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동양삼국(東洋三國: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개국사 비교)

설레임의 하루 2009. 8. 19. 04:43

*출처:다음카페-우리역사의 비밀   글쓴이-송준희


 

 

 

 

 

(동양삼국(東洋三國: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개국사 비교)
(서언)
오늘은 이웃인 중국과 일본의 개국사를 우리와 상호 비교하여  과연 이웃나라들은 개국을 어떻게 기록하고 전해져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끔씩 도대체 왜 ? 우리는 있는 역사도 스스로 말살하지 못해 안달들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하루빨리 역사왜곡의 망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一.  중국의 개국)
중국은 최초의 국가라고 기록된 하(夏)나라가 BC 2205년에 개국되어 우리 단군조선(고조선)보다 128년 늦게 창건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역사를 정립하면서 중국의 시조를 하나라의 초대왕인 우(禹)라고 하지 않고黃帝(헌원)라고 모든

사서에 기록하여 BC26세기로 중국역사의 시원(始原)을 늘려 놓았다.

또한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삼황오제(三聖五帝)를 여기저기에 끼워넣어 BC32세기까지 그들의 역사를 길게 늘려 놓고 있다.

먼저 중국의 정사인 유명한 25사의 첫번째 사서인 "사기권一, 오제본기권一"의 여러 기록들을 소개하지 않을 수없다.

1.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다.(黃帝者少典之子)라고 기록하고 초주의 말을 인용하여 "유응국의 임금소전의 아들이다."

( 周曰有熊君少典之子也)라고 주서하고 있다.

또한 횡포밀이란 사람은 "유웅은 지금의 하남 신정이다.(皇甫謐曰有熊今河南新鄭是也)라고  하면서 소전이란 것은 제후국의

국호이고 인명은 아니라고 기록하였다.(少典者諸侯國號非人名也)

2. 또한 황제의 성은 공손이며 이름은 헌원이다.(姓公孫名曰軒轅)

3. 황제는 수구(壽丘 : 산동省)에서 태어나 희수(姬水)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이 되었고 또한 헌원(軒轅)의 언덕에서 살았기 때문에

헌원이란 이름이 되었다.(皇甫謐曰黃帝生於壽丘長於姬水因爲姓居軒轅之丘因爲名)

4. 삼황오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약간의 차이나는 2명의 기록을 소개하겠다.

그 하나는 공안국의 주장으로써 삼황(三皇)은 복희, 신농, 황제이며 오제는 소호, 전욱, 고신, 당, 우이다.
(公安國尙書序--伏犧 新農 黃帝爲三皇 少昊 頊高辛唐虞爲五帝 )
또 다른설은 태사공의 말을 인용하여 오제는 황제 전욱 제곡 당요 순이라고 기록하였다.

삼황오제에 대하여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국역조제왕개람"에는 공안국의 주장과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5.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황제 후손의 족보를 보면 하나라의 초대왕인 우까지 연계되고 있다.
  
1대 황제는 25子가 있으며 그 중 14인이 性을 득했다.
     
황제로부터 舜, 虞(순, 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은 같고 국호만 다르다는 것(自黃帝至舜虞皆同姓而異其國號)을 알 수 있고 또

舜(순)은 동이인(東夷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風土記云舜東夷生姚丘)

그렇다면 순의 8대조인 황제도 동이인임을 알 수 있다.

앞표에서 소호금천씨가 오제에 포함되어 있으며 족보에도 있으나 왕계보에 들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우리 역사와의 비교를 통하여 더 자세한 설명이 이루어지겠지만 황제는 단군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九黎(구리:倍達배달 또는

환웅시대)의 14대왕인 蚩尤(치우)에 반항하여 싸워서 동이로부터 이탈되어 중국의 시조가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한국의 어떤 사서에도 기록이 없고 오직 중국의 "25사"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6. 중국의 사전사화(史前史話)라고 할 수 있는 삼황오제에 대한 기록을 더듬어 봤고 중국최초의 국가로 기록된 하나라 제왕들의

역대를 『중국역조제왕개람(中國歷朝帝王槪覽)』을 기본으로 설명하겠다.

