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근세조선

조일전쟁 개전초기 김누르하치의 왜군격퇴제안 거절한 이씨조선정권

설레임의 하루 2009. 7. 22. 03:50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신할머니          http://cafe.daum.net/mookto/GXe0/157

 

 

 

같은 핏줄 여진족(대진국 발해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한겨례형제)의 김누르하치가 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에 놓인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자기핏줄을 믿을 수 없다고 내 치고, 차이나족을 어버이로 받들며 상국 명나라 구원군만 목빠지게

기다리는 이씨조선정권의 난맥상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서기1592.9.에 후금의 김 누르하치의 참전을 받아 들였다면 전국토가 초토화 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처참한 비극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여진족은 우리를 어버이로 받들고 조공을 하고 있었고, 이조정권을 황조라고 떠 받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조정권의 뻘짓으로 불과 30십년 남짓한 후에 여진족의 청나라에게 처참하게 도륙되고 군신관계을 맺고 맙니다.

 

뿌리뽑인 정권이 남에게 운명을 맡기고 남의 정신으로 산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지금도 기독교 세력을 주축으로 한 매국노세력이 정권을 잡고 미국을 어버이 나라로 보고 이에 의지하는 정신나간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조시대는 차이나족 변태유교 성리학 세력이 그러했구요.

 

깨어있는 푸른역사 http://cafe.daum.net/mookto

 

임진왜란 개전원년, 선조실록에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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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0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9월 17일(갑술) 4번째기사
여진이 왜적을 정벌하는 데 돕겠다고 한 것에 대해 명나라 병부와 주고받은
자문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자문에,

이번에 여진(女眞)건주(建州) 에 사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이 하는 말에 의거하건대 

우리들의 땅은 조선 과 경계가 서로 연접해 있는데 지금 조선왜노(倭奴) 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이다.

노아합치(奴兒哈赤=김누르하치) 휘하에 원래 마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도독(都督)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좋은 사람이니 반드시 위엄찬

화를 내어 정병을 뽑아 한겨울 강(江)에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왜노 를 정벌 살륙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이다.’ 했습니다.

이 고마운 말과 충의가 가상하여 그들 말대로 행하도록 윤허함으로써 왜적의 환란 물리치고자 하나 단지 오랑캐들의 속사정은 헤아릴 수가 없고 속마음과 말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니 선뜻 준신하기 어렵습니다.”

하였고, 우리 나라의 자문에는,

“본인은 자문의 내용을 알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명조(明朝)에서 우리가 왜구 에게 함락된 것을 불쌍히 여겨 구제해 줄 것을 생각하여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활한 오랑캐들의 흉악한 속임수로 하는 말이라도 구환(救患)해 준다고 언급하면 또한 모두 즐겁게 듣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랑캐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려운 염려가 있어 선뜻 믿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요동 의 무진아문(撫鎭衙門)에서 은밀히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되 아울러 걱정해야 할 별도의 흔단이 없는가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첫째로는 엄격하게 약속을 맺어 소요를 일으키지 못하게 했고, 둘째로는 조금이라도 방애되는 바가 있으면 바로

군사의 출동을 정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계책을 세우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전후로 받은 은혜는 죽더라도 머리를 서쪽으로 둘 것이며 결초보은(結草報恩)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본국의 서북쪽 일대는 건주(建州) 삼위(三衛)와 국경이 연접해 있어 조상때부터 누차 그들로 인한 환란을

받았습니다.

명조(明朝) 열성(列聖)께서 만리를 훤히 내다보는 명견(明見)에 힘입어 성화(成化) 15년에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 께서 크게

화를 내시어 군사를 출병시키면서 본국(本國)에 칙유(勅諭), 힘을 합쳐 정벌하여 그들의 두목인 이만주(李滿住) 를 잡아

목베었습니다.

그로부터 저 적도의 여얼(餘孽)들은 늘 분한 생각을 품고 매번 저희 나라 압록강 연안에 이르러 노략질을 자행하였습니다.

