁록(꟔鹿)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의 투구를 하고,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한편, 치우(蚩尤)천황이 워낙 용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는 전쟁의 신(神), 즉 군신(軍神)으로 추앙하였고, 큰 전쟁을 앞두고 반드시 치우(蚩尤)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특히 치우(蚩尤)왕릉에서 제사를 지내면 능(陵) 정상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와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나라 때에는 북경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天亶)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삼신(三神)과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蚩尤) 천황을 모셨었다. 여기서 풍백, 우사, 운사 등의 삼신(三神)은 단군(檀君)의 부하인 삼신(三神)과도 동일한 것이다.

치우(蚩尤) 천황의 청구(靑丘) 배달국(倍達國)은 황하 남쪽 하남성으로부터 산동반도 일대와 양자강 북쪽의 회대(淮代)까지 지배하였다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시대의 중심은 하남성 개봉시 진류(陳留)에서 시작하여 산동성 제하(濟河), 치하(淄河) 유역의 임제(臨濟), 임치(臨淄), 임구(臨丘), 안구(安丘), 청구(靑丘) 등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치우(蚩尤) 천황은 B.C 2,700년에 산동반도의 청구(靑丘)에 도읍하여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시대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켰다.

 

용산(龍山)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곳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의 동쪽에 있는 용산(龍山)지역이다. 용산(龍山)문화의 옥기(玉器)는 옥면에 짐승이나 매. 독수리의 그림을 새기고, 삼태극(三太極)의 옥환(玉環)이 나타난다. 반월형 석도(石刀)가 출현했으며, 돌삽, 돌낫 등의 출현으로 농업이 혁신되었다. 가축 사육에서 개나 돼지 외에, 소와 양, 말이 사육되었다. 질그릇에서 채도는 줄고 회색, 흑색 토기가 주로 되며 손잡이 달린 세발 솥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용산(龍山)문화는 B.C 2,700~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 지방으로 널리 통용되었다.

치우(蚩尤) 천황 시대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동기(靑銅器) 문화의 도입이다. 치우(蚩尤)는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하였으니, 이미 청동기 시대에 돌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고고학적으로 B.C2,100년에 세워진 하(夏)나라 초기에 청동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시대의 용산(龍山)문화 유적지에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와 공작석(孔雀石, 구리와 탄소 결합 보석) 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 등의 다양한 청동(靑銅) 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난 후부터는 이제 용산(龍山)문화가 하(夏)나라 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시대의 용산(龍山)문화가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화로 인정받게 되었다. 용산(龍山) 문화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유물들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치우(蚩尤) 천황의 용산(龍山)문화는 중국에 청동기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전파된 청동기의 흔적은 산동성의 교현, 유하현, 장도현, 일조현 등과 하남성의 정주, 임여현, 등봉현 등이며, 산서성의 양분현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현재 동북방에 남아 있는 청동(靑銅) 도검(刀劍)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금주시(錦州市) 수수영자(秀手營子)의 토갱묘에서 발굴된 청동과(靑銅戈)이다. 이는 B.C 18세기경 상(商)나라의 도검(刀劍)보다 앞선 것인데, 상(商)나라에서는 도검(刀劍)의 검날만 발굴되었고, 수수영자(秀手營子)의 청동과(靑銅戈)는 도검(刀劍)의 자루까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10.사대주의에 의해 농락된 단군신화(檀君神話)

 

우리의 역사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고 농락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얽힌 내용이다. 다음은『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신화(檀君神話)와 그것을 정밀 분석해 놓은 것이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天下)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백두산)을 내려다 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도장) 3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때의 환웅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熊) 한 마리와 범(虎)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 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熊)은 몸을 삼간 지 21일(삼칠일)만에 여자(熊女)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범(虎)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桓雄)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라 하였다. 단군(檀君)은 요(堯)임금(B.C2,357~2,258년 재위)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송화강 아사달(하얼빈哈爾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 아침 해가 비치는 곳)로 옮겼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 아사달로 옮겼다. 후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980세였다.』

단군신화는 다음의 네가지 측면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졸렬한 필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중국의 눈치를 보며 억지(抑止)춘향(春香) 격으로 중국에게 절하고 있는 모습이 후세(後世)에 이르러 부끄럽게 드러난다.

첫 번째, 환인(桓仁, B.C7,199년 제위)과 환웅(桓雄, B.C3,898년 제위) 및 단군(檀君, B.C2,333년 제위)의 역사 시간대(時間帶)를 싹둑 잘라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의 기록은 고려(高麗)의 승려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三國遺事)와 고려 고종 때의 이승휴(李承休, 1224~1301)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이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단군신화의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의 기록은 각각 “고기운(古記云)”, “본기왈(本紀曰)”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고기(古記)”가 전하는 내용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했던 “고기(古記)”가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므로 어떠한 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쓰여졌던 고려시대에는 공식적으로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국조(國祖)로서 인정받지 못했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에 입각해서 기자(箕子)조선(朝鮮)의 기자를 국조(國祖)로 인정했던 때이다. 단군 왕검이 정식 국조(國祖)로 인정된 때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였다. 이것은 신라(新羅)가 중국 당(唐)나라의 군대를 끌여들여 축소(縮小)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한 댓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이 고려(高麗)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당대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이라는 것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수입하고 답습하며 조공을 바치는 입장에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 보다 높게 서술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을 중국의 입장에서 기록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신화 기록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 역사의 잣대에 맞추다 보니까, 환인(桓仁),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역사 시간대를 크게 압축해서 중국의 요임금 시대의 인물로 갖다 맞추어 놓았다.

단군 신화는 배달민족(倍達民族)의 삼성조(三聖祖) 즉 “환인(桓仁, B.C7,199년 제위), 환웅(桓雄, B.C3,898년 제위), 단군(檀君, B.C2,333년 제위)”의 역사 시간대(時間帶)를 싹둑 잘라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아무리 설화적 구성을 통해 표현해 냈다 하더라도, 환인(桓仁)의 아들이 3,301년 후의 환웅(桓雄)이 되고, 환웅(桓雄)의 아들이 1,565년 후의 단군(檀君)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환국(桓國, B.C7,199~3,898),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장구한 고대의 역사가 단군신화에서는 몇 마디 구절에 의해 짧달막하게 축소되고 왜곡되어진 것이다.


두 번째, 단군신화의 끝부분에 나오는『단군(檀君)은 요(堯)임금(B.C2,357~2,258년 재위)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의 부분을 보면, 역사의 시간이 잘못 계산되어져 있다. 단군(檀君)은 B.C2,333년에 제위에 올랐고, 중국의 요(堯)임금은 B.C 2,357년에 제위에 올랐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요(堯)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24년 되던 해에 단군(檀君) 왕검은 고조선(古朝鮮)의 제위에 오른 것이다.

세 번째, 단군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B.C 1,134년)에 기자(箕子)를 조선(고조선)에 책봉했다.』라는 부분은 시간대도 맞지 않을뿐더러, 사실을 거꾸로 뒤바꾸어 왜곡해 놓았다. 주(周)의 무왕(武王)은 중국 주(周)나라의 2대 임금이며, B.C 1,134년에서 B.C 1,116년까지 통치했던 인물이다. 기자조선(B.C323~194)은 서부 변방의 번한(番韓) 지역에 세워진 고조선의 속국(屬國)이며, B.C 323년에 세워진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주(周)의 무왕(武王, B.C1,134년~B.C1,116년 재위)과 기자조선(B.C323~194)의 기자(箕子)는 서로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제후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책봉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 왕검이 서부변방의 번한(番韓) 지역에 책봉한 것이다. “기자(箕子) 동래설”은 B.C300~200년경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다. 실제로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 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하는데, 동북아시아의 청동기 문화는 비파형(琵琶形) 동검문화로 특징되고,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기후(箕후)”라는 사람은 B.C323년 기자조선(B.C323~194)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인데, 그는 B.C 342년부터 이미 서부 변방에 있는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번한(番韓)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된 후, B.C323년, 수유족의 무력을 이용하여 번한(番韓)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기후(箕후)는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으로 자칭하면서 동시에 고조선에게는 예를 갖추어 번한(番韓) 지역의 제후가 되었다.

이중적인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족보 위의 40여대의 선조까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했다. 그리고 기후(箕후)가 추존하는 제일 위의 40대 선조가 “서우여(徐于餘)”였다. 그런데, “기자(箕子) 동래설”이 역사기록에 나오게 된 이유는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고려 때 가덕왕의 후손들이 기자조선 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世系)를 빛내기 위하여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명칭을 “서우여(徐于餘)”에서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箕子)”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기자(箕子)라는 사람은 원래 은(殷)나라의 신하로 있었는데,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B.C 1,122년)시키자,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고조선의 서부변방을 다스렸던 인물이다. 기자조선은 나중에 위만조선(衛滿朝鮮)에게 멸망되었다.

한편,『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 조선과의 연합의 고리를 끊은 나라이다.

그런데, 중국의 일부 사서(史書)들은 단군조선(B.C2,333~238)이 기자조선(B.C323~194)과 위만조선(B.C194~108)으로 계승되었다고 거짓 기록하고 있다.『단군조선(檀君朝鮮, B.C2,333~238)』의 역사 시간대를 좁혀 놓는 범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 B.C323~194)은 전국시대인 B.C323년에 고조선의 번한(番韓)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가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하여 고조선의 제후(諸侯)가 된 나라이다. 고조선이 멸망(B.C238)한 이후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위만(衛滿)에게 멸망(B.C.194)당하게 되며, 그 뒤 한수 남쪽에 후삼한(後三韓),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사기』,『관자』,『산해경』등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존재시기와 영역을 완전히 왜곡해 놓았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부터라고 했다.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삼한(三韓)을 없애버리고,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의 후삼한(後三韓)을 내세웠다. 그럼으로써, 우리 역사의 시간대를 낮추었으며, 우리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 영역 안으로 축소시켰던 것이다.

네 번째,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는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웅족(雄族)과 호족(虎族)과의 민족 연합에 관한 엄연한 사실이 외래 종교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찌들어 있던 당대의 역사 기록자에 의해 “곰과 호랑이의 인간으로 환생하기” 라는 유치하고 우매한 신화로 전락(轉落)되고 말았다.

더욱 엉뚱한 내용은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의 초대 배달 환웅이 웅족(熊族)의 웅녀와 결혼하여, 약 1,500년 후의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초대 단군 왕검을 낳았다는 차마 웃지 못할 내용이다. 어떻게 B.C3,898년에 제위에 오른 배달국 환웅(桓雄)이 약 1,500년 후의 고조선 단군(檀君, B.C2,333년 제위)을 아들로 둘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요절복통(腰折腹痛)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사대주의(事大主義) 때문에 생긴 일이다.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해야만 했던 약소국(弱小國)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를 왜곡시켜 놓은 것이다.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쉽게 왜곡된다. 그러나, 왜곡되는 역사를 바로 바로잡는 일은 마치 홍수가 나서 강물이 넘쳐 흐를 때 둑(embankment)을 쌓고 제방(dike)을 쌓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이다.

 

11.광역(廣域)국가인 고조선과 47대 단군 계보(系譜)

1)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수도에 따른 변천사

가) 첫째, 송화강 아사달 시대 : “송화강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哈爾濱) 유역을 가리킨다. 송화강 유역은 지금의 평양이 아닌 옛날의 평양 지역이다. 초대 단군 왕검 때부터 21대 소태(蘇台) 단군 때까지의 1048년간 (B.C2,333~B.C1,286)을 말한다.

나) 둘째, 백악산 아사달 시대 : “백악산 아사달”은 지금의 농안(農安), 장춘(長春) 지방을 가리킨다. 22대 색불루 단군 때부터 43대 물리 단군 때까지의 860년간 (B.C1,285~B.C426)을 말한다.

