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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나라의 채도문화는 동이족 문화

설레임의 하루 2009. 5. 22. 03:34

*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10030615

 

 

 

 

 


이 지도는 지나사가들의 일방적인 제후국 표시지도로 앞의 담론을 읽은 독자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 <이윤 헌령편>, 「사기」 <봉선서>에 각기 대하(大夏)라는
단어가 보이고 「여씨춘추」 <고악편>에 영윤(伶倫)이

대하의 서로부터 원유(阮隃)의 음지에 이른다 고 했다.

「한서」<율력지>, 「설원(說苑)」 <수문편>, 「풍속통」<음성편>에 이 일에 대한 동일한 기록으로, 원유(阮隃)는 모두 곤륜(崑崙)으로 말했다.

「목천자전」에 ‘종주(宗周) 전수(廛水) 이서로부터 하종(河宗)의 봉지에 이르기까지 양우(陽紆)의
산이 3천 4백 리이다. 양우(陽紆)로부터 서하(西夏)씨까지가 2천 5백리이다.

서하로부터 주여(珠余)씨 및 하수(河水)에 이르기까지 천 5백리이다. 하수(河首) 양산(襄山) 이서로부터, 남으로 춘산(春山) 주택(珠澤) 곤륜의 언덕에 이르기까지 7백리이다.’

「일주서」<사기편>에 ‘옛날 서하(西夏)의 성품은 인(仁)하여 군사를 등졌다. 성곽을 고치지 않고, 무사도 자리할 곳이 없었으니, 은혜를 베풀며 상을 좋아했으므로 재물이 다하고 나서야 상 주기를 그쳤다.

당(唐)씨가 이를 정벌하니 성곽이 지켜지지 아니했는데 무사가 쓰여지지 않아 서하가 망했다. 

위에 인용한 「목천자전」에서 설명한 바의 서하(西夏)는 「여씨춘추」 <고악편 봉선서>에 설명한
바의 대하(大夏)로 땅을 바라보면 바로 부합해 가히 서하가 곧 대하가 됨을 보니, 이는  하후(夏后)씨의 모(某) 일(一) 자족(子族)임을 한가지로 가리키는 것이다.

저 일 자족은  동이(東夷)에서 가지치고 나아가 서이(西夷)로 다시 서하(西夏)로 다시 화하(華夏)로 변신 내지 정형화 해 나아가는 지나족의 본령이 왕국유

(王國維)에 의해 자세히 설명되고 있으며  은(殷)말 주(周)초에야 비로소 화하(華夏) 이전의 서하(西夏)로의 상고사 실마리를 잡고 있음을 수 있으며 사실상

 지나족(漢族)의 본격적인 왕조는 동이족 초나라 출신인 유방의 한(漢) 왕조에 들어서서야 그 확실한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은말(殷末) 주초(周初)에 북방에 거주해 규합해 대하(大夏)를 만들었다.

춘추시대 혹 서주(西周) 중엽, 서쪽 신강으로 옮겨 동족을 규합해 서하(西夏)를 만드니, 이로써 신강서남 우격(于격), 차말(且末)의 사이에 고정적인 거주처가 마련되었다.

(왕국유(王國維) 설로 「관당집림(觀堂集林)」권 13 서호고하(西胡考下) )

  신강의 합밀(哈密), 토노번(吐魯番), 아이애(雅爾崖)로부터 차말(且末),섭이강(葉爾羗)에 이르러
한 줄(線) 역사시기의 채도문화가 곧 저 대하(大夏)인이

전파한 것이다.

대하(大夏)는 중국의 역사기록상에 있어 후에 이른 것으로 인도의 불경 기록과 일치하니, 일찍이  허다히 일치하지 않는 이름이 있었다.

곧 중국사 기록이 설명하기를, 「후한서」<서역전 서>에 다른 사람들을 규합해 두륵(兜勒:兜는
투구 두, 범어 tusita를 음역한 兜率에 한해 도솔로 읽는다)을

만들었다 하고, 「위서」<서역전>에 다른 사람들을 규합해 토호라(吐呼羅)를 만들었다 하고, 「수서」, 「당서」<서역전>에  다른 사람들을 규합해 토화라

(吐火羅)를 만들었다 하고, 「대당서역기」에 다른 사람들을 규합해 도화라(覩貨邏)를 만들었다고 했다.

