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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복자 치우천황

설레임의 하루 2009. 7. 1. 03:46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신할머니     http://cafe.daum.net/mookto/GXdr/20

 

 

 

 


위대한 정복자 치우천황


치우(治尤 혹은 蚩尤)는 상고시대(BC2700년경)의 인물로서 이른 바 '천하융사지주(天下戎事之主)'라고
평가되던 전설적 영웅이다.

이에 관해서 중국측과 우리측 모두 관련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중국측 기록에는 매우 곱지 않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러하다.

'치우는 노산의 쇠로써 오병을 만들었다. 그런데 치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중략)---
황제가 섭정을 할 때 치우와 그 형제 81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였다.
구리 머리에 소의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 병장기로 칼·창·큰활 등을 만들어 천하에 위세를
 떨쳤다.'
--------<사기(史記)>

사기의 내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이 모래와 돌을 먹었다니. 그러면 괴물이었단 말인가?

사마천은 왜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그 까닭은 치우가 다름아닌 동이(東夷)겨레의 수장이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록을 통하여 치우에 관한 몇가지 단서를 읽을 수 있다.

적어도 치우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상고시대 금속제 병장기를 만들었음은 고도의 기술 수준이 바탕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 우리 겨레의 기술수준이 높았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매우 높은 금속관련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관한 우리측의 기록물을 보면 치우와 동이겨레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우리측 기록에 치우는 일명 '치우천황'으로 통칭되던 존재였다.

그리고 치우천황의 치적을 몇가지로 추려보면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병(作兵) 및 연병(鍊兵), 그리고 뛰어난 숭생중물

(崇生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한다. 교통의 발달을 꾀한 것이다,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기>의 일부 내용처럼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나 이때 치우천왕은 구야(九冶)라고 하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용하였다고 한다.

제련산업 일으키고 기술부대 운용도 또한 작병이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음을 말하는 것이요,

연병이란 강력한 군대를 길렀음을 뜻한다. 그리고 숭생중물이란 치우천황의 치도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온갖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황은 그야말로 문무겸전의 이념으로 겨레의 앞날을 열고자 땀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이겨레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동이겨레가 늘 외경하던 '밝은 하늘의 뜻'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이단성을 주도하던 인물이 한족(漢族)인 공손헌원이었다.

그리하여 치우천황은 공손헌원과 일전을 별렀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공손헌원족의 한갈래인 '소호'의 부대와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은 각종 기술과 기상을 조화하여 커다란 안개를 펼쳤다고 한다.

'소호'의 부대는 앞을 가리지 못한 채 괴멸하여 갔다.

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공손헌원' 부대는 치우천왕측에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물과 불을 마음껏 다스릴 줄 알았던 치우천황측을 도저히 담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치우천황의 놀라운 웅략(雄略)이 그들을 압박하였다.

이른바 '분출사도(分出四道)'라고 하는 전법이 공손헌원 부대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치우측은 '돌날림치게'라는 신전투장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치우천황부대는 대승하였다. 뛰어난 전법과 신장비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천황은 겨레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우천황은 각종의 기와에 '도깨비'무늬라고 하여 남아있다.

어느덧 치우천황의 영웅적 자취는 엉뚱한 도깨비 환상으로 옮겨진 것이다.

어쨋거나 치우천황의 웅략은 소중한 우리의 정신자산이 분명하다.

몹시 어려운 오늘에 있어 더욱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전쟁의 신, 치우천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한임(桓因. 환인)은 하늘과 땅을 열면서 빛으로 온누리를 밝히고 아사달(새땅. 시작하는 땅)을 중심으로
'한국'을 열어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고는 기원전 7199년부터 3899년에 이르기까지 7대 3300여 년에 걸쳐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후 이를 이어받아 한웅(桓雄. 환웅)이 신시(神市)를 세우고 '배달'(밝달. 기원전 3898년부터 2333년까지 18대1565년에 이름)을

다스렸다.

