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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나라를 연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는 동이족 신농의 후예다!

설레임의 하루 2009. 5. 22. 04:13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10007223

 

 

 

 





*여상 강자아는 동해인으로 염제신농의 후예다.

학문이 깊고 해박해 商纣手下에 어떻게 周臣이 되었는지 몇가지 전설중 일치된 전설이 있다.

주문왕이 낚시대를 드리운 여상을 만나 면담을 한 후 흥분해 자신의 부친 태공(太公)이 반드시 주땅

(周地)에서 성인을 만나게 되리라 하며 그를 통해 주가 장차 흥왕하리라 하니 당신이 바로 그 성인이신

가? 우리 가문은 아주 오랫동안 당신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했노라!고 했다.

이에 그의 이름이 태공망(太公望)으로 칭해졌으며 국사(国师)가 되었다.

주문왕은 여상의 보좌를 받은 후 더욱 덕을 쌓고 선행을 했으며 인물(士人)을 끌어들이고 신예(信誉)

를 강구(讲究)하고 백성을 즐겁게 하니 제후중에 성망이 높았다.

아울러 밖으로 정벌에 나서 서방의 견융(犬戎), 밀수(密须;甘肃宁台), 여국(黎国) 등을 정벌했다.

 

주문왕이 여태공에게 어떻게 천하를 얻을 것인가 묻자, 여태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왕자의 나라(王者之国)는 백성으로 하여금 부유하게 하며, 패자의 나라(霸者之国)는 사인(士人)만을 부유하게 하며, 명맥만 가까스로 유지하는 나라는 사대부(使大夫)만 부유하게 합니다. 무도한 나라는 국고가 부유하여 위로는 넘치고 아래로는 샙니다" 이에 문왕이 당신말이 극히 지당하오 하고 곧 창고를 모두 열어 돈과 식량을 백성구제하는데 모두 썼다. 주국의 사업은 날로 흥성했으며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으니 천하의 땅이 이미  2/3가 되었다. 후에 문왕이 죽자 무왕이 계승하니 여상은 스승(师)이 되니 존칭하여 상부(尚父)라 했다. 주공단(周公旦)이 보좌하고 필공(毕公) 등이 도와 문왕의 사업을 계속했다. 여상의 보좌아래 맹진에서 제후를 모이게 하여 주왕(纣王) 군대와 싸운 목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왕을 자살케 하고 상조(商朝)를 멸망시켰다.

 

(周 吕尚;姜姓,也叫姜尚,字牙,东海人,据说是炎帝的后代。学问渊博,曾在商纣手下做事,关于他如何成为周臣,有几种传说,但几乎一致的说法是﹕直到他年老才在垂钓巧遇周文王,周文王和他交谈,发现他见识非凡,非常兴奋地说﹕「当初我的太公曾经说过一定会有圣人到周地,周将靠他而兴旺。您就是这位圣人吗 ? 吾家盼望您很久了 !」于是称他为「太公望」,立姜尚为国师。周文王的得吕尚的辅佐后,更为积德行善,招徕士人,讲究信誉,和悦百姓,在诸侯中声望更高。并向外征讨。首先征讨了西方的犬戎,密须(甘肃宁台)和黎国等。周文王问吕太公如何才能得天下 ? 吕太公回答说﹕「王者之国,使人民富裕。霸者之国,使士人富裕。仅存之国,使大夫富裕。无道之国,国库富裕,这叫做上溢而下漏。」文王说﹕「你说得太好了。」马上打开仓库,拿出钱粮赈济穷人。周国的事业日益兴盛,势力更加扩张,天下的土地已是三分有其二了。 后文王逝世,武王继位,以吕尚为师(尊称为师尚父),周公旦为辅,毕公等为主要助手,继续文王的事业,在吕尚的辅佐下在盟津会诸侯,商讨纣王,在牧野和纣王的军队会战,太公带头挑战,纣王大败,纣王自焚而死,商朝灭亡。周武王建立周王朝。在周武王登基的第三天,太公向周武王讲述了《丹书》中以仁爱治国的话,然后就被武王封到齐国。周成王时吕太公协助周公平定武庚的叛乱。成王下令齐国可以对有罪的诸侯进行征伐,齐国逐成为诸侯中的强国,吕太公治国赏罚分明,又努力发展渔业,盐业和手工业,使齐国成为诸侯中的富国。传说吕太公去世时百余岁,葬在稿京。伊尹辅商,吕尚辅周,都是开国元勋,位及人臣,功业卓著,所以后世把他们成为「伊吕」。注﹕以上是摘自《史记》)