나아가 인도 불경에 설명하기를, 파사륜(婆娑倫)이 다른 사람들을 규합해 두겁륵(兜佉勒)을 만들었다 하고(권 9),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설명하기를

다른 사람들을 규합해 두겁라(兜佉羅)를 만들었다고 한다.(권 25)

그 실은 저 몇 안 되는 이름 자(字) 모두 대하(大夏) 혹 대하씨(大夏氏)를 짝해 부른 말이다.

이로 인하여 저 하후(夏后)씨의 자족(子族) 지파는 중국의 기회(杞鄶)에 잔류 거주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찍이 인도에 있어 구주(歐洲)를 좇아 모두 큰 바람머리(大風頭)로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일찍이 공원(公元) 전 150년에 있었으니, 또한 곧 한(漢) 경제(景帝) 7년으로, 희랍인이 건설한 발*연(拔(广+互)延) 왕국을 침략해 지나갔다.

(西胡考下)

그들은 다시금 진한(秦漢) 사이 서쪽으로 총령(葱嶺)을 넘어 아부한(阿富汗:아프가니스탄)의 북방에 파극특리아(巴克特里亞:박트리아)국을 세웠다.

그들의 역사시기는 중국의 채도문화가 서진한 개척자로 서쪽으로 차츰 나아가게 한 대 공신이다.

이상으로 황제씨, 제요 도당씨, 하후(우) 및 그 자족들과 그들의 활동지구를 보았거니와 이들 대단히 많은 구역 모두는 중국의 전형적인 채도구역으로

사실상 중국의 채도문화는 중국역사이전에 서래(西來)한 것이 아니라 동이민족의 기반 위에서 중국민족의 혼혈과정과 정형화 과정 즉 동이에서 서이,

서하, 화하, 한(漢)족으로 뿌리내리는 시발점에서 채도문화를 뿌리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임혜상이 말한 다음의 말 즉, “금인고증(今人考證) 은상속이계(殷商屬夷系):지금
학자들이 고증하기로는 은상은 동이족의 혈통을 이은 자”라는 말대로 은상(殷商)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대륙의 사가들이 연구해 놓은 성과를 보기로 한다. 다만 주(周)의 뿌리도 우리 동이족임을앞서 밝힌 바

있으므로 주(周)의 기원도 함께 알아보기로 한다.



 

동이족인 귀방 강방, 토방이 낙양, 정주 등의 호남성의 주나라와 수없는 전쟁을 치루었으며 회수의 서언왕도 주의 수도를 함락시킨 바 있고 상나라 때도

동부 해안의 대평원지구의 동이 제족들은 은나라를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상(商)족은 역사 교과서 상에 모두 설명하기를, 황하 중․하류에서 활동한 일개 고로(古老) 부락이라
 설명하여 이미 정해진 이론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상(商) 족이 어느 곳에서 기원했는지는 사학계가 오랫동안 온갖 이론만 모은 채 해결하지 못한 문제다.

해방 후(장개석 국민당 정부 몰아내고 공산 통일한 것), 상(商)의 역사를 연구해 바로잡는  전문 학자들은, 문헌자료와 지하 고고학 발굴자료를 사용해 서로

확인작업을 하여, 상(商)족이 하(夏)를 멸한 후에, 곧 상왕(商王) 성탕(成湯)이 건국한 이후의 최초 단계의 활동지역이 주로 지금 하남(河南)의 낙양(洛陽),

정주(鄭州)와 안양(安陽) 일대 곧 오늘날의 황하 중류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단 상(商)보다 앞선 때의 상족(商族)이  하(夏)를 멸하기 전에 대해서는, 어느 지방으로부터 하남
(河南) 중부로 진입해 들어와 중원(中原)을 통치한 것인지,

역대학자들은 한결같이, 상족(商族)의 기원이 서방, 동방, 북방과 산서에서 기원해 형성되었다는 여러 학설을 의심어린 눈으로 헤아리며 고증하고 있는데

온갖 중설(衆說)이 어지러이 일어나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아직 결론은 내지 못했다.