다) 셋째, 장당경 아사달 시대 : “장당경 아사달”은 지금의 장춘(長春)지방 근처의 개원(開原)시를 가리킨다. 44대 구물 단군 시대부터 47세 고열가 단군 까지의 188년간 (B.C425~B.C238)을 말한다. (참고: 단군세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2) 고조선(古朝鮮)의 광역 국가 체계 구축과 삼한(三韓) 관경제(官境制)

가) 진한(辰韓) : 송화강 즉 지금의 하얼빈(哈爾濱)에 도읍하여, 초대 단군 왕검께서 친히 다스렸다.

나) 마한(馬韓) : 지금의 평양에 도읍하여, 부단군(副檀君) 웅백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다) 번한(番韓) :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에 도읍하여, 부단군(副檀君) 치두남(蚩頭男,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초대 단군 왕검 때에 번한(番韓)의 부단군(副檀君) 치두남에게 순(舜)임금을 감독케 하였고, 순(舜)임금에게는 다시 황하 양자강 유역의 회수와 태산 지역의 분조(分朝, 고조선의 분국)를 감독케 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초대 단군 왕검 때부터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를 실시하였다고 한다.『환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초대 단군왕검께서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에 태어나시고, 14세(B.C 2,357년)에 비왕(裨王=부왕)으로 임명받아 24년간 부국인 대읍국(大邑國)을 섭정하셨으며, 38세(B.C 2,333년)에 거불단 환웅(桓雄)이 전사(戰死)하자, 제위에 오르시고, 87세(B.C 2,284년)에 대홍수가 천하를 범람시키자 풍백(風伯)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으며, 88세(B.C 2,283년)에는 운사에게 명하여 강남의 민정 8,600명을 동원하여 강화도에 성(城)을 쌓고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셨으며, 91세(B.C 2,280년)에는 친히 마니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리셨다. 104세(B.C 2,267년)에는 태자 부루(扶婁)를 중국 철강성의 회계산에 보내 순(舜,우虞나라) 임금의 신하인 우(禹)에게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을 전하여 홍수를 다시리도록 하셨다. 130세(B.C 2,241) 되시던 경자년 3월 15일에 돌아가셨다. 낙빈 왕비와의 사이에 부루, 부소, 부의, 부여의 4子를 두셨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3) 고조선은 고대의 한민족사에서 최대로 번성한 국가였다.

『사기』,『관자』,『산해경』 등의 중국 고대 사서에서는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머리와 몸체는 완전히 거세(去勢)해 버리고 꼬리 되는 말기의 역사 즉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 부터가 한국역사의 시작이다.” 라고 말한다.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왜곡 날조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발굴과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의 영역인 만주지역의 청동기 문화 개시연대가 서기전 2400년경으로 밝혀져, 고조선(古朝鮮)은 초기부터 이미 국가사회에 진입해 있었음이 실증적으로 입증되었고, 이제는 상식화되어 버린 역사의 진실이다.

고조선(古朝鮮)은 초기 때부터 이미 청동기 시대에 진입해 있었고, 법률제도(팔조법)가 있었으며, 문자(원시한글인 가림토 문자, 고대 신지문, 도서圖畵문자와 문자토기)를 사용했다. 또한 화폐제도(명화전, 일화전, 팔조법 중 50만 전 배상 내용), 조세제도(1/20세), 토지제도(均田制), 역(易)철학과 음양오행 상수(象數)철학, 책력법(曆法) 등 고도의 선진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킨 고대 문명국가였다. 고조선은 신교(神敎) 삼신(三神)사상에 입각하여 전국의 영토를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弁韓)의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였고, 모두 47대의 단군이 2096년 동안(B.C 2,333~238) 다스린 고대의 한민족사에서 최대로 번성한 국가였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이 지은 독단(獨斷)의 상권을 보면 “천자(天子)는 동이족(東夷族)을 부르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는 까닭에 천자(天子)라고 부른다.“라고 적혀있다. 중국사전사화 (中國史前史話) 246쪽에 보면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족이 창시한 것이다.” 라고 하여, 동이(東夷) 조선족이 책력법을 창시했음을 말하고 있다.


『단군세기』,『규원사화』를 보면, 고조선 시대는 동북아시아를 광활하게 다스렸고, 광역통치에 의해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弁韓)을 다스린 제국이었으며, 삼신(三神)사상의 신교(神敎)문화를 바탕으로 위풍당당하게 통치하던 한민족의 전성기였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의 요(堯,당唐나라), 순(舜,우虞나라),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등에서 사절을 보내고, 정기적으로 조공(朝貢)을 바쳐온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경(書經)』의「번한세가」상권을 보면, “순(舜)임금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산천에 제사지내고, 동방의 임금님을 뵈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서전(書傳)』의「순전(舜典)」을 보면, “요(堯)임금으로부터 섭정을 물려받은 그 해(B.C 2,285년) 2월에 순(舜)임금은 동방(東方)으로 순행하며 신교(神敎)문화의 풍속에 따라 차례로 천신(天神)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동방의 군장(君長) 즉 단군(檀君) 성조를 찾아 뵈었다.” 라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의「오제본기(五帝本紀)」를 보면, “순(舜)임금이 고조선(古朝鮮)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아, 요(堯)임금으로부터 통치권의 법통을 계승한 첫 해(B.C 2,285년) 2월에 동방의 군장(君長)께 인사드리러 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4) 고조선(古朝鮮,B.C2,333~238)의 47대 단군 성조 계보(系譜)

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蘇台)단군

제1대 단군 임검 (王儉, B.C2,333년 즉위), 제2대 부루 단군 (扶婁, B.C2,240년 즉위), 제3대 가륵 단군 (嘉勒, B.C2,182년 즉위), 제4대 오사구 단군 (烏斯丘, B.C2,137년 즉위), 제5대 구을 단군 (丘乙, B.C2,099년 즉위), 제6대 달문 단군 (達門, B.C2,083년 즉위), 제7대 한율 단군 (翰栗, B.C2,047년 즉위), 제8대 우서한 단군 (于西翰, B.C1,993년 즉위), 제9대 아술 단군 (阿述, B.C1,985년 즉위), 제10대 노을 단군 (魯乙, B.C1,950년 즉위), 제11대 도해 단군 (道奚, B.C1,891년 즉위), 제12대 아한 단군 (阿漢, B.C1,834년 즉위), 제13대 흘달 단군 (屹達, B.C1,782년 즉위), 제14대 고불 단군 (古弗, B.C1,721년 즉위), 제15대 대음 단군 (代音, B.C1,661년 즉위), 제16대 위나 단군 (尉那, B.C1,610년 즉위), 제17대 여을 단군 (余乙, B.C1,552년 즉위), 제18대 동엄 단군 (冬奄, B.C1,484년 즉위), 제19대 구모소 단군 (緱牟蘇, B.C1,435년 즉위), 제20대 고홀 단군 (固忽, B.C1,380년 즉위), 제21대 소태 단군 (蘇台, B.C1,337년 즉위).

나) 백악산 아사달(농안,장춘) 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단군

제22대 색불루 단군 (索弗婁, B.C1,285년 즉위), 제23대 아홀 단군 (阿忽, B.C1,237년 즉위), 제24대 연나 단군 (延那, B.C1,161년 즉위), 제25대 솔나 단군 (率那, B.C1,150년 즉위), 제26대 추로 단군 (鄒魯, B.C1,062년 즉위), 제27대 두밀 단군 (豆密, B.C997년 즉위), 제28대 해모 단군 (奚牟, B.C971년 즉위), 제29대 마휴 단군 (摩休, B.C943년 즉위), 제30대 내휴 단군 (奈休, B.C909년 즉위), 제31대 등올 단군 (登屼, B.C874년 즉위), 제32대 추밀 단군 (鄒密, B.C849년 즉위), 제33대 감물 단군 (甘物, B.C819년 즉위), 제34대 오루문 단군 (奧婁門, B.C795년 즉위), 제35대 사벌 단군 (沙伐, B.C772년 즉위), 제36대 매륵 단군 (買勒, B.C704년 즉위), 제37대 마물 단군 (麻勿, B.C646년 즉위), 제38대 다물 단군 (多勿, B.C590년 즉위), 제39대 두홀 단군 (豆忽, B.C545년 즉위), 제40대 달음 단군 (達音, B.C509년 즉위), 제41대 음차 단군 (音次, B.C491년 즉위), 제42대 을우지 단군 (乙于支, B.C471년 즉위), 제43대 물리 단군 (勿理, B.C461년 즉위).

다) 장당경 아사달(개원)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단군

44대 구물 단군 (丘勿, B.C425년 즉위): 고조선을 대부여(大夫餘),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개명하였다. 45대 여루 단군 (余婁, B.C396년 즉위), 46대 보을 단군 (普乙, B.C341년 즉위), 47대 고열가 단군 (高列加, B.C295년 즉위): 계해 58년(B.C238) 단군조선을 폐관하고 입산 수도하였다고 한다. 이후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렸다 한다.


단군과 단군조선
앞 목차1-8에 계속됩니다

09.'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단군조선 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
단군조선의 후계세력인 동부여ㆍ고구려ㆍ한 등에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추는 춤이 있었다. 이러한 춤들은 단군조선의 춤을 계승한 것들이다.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국서 정통농악과 강강술래 등 민속놀이를 비롯 세시풍속들이 펼쳐져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는데 오늘날의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음력설'은 우리민족이 역사이래 줄곧 지켰던 순수한 '우리 설날'이다.

단군조선은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이자, 우리민족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그런데 왜곡ㆍ말살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한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며, 한민족 '사회와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 그간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한국사' 전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가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한민족 '역사의 뿌리'와 '문화의 원형'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있으므로 그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한민족의 정체(正體)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단군조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민족 본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군조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윤내현 교수한테 문의하고, '한국사 왜곡과 말살실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일본인들의 역사왜곡과 그에 동조한 국내학자들을 비판한 논문」을 쓰고, 정년퇴직한 이후로도 집요하게 '한ㆍ일관계사'를 추적해온 최재석(崔在錫; 1926∼)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희건 조선일보80년사사(社史)편찬실장에게 문의하면 될 것이다.

윤내현 교수는 그 누구보다 민족에 대한 사명감으로 올바른 우리 '역사' 연구를 하는 분이다.모든 역사는 '사료'가 바탕이 돼야 한다. 윤내현 교수는 본래 중국 고대사가 전공이다. 따라서 그는 중국 사료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한민족 관련 기록이 있는 ≪후한서≫, ≪삼국지≫, ≪진서≫, ≪송서≫, ≪남제서≫ 등 방대한 중국 사료 및 고고학 자료, 우리 고대사 자료 등을 비교, 분석한 인물이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희건 조선일보80년사사편찬실장도「한국사 바로잡기」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열성을 보이는 인물들이다.

단군조선이 언급된 중국문헌으로는 어떤 사서가 있을까.
≪사기(史記)≫, ≪한서(漢書)≫, ≪관자(管子)≫ 등 중국문헌에는 단군조선(고조선)이 많이 언급됐는데 특히 단군조선과의 전쟁, 국경문제, 교역을 한 내용 등이 많이 나와 있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월간조선〉1998년도 1월호 뒷부분에 보면 40페이지에 걸쳐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 범위가 일본,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의 상당부분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그리고 황해와 동해,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선조들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10.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서 서기전 1122년까지이고, 기자(箕子)조선은 서기전 1122년에서 서기전 194년까지, 위만(衛滿)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한무제에 의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조선은 2300여년간 지속된 강대한 광역국가였고,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로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인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서기전 12세기경(서기전 1122년경)에 기자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된 것이 기자조선이다.