주무왕은 태공을 왜 제(齊)에 봉했을까. 우선 주무왕의 부인이 태공의 딸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주무왕의 장인은 바로 강태공이 되며 왕실의 측면에서 보자면 주(周)왕실은 바로 동이족 강(姜)씨 핏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앞서 문왕의 조상 고공단보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소개하면,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緜)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 「맹자」<양혜왕(梁惠王)> 편에 설명한 ‘탕 임금이 갈을 섬겼고(湯事葛)  문왕은 곤이(昆夷)를 섬겼으며 태왕(太王)은 훈죽(獯鬻)을 섬겼다( 文王事昆夷 太王事獯鬻:국내본은 대, 중국본은 태)’라는 대목이다.(험윤과 곤이가 모두 동이족이므로 곤이와 험윤을 섬겼다는 말은 곤이 험죽의 피 붙이 백성의 바운더리내에 문왕과 태왕이 있었다는 얘기이며 문왕의 뿌리 고공단보가 이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뿌렸으므로 부계, 모계 할 것 없이 모두 동이혈손인데다 무왕이 강태공의 딸과 결혼해 주왕실의 왕통을 전했으니 비록 공자의 존주 춘추사관이 주왕실을 화하사관의 벼리로 삼았다 하더라도 공자 자신이 동이혈통의 은나라 후손이었듯이 주왕실은 엄연히 동이족 왕실이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대목은 맹자가 중화사관의 입장과 명분론에 입각해 오직 인자(仁者)만이 대국으로 소국을 섬길 수 있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사관을 올바로 정립해서 바라보면 주나라와 단군조선을 겹겹이 싸고 있는 동이 제 족의 강력하고도 방대한 문화를 읽을 수 있고 지나족에 대한 한겨레 조상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대목이 어디 있겠는가.

「시경」<출거편(出車篇)> 에 물리쳐 없애 설명하기를 ‘혁혁남중 험윤우양(赫赫南仲 玁狁于襄)이라 하고 또 설명하기를 ‘혁혁남중 박벌서융(赫赫南仲 薄伐西戎)’ 이라 했으니, 「시경」 서문에 바친 시와 「일주서(逸周書)」서(序)는 서로 일치하는데 이들 모두는 문왕 때의 일로, 북에는 험윤(玁狁)이 있고 서쪽에는 곤이(昆夷)가 있다고 착각했다.

혁은 빛날 혁이니 혁혁남중이라 함은 남중을 찬양하는 말이다. 박(薄)은 엷을 박 혹은 깔보고 싫어할 박이요 어조사로는 비로소라는 뜻이니 결론적으로 그들 쪽에서 볼 때 껄끄러운 서융을 공벌했다는 뜻이다.

강태공에 대한 시속말이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마씨(馬氏) 부인과 결혼해 살던 젊은 시절과 가난으로 인해 이혼한 이후 고난의 길을 걸었던 가난했던 인생 전반부 80세시절과, 문왕을 만나 주(周)의 토대를 놓고, 무왕을 도와 상멸흥주(商滅興周)의 토대를 놓고, 다시 제(齊)땅에 봉해져 800년 제국흥왕(齊國興旺)의 터를 놓은 80년 세월(達八十)을 일컫는 말이다.

<공총자(孔叢子)․기문(記問)>에 기재된 기록을 보면, 강태공이 위수(渭水)에서 고기를 낚을 수 없는 민바늘 3600개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다가 문왕을 만난 것이 80세가 넘어서였다고 나온다(姜太公釣于渭水遇文王時年已八十歲) 또 청대(淸代)의 고가상(顧家相)이 지은  <오여독서진수필(五余讀書塵隨筆)>에서는 ”상부(尙父)가 문왕을 만났을때, 나이가 이미 80을 넘었다“고 말한다.

강량부(姜亮夫)라는 사람이 쓴 기록은, “일찍이 ”역사적으로 칭하기를, 강태공의 딸이 무왕(武王) 희발(姬發)과 배필로 처(妻)가 되어 성왕(成王:周의 2대 왕)을 낳았다. 무왕(武王)이 죽었을때 성왕(成王)은 겨우 6-7세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로 보면 공자가 화샤(華夏)의 뿌리이자 존주(尊周) 유가(儒家)의 주춧돌로 내세우고 있는 주(周)나라 역시 동이족(東夷族) 국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강량부(姜亮夫)는 상주(商紂)를 멸할 시절에 강태공은 80-90세의 노옹은 아니지 않았겠느냐 말하고 전국시대의 염파(廉頗), 삼국시절의 노장군 황충(黃忠)의 예처럼 70세 정도가 타당하지 않을까하는 견해를 피력했다는 점도 아울러 전한다.  

강태공이 묻힌 장지(葬地)는 그 주장하는 바가 모두 같지 않다. <사기(史記)․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집해(集解)>는 <예기(禮記)>를 인용해, “태공은 영구(營丘)에 봉해졌으며, 따른 것이 5세에 미쳤으며, 모두 주(周)로 되돌려져 묻혔다”고 말한다.


한편,  훈고학자 정현(鄭玄)은, “태공(太公)이 봉작을 받고 태사(太師) 직에 머물다가 죽어서는 주(周)에 묻혔으나 5세(世)가 지나 제(齊)에 매장되었다”고  하며, 어떤 이는 강태공이 동 쪽 제나라로 갔다가 다시 서쪽 주나라로 돌아와 태사(太師)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길보(李吉甫)의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 기재하기를, “강태공(姜太公) 묘(墓)는 섬서(陝西) 함양(咸陽)현 동북 10리에 있다. 그러나 태공묘가 (산동성) 임치(臨淄)에 있다는 설도 있다.