여러 학설 가운데, “서방설(西方說)”이 우선시 되고 있다. 한(漢), 진(晋) 시대의 사마천(司馬遷),
허신(許愼), 정현(鄭玄), 황보밀(皇甫謐), 서광(徐廣) 등의

학자는, 상족(商族)의 발상지가 대륙의 서토(西土)라 말하지 않는 이가 하나도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육국표서(六國表序)」중에서 설명하기를, “동방은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곳이며, 서방은 만물이 성숙하는 곳이니, 무릇

일을 일으키려 하는 자(作事者)는 반드시 동남(東南)에서 먼저 시작해야 하고, 열매를 거두고 공격하려는 자는 항상 서북에서 해야 한다.

(제갈량의 섬서성 한중의 가정, 진창을 중시한 예와 춘추전국시대와 유방의 함곡관 중시의 예) 그러므로 우(禹)는 서강(西羌)에서 흥했고, 탕(湯)은 박(亳)에서 일어났고, 주(周)가 왕이 된 것도 풍호(豊鎬)로써 은(殷)을 정벌했기 때문이었다.”고 하여, 하(夏), 상(商), 주(周) 모두 서북이 그 발상지라고 결론내린다.

「사기(史記)․은본기(殷本記)」 가운데 상탕(商湯)을 설명하기를, “처음 박(亳)에 거하다가, 선왕을
따라 옮겼다(始居亳從先王居)” 이후, 사람들은 박(亳)의

지점으로 예상되는 위치에 대해: 허신(許愼)이「설문(說文)」에서 말하기를, “박(亳)은 경조(京兆) 두릉정(杜陵亭)이라” 하고, 「사기(史記)․육국표(六國表)」“집해(集解)”에 서광설(徐廣說)을 인용해, “경조(京兆) 두현(杜縣)에 박정(亳亭)이 있다” 하여, 마땅히 “박(亳)”은 서방에 정해진다고 했다.

「사기(史記)․은본기(殷本記)」에는 또, 상족(商族)의 시조 설(契)이 “상(商)”에 피봉되었다는 설이
있다. 정현(鄭玄)은 “상(商)이 태화지양(太華之陽)에 있다”하고, 진대(晋代)의 황보밀(皇甫謐)은 곧 “낙(洛) 위는 상(商)이 옳다” 하였는데, “상(商)”이 옳든, “박(亳)”이 옳든 간에 아무튼 그들이 위치해 있던 곳은,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이 되니 곧 관중(關中) 평원이다.

이는 상족(商族) 기원의 서방설이 된다.

근대이래, 많은 학자들이 구(舊) 학설을 반박하여, 상족(商族)이 동방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정산(丁山)은 상인(商人)의 발상지가 금일의 영정하(永定河)와 구하(滱河) 사이에 있다고 보는데,  이는 지금의 하북성 동부에서 발해만 일대에 이르는 곳이다.

(見 「상주사료고증(商周史料考證)」) 정산(丁山)설은 왕국유(王國維)설과  더불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동방설”을 견지하는 학설이다. 이후, 서중서

(徐中舒), 부사년(傅斯年)은 30년대에 있어 상족(商族)의 기원이 동방에 있음에 대해 글을 지어 논증하여, 자기의 관점을 드러냈다.

최근 왕옥철(王玉哲)은 「역사연구(歷史硏究)」상에서 <상족내원지망시탐(商族來源地望試探)>을
발표하여, 도등(圖騰:곰 도등, 호 도등, 용 도등, 호 도등과

 같은 부대깃발상징로고) 신앙을 좇아 “상(商)”, “박(亳)”의 터로 보이는 5개 방면과 대문구(大汶口) 문화, 용산(龍山)문화 등의 고고학 자료를 결합하여

상족의 기원이 동방에서 비롯되었음을 상세히  논증했으니: 가장 먼 조상이 살던 웅거지는 가히 산동(山東)이 되며, 뒤에 가서 겨우 서북으로 전환해

이동하여, 하북성의 중부에 도달하고, 하(夏)의 말엽에 비로소 주력(主力)의 터전을 하북성 남부와 산동성 서부에 두었으며, 무리가 능히 서(西)로 향하여

하(夏)를 멸하고, 상(商) 왕조를 건립했다고 한다.

