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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공정의 배경과 실체 (인용글)|●---

설레임의 하루 2010. 10. 12. 02:30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GGII/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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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공정의 배경과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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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황하문명의 근원적 자기발전의 이론적인 기반으로서 단원론(單元論)을 고수하고 있던 중국학자들은 이런 결론에 그다지

반박이 없었다.  

왜냐하면 진하인(秦夏人)들은 분명하게 '앙소문화'를 거점(據點)으로 한 한족(漢族) 문명이 북방 유목문화보다는 시기가 앞서며

시원문명(始原文明)이라고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갑자기 북방에서 '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에 이르는 상호 밀접하며 일관성(一貫性)있게 연결된 독특한

'동북아문명 유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자다가 벌떡 일어날 노릇이었다.

'곽대순'이나 '소병기' 그리고 '엄문명'이 그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이들 지역의 유물에 관심을 갖고 집요하게 달라붙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발굴 작업을 철저하게 독점하면서 고고학 자료를 문헌적 기록의 왜곡된 해석에 끼워 맞추는 새로운 변종 '이하문명동근설

(夷夏文明同根說)'이라든지 이화융화설(夷華融和說)'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예 한족(漢族)의 시조로서 조작한 '황제요하문명창조설'이라는 괴이한 주장까지 이르렀다.  
이른바 '홍산공정(紅山工程)'이 진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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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참히 깨지는 중화사상(中華思想)과 일원일체론(一元一體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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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저문화(良渚文化)의 본산(本山)인 양저(良渚) 반산(反山) 무덤...
한 개의 무덤에서 홍산(紅山) 옥(玉)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옥벽(玉璧-둥근 玉)이 쏟아졌다.  

이미 주지하다시피 그동안 중국 역사계는 중원중심(中原中心)*한족중심(漢族中心)*이하융합왕조중심(夷夏融合王朝中心)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말이다.

중국인들이 왜 춘추전국 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그것은 장성(長城)이북이었던 연산(燕山) 북쪽은 본래 오랑캐의 소굴이고 단지 중원문화의 수혜(受惠)를 받은 문화열등지역이라고

폄훼(貶毁)했기 때문입니다. <이형구>

진하인(秦夏人)들은 언제부터인지 오랫동안 핍박을 받았던 동방족들을 사이(四夷-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라

칭(稱)했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당황하기 시작한다.  
홍산문화(紅山文化 BC 4500년~BC 3000년) 유적의 출현 때문이었다.  

물론 1930년~1940년대에도 장성(長城) 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융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흐름을 한족(漢族)의 역사에 끼워

넣는 경향들이 차츰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추세에 있었다.  

여기에 '서량지'의 '동서방융합설(東西方融合說)'도 한몫을 거들었다.

당시 발해유역에서 동북문화의 특징인 지자문(之字文) 빗살무늬 토기(통형관 포함)와 중원 앙소문화(仰韶文化)의 특징인 홍도(紅陶)

및 채도(彩陶)가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우월한 중원(中原)의 '앙소문화'가 열등한 '홍산문화'에 영향을 준 결과라고 치부해버렸다.

최근에 들어 지나(支那) 지역에서 가장 시원적인 문명이 기존 황하문명(시조 황제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고고학적 기반)이  아닌

'요하문명'으로 밝혀지는 상황을 접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디디고 설 땅마저 잃어버릴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다문화설(多文化說)'이 심화하는 등 '한족(漢族) 정통 및 상고(上古 ) 이래 지나(支那) 지배설'이 허구적 이념으로 전락할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발해연안에서 경이로울 정도로 오래된 각종 유물들이 쏟아지니 중국학계는

두 손을 놓은 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지켜온 역사적 허구를 지탱하기 위한 방법은 한가지로 압축될 수밖에 없었다.  '견강부회(牽强附會)할

수밖에...' <이형구 교수>

오랑캐의 소굴로만 여겨졌던 동북방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에서 제단(단壇)과 신전(묘廟) 그리고 무덤(총塚) 등 엄청난

국가제사유적이 삼위일체(三位一體)로 확인된 것이다.  

이뿐인가?  
대릉하(大凌河) 유역인 사해(査海)에서 중국 용신앙(龍信仰)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용형(龍形 )돌무더기가 흥륭와(興隆窪 BC

6000년)에서 옥기(玉器)의 원형과 빗살무늬토기 및 덧무늬 토기 등이 쏟아졌다.    

중국학계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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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휘황찬란한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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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남만(南蠻)의 소굴이었던 장강(長江) 유역에서 탄생한 이른바 '양저문화(良渚文化)'도 난공불락의 중화주의(中華主義)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홍산문화'보다 약간 늦은 '양저문화'의 찬란한 옥기(玉器)와 흙으로 쌓은 엄청난 규모의 고분군 그리고 궁전 터와 제사유적

등이었다.