하나라는 BC 2205년부터 472년간(또는 432년)지속되는 동안 17대의 제왕이 있었으며 그 수도는 안읍(현 산서), 평양(금산서), 양성

(금하남) 양적(금하남) 등의 여러 곳을 전전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夏나라는 단군조선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나라였지만 17명의 제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정사에 나와 있는데 단군조선은 왜

단군이라는 직함만 전해졌을까 ?

(二. 일본의 개국)

일본역사 기록이라는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일본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라고 하여 제1세 신무(神武)로부터 현 천황(天皇 : 平成)까지 125대를 자랑스럽게 내놓고 있다.

또한 일본은 신무천황 이전에 신대(神代)라 하여 신정(神政)시대를 기록해 놓으므로서 일본의 역사를 과거속으로 더 연장시키고 있다.

1.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정시대를 신대상하로 구분하여 신대상에서는 모두 "일서(一書)"라는 불명확한 근거를 내세워 우주의

생성과정부터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국상립존(國常立尊)이라는 신(神)이 생겼고 이어서 국협퇴존, 풍짐순존(國狹槌尊, 豊斟淳尊)이라는 삼신(三神)이 나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신대(神代) 21대까지 연결된다

한편 일본열도는 이장락존과 이장염존(伊 諾尊, 伊  尊)이 하늘위에서 구슬로 장식한 양날칼로 아래를 향하여 휘휘 저을때

칼날끝에서 떨어지는 소금 물방울이 엉켜서 섬이 되었다는 등 이야기로 흘러간다.


2. 그러는 동안 하늘 땅을 왕래하며 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 일본을 건국한신)이 태어나 고천지원(高天之原)을 다스리고 농사지어

햇곡으로 제사지내고 보경(寶鏡)과 보검(寶劍)에 관한이야기 등의 신화나 전설같은 기록이 여러페이지가 된다.

신대(神代)에서는 천조대신의 자손에관한 내용과 해궁유행(海宮遊幸) 등을 기록하여 그들 역사의 상고부분을 신화로서 미화하고 있다.

3. 『일본서기』에서 천황의 세계(世系)를 보면
BC600년경에 신무(神武)가 개국하여 약 2600년의 역사를 지닌나라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당서(唐書)』를 보면 신무(神武 : BC600년)로부터 총지(總持 : 咸亨元年 AD 670년)까지 약1200년간의 역사는 일본이 아니고

왜(倭)또는 왜노국(倭奴國)으로 있다가 AD670년에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서권 220열전 : 日本古倭奴也--天智死子天武立死子總持立咸亨元年遣使賀平高麗後稍習夏音惡倭名更號日本使者自言 --

日本은 古倭奴也이다)  

천지가 죽고 천무(39대)가 들어섰으며 그가 죽으니 아들 총지(40대)가 뒤를 이었다.

함형원년에 사신을 보내어 고려(高麗:고구려를 뜻함)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드니이로부터 차츰 중국말을 배워서 왜(倭)라는 이름을

싫어하여 국명을 일본으로 고쳤다.

『삼국사기』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국호를 바꿨다는 기록이 없다.
일본은 과연당시 이전 왜(倭)의 후예일까 ? 왜의 위치가 현일본열도였을까 ?

이것이 문제다

① 먼저 『당서』 이전의 지명에서 왜는 현 일본열도가 아니고 중국의 양자강 이남지역이다.


『삼국지』『후한서』『북사』의 왜전 및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 대방남쪽에 있다는 왜의 지명은회계동야현, 담이, 단주,

이주, 독산, 토함산(會稽東冶縣, *耳,*洲, 夷洲, 獨山, 土含山) 등으로서 중국의 양자강 이남과 현대만에만 존재하는 이름들이다.

② 『일본서기』의 왕계보가 당서 이전의 『25사』왜전의 왕내용이 다르다.

서기 178년부터 670년 사이에 『일본서기』에 명시된 천황은☞ 추고 - 서명 - 황극 - 효덕 - 제명 - 천지 - 천무 --지통-- (推古 -

舒明 - 皇極 - 孝德 - 齊明 - 天智 - 天武 - 持統)이고

25사 『삼국지』『당서』『북사』『구당서』 이전 사서의  왜지(倭志)에는 같은 기간에☞ 비미호, 대여, 찬, 미, 제, 무-- (卑彌呼,

 臺與, 贊, 彌, 濟, 武)등 『일본서기』와는 전혀 다르다.


