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잏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MJSB/202
명성황후 민비의 살해보고서- 에이조(石塚英藏) 보고서
(Eizo report described on cruel assasination & necrophilia to Empress Min by japanese))
<에이조 보고서〉는 을미사변(잘못된 용어임) 직후 조선 정부의 내부(內部)대신의 고문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 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로,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소장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에 수록이 되어 있었다.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이였던 이시즈카 에이조를, 1988년 《민비암살》 이란 소설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여사가 자신의 저서에서“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이전 상관에게 보내진 셈이었다. 이 보고서로 우리는 명성황후의 처참하고 치욕스러웠던 최후를 알 수 있었다.
먹으로 씀(메이지 28년 10월 9일부) 이토 백작가 문서 - 조선왕비사건 관계자료 は若し時機の許すあらば之を決行したるとは 不言不語之間に誰人も抱藏したる考に可有之候得共若し一步過 たば忽ち外國之關係を惹き起し永遠に國に占むる日本之地步を亡失するは必然の儀なれば深く輕率を戒しむ べきは今更申し越す?も無之儀に御座候今回之事小生共最初より少しも相談に與からず却而薄薄其計劃を朝鮮 人より傳聞致候程に有之段段聞知する所に依るに局外者にして其謀議に參與し甚しきは?次焉連が兵隊之先鋒 たりし事實に有之候而して 勿論朝鮮人にも不相知候樣子に候 現公使に對しては聊か不德義之嫌有之候得共一應事實之大要御報告仕るは 職務上之責任と相考候間左に簡單に申陳候 영원히 여러 나라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잃을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깊이 경거망동 하지 말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국외자로서 그 모의에 참여하여 심지여는 浪人(낭인)들이 병대(兵隊)의 선봉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현 공사에 대하여는 조금 예의가 없는 느낌이 들지만 일단 사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고드리는 것이 직무상의 책임일까 생각해서 아래와 같이 간단히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合に露の援兵を請うべきの約束」?に 「訓練隊解散の計劃」を宮內府に於て爲したるに由るものの如し (?ち訓練隊を利用したるなり) 하지만 하필 오늘 이것을 결행한 이유는「위급의 경우에 러시아의 원군을 청할 약속」및 「훈련대를 해산한다는 계획」을 궁 내부에서 세웠기 때문인 듯 합니다.(그래서 훈련대를 이용한 것입니다.) 王城前に在る守備兵は之を鎭靜せんが爲め四門の警備に從事したると云うに在り 왕성의 수비병은 이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4문의 경비에 종사했다고 말합니다. 參與したりと云う 其他は少しも關知せず 守備隊長馬屋原の如きは命令的に實行の任に充られたるが如し 그 이외에 시바(柴), 크스세(楠瀨), 스기무라(杉村)가 비밀 모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기타는 적어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수비대장 마오하라(馬屋原) 같은 사람은 명령으로 실행의 임무에 충당된 것 같습니다.
二十名若あり熊本人多數を占(漢城新報社迹)中に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もあり 隨て洋?和?相混ぜり 岡本 は大院君と同時入城し實行の任に當れり 守備隊の將校兵卒は四門警衛に止まらず門內に侵入せり 殊に?次馬 連は深く內部に 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 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 云う 右は士官も手傳へたるも主として兵士外日本人の所爲に係るものの如し大凡三時間余を費して右の荒仕 事を與したる後右日本人は短銃又は劒を手にし徐徐として光化門 (王城正門)を出て群集の中を通り拔けたり 時已に八時過にて王城前の廣小路は人を以て充塞せり (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쯤이 있었습니다. 구마모토(熊本) 현 출신자가 다수를 점하며(漢城新報社 迹) 그들 중 신문기자 몇 명과 의사·상인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과 일본 옷을 입은 사람이 서로 섞여 있었습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과 동시에 입성해 실행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수비대의 장교와 병졸은 4문의 경위(四門警衛)에 그치지 않고 대문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可笑又可怒 / 웃을 일, 또한 노할 일- 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 궁 내부대신을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습니다. 대략 세 시간여를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일본인들은 권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 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갔습니다. 그때가 벌써 여덟 시가 지났고 왕성 앞 대로(광소로)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使館に來り 一一を擧て難問し夜に入て各各歸館したり 三浦公使弁解頗るめ結局雙方水懸論なるも當方は余程 の痛みを感ずる廉なきにあらず 折惡しく或米人現場を目擊し居りにあらずへば普通一般之朝鮮人之?言之如く 一槪に抹殺し去るを得め結べく乍去三浦公使の弁解も亦頗る上出래なるL言之(公使之談話に依れば)又大院 君始め各るも當堅く約して日本に不利ならざるの返答を爲し居れり然るも遂に?際問題たるを免れざるべし
5. 외국사신 일본공사관에 와서 하나하나 증거를 가지고 힐문하다가, 밤이 되어 각각 귀관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서둘러 수습하려고 아주 노력하여 결국 서로가 이치만 따져 끝이 안 나는 논쟁이었지만 저(當方)는 너무나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우라 공사의 수습 역시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공사의 담화에 의하면) 또한 대원군을 비롯한 각 대신들은 굳게 약조해 일본에 불리하지 않게 답변했습니다. 그렇지만 국제문제화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るに至るべし 尤も公使は困難なる場合には免官せられ不苦と被中候得共公使之辭任豈能く國際紛議を解かん 要するに王妃が從來改革之妨害たる事は小生共之夙夜憤慨に堪えず打過候事なれば此斷然なる處分を 喜ぶと 同時に其方法の宜しきを得ざりしを深く惜まざるを不得と存候, 公使は右の?次馬連中に對しては表面上夫處 分を施さるの事ならん 乍去諸外國之困難を排除し得べきや否疑なき能はず 勿論此る荒仕事之事なれば多少 「ボロ」を現はすは免れざる所なりと雖今回之事余り「ボロ」多からざるか右は前記に申陳候如く三浦公使に 對しては甚不信實之 至には候得共 職務上之義務に馳られ不得已御報道申上る次第に御座候 右何卒篤く 만일 이 땅(當地)에서 외국 사신들 사이의 담화로 마무리되어 국제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그 요동 문제에는 곧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공사는 곤란한 경우에는 면관(免官 관리의 자리에서 물러남)되며, 공사의 사임은 아마도 국제 분의를 잘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왕비가 종래 개혁의 방해인 사실은 저도 밤낮으로 분개하고 있었던 만큼 그 단연한 처분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방법이 적당하지 않았음을 깊이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제외국의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막된 짓인 만큼 다소 ‘실수’를 하는 것은 면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너무나도 ‘실수’가 많지 않았을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우라 공사에 대하여는 극히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만 직무상의 의무에 쫓겨 부득이 보고드리는 바이니 부디 잘 봐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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