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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황은 누구인가?

설레임의 하루 2009. 7. 1. 03:44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신할머니     http://cafe.daum.net/mookto/GXdr/19

 

 

 

서기전 2707년(갑인년) 우리 민족 불세출의 대영웅 자오지 한웅이 배달나라 제

14세 한웅 신시 전통을 이었다.

이 자오지 한웅이 바로 치우천왕(단군 14대)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치우천황을 전쟁의 신, 용병술의 천재로 받들어 모시었다.

치우천왕은 전쥬신 민족을 철로써 활, 창, 갑옷, 투구의 신무기로 무장시키고

갈석산(갈로산)으로 집결시켜 탁록으로 진격해 함락을 시켰다.

이로 인해 아홉 제후들은 쥬신에 복속하게 되지만 유망은 또 다시 전쟁준비와

함께 소호장군을출전시키게 된다.

당시 소호장군의 군대는 치우천황의 군대의 2배였다.
그러나 치우천왕은 태산(염초, 폭약)으로 유인해 몰살시켰다.

후에 한인(漢人) 역사가들은 치우는 천둥과 안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산과 물도 바꾼다고 역사책에 기록했다.
화족중에 공손씨 헌원이 등장해 군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천왕군의 10배가 넘는 군병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들 군병이 화산족, 화족이었다.

(화산족, 화족 - 중화족, 화하족) 이들과 치우천왕은 70여 회의 전쟁을 했다.

그러나 치우천왕에게 번번이 짐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치후천왕은 헌원을 쥬신의 수석 제후국왕인 황제(쥬신의 수석 제후국 뜻함)로

임명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영지를 주었다.

10년간의 전쟁은 끝났으나 화산족, 하족은 동이족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헌원이 황제로 임명됨으로써 중국의 영토가 중국인들의 손으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천왕의 머리엔 뿔이 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치우천왕은 뿔이 둘 달린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최고위층 사람을 우두머리라 하고 있다. 우두란 소머리를 말하는 것이다.

관련기록
치우 천왕과 황제헌원
치우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황제헌(BC2692~2562년경)은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삼황 중에서도 황제헌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 중국 정사의 첫 번째 책인 사기에서도 첫머리를 황제헌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그 후의 제왕들도 대부분 그 뿌리를 황제헌원과 연결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황제헌원에 대해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전의 다른 지파를 공손이라 하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기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나온다.
“황제는 소전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이며 이름은 헌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전은 배달국에서 갈라져나간 사람으로서 바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다.

그러한 소전에서 다시 갈라져나간 후손중의 한 사람이 공손이며 그 공손씨의 후손이 바로 황제헌원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 천왕사이에 수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던 것은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헌원에 앞서 치우 천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삼성기 상편의 기록을 보자.
“신시 말기에 치우 천왕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
그리고 삼성기 하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몇 대를 지나 자오지 환웅에 이르렀다. 신과 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 천왕이라 불렀으니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14대 치우 천왕은 철을 캐내어 처음으로 갑옷과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었으며 투구와 갑옷을
처음 본 중국인들은 두려워하며 머리는 구리로 되었으며 이마는 쇠로 되었다하여 여러 문헌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한 무시무시한 괴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쇠를 캐내어 강력한 병장기를 만든 것이 배달국에서 비롯되었음은 쇠 철鐵자의 옛 글자를 보아도 알 수 있다.

鐵의 원래 글자는 金夷(金변에)로서(金+夷→金夷→鐵) 처음 쇠를 다룬 것이 동이족임을 나태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이 이러한데도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치우와의 전쟁에서 헌원이승리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며 고의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의 진원지격인 사기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당시 치우의 군대에게 쫓겨다니던 헌원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 늘 병사로 하여금 병영을
호위하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한 헌원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녔으며 또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치우의 군사들때문에 막사밖에는 늘 보초를 세워 두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 후로 치우 천왕은 중원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질 만큼 사후에까지 그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치우와 헌원의 싸움도 결국 같은 동이족 간의 전쟁이었다.

치우 천왕과 청구국
치우 천왕이 중원을 개척하여 넓힌 뒤에 그 땅을 청구국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중심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이었다.

서량지 교수도 중국사전사화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동이족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여 요녕성,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호북성등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대륙의 핵심적인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중원 대륙의 거의 전부를 여러 갈래의 동이족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다만 중국인들이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시대에 따라 이들을 다르게 호칭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학자 왕동령이 저술한 중국민족사의 기록을 보자.
“4천년 전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등지를 이미 묘족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이며 군주는 치우이다.”
묘족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는 구려, 구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사기 정의에서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 하였고 사기 집해에서는 “치우는 옛 천자
이다.” 라고 하여 치우 천왕이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한서 지리지에는 “치우 천왕의 능이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에 있다.”고 했으며 사기 집해에는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 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 천왕의 능이 산동성에 있다는 것은 청구국의 활동 중심지가 산동성이었음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치우 천왕은 고대 중원에서 군신, 병주로 추앙되었는데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깃발처럼 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

또 깃발 모양을 한 혜성을 고대로부터 치우기성이라 하여 역시 그 혜성이 출현하는 곳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유방은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하였다고 하며 그 후 한나라를 세운 뒤에는 치우의 사당까지 세웠다고 한다.
“축관에게 명하여 장안에 치우사를 세우도록 하고 사관, 축관, 여무를 두었다.”
출전하는 장수가 치우에게 제를 올리는 풍속이 생긴 것은 치우가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여 패배를 몰랐고 헌원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기 때문으로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중국 측의 기록대로 치우가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해 사로잡혀 죽었다면 어찌 그런 인물을군신으로 추앙할 수 있겠는가. 
한편 치우 천왕이 중원을 평정한 뒤 도읍한 곳을 태백일사에는 “하남성의 진류이며 현 회양”
이라고 말하고 있다.

치우 천왕의 능이 있다는 산동성을 후대에 일어난 모든 왕조에서는 청주라 하였는데 이는 고대청구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며 그래서인지 산동성은 물론 인접한 지역의 지명에는 청靑(혹은 淸)자가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여기서 다시 청구국에 대한 산해경의 기록을 살펴보자.
“동쪽으로 300리를 가면 청구산이라 하는데 그 남쪽에는 옥이 많으며 북쪽에는 청확이 많다.

짐승이 있는데 그 형상은 여우과 같고 꼬리가 아홉이다.”
여기서 청확이란 푸른 진사. 진사는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채색재료로 쓰기도 하고 약용으로 쓴다.
“동구산이 있으며 그곳에 군자국이 있다.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다.”
“청구국이 있으니 그곳의 여우는 꼬리가 아홉이다.”
환웅이 처음 태백산 신시에 도읍한 이래 14대 환웅인 치우 천왕에 이르러 중원을 개척하며 옮겨와 나라의 이름을 청구국이라 했던 것이며 환웅의 위는 18대까지 이어졌으므로 이 무렵은 배달국의 말기에 해당한다.

위의 기록에서 청구국에만 있다는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가 구려, 구이를 일컫는 말이고 염제신농편에서 등장하는 아홉 개의 우물과 상통한다 볼 수 있다.

출처 :가우리의부활 원문보기 글쓴이 : 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