'위만조선'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아닌, 서한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 위만조선이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즉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된,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단군조선의 왕이 되고, 서기전 108년에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현행 국사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낙랑ㆍ임둔ㆍ진번ㆍ현도의 4개군(郡))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河) 동부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역사의 주류일 수 가 없고, 단군조선의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의 주류는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으로부터 단군조선을 계승한 동부여ㆍ고구려ㆍ읍루(이전의 숙신)ㆍ동옥저ㆍ최씨낙랑국ㆍ동예ㆍ대방국ㆍ한(韓, 삼한) 등의 열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이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남방은 가야ㆍ백제ㆍ신라로 분열되어 사국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사를 단군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으로 설정한 체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위만은 중국에서 망명한 자이고, 한사군은 중국의 행정구역일 뿐이다.

요동지역에서 고구려가 서기전 37년에 건국됐는데 한사군이 종말을 고한 것은 서기 313년이다. 기존 연구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단군조선 멸망 후 5백여 년간 중국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같은 요동지역에 고구려와 한사군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모순이 생긴다.한나라 무제가 멸망시켰다는 위만조선은 평양지역이 아니라 북경 근처 난하유역이었다.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요동지역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다.한민족은 위만조선이나 한사군과는 별도로 요동지역과 한반도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등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재통합과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해온 것이다.

11.우리 한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다.지금까지 확인된「청동기문화」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이다.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ㆍ맥족(濊ㆍ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리고 예ㆍ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또한 우리문화의 기원을「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전파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교육되어지고 있다.

임효재(任孝宰; 1941∼)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전 한국고고학회 회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하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게 되면
단군조선 건국: 서기전(BC) 2333년
청동기 시대: 서기전 1000년~1300년(?)
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제작ㆍ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 주(崔 炷: 65ㆍ책임연구원)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다.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 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급'원로과학자인 최 주 박사는 특히 비파형동검이 남한의 원료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을 뒤엎었다. 그의 지적으로 우리 교과서의 단군조선 유물인 청동기 등 고대금속유물의 기원과 성분 특성 등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이런식이라면 단군조선에 대한 아직도 많은 유물과 사료들이 국내ㆍ외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2.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강대했던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였던 중국 베이징(北京) 부근의 난하유역까지를 수복하고 중국을 향해 위용을 과시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있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베이징과 톈진(天津)지역으로부터 남쪽의 저장성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제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었는데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해받은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 같다.중국의 각종 문헌에는 한국 관련 기록들이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고려하(高麗河), 고려포(高麗鋪), 고려영(高麗營) 등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베이징 인근에만 30여개에 이르고, 중국 남부 광서성에는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이 보이기도 하고, 무인도이긴 하지만 중국 동남해안에는 신라도(新羅島)라는 지명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쓰이기도 한다.

1996년 9월 15일 KBS 1TV「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다.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한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이다.

제작진은 베이징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냈다.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ㆍ백제 옛터)란 것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또한 지금의 중국 베이징과 톈진, 스자좡(石家莊)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베이징과 톈진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저장성(浙江省)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줬다.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에서 흑치상지가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는 서기 246년(고이왕 13년)에 진충(眞忠) 장군을 파견하여 지금의 베이징지역을 공략하고「백제군」을 설치한 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하북성, 산둥성(山東省), 장쑤성(江蘇省), 저장성 지역의 동부해안을 차지하였다. 백제의 중국 동부해안 지배는 시기에 따라 그 영역에 차이는 있었지만 서기 588년까지 계속되었다.

 

백제의 남방경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나갔다.즉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규슈(北九州, 기타큐슈)를 잇는 상설 항로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타이완)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群島)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인데 이곳이 백제와 연관이 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분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씨(氏)를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3.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인 '발해'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698∼926)의 개국 시조 대조영(大祚榮; ?∼719)은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거란ㆍ돌궐족의 대두와 당제국의 혼란ㆍ약화라는 국제정세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강대국을 세웠다. 서기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옛날 부여가 있던) 지역인 백두산 동북 송화강 유역인, 만주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임(自任)하고,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남쪽의 통일신라와「남ㆍ북국관계」로 대립ㆍ교섭하면서 동북아 일류의 문화국으로 영화를 누렸던 2백 30여년간 존속한 선진 발해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기도 했고, 1천 300km 떨어진 일본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발해는 육상전투에서 능숙했던 대륙국이면서도 해양대국이었다. 일본과는 47회의 교류를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발해인의 일본진출 루트는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동해는 발해의 내해(內海)였다. 평양∼원산 이북 지역부터 중국 동북부의 대부분과 러시아 연해주를 지배한 발해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이다.

발해 북쪽의 강역은 고구려 북쪽의 강역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발해는 만주 동부에 중심을 두고, 북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호령하던 동북아의 대강국이었다.

 

발해의 152년간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동경성(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둘레가 16km에 달하고, 궁전터만 37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발해는 고구려인 대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동북아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자리매김 하려면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발해를 건국하는데 있어서 말갈족도 참여하였는데 말갈족은 단군조선의 속국이었다.

고구려 후손들은 비록 나ㆍ당연합군에 의해 왕조의 역사를 마감했지만 그 혼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서 고구려 옛땅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이정기 장군은 중국 산둥반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다.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이정기 장군은 고구려 멸망 100년 후 고구려인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산둥반도를 비롯해 랴오닝성, 허베이성, 안후이성 등 무려 15개 주에 걸친 영토를 58년간 통치했다.이렇듯 우리는 단군조선∼현재까지 4332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그런데 각 성씨(姓氏) 족보에 보면 성씨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한 성씨들이 있다. 이것은 사대주의 때문이다. 중국이 강해지니까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는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여긴 영향 때문이다.

14.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가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를 우선 정립하지 못한 상황아래서 '한ㆍ일 역사 공동연구'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일본에 끌려다닐 소지가 있다고 본다. 특히 한ㆍ중ㆍ일 3국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우리만 고립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정립한 후에는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우리가 적극 나설 필요성도 있다.우리 '문화'는 흔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중국과는 크게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우리문화이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나, 특히 전세계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광복이 된지 54년이 지나도록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이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문화'를 비하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사료'부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취사선택'하여 남겨 놓은 사료만을 들먹이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가져간 수많은 사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모으려는 노력도 미흡했고, 외국 각국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 서술돼 있거나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도 이런 왜곡실태가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실정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민족사 관련 수탈자료를 반환해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그런데 과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았을까.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배달≫40호(1998년 겨울호) p.70∼p.74에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 왕실문고(왕실도서관)에서 도서분류 및 내용분석 업무를 담당했던 박창화(朴昌和; 1889∼1962) 씨와 관련된 글이 실려있다.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고향인 역사가 박창화 씨는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는 그 뒤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일본 궁내청 소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그는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다고 그 뒤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崔基哲; 1910∼)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이를 '증언'했다고 한다.

본란에서는 (사)한배달 최봉열 원로회 회장, 한애삼 부회장 등이 1998년 10월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를 탐방하고 녹취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 최초 제보자: 이름/박창화(朴昌和ㆍ당시 56세)
▶ 2차 제보자: 이름/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
주소/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92-368 12/8

 

박창화와의 만남
본건의 제보자인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처음 박창화를 만난다. 박창화는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다.당시의 박창화는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고,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에 머물게 되었으며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원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을 하다 중국 안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것. 거기서 독립항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신념을 밝히자 그 관헌이 박창화의 뜻을 좋게 여겨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박 씨는 왕실문고 재직 당시(8ㆍ15 광복 전) 왕실문고 내 소장된 사료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사서임을 직접 확인했고, 한국에서 수탈해간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수탈된 사료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료의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사료였다. 소화(昭和) 일왕의 이름 '소화'를 내각총리의 의뢰로 박창화가 지어주기도 했다는 것.당시 그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청주사범학교 국사교사로 새출발
광복 직후 학교로 자주 찾아와 말동무를 하던 박창화는 최기철 박사에게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요청하였고, 최기철 박사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인정, 청주사범학교의 국사교사로 채용하게 되었다.박창화는 마땅한 말동무가 없어 자주 최기철 박사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왕실문고에서 보았던 책들과 일하던 내용을 말하곤 하였으나, 역사에 전문지식이 없던 최기철 박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던 박창화는 한 학기 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단군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창화로부터 국사를 배운 제자로는 김준호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 생물학)와 임양재 교수(전 중앙대 교수)가 있다.

광복 직전 미국의 B-29의 폭격이 한창이자 일본정부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하리(尾張) 공작(또는 백작)집 지하실로 사서들을 옮겼는데 이때 박창화가 직접 왕실문고를 옮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후 귀국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오하리의 집 지하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왕실도서관으로 다시 복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기철 박사가 청주사범학교 교장(1년 재직)을 그만두고 충주사범으로 잠깐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옮긴 후 교수들 사이에서 박창화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다. 당시 30세 정도의 일본사를 전공하던 김용덕 부교수(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찾아와 "화랑도, 화랑정신을 알린 분이 박창화 씨라는데 그 박창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박창화를 수소문한 결과 친지가 있는 괴산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기철 박사가 서울대에 재직할 당시 이병도 박사(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게도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된, 우리나라에서 수탈해 간 고대사 관련 사료의 존재와 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알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또 1957년경 문교부 편수국장을 방문하여 박창화의 왕실문고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박창화 씨는 1950년까지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근무했다.청주에 사는 박인규 전 초등학교 교장이 박창화 씨의 손자이다.

1999년 7월 10일(토) 저녁 8시 KBS-1TV [역사스페셜]에서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역사가 박창화 관련 기사가 방영됐다.

다음은 박창화 관련 기사 부분이다.
역사가 박창화는 일제강점기에 12년간 미공개된 우리나라 도서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왕실도서관의 사서를 지냈다.박창화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그는 1889년 이곳 박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박창화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박창화는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 길팔봉의 회고에 따르면 그후 박씨는 충북 영동소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 그는 배재고보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현 서울대 명예교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선생은 (박창화 씨로부터) 주목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중국을 갔는데 국경 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데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답니다. 독립항쟁을 한다면 야단이 나는데 정중히 대하더래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역사공부라고 했더니,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우리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할테니 오시오 해서 간 곳이 왕실도서관이라고 해요."박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인데요. 50년도 박창화라고 돼 있네요."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이거군요. 어떻게 돼 있죠?""최종적으로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 의원 면직했는데요. 서기로는 1950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 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그중 1935년 직원명부.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은 85엔이었다.

12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광복직전 귀국했다. 광복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테니 목록을 적어보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제자 김준웅 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왕실도서관이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12년동안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강탈해간 것인데,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자기들 책이라고 하고 있는데 가르쳐 주겠느냐, 자기(박창화 씨)는 거기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 몇 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부에서) 간다고 주겠느냐."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왕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돼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중요한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고서적을 비롯, 도자기, 그림, 비석, 탑, 건물 등 우리 문화재를 마구 파괴하고 약탈해 갔다. 1999년 8월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 미국 등 18개국에 6만 8천 5백 20여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특히 일본에만 3만 3천여점이 있다. 이중 대부분은 약탈품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반환은 5%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재일동포 수집가의 기증이 대부분이어서 순수 반환은 미미한 편이다.

