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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밝힌 중국인의 뿌리는?

설레임의 하루 2009. 5. 22. 04:11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10007144

 

 

 

 

먼저 지나 대륙의 신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을 숙지해야 한다.

지나대륙의 상고사에는 오늘날 지나 한족의 역사는 없다. 바로 한겨레 동이 묘요족, 예맥, 구려, 백월, 형오, 훈죽, 읍루, 강방, 귀방,묘(苗), 동호(東胡),

산융(山戎), 동이(東夷), 융이(戎夷) 및 숙신(肅愼),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등등의 대륙에 존재했던 수많은 동이 한겨레의 역사였기때문이다.

즉 오늘날 지나한족이 자기들의 신화라고 말하고 있는 모든 자료는 정작 단군의 건국신화마저 허구로돌리는 무정신의 역사 주인공 한민족의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필자는 지나대륙에 전해지는 사료를 중국에서 현지채취해 따끈따끈하게 번역소개함과 동시에 이들 신화전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사관 정립의 소스를

버무려 설명해 놓았다.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웅장화끈한 것인지 감상해 보기 바란다.

 



 

이 지도는 대륙의 노른자위를 차지한 동이계와 영양가 없는 서부내륙 황토고원의 화하계, 남방의 양자강 유역의 동이계열인 초나라 월나라를 포함한 동이

9려족 중심의 묘만계를 그리고 있다.

 뒤의 지도는 지나족이 앞 지도에서 보는 것 처럼 섬서성으로 비정하는 황제를 불변의 같은 섬서성으로비정되는 동이족 신농과 청구(산동성)의 치우와

병치했을 경우 그 출자를 하북성으로 변조해 놓은 지도이다.

지나사가의 대세론은 앞 지도에 준하고 있다.


서욱생(徐旭生)은 화하(華夏)·동이(東夷)·묘만(苗蠻) 3집단으로 나누고, 여러 신화를 이 3집단에 귀속시키려 하였다.

고고학적으로 화하는 채도문화(彩陶文化), 동이는 룽산문화〔龍山文化〕·다원커우문화〔大汶口文化〕, 묘만은 굴가령(屈家嶺)과 강남의 여러 문화가

해당되는데,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었다.

(본인의 글을 지금까지 잘 읽어본 독자는 화하계 뿌리가 동이 제족이고, 묘만이 동이계임은 이제 잘 알테고;베트남 묘만이 신농씨 후예) 이는 현재 지나

대륙사의 일반적 견해지만 그나마 국내 강단사학계는 반도사관에 매몰되어 이조차 철저히 외면하여 노코멘트로 일관한다.

 

(최근의 지나 대륙사학자들은 화하족의 조상으로 삼아온 기존의 황제헌원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인지 대륙을 동이, 묘만,화하로나누고 이들의 조상을

각기 신농(동이), 치우(묘만), 황제(화하)로 분류해 지나족의 공동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화하의 뿌리는 환인천제 환국시대, 환웅천왕 배달국 시대를 그만두고라도 우리의 단군조선 시기(하우 시기)이상을 못넘어가며, 요,순은 물론 하우조차

 동이혈족이고, 지나 한족의 뿌리로 삼는진,한의 시조 역시 모두 동이 혈통이다.  

진시황은 진 황실의 성씨(영)로 보나 친부 여불위의 여(원래 동이족 염제 신농의 강씨에서 유래)씨로 보나 동이족의 바운더리를 넘을 수 없고, 또 한고조

유방마저 혈통적 뿌리가 동이족으로 그는 동이족국가 초나라 후예로(굴원은 초나라 왕실 성씨와 동일하고 동이족 전욱고양의 후예임은 <초사>에서 밝히고

단군성조 동황태일을 모신다고 밝힌 바 있다)  

 

동이족의 주 웅거지 제나라 산동성에 뿌리를 내렸다.

중요한 점은 이 지도 이전의 상고 대륙시대는 현재 다양한 상고 소수민족 이름으로 전해져 지나 한족의 조상으로 오인할 소지가 다분히 있는 동이 제족이

전 대륙을 석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 주인되는 이들 동이 제족의 신화 내용이 상당히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고 서로 중첩되어있으며 태호복희를

비롯한 각종 동이족 조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 산해경을 번역 소개한한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는 중국신화의 구분 및 종류를 다음과같이 서욱생(徐旭生)과 동일하게 화하(華夏)·동이(東夷)·묘만(苗蠻) 3집단으로 나눈다.

 

중국신화는 크게 지역 및 거주종족 그리고 신화내용에 따른 두가지 방식에 의해 구분해 볼 수 있다.  

 

① 동방 동이계(東夷系) 신화: 황하하류 및 산동반도, 요동반도 등 발해만 일대와 동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동이계 종족 계통의 동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동이계 종족 계통의 신화이다.

북방신화도 이에 포괄된다. 제준(帝俊), 예( ) 신화 등이 대표이다.

 

② 서방 화하계(華夏系) 신화: 황하 중상류 지역으로 후대의 이른바 중원 지역.

