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삼국사기의 의문점-신라본기중에서--신라와 백제

설레임의 하루 2009. 8. 22. 03:08

*출처:다음카페-상촌 김자수 기념사업회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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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의문점-신라본기중에서--신라와 백제

***신라본기***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 변한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본기***
(혁거세 21 년)
東明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 <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王見<沸流水>中, 有菓{菜} 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혁거세 21 년)
동명왕이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고구려본기***
○동명왕 二年, (혁거세 22 년)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동명왕 2년 (혁거세 22 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동명왕 六年, (혁거세 26년)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太白山}> 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6년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치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동명왕十(+一) 年, (혁거세 30년)
冬十一月, 王命<扶尉?>,
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10년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신라본기***
○혁거세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혁거세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동명왕十九年, (혁거세 39년)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동명왕 19년 (혁거세 39 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瑠璃明王>立. 諱<類利>, (혁거세 39년)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혁거세 40 년)
40년,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백제본기***
온조왕 1 년 (혁거세 40년, 유리왕 2 년)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고구려본기***
○<瑠璃明王> 十一年,夏四月, (혁거세 49 년,온조왕 10년)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유리명왕 11년 여름 4월,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신라본기***
○혁거세 五十三年, (온조왕 14 년, 유리왕 15년)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百} 匹, 曰:
"寡君問{聞} <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혁거세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났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를 보내 이를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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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

1. 서기 8년에 망한 마한에서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몰라도 마한의 장수 맹소가 서기 61년에 신라에게 항복을 할수 있는가??

1. 왜인은 왜 백제는 침범을 하지 않고 신라만 침범하는가??

1. 신라건국후 133년만에 가야와 전쟁을 하는데 왜 그런가??

1. 말갈은 왜 백제만 공격하고 신라는 공격을 하지 않는가??

1. 낙랑은 왜 신라만 공격하고 백제는 공격을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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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전쟁부분만 간추려 보았읍니다



백제는 서기 8년에 마한을 멸망시킨다 다만 원산,금현성만이 항복하지 않으나 서기 9년에는 두성마져 백제에 항복하고 만다

서기 14년에 왜인이 신라의 해변을 침략했다

서기 16년 우곡성을 거점으로 마한의 장수 주근이 백제에 반란을 일으키다 죽는다

서기 19년에 신라의 북명사람이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왕에게 바친다

서기 19년에는 백제 한수 동북지방에 가믐이 들어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서기 20년에는 백제 온조왕이 전국을 순무하는데.. 동쪽으로는 주양까지갔었고 북쪽으로는 패하(패수)까지 갔었다
50일만에 돌아왔다

서기 22년에는 말갈이 백제의 술천성과 부현성을 공격해 왔다

서기 23년 봄 정월, 백제의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서기 25년에는 백제로 남옥저와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서기 30년에는 백제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서기 31년에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서기 34년에는 말갈이 마수성을 함락시키고 또 병산책을 습격했다

서기 36년에 낙랑이 신라를 침범하여 북쪽의 타산성을 점령한다

서기 37년에는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자 유민 5 천명이 신라로 투항해 왔다

서기 40년에 화려,불내현이 반란을 일으키나 맥국이 평정하여 신라와 맥국이 국교를 맺었다

서기 55년에 말갈이 백제의 북쪽을 침략했다

서기 56년에 백제는 우곡성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였다

서기 61년 마한장수 맹소가 신라에게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을 했다

서기 63년 백제가 낭자곡성에 성을 쌓아서 신라와 사이가 나빠졌다

서기 64년 백제가 와산성과 구양성을 공격하여 신라와 싸웠다

서기 66년에 백제와 신라는 와산성에서 싸웠다

서기 70년에 백제가 신라를 침범했다

서기 73년에 왜인이 목출도를 침략했다

서기 74년에 백제가 신라를 침략했다

서기 75년에 백제가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 함락시켜다

서기 76년에 신라가 와산성을 되찾았다

서기 76년에 신라는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이겼다




*** 상기 사실에서 거론되는 지명을 열거해보면 ***

백제는 서기 8년에 마한을 멸망시킨다,

다만 원산,금현성만이 항복하지 않으나

*****원산성,금현성*****

다음해(서기 9년)에 두성마져 항복하고 만다.