일본정부는 진정한 한ㆍ일우호증진을 원한다면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간 '단군조선'관련 고서적과 우리 문화재의 목록을 공개하고 이를 반환해야 할 것이다.정부는 교착상태에 빠져있는「외규장각 고문서」반환협상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문서 3백40여권 중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2백96권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법학자인 백충현 서울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역사적 불법성을 정당화시키는 협상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전시하되 한국도 같은 가치의 우리 문화재를 프랑스에 임대해주는 등가교환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도 말했듯이, 프랑스군(軍)이 1866년 11월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도서 340책을 약탈하고 건물과 나머지 고서를 불태운 사실은 프랑스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탈된 외규장각 문화재를 추가로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이태진, 백충현 두 교수는 1991년 서울대가 우리 정부를 통해 프랑스정부에 대해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요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ㆍ일관계사', 특히 '단군조선'을 정립시킨 후 이를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각국의 교과서는 물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어느 한 곳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적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1세기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려면 먼저 국민의식 수준부터 높여야 하는데 특히 '역사의식'은 중요하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북3성을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등 한대륙에서 터를 열고, 한대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천하를 누비며 사자후를 토하던 우리선조의 모습이 담긴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되면 우리의 과거가 그리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못 보아왔고,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불안정으로 우리 '국가'를 불신하고, 우리보다는 외국을 선호하며 살아 온 이유로 우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젠 우리 언론매체가 앞장서서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출처 http://www.dangoon21.net-정산님 홈

단군과 단군조선

* 목차 *
01. 단군조선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02. 광복 후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03. 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04.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05. 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06. 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07. 단군조선을 계승한 열국시대
08. 단군조선의 고토(故土) 수복을 위하여
09.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단군조선 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
10.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11. 우리 한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12.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13.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인 '발해"
14.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가
01.단군조선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은 민족 구성원으로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처신해야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최근 한국교회 일부는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적 이해 없이 단군의 신격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단군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 단국대 부총장 겸 사학과 교수의 ≪고조선 연구≫(일지사)와 서희건 현 조선일보80년사사(社史)편찬실장이〈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그 뒤 책으로 나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전3권, 고려원)) 등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단군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자칫 반민족 행위로 비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상고사(단군조선)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윤내현 교수와 같이 올바른 역사를 하는 이들한테 그 연구를 지원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단군조선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조선과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신화'로 왜곡한 일제와 어용학자들의 공(?)이 크지만, 이에 못지 않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흡한 역사교육과 국조 단군을 종교화ㆍ신격화한 단체들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1980년대 중반「단군성전」건립 때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반발을 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일부 기독교인들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현재 기독교인들이 국조 단군을 역사적 주체로서가 아닌, 종교화ㆍ신격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4332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을 종교화ㆍ신격화ㆍ사상화 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국민은 반대하리라 본다.국조 단군은 역사적 주체로서 우리 한민족의 공통된 시조이지 어느 단체나 개인에 의해 종교화ㆍ신격화ㆍ사상화 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국조 단군을 종교화ㆍ신격화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가깝게는 내 할아버지를 종교화ㆍ신격화 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02.광복 후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광복 후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63년 국사교과서 내용을 통일하면서, 그리고 1974년 '국정국사교과서'부터 부정ㆍ축소되는 이변이 일어났다.1963년이면, 정인보(鄭寅普; 1892∼?)ㆍ안재홍(安在鴻; 1891∼1965)ㆍ손진태(孫晋泰; 1900∼?) 선생 등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납북된 뒤이고, 장도빈 선생 마저도 타계하신 해이다.
1963년 5월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국사학자와 검인정국사교과서 집필자, 국사담당교사 등 28명이 12차례의 회의를 열고, "단군은 민족의 '신화'로 취급한다!, 삼국의 건국에서 삼국의 시조인 주몽ㆍ온조ㆍ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룬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때는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 때부터 또는 몇세기 부터라고 한다!" 등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후이다.

이런 결론은 일제가 '취사선택'한 사료를 바탕으로,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를 왜곡ㆍ말살하면서 (일제가) 내렸던 결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5ㆍ16 군사 혁명정부가 민족사관을 강화하기 위해 검인정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통일하도록 한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단군조선을 비롯 삼국의 시조와 삼국의 초기 역사마저 '신화'로 왜곡하고 축출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말이 5천년 역사이지 2천년도 채 못되는「머리없는 역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이처럼 1910년 강점 전ㆍ후와 광복 후 '국사교과서 변천과정'은 바로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ㆍ말살실태를 체계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

결국 정인보ㆍ안재홍ㆍ손진태 선생 등을 비롯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6ㆍ25 때 납북된 영향이다. 이들이 6ㆍ25 때 납북만 안되었다면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 그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손진태 선생은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중 납북되고 말았다.보성전문ㆍ고려대의 초대 도서관장이었던 손 선생은 ≪조선민족사개론(朝鮮民族史槪論)≫과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저술했다.

단국대 초대학장을 지내기도 한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선생은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복원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항일구국항쟁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장 선생은 참으로 애국자이셨다. 단국대 교가는 장도빈 선생께서 작사한 것이다. 장도빈 선생은 3ㆍ1항쟁 당시 경성여고(현 경기여고) 학생으로 3ㆍ1항쟁을 주도했던 김숙자(金淑姿) 여사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장치혁(張致赫; 1932∼) 고합그룹 회장이 장도빈 선생의 4남이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장 선생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던 장 회장은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국립 극동대학에「한국학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장치순(張致順; 1944∼) 중앙대 무역과 교수가 장도빈 선생의 5남이다. 장도빈 선생은 오산학교에도 재직했었는데 당시 한경직(韓景職; 1902∼) 목사의 역사 교사였다.

03.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 전역에 수만기가 산재해 있는 '고인돌(支石墓ㆍDolmen)'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일원의 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지구상에 존재하는 7만여기의 고인돌 중 절반에 가까운 4만여기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 남한에 3만여기, 북한에 1만여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수를 7만∼8만기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지난 30년 동안 무려 4만여개 고인돌이 파괴ㆍ훼손된 것으로 조사돼 있다.

국내 고고학자들은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는 동아시아 거석문화권의 중심권"이라는 사실에 누구나 동의한다. 중국에서는 황해에 인접한 랴오닝(遼寧)ㆍ산둥(山東)ㆍ저장(折江)일대에서 350여기,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인접한 규슈(九州)지역에 55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됐지만 그 형태의 다양성이나 분포도에서 한반도에 크게 못 미친다.일본 오키나와제도 끝부분 미야고 섬의 고인돌은 우리나라 제주도식 고인돌과 흡사하다.한반도 고인돌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제주지역 고유의 고인돌 연구가 지속된다면 역사적으로나 문화관광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을 것이다.한반도 전체의 고인돌 중 제주지역의 고인돌은 140기로 대부분의 보존상태는 무난한 편이지만 체계적인 관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적어도 1000여기 이상은 제주지역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많아, 이 부분에 대한 각계의 발굴·보존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이처럼 한반도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포대 이영문(李榮文) 교수도 말했듯이, 아시아지역 고인돌의 중심분포지가 한반도이고, 형식도 북쪽에 북방식 고인돌이 많고 남쪽에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비슷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남ㆍ북방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결국 한반도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특히 밀집 분포도나 규모, 다양한 형식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국내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20여개국이 참가한 세계거석(巨石)문화협회(총재 유인학(柳寅鶴; 1939∼ㆍ한양대 법대교수))가 결성되고 2000년에는 한국에서「세계 '고인돌'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학계와 정부ㆍ지자체가 공동으로 고창ㆍ화순 고인돌지역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도 추진돼 왔다.세계 고인돌의 과반수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세계 고인돌의 보존 연구 활동의 메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 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 노력은 관광 측면에서 볼 때도 유익한 일이다. 프랑스는 브리타뉴 카르냑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연간 500만명 가량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지석묘) 남한에서 가장 큰 북방식 고인돌로 덮개돌의 무게가 무려 50t에 달한다 1963년 사적 제137호로 지정됐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


*전라북도 기념물49호 도산리 고인돌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이나 일본 본토는 물론 심지어는 남양군도로까지 한국인을 학병, 징병, 강제노역(징용), 일본군 강제 위안부(정신대)로 강제 동원하였던 장본인이자, 특히 일제 지도층의 명령아래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에 앞장섰던 장본인이 바로 조선총독들이다.≪조선총독10인≫이라는 책자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현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는 됐으나 일제 통치는 총독부 건물이 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 이하 일제 관리들이 장본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일왕의 대리권자로서 한국(조선)의 제반통치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장본인이자,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처단 제1호'의 인물이었다. 조선총독은 행정ㆍ입법ㆍ사법ㆍ군사통수권까지 장악한 채 한국을 포괄적으로 통치했는데 형식상 일본총리하에 있었으나 한국통치와 관련해서는 대부분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조선총독이었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가 편찬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비롯, ≪제헌국회사≫, 일제강점기 때 군수를 했던 문정창 씨의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30여년 동안 '단군조선' 관계 사료를 수집ㆍ정리한 이상시(李相時; 1932∼) 변호사가〈조선일보〉1985년 10월 4일자 11면 머리기사로 폭로한「일제의 한국고사서 대량분서」의 기사와「일제의 한국상고사 말살실태와 단군실사」라는 (표제의) 논문집,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우리 상고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등 저서에 잘 나와 있다. 이상시 변호사는 "검사시절의 수사경험을 살려 한국상고사에 관한 한-중-일 문헌을 철저하게 비교분석 했다"고 말했다.

 

특히 서희건(徐熙乾; 1944∼) 현 조선일보80년사사(社史)편찬실장이 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와〈조선일보〉의 광복 41주년 '특별기획'으로 1986년 8월 15일부터 말일까지 11회 연재한「국사교과서 새로 써야한다」에 잘 나와 있다


1985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있던 서희건 씨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를 장기 연재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격려를 해 준 분들이 안병훈(安秉勳; 1938∼) 현 조선일보 부사장(편집인), 조병철(曺秉喆; 1935∼) 전 주간조선 주간(전 조선일보 편집국장대우), 이남규(李南圭; 1936∼) 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이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6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ㆍ군ㆍ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ㆍ불태웠다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다.

사료 수집기간과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을까.
사료 수집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ㆍ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만 권, 그 뒤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 9백 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ㆍ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의 우리 고사서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던 것이다.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현재 단군조선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사서 등을 중심으로 남겨 놓았을 것이다.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조선반도사」편찬을 담당시켰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ㆍ분서한 이외에 한국사 왜곡을 위해 '근거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놓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1915년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사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왜곡편사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이완용과 권중현 등을 고문으로 앉힌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6년 1월 중추원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편사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ㆍ감독을 의뢰하였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4∼7면을 보면, 한국사료의 대량 분서와 한국사의 왜곡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요, 또한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각 도청ㆍ군청ㆍ경찰서 등 위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벌린 제2차 '사료수색'에서는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인물' 등 압수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헌병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ㆍ1항쟁을 철저히 탄압했던 제2대 총독에 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교활하게도 한국사람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1922년 총독 사이토가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말하기도 했다.

05.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1920년대 일제의 정책은 수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을 분열시키고, '역사'를 단절시키는 수준에까지 나갔다. 일본은 '자생왕조'라는 허구의 합리화 이외에도, 당시 3ㆍ1항쟁으로 고조된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희석시킬 고차원의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더욱이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한국인의 '역사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데 있어서,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 군사적ㆍ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적ㆍ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도 일본이 한반도 지역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조작, 교육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일제는 그 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령(訓令)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그러나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한「조선사편찬사업」이 정인보(鄭寅普) 선생 등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사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인 사이토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ㆍ개편하였다.명칭을「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왕(日王)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다. 1925년 6월에는 '일왕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ㆍ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관제(官制)를 새로 제정한 다음달인 1925년 7월 개편한 조선사편수회의 참여인물들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다시 앉히고 박영효, 이윤용,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또한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간의 사료수집 기간을 제외한 35권의《조선사》편찬기간만도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때부터 1938년 3월 완료되기까지 만 16년이 걸렸다.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만도 엄청났다.일제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이나 앞서있는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ㆍ말살시키기 위해 '일왕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킨「조선사편수회」에서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이다.