이곳에 거주했던 한족의 선조인 화하계 종족계통의 신화이다. 황제(黃帝) 신화가 대표이다.

 

③ 남방 묘만계(苗蠻系) 신화: 장강 이남에 거주했던 묘만계 종족계통의 신화이다.

신농(神農), 치우(蚩尤), 축융(祝融) 신화 등이 대표이다(이들을 동이계 신화로 보는 견해도 있음).

동방 동이계 신화가 내용적으로 가장 풍부하며 남방 묘만계 신화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아주넓게는 중국신화를 동이계 신화와 화하계 신화의

대립구조로 파악해 볼 수도 있다.


지나족이 화샤(화하)의 시작을 동이혈통의 진,한(진시황, 유방)으로 잡는것과는 별도로(화하(華夏)·동이(東夷)·묘만(苗蠻) 3집단으로 대륙을 3분해 보는

상기 서욱생, 정재서의 구분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방촌 임균택은 "상고대륙을 뒤덮고 있었던 그 근본은 모두 동이족 묘민이었다"고 필자와의

대담에서 말한다) 방촌 임균택은 현실적인 지나 화샤의 시작을 남방계 객가인 출신의 손문의 민국정부로 보고 있으며(북방 동이족 주류 왕조를 꺾고 남방

비주류 동이족 국가의 현대사적 최초출현) 그 정통을 이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마저도 모택동으로부터 대만으로 쫓겨들어가 그 정통을 공산당 모택동

정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즉 한(지나) 중심의 손문은 소위 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등 혈통상 동이 중심의 왕조 멸망이후, 민국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방촌은 지나 중국을 한족이라 규정하는 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즉 지나 한족(漢族) 이외의 여타민족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해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상고 대륙사를 크게 양분하면 대륙 전체는 동이 제족이 석권하고 있다가 하우 (夏禹)의 아들 계(啓)에이르러 주류와 비주류로 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중원대륙은 조이족인 동이 주류계이며 동이 남방 지류 지나계란 진나라 말기에서 유방의 한나라에이르러 구강(九江)이 도읍지로 정착하게 된 후,

그곳을 중심한 남방계 삼국인 촉(蜀),오(吳),위(魏) 그리고 진(晋)-수(隋)-당(唐)-오대(五代)-송(宋)-명(明)이 인도지나계로 연결됨으로써 남방 지나계의

시조가 동이족인 하우 (夏禹)의 아들 계(啓)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한다.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조선의 실체Click here!

중화민족은 모두 허구의 족명이다.(대만 심건덕)


相傳盤古開天闢地,女媧摶人補天,天地人從此出現於世
三大勢力─華夏、東夷和苗蠻為爭奪中華大地,不斷互相討伐


지나족이 이들 세 집단을 분류하는 중화사관적 관점

:當時居民聚族而居,他們之間以血緣為紐帶,規模較大的便形成一些氏族、部落。

當時中華大地遍佈很多這類部落,這些部落融合後就形成一些集團,其中最大的可主要分為華夏集團、東夷集團和苗蠻集團。 華夏集團以炎帝族和黃帝族為首,東夷集團則以蚩尤的九黎族為首,

炎帝族和黃帝族最初居住在陝西,後來各自逐漸東遷。黃帝族順北洛水南下,又東渡黃河,沿中條山、太行山向東北發展,炎帝族也有一部分順渭水東下,沿黃河南岸向東發展,他們吊進過程中,

不斷擴大自已的勢力,並與西進的東夷集團、北上的苗蠻集團發生過多次戰爭,

其中黃帝族和炎帝族與蚩尤為首的東夷集團之間的戰爭最為激烈,傳說的神魔之戰亦從此而.

*고사변古史辯(현대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사서)에도 이르기를 "동이東夷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제준, 제곡

(제곡고신), 순, 소호금천, 그리고 은 시조 은설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라고 하였다.


 현재 해방이후의 반도 사학자들은 조(새) 도등(토템)의 연나라(북경의 옛이름이 연경으로 북경은 동이족의 권역이었음은 말할나위없다)가 번한왕 기준

(箕準)을 내쫓고 왕이 된 정치사적인 이유로 이적시하고 있는데, 이는 북벌파 최영을 친 이성계 부자 왕실이 지나왕실 명을 천자로 모시고 동족인

만주족 청나라를 개,돼지로 보아 이적시하는 거와 다를 바 없이 아주 잘못된 역사인식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역사는 마땅히 정치사 뿐 아니라

문화인류학적 혈통과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역사적실루엣을 조명해 그 뿌리의 실루엣을 벗겨내야 한다.

참고로 노관은 한(漢)의 풍(豊) 땅사람으로서 한 고조 유방과 한 마을에 살고 같은 날 낳았다고 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뒤에는 흉노로 항복해 들어가 동호로왕(東胡盧王)에 봉해졌다.

한편 유방이 죽자 노관은 실권을 쥔 여황후(呂皇后)의 전횡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흉노에 망명하였다.