배달국은 그 강역이 북으로는 바이칼호 일대, 남으로는 한반도와 서해서안일대(지금의 중국 해안지역),
서쪽으로는 몽골사막,

동쪽으로는 태평양까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이르렀다.

서기전 2707년에 이르러서는 치우천황(蚩尤天皇)이 배달의 제14세 한웅으로 오른다.

그는 자오지천황(慈烏支天皇)으로도 불리었으며 숱한 전쟁에서 단 한차례의 패배도 없이 전승을 거두어 우리 민족 최고의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지고있기도 하다.

치우가 재위에 오를 무렵, 당시 한민족은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사방의 영토에 대한 중앙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주위 여러 거수국

(제후국)들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특히 신농씨의 후손이었던 유망(楡罔)이 왕위에 오르면서 유사 이래 내륙에 살아오던 화산족(華山族. 중국민족의 조상)을 이끌고

공상으로 선공해 왔다.

일찍이 제10세 갈고(葛古) 한웅이 여와의 왕위를 빼앗은 신농(神農)을 화산족의 최고 통치자로 임명할 당시신농이 그 자리를

보전하는 대가로 약속한 공상(空桑)의 동쪽 영토를 영원히 넘지 않겠다고 한 국경협약을 어긴 것이다.

이에 치우는 전쟁을 선언하고 활과 창, 갑옷과 투구 등을 만드는 한편쇠로 만든 칼 등 여러 새로운 신무기로
무장했다.

아울러 전 배달민족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갈로산(葛盧山. 葛石山)으로 집결시켰다.

특히 그는 신농과 유망이 원래 한겨레였으나 화산족 세력을 등에 업고 이제 영토까지넘보는 것을 응징하고자했고 이 참에 한민족의

지배력과 영토도 확고히 해두고자 했다.

우선 그는 9명의 장군 아래로 군사를 배치하고 이를 다시 9진영으로 나누어 81명의 장군과 함께 탁록
( 이수평원·기주평원. 평양)으로

진격했다.

이에 유망편에 서 있던 탁록왕의 군대는 한겨레에게서 배운 축성법을 이용하여 성을 쌓은 뒤 치우의 기마부대를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이 아닌 평지에 허술하게 쌓은 성이라 신무기로 무장한 치우의 군대는 성문을 격파하고 반나절만에점령해 버렸다.

첫 전투였지만 치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에 따라 각 곳의 거수국들 중 일부는 바로 항복하고 일부는 싸우다 항복하였다.

그 결과 '탁록전'의 승리 이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아홉 제후국이 치우에 복속하고 충성과 조공을 맹세했다.

이에 유망은 공상으로 수도를 옮기고 성을 쌓아 대비했다. 아울러 소호(少昊)를 보내 치우를 상대케 했다.

그러나 소호가 치우의 군대보다 2배나 많은 화산족을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전략에 뛰어났던 치우인지라
과보와 형요(形夭. 후일 그는

중국 남부지역 정복에 성공하고 티벳까지 정벌하여 800년간 다스렸다)로 하여금염초와 폭약을 설치한 다음 태산(泰山)으로 유인하여

격파해 버렸다.

치우군은 일단 소호의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 마치 패하여 도망치듯 하다가 화산족이 태산으로 모두 쫓아 들어옴과 동시에, 다시

뒤돌아선 치우가 손을 올려 우뢰와 같은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큰 소리가 나고 연기가 자욱해지면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치우가 안개와 바람을 일으킨 것으로 안 소호와 화산족이 후퇴하려 했으나 서로 짓밟히고 넘어지는가 하면 치우군의 돌을

굴리고 활을 쏘는 공격에 거의 전멸당해 버렸다.

사실 치우는 일부러 도망치듯하면서 적을 유인하여 모두 태산의 계곡으로 몰아 넣은 뒤 바람을 등에 업고,
마른 염초를 태워 그

연기를 바람과 함께 계곡으로 불어 넣고 폭약을 써서 그 놀라운 소리를 만들어 내어 이를 처음 겪었던 화산군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아무튼 이후부터 적은 치우가 천둥과 안개를 일으키고 산과 물도 바꾼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에 유망은 공상으로 도피해온 소호와 함께 도망해 버렸고 천하는 평정되었다.