이마니시는 ≪조선사≫ 편찬의 주역으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 업무에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동안 앞장서 관여해 왔다.그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의 모교인 경도제국대학에「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16년 1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는 새로 편찬할 한국사의 시대구분을「상고ㆍ삼한(上古ㆍ三韓)」, 즉 '단군조선'을 집어넣기로 결의 했으나, 7년 후인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위원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상고ㆍ삼한(上古ㆍ三韓)」을 단순히「삼국이전」이라는 한편으로 축소하여 놓고, 1925년 10월 8일 조선사편수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삼국이전」과「삼국시대」를 줄여「신라통일이전」이란 한편으로 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 마다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일제는《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체제가 바로 '편년체'였다.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목적은 <'취사선택'하여 남긴 사서에서 이 사서들을 기준으로>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데 있었다.또한 이 연장선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등 열국시대를 말살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다.

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특히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수집했던 일제는 단지 고려시대 중엽과 말엽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와 ≪삼국유사(三國遺事)≫(1285년 편찬) 등 '취사선택'하여 이와 같은 사서들만 남겨놓고, 그 이전의 사서들은 불태우거나 빼돌림으로서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단군조선 등 삼국이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와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는 이유야 어찌됐든, 결국 이 두 사서는 일제가 '단군조선'을 부정 4332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역사를 말살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일제에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일제는 '취사선택'하여 남긴, 즉 단군조선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삼국사기≫를 한국상고사의 기본사료로 못박아 단군조선을 말살, '한국사'를 2천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史設)로 규제해 버림으로써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처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가 왜곡 말살된 이유는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사료들의 소실과 새왕조가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전(前)왕조의 업적을 강등하고 파괴시킨 자괴행위, 중국을 위하는 사대사관이 낳은 역사왜곡 등이 있다. 그러나 특히 일제강점기 때 우리 역사를 왜곡ㆍ말살하여 교육하는, 즉 우리민족의 말살정책사관인 '식민사관'에 의한 철저한 역사왜곡이 그 근본이유이다.

06.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앞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이 점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수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ㆍ백제ㆍ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 베이징)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한 후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이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 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얼마나 많은 거수국을 거느리고 있었을까.
단군조선은 부여(扶餘)ㆍ고구려(高句麗)ㆍ고죽(孤竹)ㆍ예(濊)ㆍ맥(貊)ㆍ추(追)ㆍ진번(眞番)ㆍ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 현도ㆍ숙신(肅愼)ㆍ청구(靑丘)ㆍ양이(良夷)ㆍ양주(楊州)ㆍ발(發)ㆍ유(兪)ㆍ옥저(沃沮)ㆍ기자조선(箕子朝鮮)ㆍ 진(辰)ㆍ비류(沸流)ㆍ행인(荇人)ㆍ해두(海頭)ㆍ개마(蓋馬)ㆍ구다(句茶)ㆍ조나(藻那)ㆍ주나(朱那)ㆍ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가운데 부여ㆍ고구려ㆍ고죽ㆍ예ㆍ맥ㆍ추ㆍ진번ㆍ낙랑ㆍ임둔ㆍ현도ㆍ숙신ㆍ청구ㆍ양이ㆍ양주ㆍ발ㆍ유ㆍ옥저ㆍ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ㆍ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ㆍ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다.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

단군조선의 강역에 대해 알아보자.
단군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로부터 북쪽은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지금의 흑룡강을 국경으로한, 즉 한반도와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동북3성(흑룡강성ㆍ길림성ㆍ요령성)을 비롯한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때로는 재러동포들이 살고있는 연해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국(서기전 16세기부터 단군조선 말기까지 대체로 이러한 강역이 유지됨)이었다.

단군조선은 2300년간 실재했던 동북아 최강국가였으며, 중국의 최초국가인 하(夏)나라보다 1백여년 앞선 나라였다.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에 중국에서는 하(夏)ㆍ상(商, 은(殷))ㆍ서주(西周)ㆍ춘추(春秋)ㆍ전국(戰國)ㆍ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漢帝國)이라는 왕조와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단군조선 말기(서기전 3세기 이후)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문화가 있었다.

단군조선의 국력은 어떠했을까.
단군조선은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서기전 323∼222)와의 전쟁에서 일시침공을 받았으나 그것을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였고, 서한제국은 단군조선과의 국경을 지키지 못해 뒤로 물린 바 있다.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한 국력(군사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국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단군' 한 사람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을까.
'단군'은 군주(君主)를 뜻하는 말로서 오늘날의 대통령이라는 칭호와 비슷한, 단군조선을 통치했던 최고 통치자에 대한 칭호로서 단군조선 시대에는 수십명의 단군이 있었으며,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다.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던 것이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한 다른 칭호였다.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중국과 맞선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며, 그 중심지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북경 동쪽이었다.

07.단군조선을 계승한 열국시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 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낙랑(樂浪)ㆍ임둔ㆍ진번ㆍ현도(玄 )」4개의 군(郡)을 설치했다


*위만조선과 한사군 위치도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인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렇게 두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동부여(∼494)ㆍ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ㆍ∼668)ㆍ읍루(연해주 지역ㆍ∼6년 이전)ㆍ동옥저(함경도 지역ㆍ∼56년)ㆍ최씨낙랑국(평안남도 지역ㆍ∼300년)ㆍ동예(강원도 지역ㆍ∼245년 이전)ㆍ대방국(황해도 지역ㆍ∼300년)ㆍ한(삼한)(∼300년경)ㆍ가야(∼562년)ㆍ신라(∼935년)ㆍ백제(∼661년) 등이 그런 나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열국시대(서기전 1∼5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사국시대(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로 정립되기 전까지 한반도와 만주에는 여러 정치집단이 있었다.그런데 기존 연구는 이 집단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위만조선이나 한사군 등을 통해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것처럼 잘못 평가해왔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扶餘)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 어디였을까.
부여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다.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에 도읍하고 내몽골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이었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이다.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국 등의 나라가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다.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08.단군조선의 고토(故土) 수복을 위하여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이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이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어떻게,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영토를 확장했을까.
우선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였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그 시기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톈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특히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 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ㆍ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알아보자.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이다.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다. 그런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
당시의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즉 요서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진출한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중국 북경 근처였다.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구려 영토가 북경 근처가 아닌,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지명과 동일한 곳으로 잘못 인식한 결과가 빚어낸 오류인 것이다.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단군조선의 영토도 축소되어 있는 상태다.


* 편집 : 사후의 칼럼 몇가지를 붙여 편집하였으며 대륙을 지배했던 환국이후 고려까지의 강역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지도로 본 역사강역

동북아시아지역의 지도를 중심으로 한(韓)민족의 고대국가와 화하족의 강역을 살펴보고 간단하게 역사를 소개합니다

사서에 나오는 배달국은 환국시대에 편입했으며 삼국의 초기위치와 일본열도는 coo2.net의 글을 참조했고 가야는 제 나름대로 설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에 나오는 국명에서 한(韓)민족의 동이족(東夷族)계열은 붉은색 글자로 화하족(華夏族)계열은 녹색으로 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대륙의 성(省)지명을 기억할 수 있게 지도를 올립니다


-대륙의 성(省)지명


대륙의 요녕에서 한(韓)민족의 선조가 만든 홍산문명(紅山文明)이 발견되었는데 화하족(華夏族)의 앙소문명(仰韶文明)보다 빠른 문화이다.

요녕지역이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중심지였고 화하족보다 먼저 환국(桓國)이라는 고대국가를 형성하는데 BC.6000~5000년대의 흥륭와(興隆窪)와 사해(査海)를 기반으로 BC.3000년의 우하량(牛河梁), 하가점(夏家店)으로 발전하고 요동반도의 소주산(小朱山)과 산동반도의 대문구(大汶口), 용산(龍山)문화로 전개된다.

우하량의 석관묘에서 여신상과 빗살토기, 곡옥(曲玉)이 발견되고 동산취(東山嘴)에서 석축제단(石築祭壇)이 발견된다.

요녕에 있던 환국의 동이족(치우)이 세력을 확장하여 산동반도와 하남으로 진출하는데 탁록(琢鹿)에서 화하족(헌원)을 물리치고 회대(淮垈)지역에 청구국(靑丘國)을 세우고 용산문화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에 나오는 환국의 강역은 흥륭와, 사해. 신락(新樂), 홍산으로 연결되고 청구국은 대문구, 용산으로 이어지는 강역입니다.

이 시기에 한반도 농포동(農圃洞)에서 빗살토기와 인물상이 출토되는데 대륙의 동산취유물과 비슷합니다.>

[청구국의 강역]

 

- 청구국시대의 지명도

환국시대의 14대 치우(蚩尤)환인이 제후국의 반란을 격퇴하고 대륙의 하북성과 산동성지역에 청구국(靑丘國)을 만듭니다

요녕지역의 홍산(紅山)에 있던 환국(桓國)이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환국의 분파들이 산동과 하남성 그리고 강소, 안휘와 절강지역으로 진출하여 환국의 제후국을 건설합니다.

그런데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를 화하족의 사서에서는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는데 거짓기록으로 한(韓)민족의 조상입니다.

환국시대의 14대환인 자오지(치우)가 제후국(유망)의 반란을 평정하자 유망의 아들 헌원(軒轅)이 치우에게 다시 도전을 하는데 치우는 탁록(琢鹿)에서 승리하여 헌원을 서쪽지역으로 몰아냅니다.

이렇게 대륙의 하북성, 산동성과 하남성, 강소성등 전지역으로 강역을 확장하여 청구국을 건국하고 중심에 신시를 만드는데 그곳을 공상(空桑)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헌원과의 탁록전투 이후에 치우가 연(宴)과 회(淮),대(垈)를 점령하고 예(芮),탁(琢)지역에는 군대를 주둔시켜서 헌원을 방어하게 합니다.

연은 연주(宴州)로서 산동성과 하북성의 경계지역으로 황하 하류지역이며 회,대는 회수(淮水)와 태산(泰山)지역으로 태산은 산동성에 있는데 동악이고 회수는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을 지나 황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한편 치우가 헌원을 평정한 뒤 도읍한 곳을 <태백일사>에는 하남성의 진류(陳留)이며 지금의 회양시(淮陽市)라고 말하고 산동성을 청주(靑州) 또는 청구(靑邱)라고 했는데 청구국에서 유래 된 것으로 지금도 산동지역에는 '청'자 지명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치우가 개척한 청구국의 강역은 대륙의 태행산맥(太行山脈) 동쪽의 화북평원임을 알 수 있으며 사서에 나오는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과 일치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북지역의 산융(山戎), 북적(北狄), 동호(東胡), 숙신(潚藎)을 말하고 산동지역에는 래이(萊夷), 우이(禑夷), 도이(島夷), 풍이(馮夷), 양이(揚夷)가 있었고 회수지역에는 서이(徐夷), 회이(淮夷)가 있었습니다

치우의 청구국은 요녕지역에서 헌원을 물리치고 회대(淮垈)지역으로 진출했으며 예(芮)지역을 봉쇄해서 헌원을 방어하고 영토를 확대해 간 것입니다.

예는 산서성과 하남성의 접경지역이고 황하와 위수가 합류하는 곳으로 예국(芮國)이 있었고 지금은 예성(芮城)이 있다.

치우시대의 지명들을 살펴보면 지금의 북경지역에 탁록과 탁수(琢水)가 있고 무종산(無終山)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산동성의 임치시(臨淄市)지역에 환성(桓城)과 환태(桓台)가 있었고 지금도 환대시(桓垈市)로 남아있으며 산동반도의 래이가 활동하던 곳에 래주시(萊州市)가 있다.

