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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전쟁 2부작 -1편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2편 강감찬의 귀주대첩

설레임의 하루 2010. 4. 10. 03:51


 세기의 전쟁 2부작


        1편   을지문덕 살수대첩

            2편   강감찬 귀주대첩


1편 을지문덕 살수대첩

 

▣방송 : 2009. 11. 14(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나 영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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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세계 전쟁사 중 최대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다!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진격하는 수나라.
300여년만에 대륙을 통일한 수퍼파워 수나라의 군대를
을지문덕은 어떻게 전멸시켰나!

 

고대의 수퍼 파워 수나라,
 동아시아 사상 최대의 전쟁을 일으키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300년만에 통일한 수나라. 거란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며 당시 아시아 최대의 강대국으로 위용을 떨친다. 하지만 고구려는 대담하게도 수나라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거부한다. 이에 수나라는 612년, 철저한 준비를 통해 113만명의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향해 진격한다. 당시 고대 서양의 전투 규모는 고작해서 5만~10만명이었다. 100만의 수나라의 병력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1, 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군사동원이었다!

 

살수대첩, 전쟁의 운명을 가르다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해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던 수나라. 하지만 요동성, 평양성, 살수에서 패하며 100만 대군은 치욕적으로 철수하고 만다. 특히, 30만 별동대까지 투입하여 전투를 벌였던 살수에서는 살아남은 수군의 수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가 바로 삼국사기에서 조선역사 최고의 일이라고 격찬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살수대첩은 청천강에 둑을 쌓은 다음, 수군이 강을 건널 때 둑을 터뜨려 공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과연 이 전술은 실제로 가능했을까? 고구려는 어떤 전술로 수나라를 상대하여 승리하였을까.

 

고구려 승리의 전략1 - 청야입보(淸野立保)
중국의 강력한 군대와 대항하며 성장해온 고구려는 그들만의 독특한 전략을 만들어낸다. 바로 청야입보전술이다. ‘청야’‘들을 비우다’, ‘입보’‘성을 굳게 지키며 저항한다’는 의미로 적이 공격해 왔을 때 쌀 한톨 남김없이 생활터전을 불태우고 성으로 들어가서 적의 현지조달을 막는 방어전술이다. 서양의 사례로 본다면 러시아군이 원정을 온 나폴레옹군을 상대했던 전략과 유사하다. 러시아군은 나폴레옹군을 러시아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 후, 보급선을 끊어 철군하는 나폴레옹군의 후미를 쳐 큰 피해를 주었다. 을지문덕 또한 수나라군을 고구려땅 깊숙이 유인해 수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살수에서 마지막 일격을 가해 수나라군을 물리쳤다.

 

고구려 승리의 전략2 - 최강 중장기병과 활

고대 세계 최강의 수나라군을 완파한 고구려군, 그들은 어떠한 무기로 싸웠던 것일까.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군 무사와 말이 철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최근 경주의 쪽샘지구에서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무사와 말의 갑옷이 한세트로 발굴되었다. 동아시아에 있어 완전한 형태의 철갑옷 발굴은 최초이다.
▲경주 쪽샘지구 발굴현장  

쪽샘지구의 철갑옷 발견으로 고구려 철갑옷의 존재를 확인한 제작진은 고구려의 철갑옷과 활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그 위력을 실험해보았다.

▲고구려 삼실총 고분벽화와 복원한 고구려 찰갑

작은 철조각들을 하나하나 가죽끈으로 연결해 만든 찰갑은 화살에 맞을 경우, 가죽끈으로 연결된 철편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하고 다시 튕겨내는 방어력을 지닌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전투 중 철편이 망가져도 다른 철편으로 쉽게 수선할 수 있었다.

▲복원한 화살촉

고구려 유적에서는 많은 화살촉도 발견된다. 이 화살촉들은 오늘날의 특수강과 맞먹는 강도를 갖고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무기들은 고구려의 뛰어난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2편 강감찬 귀주대첩

 

▣방송 : 2009. 11. 21(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최필곤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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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년 2월. 전쟁으로 황폐화된 고려를 구출한 영웅이 있었다!
27년간 계속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귀주대첩의 강감찬은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거란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강감찬, 당대 세계 최강 거란을 대파하다.
1019년 2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시아 전역을 전쟁의 공포 속에 몰아넣은 거란을 고려가 물리친 것이다. 이 전쟁으로 고려는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을 높이며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는 반면 거란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바꾼 귀주 대첩, 그 중심엔 전략가 강감찬이 있었다.
▲ 강감찬 영정 ▲ 낙성대공원 강감찬 동상

 

27년간의 집요한 침략
송을 굴복시킨 거란 성종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서희의 외교담판 이후 두 번째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 통주, 서경을 연달아 격파한 40만 거란 대군은 개경에 들이닥쳐 약탈과 방화 끝에 고려왕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러나 2차 고려·거란 전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회군하는 거란군을 앞뒤에서 급습하여 적군의 목을 베고 백성을 구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결국 거란은 후퇴하며 3차 침공을 결심한다.
▲ 거란군의 침입

 

고려의 운명을 바꾼 강감찬의 묘수(妙手)
1018년 겨울, 고려와 거란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경직공'이라는 놀랍고도 대담한 계획을 세운 소배압은 도중의 모든 요새를 우회하여 빠르게 남진한다. 그러나 고려군의 끈질긴 추격과 현종의 청야입보전술에 지친 거란 대군은 개경을 코앞에 두고 철군을 결정해야 했다. 모든 것을 예상한 강감찬은 쫓기듯 밀려온 소배압군을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귀주대첩, 고려·거란 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는 마지막 승부였다.

 

귀주에서 펼쳐진 한국판 적벽대전
1019년 2월, 귀주에서 고려와 거란은 최후의 결판을 벌인다. 팽팽하던 전쟁은 북풍이 남풍으로 바뀌면서 일시에 고려군이 승기를 얻게 됐다. 결국 거란군은 바람을 등지고 공격해 오는 고려군을 맞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북쪽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불어주는 바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강감찬은 기상변화를 예측하고 있었을까? 그 비밀을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