다만 『당서』만 『일본서기』와 일치된다. (『당서』는 AD945年 에 쓰여졌고 1749年에 교간된것을 볼 수 있는데 『일본서기』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③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천문현상중
일식기록(日蝕記錄)은 서기 628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일식관측지역(영토) 은 현재 일본열도가 아닌 중국땅 대만 해남도 및 필리핀

등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속일본기』『일본후기』『속일본후기』『일본문덕천황실록』『일본삼대실록』등의 사료와 그 이후의 일본역사 기록에서

일식관측지에 대한 분석을 보면 1100년대까지는 일식관측지가 서태평양을 거쳐 불명확하고 1100년대에 이후에 비로서 일본열도에

고착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일본서기』등 일본측 사료에 의하면 왜로부터 현 일본에 이르는 동안 628년부터 1800년경사이에 총685회의 일식 기록이 있으며

그 중 실제 관측했다고 기록된 것은 532회라고 쓰여져 있다.

이를 분석결과 일식이 실현된것은 532회중 292회로서 54.9%를 나타내고 있다.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논문)일식기록을 역사적으로 분석해보면 왜는 現 일본과는 무관하고
25사』에 기록된대로 동이(東夷)의 일부로서 중국의 양자강 이남지역에서 서기 700년경까지 위치했다가 왜(倭)가 망하면서 왜인

(倭人)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위치가 불확실환 시기가 3백년~4백년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100이후에 現일본열도로 정착되어 국가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보여진다.
이런내용은 『일본서기』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더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왜곡시키고자하는 우리역사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던져본다.
그들의 조상의 역사를 그토록 저주할 정도로 왜곡하고 싶어하는 일본민족의 "개과천선"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


(三. 우리나라의 개국)

우리나라의 개국역사에 대하여는 따로 나온 사서가 없다.

『삼국유사』에
중국,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라의 왕역(王歷)다음에 기이편(紀異篇)이라하여 고조선, 위만조선, 마한, 낙랑국등으로 엮으면서

고조선에 대하여 2면으로 간략히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원문)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위서(魏書)』에 지금으로 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는데 요(堯)와

같은 때였다.

고기를 인용한 내용은 -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태백산의 신단수밑에 내려와 인간세계를 다스렸다.
- 환웅천왕은 잠시 인간으로 변신하여 곰이 여자로 바뀐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
왕검은 요(堯) 임금이 즉위한지 50년에 평양에 도읍하고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기 1500년에 주나라 무왕(또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1908세였다.

이것이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개국시기는 BC2333년이며 신화로 엮어져 있다.
이와같이
중국은 동이임을 부인하면서도 동이족을 그들의 조상으로 삼아 역사를 길게 늘려놓았고 일본은 중국땅에 있던 왜의 역사를

일본역사앞에 붙여 조상들을 찬양하며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고 국민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하므로서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미래의 꿈을 심는 거울로 삼고 있다.

3.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동북아시아의 주도국가였던 유구하고 긴 역사를 짧게 넓은 땅을 좁게
호화로운 사실을 빈곤하게

찬란한문화를 비천한문화로 만들어 놓았으니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역사는 단군조선 이전에는 없었을까 ?

여기에 대하여 우리역사가 아닌 『중국25사』 『사기』권1 오제본기 제1에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를 높이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우리 조상의 위치를 낮추어 기록해 놓은 단군조선 이전의 나라 九黎(구리)의

치우(蚩尤) 천자에 관한 몇가지 내용을 소개한다.


1. 구리(九黎)의 군호는 치우이다.
(公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2. 치우는 고천자(古天子)이다. 황제는 소전(제후)의 아들이다.
(蚩尤古天子 黃帝者少典(諸侯國號)之子

3. 치우는 서인으로 욕심이 많은 자이다.
(三朝記曰蚩尤庶人之貪者)

4. 제후가 서로 침략하는데 치우가 가장 포악하므로 치우는 천자가 될 수 없다.
(按此紀云諸侯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5. 제후들이 찾아와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정벌하지 못하였다.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慕能伐)

6. 치우는 노산의 금을 캐내어 오병을 양성하였으니 분명히 서인은 아니고 대개 제후의 호를 지녔다.
(管子曰蚩尤受盧山之金而作五兵明非庶人蓋諸侯號也)

7. 황제가 섭정할 때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쓰며 동두철액(銅頭鐵額:

  동과 철로 투국와 갑옷을 입은 형상을 의미하였음)에 모래를 먹고 살았다.