본국이 항상 국경의 수비에 애쓴 보람으로 겨우 막았습니다만, 이들 오랑캐가 본국에 원한을 품은 것은 한 시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사나운 마음으로 틈을 엿보아 온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들 무리인 마삼비(馬三非) 등이 왜적을 토벌한다는 이름을 빌어 병부에 아뢰면서 겉으로는 양순하게 돕는 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물어뜯으려는 계책을 품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발생할 것입니다.

본인은 종묘와 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선조의 능묘를 보전하지 못하여 근심과 울분이 병이 되었으나 더욱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채 구차한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적세가 사방에서 핍박하고 있으므로 중국에서 끝까지 불쌍하게 여겨 구원하여 주기만을 믿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즉시 흉도(凶徒)에게 분명한 칙서를 내려 간계를 시원하게 깨뜨려 바깥 오랑캐가 넘보려는 조짐을 막고 급히 왕사

(王師)를 진발시켜 천토(天討)를 보여줌으로써 중국 정토(征討) 위엄을 베푸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30권 16장 A면

【영인본】 21책 544면

【분류】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宣祖 30卷, 25年(1592 壬辰 / 명 만력(萬曆) 20年) 9月 17日(甲戌) 4번째기사
여진이 왜적을 정벌하는 데 돕겠다고 한 것에 대해 명나라 병부와 주고받은 자문

〔○〕兵部令 遼東 都司移咨, 有曰:

今據 女眞 建州 貢夷 馬三非 等, 告稱: “本地與 朝鮮 , 界限相連, 今 朝鮮 旣被 倭奴 侵奪, 日後

必犯 建州奴兒哈赤部 下, 原有馬兵三四萬, 步兵四五萬, 皆精勇慣戰。 如今朝貢回還,

對我都督說知, 他是忠勇好漢, 必然威怒, 情願揀選精兵, 待嚴冬氷合, 卽便渡江, 征殺 倭奴 , 報效皇朝。”

據此情詞, 忠義可嘉, 委當允行, 以攘外患, 但夷情回測, 心口難憑, 況事在彼中, 遽難准信。

本國有曰:

當職, 爲照天朝矜愍小邦, 陷於 倭寇 , 思所拯濟, 靡有餘力。 雖黠虜兇詐之說, 而有及於救患,

則亦皆樂聞而許之。 猶慮夷情叵測, 謂難遽信。 令 遼東 撫鎭衙門, 密議施行。 兼察有無別患釁端。

一則曰嚴加約束, 不許攪擾, 二則曰稍有窒礙, 卽行寢絶, 雖父爲子謀, 無以加此。 當職前後受恩, 死且西首,

結草圖效。 仍念小邦, 西北一帶, 與 建州 三衛, 境界相連, 自祖先以來, 屢被其患。 欽蒙列聖明見萬里,

乃於成化十五年, 憲宗純皇帝 , 赫怒發兵, 勑諭本國, 協行征討, 捕斬渠魁 滿住 。 自後彼賊餘孽, 常懷憤恨,

每到本國沿江地面, 竊發爲寇。 小邦常勤防戍, 僅得遮遏, 此虜蓄怨小邦, 非止一世, 悍昧伺隙, 積有年紀。

卽有其黨 馬三非 等,

假名征 , 稟告兵部, 陽示助順之形, 陰懷狺噬之計。 若遂其願, 禍在不測。 當職廟社爲墟, 先墓不保,

憂憤成疾, 益無以自效, 而性命苟存。 賊勢環逼, 只恃天朝終始哀憐救活。 乞卽明飭兇徒, 痛破姦計,

杜外胡窺覘之漸, 急進王師, 快施天討, 宣中國征討之威, 不勝幸甚。

【태백산사고본】 15책 30권 16장 A면

【영인본】 21책 544면

【분류】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법(兵法)

 

 

 

 

 출처: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