그리고 '청'자 지명으로 청구(靑丘), 청산(靑山), 청도시(靑島市)가 있으며 하남성 개봉시(開封市)가 공상이며 남으로 허창(許昌), 회양(淮陽)이 있다. 이렇게 '청'과 '환'이 들어가는 지명들이 하북평야에 많이있고 이곳이 청구국의 활동지역이었습니다.

 

- 치우시대의 묘 분포도

그리고 치우의 묘(墓)가 옛 지명으로 수장현(壽張縣)이고 지금의 동평(東平)의 문상현(汶上縣)에 있고 동평의 서쪽 동군(東郡)에는 고신씨(高辛氏)의 묘가 있으며 지금의 곡부(谷阜)에는 소호씨(少昊氏)의 묘가 있고 서화(西華)의 동쪽 항성(項城)에는 기자(箕子)의 묘가 있습니다.

또 한 지금의 진성(晉城) 서쪽에 황릉(黃陵)이 있는데 헌원의 묘가 있고 요구(姚丘)지역은 순(舜)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대륙의 태원(太原), 진성(晉城), 서화 그리고 항성지역을 사이에 두고 동부지역은 치우의 강역이었고 후에 한(韓)민족의 고구려, 백제가 화하족과 대치하면서 싸우던 격전지였습니다

치우에 대해서 화하족의 사서는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가 날리면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믿었고 또 깃발모양을 한 혜성을 치우기성(蚩尤旗星)이라 하면서 치우를 대륙에서는 군신으로 추앙을 하면서 두려워했던것 입니다.

그리고 사서도 치우를 구려(九黎)의 천자(天子)라 하므로 동이족(東夷族)이란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치우와 헌원은 천자와 제후의 전쟁이었으며 치우는 산동지역에 청구국을 세우고 지배하였습니다.

[고조선의 성립기]

 

- 고조선과 하, 은의 강역(BC3000~ BC1000)

환국을 계승한 고조선(古朝鮮- 47대 2000년)은 요녕을 중심으로 하북, 산동, 만주, 한반도를 강역으로 삼한(三韓)이라는 분권제를 하는데 삼한의 위치는 요녕지역에 진한(眞韓) 하북에 번한(番韓) 그리고 산동지역에 마한(馬韓)이다.

요녕의 하가점에서 70개성터와 비파형동검, 다뉴세문경이 발견되고 지석묘는 요녕, 길림, 산동, 절강과 한반도에 있고 요녕성 대집둔에서 번한(番干)과 하가점에서 단(亶), 기(其), 언(堰), 고죽(孤竹)이라는 문자가 출토됩니다.

진한은 단제가 직접 통치했는데 부루단제는 앙숙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만들고 식달이 남,진,변의 병력으로 황하중류를 정벌하고 흘달단제시기에 우량이 하(夏)왕조를 멸망시키고 은(殷)왕조를 세우고 고조선의 분국을 설치한다.

요녕의 부하구문(富河溝門)과 하가점의 초기갑골이 은허(殷墟)의 갑골보다 빠른데 요녕지역은 고조선의 강역으로 은왕조는 요녕에서 이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은왕조의 무정이 귀방(鬼方),소도(索度),영지(令支)를 침공하고 고조선의 우현왕인 색불루가 반란을 일으켜 단제에 등극하면서 은왕조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어 간다.

이렇게 고조선은 요녕에서 건국하고 대륙의 하(夏), 은(殷)을 통치하면서 약 2000년을 지속한 국가였습니다.

[고조선의 성장기]- 춘추전국시대

 

-고조선과 기자,춘추전국의 강역(BC1000~BC206)

고조선의 소태단제가 서우여에게 양위하자 색불루가 반란을 일으켜 단제로 즉위하고 서우여에게 번한(番韓)을 양보한다. 색불루단제는 진조선(眞朝鮮)을 중심으로 서요하에 막조선(莫朝鮮)을 두고 번조선과 함께 삼한제도를 이어간다.

그리고 주(周)나라에 망한 은왕조의 유민들이 번한지역에 정착하는데 기자조선(箕子朝鮮)이고 번조선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마한은 한반도로 이주하고 청구국의 후손인 소호씨(少昊氏)가 청양(靑陽)지역에 정착한다.

산동반도 황현(黃縣)에서 기기(箕器)라는 글과 연대시(烟臺市)에서 기후(箕候)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솥이 발견되어 산동지역이 기자조선의 강역으로 보입니다.

고조선이 왕권쟁탈로 내분이 생기자 주나라가 쇠퇴하고 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가 온다. 이렇게 고조선의 대륙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연(燕), 제(齊)나라와 번조선이 분쟁이 일어나고 고조선의 소국인 흉노(匈奴)가 강성해진다.

대륙에서는 연, 제, 초(楚)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는데 연, 제나라는 번조선과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지자 변방에 있던 진(秦)나라에 의해서 통일이 된다.

화하족의 사서에 주나라는 천리를 넘지 못했고 제나라도 닭과 개소리가 들리는 영토라는 기록이 있는데 춘추전국시대 국가의 강역은 군(郡), 읍(邑) 규모의 소국이었습니다. 고조선의 후기에 존재한 주(周)나라와 전국시대의 나라도 낙양(洛陽)지역에 있었고 대륙의 평야지역은 고조선세력이 살던 곳입니다.

 

[고조선의 쇠퇴기]

 

-북부여와 위만, 한의 강역(BC206-AD220)

고조선의 서쪽 변방지역에 있던 연(燕)나라의 진개가 요동지역을 공격하고 위만이 번조선(기자)의 기준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고조선의 고열가단제는 해모수에게 제위를 내놓는다.

고조선을 계승한 해모수는 북부여(北夫餘)로 국명을 변경하고 홀본(忽本)지역으로 이동하고 진조선(眞朝鮮)은 진국(眞國)과 흉노(匈奴)로 분리되고 한(漢)나라가 번조선(위만)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번조선(위만)에서 내분이 일어나 최, 참, 음, 협의 후(侯)가 평주(平州), 추저(萩菹), 날양(捏陽), 홰청(澮淸)지역을 분할 통치한다.

홀본지역에서 고우서의 아들 고주몽이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번조선의 기준은 한반도의 마한(馬韓)을 장악하며 절강지역에 있던 소호씨(少昊氏)의 가야(加倻)세력은 한반도의 남부에 정착한다.

이렇게 고조선의 붕괴로 한(韓)민족의 동이족은 분리되어 발해연안지역은 열국시대로 진입하는데 백제(百濟)와 고구려가 다시 통합하게 된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가 쇠퇴하고 한(漢)나라가 세워지고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와 고조선에서 분리된 흉노가 한나라를 위협하던 시대입니다

[고구려,백제의 성장기]- 위.진시대

 

- 고구려, 백제와 진의 강역(AD220-316)

북부여(北夫餘)의 홀본지역에 있던 고구려는 유리왕대에 요녕지역의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비류와 온조가 하북의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건국하며 진국(眞國)의 예맥고지에서 신라(新羅)가 성립되고 위(魏)나라의 낙랑(樂浪)이 하북지역에 진출한다.

고구려, 진한과 낙랑이 하북지역에서 전쟁을 하는데 239년경에 위나라의 낙랑에 예맥고지의 진한은 패하여 한반도의 서라벌(徐那伐)로 이동하고 240년경에 고구려는 관구검의 공격을 받지만 313년에 낙랑과 대방(帶方)을 정복하고 하북지역을 지배한다.

고구려는 계속해서 흉노(匈奴)와 백제를 공격하는데 백제는 후퇴하여 황하의 위례성(慰禮城)을 중심으로 고조선시대의 해상(명이)세력을 흡수하고 강소, 절강으로 진출하며 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한다.

한반도로 이주한 가야(加倻)는 마한(馬韓)세력을 흡수하여 한반도 중남부(경기, 김해, 영산강)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해상세력으로 성장한다

다시 말하면 위(魏),촉(蜀),오(吳)를 통일한 진(晉)나라를 고구려와 백제가 압박하면서 섬서, 하남, 산서지역의 호족과 북방세력이 성장하는 혼란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고구려,백제의 전성기]- 남북조시대

 

- 고구려, 백제와 5호16국, 수의 강역AD316-600)

고구려와 백제가 각축을 벌였는데 고구려는 하북과 산서로 남진을 하면서 태원(太原)과 부성(阜城), 창해(滄海)지역을 영토로 확장하고 옥저(沃沮)와 한반도의 낙랑국(樂浪國),서라벌(徐那伐)지역을 평정하고 간(干)을 임명한다.

백제는 산동을 중심으로 동성왕시대에 북위(北魏)와 전쟁에서 진성(晉城)과 고평(高平)지역을 확보하고 남제(南齊),양(梁),남송(南宋)의 제후국을 앞세워 호북,호남과 강서지역으로 진출한다. (加倻)를 합병하여 막강한 해상세력이 되면서 대만과 필리핀지역에도 흑치국(黑齒國) 같은 담로를 설치하고 가야는 일본열도의 구주를 영토로 대화(大和)정권을 세운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에서 성장하다가 충돌하는데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치양(稚壤-남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살해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는데 고구려에 광개토왕이 등장하면서 대륙의 하북, 산서지역과 한반도에서 다툼이 가속화 된다

고구려는 먼저 부여(夫餘)를 통합하고 서라벌신라(徐那伐新羅)를 신하국으로 만들고 전연(前燕)을 정벌하고 북위와는 연합을 하는데 백제는 남제를 속국화하고 일본열도의 가야계 대화왕조에 동맹을 요구하면서 고구려와 전쟁을 했고 수(隨)나라를 이용하기도 한다.

한(韓)민족의 고대사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동이족의 맹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대륙에서 격렬하게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합니다.

[고구려, 백제의 쇠퇴기]

 

- 고구려,백제,신라와 당의 강역(AD600~AD700)

태행산맥동쪽과 양자강이북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는 주도권 다툼을 계속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구려는 수(隋)나라의 침공을 받지만 요녕지역의 살수(薩水)에서 승리를 거두고 당(唐)나라를 요동성(遼東城)과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파한다.

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던 가야의 대화(大和)왕조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만 패하고 무령왕때에 일본열도의 가야를 제압하고 완전하게 속국화하면서 대륙과 일본열도 경략에 치중한다.

한편 고구려에게 패한 전연(前燕)세력은 서라벌신라를 장악하며 한반도중부로 진출하고 화하족계열을 통합한 당(唐)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황산(黃山)과 백마하(白馬河)에서 격퇴하고 신라는 산동과 강소지역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고구려도 백제,수,당나라와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말갈(靺鞨),거란(契丹)이 이탈하고 당나라가 다시 침입하면서 붕괴되어 간다.

[전기 남북국시기]

 

- 대진국,후기신라와 당의 강역(AD700~AD900)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패망하면서 대조영은 요동의 소구려(小句麗)를 합병하고 말갈(靺鞨)을 규합해서 대진국(大震國-발해)을 건국하여 고구려를 계승하고 당(唐)나라는 유주에서 대진국을 공격하고 신라(新羅)는 남동쪽에서 공격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대치한다.

그리고 신라는 당나라를 대방과 석문에서 이기고 한반도와 강소, 절강지역을 접수하지만 다른지역은 당나라에게 빼앗긴다. 일본열도의 왜백제(倭百濟)는 백제의 패망후에 가야계와 백제계가 연합하여 일본(日本)으로 독립하고 백제의 중심이던 산동지역은 이정기가 제(齊)나라를 세우고 백제의 담로였던 흑치국의 흑치상지가 양자강남부에서 당나라에 대항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가 붕괴되면서 한(韓)민족은 환국(桓國)과 고조선(古朝鮮)부터 지배하던 태행산맥 동쪽과 양자강 이북을 화하족(華夏族)에게 상실하고 대륙의 산동과 강소지역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를 영토로 하는 대진국과 후기신라의 전기남북국시대가 됩니다.