또한 오병과 각종무기(刀戟과 大弩)를 만들어 그 위세가 천하를 진동하니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龍魚河圖云 黃帝攝政有蚩尤兄弟八十一人竝獸身人語 銅頭鐵額食沙造五兵丈刀戟大弩威振天下誅殺無道萬民)

8. 황제가 영을 내려 용으로 하여금 치우를 공격케하니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청하여 대풍우로 쫓았다.
(.山海經云黃帝令應龍攻蚩尤 蚩尤諸風伯雨師以從大風雨)

9. 치우가 란을 일으켜 제의 명을 듣지 아니하므로 황제가 제후를 징사(徵師)하여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10.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의 성안에 있으며 높이가 7장이다.
백성들이 10월에 제사하는데 붉은 기가 솟아 올라 비단같아서 백성들이 치우기라 하였다.
부인(견비)의 묘는 산양군거야현에 있다.

11. 중국역사에 기록된 바로 한족과 이민족의 제2차전쟁은 황제와 치우의 탁록에서의 싸움이다.
     황제는 한족의 영추이며 치우는 구려 즉 묘족의 추장이다.


4. 위의 치우천자에 대한 기록들은 너무도 분명하고 생생한 역사의 한토막이다.

중국의 시조인 황제와 상대적 비교를 통하여 치우는 천자이고 황제는 제후의 아들이었다는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후대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황제를 더높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내용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황제와 동시대 인물 치우천자는 우리 사서인 『한단고기』의 『삼성기』와 『태백일사』의 신시본기 및 『규원사화』 등에서

단군조선 이전 환웅시대의 18대왕중 14대왕임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정사인 『25사』의 기록과 일치되고 있는 구리(九黎 : 환웅시대)의 기록이 우리정사인 『삼국사기』와 야사인 『삼국유사』에

없으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5. 결  언)
중국 일본 우리나라의 개국사 기록을 중심으로 검토해보았다.
중국의 역사는 사기를 중심으로 기술하였고 일본은 일본서기에 근거했으며 우리역사는 삼국유사를 기본으로 하였다.

여기에서 공통적인 것은 각기 자기나라의 개국사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미화하고 타(他)의 존재는 약화시켰으며 역사를 과거속으로

길게 늘려 놓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하(夏)나라의 BC23세기보다 1000년을 늘렸고 일본도 1200년 정도의 남의 역사를 자기역사로 차용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역사는 있는 역사도 불확실하고 신화화되어 마치 단군조선은 있는 듯 없는 듯 느껴지도록 되어 있고 그 이전의

역사는 아예 없는 것처럼 되어 있다.

(기자조선 단군출생과 1907세수 왕역대의 기록이 전혀없는 것 등)

현 사학자들은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이외의 사서는 믿을 수 없다고하여 단군조선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불신하고 있다.

위서(僞書)라는 이야기이다.

단군조선시대의 왕역대(47대)를 적은 사서는 『환단고기』 의 단군세기를 비롯하여 『규원사화』『단기고사』가 있으니 그 시대에

관한 여러 기록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 이전의 기록(九黎)도 『중국의 25사』와 『단기고사』의 내용이 같으니 구리(九黎)의 역사도 인정해야 된다.

문제는 구리(九黎)이전의 역사, 즉 환국의 3000년 역사인데 이것은 다분히 신정의 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이며 인접국가들도 모두 신정시대를 사화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만 그 기록을 외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출생. 고구려의 주몽. 가라의 김수로. 심지어 제주도의 고량부 등의 많은 설화들도

존재하는데 만년전 신화라고해서 사서에 나와 있는 기록을 위서라는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이 갖지못한 그 이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주역국가로서 인접 여러 족속이 파생되어 나간 원

동이민족임을 자랑스럽게 가꿔 나가야 할 것이다.

(새로밝혀진 우리역사의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