예컨대
'양저문화'의 대표격인 '양저 유적'은 30㎢의 면적에 50곳이 넘는 건축지와 거주지 그리고 고분군을 자랑한다.  

특히
반산(反山) 12호는 대표적인 중심인데 그곳에서 나온 옥월(玉鉞-옥으로 만든 도끼)과 옥종(玉琮-구멍 뚫린 팔각형 모양의 玉그릇)

옥(玉)문화는 휘황찬란함 그 자체이다.

홍산문화의 옥(玉)과 비교하면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양저'보다는 이른 시기인 홍산옥(紅山玉)은 사실적이고 조형적인 반면 '양저'의 옥(玉)문화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정교합니다.  

옥玉에 세밀화를 그린 듯한 1㎜의 세공기술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합니다. <이형구 교수>

유적에서 확인된 옥종(玉鐘-예기禮器)과의 비교에서 홍산옥(紅山玉)이 조형적인 반면 '양저' 옥(玉)문화는 세밀화를 그린 듯

정교함을 뽐낸다.  

옥월(玉鉞)과 옥종(玉鐘)은 예기(禮器)이자 위세품(威勢品)이다.  
옥종(玉鐘)이 의식(儀式)에 사용됐다면 옥월(玉鉞)을 포함한 각종 부월(斧鉞, 도끼)은 군권(軍權)을 뜻한다.  

반산(反山)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신권(神權)과 군권(軍權)을 한꺼번에 차지했다는 뜻이다.

또한 반산(反山) 인근의 막각산(莫角山) 유적군은 '양저문화' 유적군의 중심점이다.  
동서 길이 670m*남북 폭 450m로 전체면적이 30만㎡에 달한다.    
높이 10m의 인공토축(人工土築)을 쌓았고 그 위에 작은 좌대(座臺)를 3개 조성했다.  

좌우로 나란히 배열된 직경 50㎝가 넘는 나무기둥들이 있고 20m가 넘는 초목탄층과 홍토(紅土) 퇴적층이 보인다.  

모두 이곳이 궁전 터이자 제사를 지낸 곳임을 방증해준다.  
요산(瑤山) 유적에서는 홍색*회색*황색 등 3색으로 조성된 대형제단과 묘지가 확인되었다.  

'양저' 유적 조사단은 한마디로'이곳에는 궁전과 제사기능을 갖춘 대형건축물 혹은 도성(都城)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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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국(古國-홍산)과 방국(方國-양저)이론의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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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홍산문화'와 '양저문화'의 관계였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이야기한다.

양저문화 초기의 옥기(玉器)를 보면 규범화한 짐승 얼굴 도안이 대량 활용되었는데 이는 홍산문화 옥기(玉器) 가운데 용형옥기

(龍形玉器)의 원형을 연상시킨다.  

이는 양저문화가 홍산문화의 영향을 또 받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이형구 교수>

동방족의 본거지에서 잇달아 중원(中原)을 능가하는 문화가 터지자 중국학계는 곽대순(郭大順) 요령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의

표현대로 '통고적(痛苦的)' 즉 '쓰라린 아픔을 겪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황하(黃河) 중류(중원中原)는 중국문명의 중원(中原)이 아니었다.  
중국고고학의 태두 '소병기(蘇秉琦)'는 이렇게 인정했다.  

그리고 후(後)에 들어서는 중국 최초의 나라인 하(夏)와 상(商)을 형성*발전시키는데 초석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홍산문화와 양저문화는 차례로 중원(中原)으로 몰려와 중화(中華) 대지에서 4000년~5000년 문명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병기>

<소병기>는 그러면서 '중화문명론'이라는 것을 개진했다.  
즉 세 부곡(部曲)이라 해서 고국(古國)-방국(方國)-제국(帝國)의 3 단계론을...

그러면서 홍산문화를 중국 최초의 원시국가단계인 고국(古國)으로 양저문화를 그 다음 단계인 제후국의 형태인 방국(方國)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형구 교수>

<소병기>는 두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최고위층 즉 왕(王)의 신분임을 입증해주는 유적이 확인된 점에 주목했다.

취락이 있다 해서 다 국가단계가 되는 건 아니다.  
일반취락과 중심취락 그리고 중심취락을 초월하는 최고위층의 공간을 갖춰야 국가단계라고 할 수 있다.   <소병기>

이미 살펴봤듯
'우하량'은 단壇*묘廟*총塚 등 삼위일체의 조합이 엄격하게 구분된 '홍산인'들의 성지(聖地)이며 특수신분인 제정일치시대의

왕(王)이 하늘과 소통하는 곳이었다.  