[고려의 강역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고려(高麗)의 영토를 한반도로 한정하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나오는데 살펴봅니다

<고려사>인종14년

김치규와 유대거를 송나라 명주(明州)에 보내 서찰을 전하기를 상객 진서(陳舒)가 말하기를 서하국(西夏國)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일을 의논하고자 한다. " 만약 중국의 울타리인 우리나라가 없어진다면 회남(淮南), 절강(浙江)의 언저리가 금나라와 인접되니 진실로 상국의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상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로 길을 향한다면 저쪽도 역시 이 곳을 경유하여 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연해(沿海)의 모든 고을은 경비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고려가 없어지면 송(宋)나라의 회남, 절강지역이 금(金)나라와 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송나라에서 금나라에 복수를 할 생각으로 고려에게 길을 빌려줄 것과 군사지원을 요구하는데 고려는 만약 송나라에게 길을 빌려주면 금나라도 이 길을 이용해 송나라의 해안지역을 침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송나라가 금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고려를 지나야 한다는 소리인데 고려의 영토는 어느곳까지 인가 하는 겁니다.

 

- 고려장성(보라색선)

송나라의 답신의 내용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고려의 영토와 고려의 국제적지위도 알 수 있습니다

송나라의 답신

[듣건대, 금나라와 매우 가깝게 인접해 있다 하니 사절의 왕래로 인하여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안부를 응당 들었을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응전을 한다든지 귀국의 땅에 길을 빌어 금나라를 정벌(征伐)을 한다는 말은 모두 돈례가 자기의 의사로 한 말이요, 조정이 지시한 것은 아니니 마땅히 깊이 양해하여 스스로 의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송나라가 고려에게 휘종과 흠종의 안위를 알면 안부나 들었으면 한다는 말이고 고려가 송과 같이 금나라의 정벌을 거부하니 송나라의 자세는 아주 낮아집니다 이렇게 송나라가 금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고려의 땅을 지나야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글에서 말한 길이 바다길이면 남송은 고려의 땅을 이용할 필요없이 요동반도를 통해 직접 북진하면 됩니다.

그러나 바다길이라는 가능성은 남송의 회수, 절강지역이 금나라와 접하게 되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회수, 절강지역을 금나라와 분리하기 위해서는 고려가 금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있고 그곳은 산동반도 지역입니다.

<자치통감>

扶餘城卽唐高麗之扶餘城也 時高麗王王建有國 限混同江而守之 混同江之西不能有也 故扶餘城屬渤海國混同江卽鴨淥水

[발해의 부여성은 고구려의 부여성이다. 당시 고려왕 왕건이 나라를 세워 혼동강까지 차지해서 지켰다. 그러나 혼동강 서쪽은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부여성은 발해에 속한 것이다. 혼동강은 바로 압록수이다]

혼동강은 요하의 지류인 혼하로 왕건이 혼동강 서쪽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하므로 초기고려의 강역은 한반도에서 요동반도까지 입니다 대진국(발해)을 멸한 요나라가 고려와 치열한 전쟁을 한 것은 발해만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나라가 고려에 보낸 조서에는 금나라가 고려를 황제국(皇帝國)으로 보고 있습니다.

금의 조서

大金皇帝奇書于高麗國皇帝

[대금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만약에 고려의 영토가 한반도에 한정된 작은 국가라면 고려의 왕을 황제(皇帝)라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화하족의 역사에 명옥진이 사천성에서 하(夏)나라를 건국했으나 사망하자 그의 아들 승이 계승하지만 주원장에게 토벌당하는 사건이 있는데 <명사>의 기록에 명옥진의 아들 명승은 명(明)나라로 끌려갔다가 고려로 신분이 넘겨지게 된다.

<명사>'열전'

洪武五年理及歸義侯明升徙高麗

[홍무 5년에 리가 귀의후 명승을 고려로 보냈다]

<명사>

明年徙升於高麗

[명년에 승을 고려로 보냈다]

이 기록을 보면 명나라의 입장에서 명옥진은 반역자인데 주원장은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고 고려로 보냈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 이유는 명승에게는 귀의후라는 칭호까지 있었기 때문에 주원장이 함부로 못하고 고려로 보낸 것이므로 명나라가 고려(高麗)의 신하국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고려는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이고 대외적으로도 인정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궁궐에 있던 원구단(圓丘壇)에서 고려 황제가 제천의식을 했는데 동아시아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권한은 천자(天子)에게만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격에 맞지 않는다' 해서 원구단을 없애버리지만 고려는 제사를 지냅니다.

* 원구단(圓丘壇)-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대륙에서 1945년에 고려태조 왕건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송사>에 왕건이 살던 지명이 있고 그곳이 개주이고 촉막군인데 한반도에는 개주, 촉막군이라는 지명은 없습니다. 이 촉막군은 당나라부터 성산군으로 불려왔고 후에 개주라 했으며 현재는 대륙의 사천성 개현이며 개주는 본시 예맥의 땅이며 고려가 있던 곳 입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개성현으로 되어있고 개성현을 보면 개성진이라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개주, 개성, 개성부, 개성진은 모두가 사천성 근처이고 사천성도 그 주위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기록도 있는데 고려말기에 철령의 요동때문에 명나라와 국경분쟁이 있었다고 <고려사>와 <명사>에 있습니다

<명사>를 보면 철령(鐵嶺)은 주(周), 진(秦)시대에 숙신의 땅이고 한(漢), 진(晉)시대는 읍루의 땅이라 했고 금나라때는 연평부(延平府)관할이라 한다.

* 연평부- 섬서성의 연주(延州)와 평주(平州)지역

개원(開原)은 원(元)나라때에 개원(開元)이었으나 명(明)때에 원(元)자를 원(原)자로 개명한 곳이고 감숙성지역이며 명나라때 개원성(開原城)에 주치소를 설치했다.

그렇다면 고려의 영토는 동북삼성지역의 남쪽이 아니라 영하성 중위현지역이 고려의 영토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 고려를 한반도에 국한시키기 힘든 이유로 조선(朝鮮)시대의 한반도인구가 100만이 안되는데 고려인구는 210만이라면 그에 맞는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 출처 : 사후(http://XXX/casahoo/20001722883

 

 

 


환국(桓國) 환인 계보 (7대, 재위년수 : 3,301년)

 

 

 

 

1대 안파견(安巴堅) 환인(B.C.7199)
2대 혁서(赫胥) 환인,
3대 고시리(古是利) 환인,
4대 주우양(朱于襄) 환인,
5대 석제임(釋提任) 환인,
6대 구을리(邱乙利) 환인,
7대 지위리(智爲利) 단인(檀仁이라고도 한다)

 

 

 

 

신시배달국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B.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단군조선 단군 계보 (47대, 재위년수 : 2,096년)

 

 

 

 

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초대 단군임검∼21세 소태(蘇台) (B.C.2333∼1286 : 1048년간)


1대 단군 임검(王儉, 93, B.C.2333)
2대 부루 단군(扶婁, 58, B.C.2240, 태자)
3대 가륵 단군(嘉勒, 45, B.C.2182, 태자)
4대 오사구 단군(烏斯丘, 38, B.C.2137, 태자)
5대 구을 단군(丘乙, 16, B.C.2099, 羊加)
6대 달문 단군(達門, 36, B.C.2083, 牛加)
7대 한율 단군(翰栗, 54, B.C.2047, 羊加)
8대 우서한 단군(于西翰, 8, B.C.1993, ? )
9대 아술 단군(阿述, 35, B.C.1985, 태자)
10대 노을 단군(魯乙, 59, B.C.1950, 牛加)
11대 도해 단군(道奚, 57, B.C.1891, 태자)
12대 아한 단군(阿漢, 52, B.C.1834, 牛加)
13대 흘달 단군(屹達, 61, B.C.1782, 牛加)
14대 고불 단군(古弗, 60, B.C.1721, 牛加)
15대 대음 단군(代音, 51, B.C.1661, ? )
16대 위나 단군(尉那, 58, B.C.1610, 牛加)
17대 여을 단군(余乙, 68, B.C.1552, 태자)
18대 동엄 단군(冬奄, 49, B.C.1484, 태자)
19대 구모소 단군( 牟蘇, 55, B.C.1435, 태자)
20대 고홀 단군(固忽, 43, B.C.1380, 牛加)
21대 소태 단군(蘇台, 52, B.C.1337, 태자)

나. 백악산 아사달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 : 860년간)

22대 색불루 단군(索弗婁, 48, B.C.1285, 욕살 고등의 아들로 우현왕을 거쳐 단군으로 즉위)
23대 아홀 단군(阿忽, 76, B.C.1237, 태자)
24대 연나 단군(延那, 11, B.C.1161, 태자)
25대 솔나 단군(率那, 88, B.C.1150, 태자)
26대 추로 단군(鄒魯, 65, B.C.1062, 태자)
27대 두밀 단군(豆密, 26, B.C.997, 태자)
28대 해모 단군(奚牟, 28, B.C.971, ? )
29대 마휴 단군(摩休, 34, B.C.943, ? )
30대 내휴 단군(奈休, 35, B.C.909, 태자)
31대 등올 단군(登 , 25, B.C.874, 태자)
32대 추밀 단군(鄒密, 30, B.C.849, 아들)
33대 감물 단군(甘物, 24, B.C.819, 태자)
34대 오루문 단군(奧婁門, 23, B.C.795, 태자)
35대 사벌 단군(沙伐, 68, B.C.772, 태자)
36대 매륵 단군(買勒, 58, B.C.704, 태자)
37대 마물 단군(麻勿, 56, B.C.646, 태자)
38대 다물 단군(多勿, 45, B.C.590, 태자)
39대 두홀 단군(豆忽, 36, B.C.545, 태자)
40대 달음 단군(達音, 18, B.C.509, 태자)
41대 음차 단군(音次, 20, B.C.491, 태자)
42대 을우지 단군(乙于支, 10, B.C.471, 태자)
43대 물리 단군(勿理, 36, B.C.461, 태자)

다.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44대 구물 단군(丘勿, 20, B.C.425, 욕살) :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정
45대 여루 단군(余婁, 55, B.C.396, 태자)
46대 보을 단군(普乙, 46, B.C.341, 태자)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계해 58년(B.C.238) 단군조선을 폐관하고, 이후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린다.


유불선 모체종교인 한민족의 신교문화

 


1. 상제님에 대한 인식

* 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은 곧 일신이요 우주의 조화성신이니라. 삼신께서 천지만물을 낳으시니라.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오니라. 동방의 한국은 본래 신교를 닦아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의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니라. (道典 1:1)


신교(神敎)란 무엇인가? 이신설교(以神說敎)의 준말이다. '이신설교(以神說敎)'란 '신으로써 모든 인간 교화의 중심을 삼는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은 태극의 원리에 의해 인간계와 신의 세계가 병립함을 알았고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신이 들어서 되는 것임을 올바르게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 신(神) 중에서도 인간과 신을 통치하는 최고의 자리에 계신 분을 '하느님'이라 불렀고, 한문으로는 '상제(上帝)'로 표기하였다. 이 상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아(我)에 대한 인식과 민족에 대한 인식과 국가에 대한 인식 및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인식이 출발하게 된다.


{환단고기} 등의 내용을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상제님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였는가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제님을 인류 기원의 뿌리, 역사의 근원으로 보았다.1)


즉 모든 사람은 삼신상제님의 후손으로 인식하였다.