김경방(金景芳)은 몇 년 전에 글을 지어 그의 학설을 배척하여, 상인(商人)이 북방에서 기원했음을
제안한다. 그는 주로 「순자(荀子)․성상(成相)」과

<세본(世本)>의 설법을 인용해 상세히 고증한다.

「순자(荀子)․성상(成相)」에 말하기를, “설현왕(契玄王)이 소명(昭明)을 낳고, 후에 지석(砥石)에
거주하다가 상(商)으로 천도했다. 14세(世)때, 천을(天乙)에

 이르니 이가 곧 성탕(成湯)이다”;

<세본(世本)>에 “설(契)이 번(番)에 거(居)하다”,“소명(昭明)이 지석(砥石)에 거(居)하다”라고 기재되어있다.

여기에 나오는 “번(番)”과 “지석(砥石)” 두 곳은 동서설(東西說)과 더불어 같지 않은 곳의 지명이다.

김경방(金景芳)이 고증한 바와 같이, “번(番)”은 사서 상에 자주 보이는 “박(亳)”이 되는데, 비록
지금의 땅이 아무 원칙 없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북방 지역에 속하는 곳이니, 곧 옛날의연(燕) 땅이다.

또 설(契)의 아들 소명(昭明)이 거주한 지석(砥石)은 바로 요수(遼水)의 발원지이니, 곧 지금의 내몽고 소조달맹극십극등기(昭鳥達盟克什克騰旗)의 백분산

(白岔山)이다.

이에 근거해, 그는 성탕(成湯)이 하(夏)를 멸하기 이전, 상인(商人)의 세력이 지금의 하남(河南)의
중부에 도달한 적이 없고, 이로 인해 지금의 하남 중부에

“상대(商代) 선공(先公) 시대의 문화” 혹 “상대(商代) 조기(早期) 이전의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와 별도로 추형(鄒衡)의 “상족(商族)이 산서성에서 기원했다”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비록 김경방(金景芳)의 “북방설”과 더불어 대략 동일하지는 않지만, 지역상으로 본다면 거듭 “북방설”에 속한다.

이상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본 상(商)족의 기원설은 하나로 결론 내리기가 무척 어렵다.

이 문제에 관련해 문헌상 드러나고 있는 증세는, 가히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이 크게 부족하다는 데 있으며, 게다가 상(商) 족이 자주 이사를 다녀서

“전8 후5”의 설이 있으니 곧 건국 전에 일찍이 8차례 옮기고, 입국(立國)후에 5차례 천도했다.

건국 전 8차례 옮긴 것에 관해서, 황보밀(皇甫謐)은 “역사에 실전하여, 상세히 알 수 없다(史失其傳,
故不得詳)”고 말한다.

따라서 상(商) 족의 기원문제에 관해, 우리 각 학파는 단지 한계가 있는 역사전설과 근년 래, 전야(田野) 고고학적 수확물을 종합 분석한 연구에 근거해 논술

증명할 수 있다.

이로 보면, 상족의 기원을 밝힌 제(諸) 가(家)의 설은 자연적인 일로, 상족 기원의 문제가 장기적으로의견만 분분할 뿐 쉽게 결정되지는 않는 것이 괴이하지

않을 것이다.(洪偶)

주(周) 족은 상(商) 대 말년에 각 족을 거느려 주(紂)왕의 통치를 뒤집고, 주조(周朝) 정권을 건립했다.