또한 종교제사 중심인 이곳은 1개 씨족이 아니라 여러 씨족의 문화공동체가 모셨던 곳이었다.

홍산문화(BC 4500년~BC 3000년)보다 시기가 다소 늦은 양저문화(BC 3200년~BC2200년)는 취락분화의 층위(層位)가 더욱

뚜렷하다.  

모든 유적이 정남북의 정교한 배열을 이루고 있으며 옥기문화(玉器文化) 또한 훨씬 정교했다.    
<소병기>는 이런 '양저문화'를 '방국(方國)'의 전형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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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 축록중원(逐鹿中原-중원中原을 향해 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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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양저*홍산 축록중원 良渚*紅山 逐鹿中原'이란 말로 정리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축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유방과 항우가 중원(中原)을 향해 다투어 진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에서 딴 '양저*홍산 축록중원'이란 말은 두 문화가 중원으로...중원으로 질주했다는 뜻이다.  

그럼 '축록'의 증거들을 살펴보자.

1) 중원 앙소문화의 본거지인 도사(陶寺) 유적에서 확인된 '반용문 토기'가 용(龍)의 본향인 '홍산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2) 우선 동북 '홍산문화'와 중원 '앙소문화'의 접촉이 두드러진다.  

오랑캐의 문화를 통고(痛苦)의 과정 끝에 '중국문명의 시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학계가 주목한 곳은 하북성(河北省)

서북부였다.  

1970년대 말 상간하(桑幹河) 유역인 울현(蔚縣) 삼관(三關) 유적에서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문양인 용(龍)무늬 채도관과 '앙소문화'의 상징인 장미문양의 채도(彩陶-이른바 묘저구廟底溝 유형이라 한다)

가 나란히 나왔다.

3) 최근에는 상간하 인근 신석기 유적에서
   '홍산문화' 말기에 해당되는 옥조룡(玉造龍-용 조각 옥기玉器)이 출토되었다.  

중원(中原)인 진남(晋南) 도사(陶寺)유적에서 출토된 주칠(朱漆)을 한 반용문(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龍) 토기그릇과 외방내원

(外方內圓)의 옥벽(玉璧)은 '홍산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소병기>의 결론은 이랬다.  

또다시 특유의 중화주의적인 역사해석과 '춘추필법(春秋筆法)'이 작용한 것이다.  
마치 각 부분에서는 '동방계문화의 선진성(先進性)'을 피력하다가 결론에 이르면 슬그머니 '동서방융합론'으로 빠지는 전형적인

중국학자들의 기술방식을 그대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같은 행태에 맞장구를 쳐주는 '앵무새'들의 푸닥거리가 참으로 가관이다.

관중 분지(중원中原)에서 자생한 장미문양의 채도(彩陶-앙소문화)와 연산(燕山) 이북* 대릉하 유역에서 자란 용인문(龍鱗紋-용龍과

비늘모양 무늬) 채도彩陶 및 빗금 토기 옹관(甕棺-홍산문화)이 북으로 남으로 향했다.  

두 문화는 결국 하북성 서북부에서 조우했다.  

이곳에서 융합된 두 문화는 다시 동북으로 건너가 홍산문화의 꽃인 제단(단壇)과 신전(묘廟) 그리고 무덤(총塚)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소병기>

중국학계는 이른바 그렇게 창조된 중국문명의 질긴 왜곡의 끈을 북경(北京)의 천단(天壇)에서 찾는다.  

'우하량' 제단의 앞부분 형태는 천단(天壇)의 환구(環丘)이고 뒷부분은 북경(北京) 천단(天壇)의 기년전(祈年殿-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 지낸 곳)과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무덤의 구조와 후대(後代) 제왕릉(帝王陵)의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비단 '홍산문화'만이 이렇게 중원(中原)으로 남으로 퍼진 것은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홍산'보다 늦은 '양저문화'의 '축록중원'을 살펴보자.  
요(堯)*순(舜)시대 유적으로 꼽히는 진남(晋南)의 도사(陶寺) 유적에는 양저식 토기와 옥기(玉器)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또한 산동반도 남쪽인 소북(蘇北) 화청(花廳) 유적은 이른바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유적으로 꼽히는데 이곳에서도 '양저문화'의

전형적인 정(鼎-솥)과 호(壺-항아리)와옥(玉) 등이 나왔다.  

이는 '양저문화'가 중원은 물론 산동반도까지 결합되었다는 소리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엄문명(嚴文明)'은 이런 사실을 눈여겨보고'양저문화가 대문구문화를 정복했다'라고까지 단언했다.

중국학계는 수레바퀴통으로 문화의 접변과 교류를 설명했습니다.  

5000년 전 중국문명은 여러 부족들의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중원으로 모였다고(분명히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낯설지 않은

주장이 아닌가?)...