둘째, 창조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2)
셋째, 교화(敎化)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3)
넷째, 통치(統治)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4)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과 더욱 밀착되어


다섯째, 생사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5)
여섯째, 화복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6)
일곱째, 진리의 근원으로 인식하였다.7)

이 뿐만아니라 우리 민족은 상제님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의 [삼신설]에 의하면 "상계주신(上界主神)은 기호왈(其號曰) 천일(天一)이시니 주조화(主造化)하사 유절대지고지권능(有絶對至高之權能)하시며, 무형이형(無形而形)하사 사만물(使萬物)로 각통기성(各通其性)하시니 시위청진대지체야(是爲淸眞大之體也)시며, 하계주신(下界主神)은 기호왈(其號曰) 지일(地一)이시니 주교화(主敎化)하사 유지선유일지법력(有至善唯一之法力)하시며, 무위이작(無爲而作)하사 사만물(使萬物)로 각지기명(各知其命)하시니 시위선성대지체야(是爲善聖大之體也)시며, 중계주신(中界主神)은 기호왈(其號曰) 태일(太一)이시니 주치화(主治化)하사 유최고무상지덕량(有最高無上之德量)하시며, 무언이화(無言而化)하사 사만물(使萬物)로 각보기정(各保其精)하시니 시위미능대지체야(是爲美能大之體也)시니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은 환국시대부터 우주의 주재자인 하느님을 신앙하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을 한문으로는 '상제(上帝)'라 하는데, 여기다 '삼신(三神)'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삼신상제님'이라 호칭한 이유는 위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이 세 분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뜻은 결코 아니다. {태백일사}의 [삼신오제 본기]에서도 "자상계(自上界)로 각유삼신(却有三神)하시니 즉일상제(卽一上帝)시오. 주체즉위일신(主體則爲一神)이시나 비각유신야(非各有神也)시며 작용즉삼신야(作用則三神也)시니라"라고 하였으며, 또 "도지대원(道之大原)이 출어삼신야(出於三神也)라" 하였다.


삼신이란 하느님이 3가지 역할로, 만물을 창조해 내는 아버지의 역할(父)인 조화신(造化神), 그리고 창조해 낸 삼라만상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師)인 교화신(敎化神), 그리고 만물이 각자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다스리는 군장의 역할(君)인 치화신(治化神)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는 바로 우주의 창조법도(Being, 존재의 원리)와 구원의 법도(Becoming, 변화의 원리)가 모두 3수의 원리로 전개된다는 사실이다.(執一含三 會三歸一)


예를 들어 우주가 하나이지만 현실적으로 천지인(天地人)으로 존재하며, 사람의 한 몸뚱아리도 머리·몸통·다리의 세 부분으로 나뉘며, 원자의 세계도 양자·전자·중성자의 셋으로 나뉜다. 이 밖에 빛과 색의 3원색의 원리, 입법·행정·사법의 정부 조직원리, 기체·액체·고체의 물의 3단 변화 등이 있다. 현재 우리의 국사 교과서에 우리의 고대 사회가 삼신을 신앙했고, 삼신은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이라 했는데 너무도 잘못된 설명이다.

2. 유불선의 어머니 종교인 신교(神敎)

일반적으로 '종삼횡사(縱三橫四)'라 하여 시간의 원리는 사(四)를 마디로 하는데, 어째 구원의 원리는 삼(三)으로 변화한다고 하는가? 이것은 생·장·염·장(삼현일장 : 三顯一藏) 중 근본이 되는 장(藏)을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문화의 최고 원리인 종교도 이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환인, 환웅, 단군,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까지 8,000년 이상 우리 민족의 국교였던 신교(神敎)는 유·불·선으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신교를 제1의 종교 또는 모체 종교라 하고, 유·불·선을 제2의 종교라 한다. 유·불·선의 사상이 포괄된 모체 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삼국사기}의 신라 24대 진흥왕 37년조의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 서문}8)에 보인다.


유교에서는 우주의 본원인 '무극', 창조의 본체인 '태극', 그리고 무극과 태극을 이어주며 현실을 과불급이 없도록 조화시키며 작용의 중심점이 되는 중의 본체를 '황극'이라 하는데, 이들은 각각 다르면서도 하나의 원리 속에 내재해 있으며, 불교에서도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의 삼신불이 있으며, 도교에서도 상청(上淸), 태청(太淸), 옥청(玉淸)의 삼청(三淸)9)사상이 있다.

기독교에서도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하여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일체(一體) 원리가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에도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 유지신인 비슈느, 파괴신인 시바가 있지만 각각 다른 신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권화(權化)로서 현현한다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원리가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볼 때 유·불·선·기독교의 원리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제2의 종교인 유·불·선은 증산도로 통일되어 인류 문명의 결실을 이루게 된다. 집일합삼(執一合三),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이다.

 


증산도는 신교(神敎)의 이상을 실현하고 유불선의 예언을 완성하는 제3의 초종교이다. 신교의 정통맥을 이어 4대 고등종교의 이념을 완성하는 무극대도인 것이다. 삼신상제(三神上帝)는 후에 언어가 분리되어 삼신은 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상제는 도가로 흘러 들어가 본질이 왜곡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신의 본래 의미는 상제님을 지칭하지만 후세에 삼신상제님의 三化의 기능을 지상에서 대행한 삼성조(三聖祖)를 일컬을 때도 있고, 우주의 조화삼신을 대행하여 생명을 태워주는 조상신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다.

 

* 상제님께서 4월 13일에 하운동 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형렬이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에 산기가 있구나." 하시니라. 형렬이 여쭈기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삼신이 말을 몰고 너의 집에 들어가므로 알았노라." 하시고... (道典 2:19:1-3)

 

이 말씀에 나타난 삼신은 바로 그 집안의 조상을 가르킨다.

 

3. 신교는 상제님을 근원으로한 다신(多神)의 체계

 

 

 

위의 내용으로 보건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은 음양(陰陽)의 원리를, 오제(五帝), 오령(五靈)은 오행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오령의 태수(太水)·태화(太火)·태목(太木) 등에서 태극(太極)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음양오행은 신교의 우주관을 설명하는 이론인 것이며 우주의 근본체계를 설명하는 이론인 것이다. 또한 신교는 광의적으로 Animism11), 산천숭배12), 조상숭배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4. 신교는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한 절대자 신앙이다.

 

* 사람이 살다가 죽게 되면 삼신도 따라 떠나니라. 밥을 해 놓고 또 적삼을 흔들어 초혼하나니 이는 다 부당하니라. 삼신에게 고함이 옳으니라. (道典 2:103:1-2)

 

초대 단군 할아버지의 팔조법(八條敎)의 제3조에 "이생유친(爾生惟親)이요 친강자천(親降自天)이니 유경이친(惟敬爾親)이라야 내극경천(乃克敬天)이라."하여 부모와 조상을 섬기지 못하는 자는 하느님을 섬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부여의 구서(九誓)에서도 효를 처음에 언급하고 있고, 삼한통속(三韓通俗)의 오계(五戒 : 多勿五戒)에서도 효가 처음에 자리하고 있다.

 

5. 신교는 종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의 근원이다

 

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참전계경(參佺戒經)의 삼화경(三化經) 및 태극(太極), 음양(陰陽), 오행(五行), 팔괘(八卦), 하도(河圖),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등은 인류 철학의 모태가 되며, 삼신상제님에 대한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부터 음악, 미술, 체육 등의 문화가 기원하였다.

 

6. 신교는 상제님의 조화원리를 통해 인간의 생성원리를 밝혀주며 수행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13)

 

 

{단군세기서(檀君世紀序)}에 "왈(曰) 부삼신일체지도(夫三神一體之道)는 재대원일지의(在大圓一之義)하니, 조화지신(造化之神)은 강위아성(降爲我性)하고, 교화지신(敎化之神)은 강위아명(降爲我命)하고, 치화지신(治化之神)은 강위아정(降爲我精)하나니라." 하였으며,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인물이 동수삼진(同受三眞 : 性命精)이나 유중(惟衆)은 미지(迷地 : 처지 즉 환경에 미혹)하야, 삼망(三妄 : 心氣身)이 착근(着根)하고 진망(眞妄)이 대(對)하야 작삼도(作三途)니라."고 하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통성(通性), 지명(知命), 보정(保精)의 방법과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촉(禁觸)의 수행법을 제시하여 인간완성(덕:德, 혜:慧, 력:力)의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국선도(國仙道)의 장생불사의 맥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7.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성지(聖地)

 

 

* 이 세상에 조선과 같이 신명(神明)대접을 잘하는 곳이 없으므로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각기 소원을 따라 꺼릴 것 없이 받들어 대접하리니 도인(道人)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천하사(天下事)만 생각하게 되리라. (道典 2:25:5-7)

 

제천의식은 민족단합(民族團合)의 근원이었으며, 그 장소는 아사달(阿斯達) 또는 소도(蘇塗)라 하였다.14) 천제(天祭)의 목적은 위민기복(爲民祈福), 축신흥방(祝神興邦)이었고 제천단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에 의해 원구단(圓丘壇)을 쌓았으며 고인돌에도 그 사상이 들어있다.


처음에는 3월 16일과 10월 3일에 제천15)하였는데, 후에는 5월(씨뿌리고 난 뒤), 10월(추수한 뒤)에 행하였다. 이 의식은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중삼한(中三韓)의 상달제로 계승되었다. 흉노(匈奴)도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주(祭天主)로 삼았다. 초대단군 88세때 운사 배달신을 보내 참성단을 마리산에 쌓았었는데,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최고의 제천단이다.


순이 왕위에 오른 뒤 "사류우상제(肆類于上帝)하시며 인우육종(?于六宗)하시며 망우산천(望于山川)하시며 편우군신(?于群神)하시다." 하여 상제(上帝)이하 모든 신(神)에게 제사를 올린 것으로 보아 그도 동이족임을 알 수 있다.


올림픽도 원래는 올림프스 12신에게 제사를 드린 뒤 하는 뒷풀이 의식이었으며, 우리 민족도 천제를 올린 후에는 신단수 아래서 무술을 즐겼었다.

 

8. 삼신산(三神山)16)에 대하여

 

* 하루는 공사를 행하실 때 "백두산의 기운을 뽑아 제주 한라산에 옮기고, 금강산의 기운을 뽑아 영암 월출산으로 옮긴다." 하시니 한 성도가 그 이유를 여쭈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백두산에 천지(天池)가 있고 한라산에도 못이 있으며, 금강산이 일만 이천 봉이요 월출산도 일만 이천의 기운이 있음이로다."하시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이 동과(冬瓜)의 형체인데 뿌리에 수기(水氣)가 고갈되어 이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백두산이 근본처이므로 그곳에 가서 수기를 돌리고 오리라."하시니라. (중략) 이 뒤에 백두산에서 돌아오시어 말씀하시기를 "이제 수기를 돌려 회생케 하였노라."하시니라.(道典4:53:1-4,22)

 

17)

 

즉 백두산으로 바뀌었다.


금나라의 6대 임금 장종(章宗)은 백두산 산신에게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란 존호(尊號)까지 올렸는데, 예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삼신상제님께서 백두산에 내려오시어 삼계를 선화하신다고 믿어왔다.

 

* 너의 동토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물면서 최제우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주었더니?. (道典 2:73:6)

 

혹자가 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로 각각 금강산, 지리산, , 한라산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18)


백두산은 우리국토의 진산(鎭山)이며, 역사의 근원, 신앙의 근원이 되는 산이다. 백두산에 근원지를 두고 있는 강도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 등 3개의 강으로 나뉜다.


{위서}는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 표범, 곰, 이리 등이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고 사람들도 산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지 않으며, 산에 오르는 자는 모두 소변담는 그릇을 가지고 갔으며, 백두산에는 흰 사슴, 흰 꿩, 흰 매 등이 산다."라고 전한다. {괄지지(括地志)}는 "백두산의 새와 짐승과 초목은 모두 희다."고 말하고 있다.

 

출처 : 21C 영적경영연구소
글쓴이 : 선우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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