이후에도 치우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고 화산족과 하족계열의 12거수가 항복해오자 이들도 모두 자신의 영지로 편입했다.

그러던 중 중국민족계인 공손씨 헌원(公孫氏 軒轅)이 화산족과 하족을 화하족(오늘날의 중국민족)으로
하나로 단결시키고 군병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이후 동양 역사의 쟁탈전이 10여년에 걸쳐 70여회의 대회전을 치르며 계속되었다.

물론 치우는 모두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길고 긴 10년 전쟁을 마무리했다.

또한 헌원이 항복하자 치우는 헌원을 조선의 5제(五帝)벼슬 중 으뜸가는 벼슬인 황제(黃帝)로 명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한겨레에 의해 지배받던 화하족과 그들의 영토가 중국인의 자치권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후 치우는 수도를 청구(지금의 산둥반도 일대)로 옮기고 그의 치세를 열어 갔다.

치우는 전쟁을 하기에 앞서 항상 끊임없이 신병기를 개발하는 한편 전쟁에 임해서는 지형과 자연조건까지도 이용했다.

아울러 당시 군사력의 상징이 되는 철기무기를 만들어 세상을 압도했다.

원래 철(鐵)의 옛글자가 금(金)과 이(夷)를 합친 글자였음에 비추어 철의 생산기술이 우리 한겨레로부터 나왔고 치우시절에는 야금술

(冶金術)도 선진적이어서 쇠로 만든 칼 등의 무기로 무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전략과 기마부대를 중심으로 한 용병술은 탁월해서 가히 그를 전쟁의 신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그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전한다.

특히 치우의 활동무대가 지금은 중국의 영토인지라 그는 중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그들은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모시고

사방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

지금도 우리는 최고위층 사람을 우두(牛頭)머리라 하는데 이는 당시 치우가 전쟁에서 항상 동(銅)으로 만든 투구에 양쪽으로 쇠뿔

모양의 장식을 달고 다닌데서 유래되었다.

즉 무리의 대장을 '치우처럼 머리에 뿔이 난 자'라고 여긴데서 나온 말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위와같은 말들이 결국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우선 중국의 정사인 "25사" 제일 첫부분 "사기"의 기록을 보자.
『중국의 시조는 "황제헌원"인데 이웃나라 "치우(蚩尤)"라는 사람과 기원전 2700년경 "탁록"에서 전쟁을
하였다』고 하며 치우천황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그 요점은,

1.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 자가 없었다
2. "치우는 고천자이며, 황제는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다"
3. 치우의 형제는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을 하고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동두철액,
銅頭     鐵額)이며

  모래로 밥을지어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4. 구리의 통치자는 치우다
5.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 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 올라

  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또한 그 부인 견비의 묘는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6.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일본의 사학자는 물론 한국의 사학자들마저 단군조선조차 신화라고 우기는 판에 위와 같은 중국의 사가에
의해 거꾸로 기술된 기록을

보더라도 그 진실은 낭중지추모양으로 다음과 같이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즉,
1. 단군조선(고조선 : 기원전 2333년) 이전에 중국 정사에 나오는 "구리국"이 있었으며 그때 14대 천자인
치우천자께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헌원과 전쟁을 하였다.

2. 황제헌원이 중국역사의 시조라고 표현해놓고서는 뒷편에서는 황제가 (구리국의) 제후국의 아들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결론은,

구리국 14대 천자이신 치우천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제후국의 아들이었던 헌원이 반기를 들어,
치우천자께서 징벌을 하자

헌원은 이후 10여년 동안 70여회의 전쟁을 하며 한번도 이겨보질 못하고 매일밤 거소를 옮겨다니며 살다가 현 중국땅의 서쪽으로

쫓겨나 지나(중화국)족의 시조가 되었다.

출처 :가우리의부활 원문보기 글쓴이 : 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