먼저 북방(홍산문화)이 중원(앙소문화)과 교류를 시작하였고 이어 동남(양저문화*대문구문화)과 중원이 교류하고 북과 동남이

관계를 맺고...뭐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정리했습니다.   <이형구 교수>

중국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문명은 중원(中原)에서 나왔다는 '일원일체(一元一體)의 역사관'이 어이없게 무너지자

재빨리 얼굴을 바꾸어 '홍산*양저' 등 여러 문명이 모여 지금의 중화문명을 이뤘다는 '다원일체(多元一體)의 역사관'으로 대체했다.  
그러면서 하나 둘씩 고대의 전설을 이런 고고학적인 성과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즉 '사기' 등 역사서에서 전설로 등장하는 황제(黃帝)와 염제(炎帝)를 '염황(炎黃)'으로 묶어 한족(漢族)이 그들의 자손이라는 억지

논리조작을 바탕으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 아전인수적인 해석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중국학계의 견강부회(牽强附會)를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민족사학계'에서 통렬하게 질타하는 부분이다.  

가장 대표적인 실례(實例)를 하나만 소개한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문제의 기록이다.

황제(黃帝)가 염제(炎帝)와의 싸움에 곰(熊)*말곰(羆)*휴(휴貅-범과 비슷한 동물로 비貔는 수컷이며 휴貅는 암컷)*추(貙-큰 살쾡이)

*호랑이(虎) 등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 염제(炎帝)와 싸웠다.

여기에서 '중국학자'들의 기가 막힌 술수가 등장한다.  

황제(黃帝)가 이런 짐승들을 토템으로 삼고 있는 족속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북방민족과 수렵민족의 색채가 짙다. 곽대순'라고까지 표현한다.  

더 나아가 저명한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는
아예 '황제시대(黃帝時代)의 활동중심은 홍산문화의 시공과 상응한다'고까지 하면서 어이없는 견강부회까지 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황제(黃帝)가 본래 홍산인의 왕(王)이었다'는 또 하나의 '동북공정'으로서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는 허황된 말장난이다.  

왜냐하면
'산해경' 등 관련 문헌을 한번만이라도 살펴본다면 그 속에 일관된 기술방식으로서 우리 동방민족이 정착한 모든 방국(邦國)에서
다른 어느 이족(異族)과는 독특하게 '기장을 먹으며 곰*말곰*호랑이*표범의 네 종류 조수(鳥獸)를 거느렸다'는 기록으로 명확히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황제(黃帝)가 동방 상제(上帝)인 제준(帝俊)의 갈래로서 어떻게 본향(本鄕)을 떠나 지나(支那) 지역에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는지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낼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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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BC 3000년 이상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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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영자' 출토 '청동꺾창'은 지금으로서는 병기(兵器)의 예제화(禮制化)를 뜻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출토 유물인 셈이다.  

벌써 BC 1500년 무렵에 이토록 예기(禮器)의 완벽한 모습까지 갖춘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청동기의 기원은 언제였을까?    

여기에서 우하량(牛河梁) 13지점에서 보았던 이른바 전산자(轉山子) 유적의 금자탑(金字塔-피라미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향신문 12월 1일자  뉴허량의 적석총들 참조)  <이형구> 교수는 말한다.

BC 3500~BC 3000년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이 피라미드 정상부에서 야동감과(冶銅감鍋) 즉 청동기를 주물(鑄物)한 흔적으로 보이는

토제(土製) 도가니의 잔편(殘片)이 있는 층위(層位)를 발견했습니다.  

청동주물(靑銅鑄物)을 떠서 옮기는 그릇과 함께 말입니다.  <이형구>

이는 매우 중대한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존 중국 청동기 시대의 개막연대(BC 2000년)보다 1000년을 앞당긴 고고학상의 쾌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과기대 야금연구실 '한여(韓汝)' 교수는 1993년 베이징대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성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지층(地層)이 교란(攪亂)되었다는 점이 제기되어 여전히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중국학계는 결코 한번 잡은 실마리를 놓지 않았다.

피라미드 도가니 지층에서 확인된 고풍관(鼓風管-높은 열을 내려고 바람을 불어 넣는 관)의 구멍을 보라.  

그것은 마치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 표현된 청동기 제작 과정과 완전히 똑같다.  
(곽대순郭大順 요령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이를 증빙하는 유물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우하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을 조사단이 분석한 결과

홍동질(紅銅質-원시청동인 순동)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87년 오한기(敖漢旗) 서대자(西台子) 유적즉 훙산문화(BC 4500년~BC 3000년) 문화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

다.   그 속에는 낚시 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아울러 이런 '홍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商)나라로 고스란히 연결된다는 점도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수맥님의글   coo2.net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