동주(東周) 곧 춘추 전국 시기에 있어 주실(周室)는 명의상 천하의 공주(共主)였다. 주(周)족은 800년 간 중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주(周)족의 조상 선조의 원래 거처가 어느 곳에서 비롯하고 있는지에 대해, 학술계의 주장은 다양하여 일치된 의견을 얻기가 어렵다.

현재 각종 관점을 아래와 같이 진술하니 독자가 알아서 감별해 내었으면 한다.

1.산서(山西)설. 1930년대, 전목(錢穆)은 「연경학보(燕京學報)」 제 10호 상에 <주초지리고(周初地
理考)> 글 하나를 발표하여, “주(周) 인이 대개 기주

(冀州)에서 일어나, 대하지동(大河之東)에 있었다”고 제출했다.

그 후, 여사면(呂思勉), 진몽가(陳夢家), 왕옥철(王玉哲), 전창오(田昌五), 이민(李民) 등 허다한 학자들 모두가 찬동을 표시하여 그 학설을 증거했다.

그들은 문헌상 설명하고 있는 주(周)의 시조 기임후직(棄任后稷)의 관(官)이 태(邰:나라이름 태)에 피봉되었는데. 그 땅이 곧 지금의 산서(山西)의 문희(聞喜), 직산(稷山) 일대라고 말한다.

「좌전(左傳)․소공원년(昭公元年)」 기록에 의거하면, 태(邰)에서 원래 “태태(台駘)”를 일으켰으니,
이는 “분신(汾神)”이다.

후인이 신명(神名)을 지명(地名)으로 바꾸어 2개의 동음 글자를 한 자로 줄여읍방(邑旁)을 보탰다.

수경(水經)․분수주(汾水注)」에 이르기를, “분수(汾水)는 또 직산(稷山) 북을 지나니, 직산은 분수 남 40리 정도에 있다. 산위에 직사(稷祀)가 있으며, 산아래

직정(稷亭)이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 45에 「수도경(隋圖經)」을 인용해 말하기를, “직산(稷山)은 강군(絳郡:지금의 산서성 직산현(稷山縣)), 후직(后稷)은 이 산에서

백곡을 파종했다.”

직산현(稷山縣)에 근거해 설명하면, 마을마다 직왕묘(稷王廟)가 있고, 또한 직왕낭낭묘(稷王娘娘廟)
 가 많다. 

현의 남쪽에 직왕산(稷王山)이 있고, 전해오는 말이 직왕(稷王) 기(棄)가 그 어머니 강원(姜原) 씨를 따라 항상 이 산을 왕래하며 사람들에게 파종(播種)을

가르쳤다.

문희(聞喜)현 서북 직산 아래 강원(姜原) 씨의 묘(墓)가 있는데, 묘(墓) 곁에는 빙지(冰池)가 있어, 강원(姜原) 기후직(棄后稷)이 있던 곳(處)라 한다.

주(周)의 시조는 요(堯), 순(舜), 우(禹)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묵자(墨子)․상현중(尙賢中)」은,  “선왕지서(先王之書)”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堯)가 백성을 구휼한 공을 내세워 3후(三后)의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백이(伯夷)는 전(典)을 내리고, 우(禹)는 평수토(平水土)하고, 직(稷:農官)은 파종을

 융성하게 했다.”

「서(書)․요전(堯典)」은 “너, 기(棄) 후직(后稷)아! 백곡을 뿌려라.”고 한 순(舜)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일주서(逸周書)․상서해(商誓解)」는 주무왕(周武王)의 다음 말을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후직(后稷)이 있었는데, 능히 백곡을 뿌려, 우(禹)의 치적에 올랐다.”

사료 기재에 근거하면, 요(堯), 순(舜), 우(禹)가 마음에 두었던 곳은 모두 지금의 산서성 남부 ,하남성
 북부일대였다.

(요순우의 통치 근거지는 산서성 남부) 이로 보면 주(周)의 선조는 마땅히 수많은 지구 가운데의 한 부락연맹의 한 갈래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가능하다.



2.섬서(陝西) 토착설. 고래로부터의 허다한 지리(地理) 저작(著作)은, 모두 주(周) 시조(始祖) 후직
(后稷)이 봉해진 지금의 섬서 무공현(武功縣)에 있는

태(邰)로 여긴다.