그 7년후에(서기 16년) 우곡성을 거점으로 마한의 장수 주근이 백제에 반란을 일으키다 죽는다

*****우곡성*****

서기 19년에는 한수 동북지방에 가믐이 들어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패수,대수*****

백제는 말갈과 싸움이
서기 22년에,서기 30년에,서기 31년에,서기34년에 서기 55년에, 그리고 56년에는 우곡성을 쌓아 말갈에 대비한다

*****우곡성*****

백제는 신라와 싸움이 서기 63년에,백제가 낭자곡성을 쌓아 신라와 사이가 나빠진후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서기 64년에,서기 66년에,서기 70년에,서기 70년에, 서기 74년에,서기 75년에,서기 76년에 싸웠다

*****낭자곡성,와산성,구양성*****

왜인이 신라를 침범한것은 서기 14년에,서기 73년에 침범했다

*****목출도*****

낙랑은 서기 36년에 신라의 타산성을 점령하나 그다음해에 서기37년 고구려에게 멸망했다

*****타산성*****

신라는 가야와 처음으로 서기 76년에 황산진에서 전쟁을 했다

*****황산진*****



*** 아래는 간추린 삼국사기의 초기 역사입니다 ***
서기 8년부터 서기 76년사이의 백제와 신라본기 부분입니다


(AD 8)
○백제 온조왕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久} .
?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순망치한이 되어,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합병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AD 9)
○백제 온조왕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AD 14)
○신라 남해 차차웅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 掠海邊民戶,
11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AD 16)
○백제 온조왕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AD 19)
○신라 남해 차차웅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16년 봄 2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주워서 이를 왕에게 바쳤다.

(AD 19)
○백제 온조왕 三十七年,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AD 20)
○백제 온조왕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38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AD 22)
○백제 온조왕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 拒擊之.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


(AD 23)
○백제 온조왕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 本<扶餘>人也.
神識淵與{奧} ,
年過七十, 旅{?} 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41년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AD 24)
○신라 <儒理>尼師今立,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AD 25)
○백제 온조왕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 가을 8월, 왕이 5일 동안 아산 벌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AD 30)
○백제 다루왕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AD 31)
○백제 다루왕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
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4년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 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AD 34)
○백제 다루왕 七年,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 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7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AD 36)
○신라 유리이사금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3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점령하였다.


(AD 37)
○신라 유리이사금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AD 40)
○신라 유리이사금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 가을 9월, 화려현·불내현의 두 현 사람들이 공모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 서쪽에서 요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AD 55)
○백제 다루왕 二十八年, 秋八月, <靺鞨>侵北鄙.
28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AD 56)
○백제 다루왕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AD 61)
○신라 탈해이사금 五年秋八月, <馬韓>將<孟召>, 以<覆巖城>降.
5년, 가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AD 63)
○신라 탈해이사금 七年冬十月, <百濟>王拓地, 至<娘子谷城>,
遣使請會, 王不行.
7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까지 넓히고
사신을 보내 왕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AD 63)
○백제 다루왕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36년 겨울 10월, 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AD 64)
○신라 탈해이사금 八年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逆) 擊走之.
8년 가을 8월,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 백제가 다시 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그들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AD 64)
○백제 다루왕 三十七年,(+秋八月)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冬十月) , 移兵<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37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AD 66)
○신라 탈해이사금 十年, <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AD 66)
○백제 다루왕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 守之,
尋爲<新羅>所敗.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AD 70)
○신라 탈해이사금 十四年, <百濟>來侵.
14년, 백제가 침범하였다.


(AD 70)
○백제 다루왕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43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AD 73)
○신라 탈해이사금 十一{七} 年, <倭>人侵<木出島>.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 {死} 之.
17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하였다.
왕이 각간 우오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우오가 전사하였다.


(AD 74)
○신라 탈해이사금 十八年, 秋八月, <百濟>寇邊, 遣兵拒之.
18년 가을 8월, 백제가 변경을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 이를 방어하였다.


(AD 74)
○백제 다루왕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47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AD 75)
○신라 탈해이사금 十九年,冬十月,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19년,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AD 75)
○백제 다루왕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48년 겨울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AD 76)
○신라 탈해이사금 二十年,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2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AD 76)
○백제 다루왕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AD 76)
○신라 탈해이사금 二十一年, 秋八月, 阿?<吉門>, 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 賞功也.
21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