이때 노관의 부하인 위만이 번한으로 망명하였고(위만은 원래 동이족이라 연이 망한 후에도 계속그곳에 머물면서 망국의 슬픔을 주민들과 함께 하였다),

번한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경계에 살면서 상하 운장(上下 雲章; 閭陽+黃泥崖)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번한왕 기준(箕準)을 속여서 번한성에 입성하였고 번한왕을 내몰았으며 스스로 번한왕이 되었다.

연이 같은 혈족임에 대해 정일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은 진시황이래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아직 그 주민은 동이족이며 변조선과 국경하고 공지를 두어 주민간의 교통을 분리하고 있으나 동족간의 제휴가 쉬운 것인즉 대 인물이 아니면 대임을 맡길수 없는지라. 내심 노관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여러 의견을 듣고자 백관을 소집하였다.

한왕이 이르되, "제장 열후 중에서 누가 연왕에 적임인가?"

하니 여기서 자격으로 보아서 장자방,한신,노관 삼인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장량자방은 이미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혔고 한신은 한왕의 신임이 노관만 못하니 중의(衆議)는 노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모두 입을 모아 "태위장안후노관이 적임이옵니다." 하였다.

그때 벼슬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이때 왕후에 봉작을 받은 자는 많았으나 한족식 명예직일 뿐 실권을 행사하는 왕후는 유씨 였다 따라서 유씨 외의

타성지인은 팔명에 불과 하였다.

한고조가 노관을 연왕으로 봉하니 왕후들 중 행운이 연왕 만한 사람이 없었다.

(上乃入团爲燕王諸候得莫如燕王者)라고 역사가 반사고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연나라는 동이열국의 서쪽에 위치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영토가 광활하여 동방군자국으로서 문화가 발달하여 중원의 각 민족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중원의 한족에게는 문명을 수출하는 대단군 조선 제국의 번한에 속한 열후였는데 자칭 왕이 되어 이탈함으로서 번한과 오랜 전쟁을 한족 열국과도 분쟁이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에 패망 당하고 진이 한나라에게 망하니 한나라 영토가 된 것이다.

연인은 동이족의 용맹과 의리와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시 왕이 중원을 통일할 적에도 마지막까지 항거하였으나 본국과 결별되었으므로 본국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이러한 연나라는 옳은 주인을 만나면 크게 발전하여 중원에서 한과 겨룰 만한 강국이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열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그 연왕의 자리를 노관에게 맡긴 한고조는 내심 아무리 심복이라고 하나 불안하였다. <정일영 고대사 동방제국)

참고:中國의 文字學者 李敬齋는 "(前略) 在武功方面, 諸夏雖獲勝利, 而在文化方面則同化於東夷矣.

(中略) 夫東夷果何等人耶. 乃愷悌慈祥, 薄武力而崇藝術之人也. 其代表人物如舜(孟子曰舜, 東夷之人

也). 至仁至孝, 能使人讓以天下, 而以復以天下讓人, 眞古今中外無比至聖也. (中略) 

 可見我國文字東夷人亦多所創造, 而爲契所推廣因以造字之功歸之契. 如將東土西土古文略一比較,

卽東夷對於文字之智慧優於西夏, 東夷人旣握有敎育權, 故諸夏盡受東夷之文化."

 (武功 방면에 있어서는 諸夏가 비록 승리를 획득하였으나, 문화방면에 있어서는 東夷에 동화되었다.

(中略) 대저 東夷는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곧 화목 자상하고, 武力보다는 藝術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을 들면 舜임금이다.

(孟子는 舜임금을 東夷人이라고 말하였다) 至仁, 至孝하여, 남에게 天下를 양위하고, 또한 천하를 다시남에게 양위함은 참으로 古今中外에 다시 없는

지극히 聖스러움인 것이다. (中略)

 

우리 나라(中國) 文字는 東夷人이 다 創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契(설)이 널리 보급하였기 때문에造字의 功이 契에게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東土와 西土의 古文을 대략 비교하여 보면, 곧 東夷가 文字의 지혜에 대해서는 西夏보다 우수하고, 東夷人이 먼저 敎育權을 장악하였으므로 諸夏가 모두

東夷의文化를 받아들였다.

)(整理文化中途自述)라고 論及한 바와 같이 中國文化는 곧 東夷文化를 받아들여 이룩되었으며, 이른바 漢字(契)는 모두 東夷族이 創造한 바라고 강조하였다.

 

(陳泰夏:東夷文化特輯 중)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복희, 염제, 신농씨, 黃帝,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요, 순, 하,

은, 주, 진(秦), 한(漢), 서한(西漢), 동한(東漢), 후한(後漢), 삼국(三國), 위(魏), 촉(蜀), 오(吳), 진(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조(南趙)는 송(宋), 제(齊), 양(梁), 진(秦), 후양(後粱), 북조(北趙)는 북위

(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그리고 수(隋), 당(唐), 무주(武周), 오대시

(五代時), 북송(北宋), 남송(南宋), 거란(契丹), 요(遼), 서요(西遼), 금(金), 몽고(蒙古), 원(元), 명(明),

후금(後金), 청(淸) 등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이 뿌리라고 밝히고 있다.


출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