삼국(三國)시대 지어진 <황람(凰覽)>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여상총(呂尙冢)이 임치현(臨淄縣) 성남(城南)에서 10리를 가면 있다“고 한다. 현재 산동성 임치(臨淄)에 있는 강태공 의관총(衣冠冢)은 후인이 만든 것으로 그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강태공이 봉해진 영구(營丘)가 어느 지방인가에 대한 연구도 다양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엄청난 지면이 필요하므로 생략하고 간단히 눈에 띄는 주장만 요약한다. <괄지지(括地志)>에는 “영구(營丘)는 임치(臨淄) 북(北) 백보(百步) 성(城) 밖에 있다”고 하고,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임치(臨淄) 성(城) 가운데 언덕(丘)이 있는데, 치수(淄水)가 그 앞으로부터 용출해 그 좌측으로 흘러 영구(營丘)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제군(齊郡) 임치(臨淄) 조(條) 주석에 신찬(臣瓚)을 인용해 말하기를 “임치(臨淄)는 곧 영구(營丘)”라 하는데, <사기(史記)․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는 태공시절에는 제국(齊國)이 지금의 창락(昌樂)현 동남 영릉성(營陵城)인 영구(營丘)에 도읍했다고 하며,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영구(營丘)는 곧 영릉(營陵)이라고 말한다.

근현대사학가도 영구의 위치비정(比定)에 대해 일치하지 않아서, 곽말약(郭沫若)은 영구(營丘)가 임치(臨淄)라 하고, 범문란(范文瀾)은 창락(昌樂)이라 말한다. 또 근래 임치 고성 부근에서 발굴된 지하 고고학 자료를 통해 한신령(韓信岭)은 수광현(壽光縣) 괘송대설(咼宋臺說), 수광(壽光) 장대(臧臺)유적지설을 제출하기도 했다. <창락현지(昌樂縣志)>에 기재하기를, “영구(營丘) 고성(故城)은 원래 외성과 내성의 구분이 있었는데, 내성 북쪽에 외성을 널리 20리(8km)나 둘러쌓다 한다.

  <산동통지(山東通志)>,<청주부지(靑州府志)>는 모두 영구(營丘)가 창락(昌樂)이라 하는데 근자의 고고학적 유물은 영구(營丘)가 곧 창락(昌樂)임을 고증하고 있다고 한다.

영구(營丘)의 기원은 아주 오래되었다. 상고시절 9주(州)로 나뉘어 있을 때 그 중 하나가 영구(營丘)였다. 우순(虞舜)은 12주(州)를 나누어 설치했는데 그 안에 영주(營州) 역시 있었다. 하여 <이아(爾雅)․석지(釋地)>에 이르기를, 제국(齊國)을 또한 영주(營州)라 칭한다 했다. 당시 국가는 성방(城邦) 국가인 도성(都城) 국가였다. 따라서 이곳의 제국(齊國)은 곧 곧 영구(營丘) 혹 임치(臨淄)라 할 수 있다.

산동성 임치 강태공 의관총

진국(秦國)의 조상 선조 백익(伯益)은 일찍이 산동성 해대(海岱)지구의 큰 부족이었다. 백익족(伯益族)은 영성(嬴姓:진시황은 嬴政 황실 성은 嬴 혈통은 여불위의 呂(炎帝 神農의 후손인 강태공 呂尙 후예)으로 그들 족인(族人)은 산동성의 치(淄), 유(濰), 기(沂), 술(沭) 유역 및 영구(營丘), 청주(靑州), 래무(萊蕪) 각지에 비교적 많이 거주했다.

영(嬴)과 영(營), 영(盈) 자는 상고시기에 서로 한가지로 통하는 글자다. 진시황의 황실 성(姓)씨인 영(嬴) 성의 뿌리가 동이 제족이었음을 음운학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땅으로 씨(氏)를 삼았으므로 영구(營丘)의 이름 또한 영성(嬴姓) 족인(族人)이 집단적으로 거주한 것에서 이름붙여진 것이다.

진한(秦漢) 시기에 산동성 래무(萊蕪) 일대에는 영현(嬴縣)을 설치해 관리했는데, 이는 또한 영성(嬴姓)  부족(部族)이 모여 살아 이름을 얻은 사실을 추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B.C. 867년, 강태공 5세의 애공(哀公)이 주왕(周王)에게 팽(烹)하여 죽고 애공의 동생 강정립(姜靜立)이 제후(齊侯)가 되었으니 이 사람이 호공(胡公)이다,

B.C 866년, 제(齊) 호공(胡公)이 영구(營丘)를 떠나 박고(薄姑:현재 博興면 城南)로 천도했다. 영구(營丘)는 주대(周代) 200년간 제국(齊國)의 도성(都城)이었다. B.C. 859년, 애공의 동생 강산(姜山)이 호공(胡公)을 계승해 제후(齊侯)가 되니 역사에서 칭하는 헌공(獻公)이다. 제 헌공은 박고(薄姑)를 떠나 영구(營丘)로 다시 도읍을 옮겼으니, 영구는 치수(淄水)를 임(臨)했다 하여 임치(臨淄)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