「사기(史記)․주본기(周本紀)․정의(正義)」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 말하기를, “옛 태성(邰城)은 일명 무공성(武功城)으로, 옹주(雍州) 무공현

(武功縣) 서남 22리에 있으며, 옛 태국(邰國)은 후직(后稷)이 봉해진 곳으로, 후직(后稷) 및 강원사(姜原祠)가 있다”

「수경(水經)․위수주(渭水注)」 및 무공현지(武功縣志)에도 대략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음의 일반적인 통사(通史) 저작, 주소후(朱紹侯) 주편(主編)과 유택화(劉澤華)가 편집 저술한 「중국고대사」는 모두 이러한 관점을 채용하여, 주(周)족의

선조가 가장 먼저 활동한 지구가 지금의 섬서성 서부와 위하(渭河)의 기름진 옥야 가운데 있다고 한다.

근년래, 고고학 종사자들이 무공(武功) 정가파(鄭家坡:파는 나무가 없는 산)에서 허다한 선주(先周)
시대의 유물을 발굴했다.

이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이곳에서 발굴된 각종 도자기를 분별하면 서주(西周)시대와 동일한 형태의 도자기의 앞선 형태이며, 출토된 동정(銅鼎)과 생산

공구도 서주(西周)초기와 더불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선주(先周) 문화가 관중(關中) 서부 칠수(漆水) 유역에서 발전해 일어난 일종의
토착문화로, 전설에 주(周) 시조 후직(后稷)이 백성에게

파종(播種)을 가르친 곳이 산서(山西)의 직산 (稷山), 문희(聞喜) 일대로 이는 후인이 견강부회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3.감숙(甘肅)설. 한 종류의 의견이 인정되고 있으니, 주(周) 시조 후직(后稷)이 일 개 전설 가운데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국어․주어상(周語上)」에 기록하기를, “하(夏)가 쇠해짐에, 사직을 포기하고 힘쓰지 않아(棄稷不務),나의 선왕 불굴(不窟)에게 사람이 모이지 않아 관리를

등용하지 못하므로, 융적지간(戎狄之間)에서 自窜했다” 이곳의 “불굴(不窟)”은 그야말로 겨우 주족(周族)이 기댈 수 있는 조상이었다.

(주족의 뿌리집단이 대륙을 덮고 있는 동이 제족의 하나로 지나족이 하나의 모판으로 떼어내 과장하고있지만 알고 보면 보잘 것 없는 세력임을 암시)

사기(史記)․주본기(周本紀)․정의(正義)』에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해 말하기를 “불굴(不窟)
고성(故城)이 경주(慶州) 홍화현(弘化縣) 남쪽 3리에 있다”

하고, 『원화(元和) 군현지(郡縣志)․관내도 (關內道)․경주(慶州)』에 기록하기를, “불굴(不窟)이 융적지간(戎狄之間)에 패주했으니, 현재 주리(州理) 동남

3리(里)에 불굴(不窟) 고성(故城)이 있다”하고,『경양부지(慶陽府志)』 역시 기재하기를,“불굴(不窟)이 하덕(夏德)이 쇠해 혼란함을 당함으로 인해, 窜居北豳

했으니, 곧 지금의 경양(慶陽)이다”

이상의 세 기록 모두는 불굴(不窟)이 지금의 감숙 경양(慶陽)에 성(城)을 건립해 있었다 설명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감숙(甘肅) 동부의 위하(渭河), 경하(涇河) 유역, 진원(鎭原), 영대(靈臺), 평량(平凉),경천(涇川) 등 현(縣)에서 허다한 선주(先周) 문화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로 인해 몇 몇 학자들은 주족(周族)이 원래 감숙성 동부 지구에 거주했다가 뒤에 섬서(陝西) 장무
 (長武), 빈현(彬縣)일대로 옮겨간 것으로 인정한다.

태왕(太王) 때에 이르러 서북의 험윤(玁狁:임혜상, 서량지가 말하는 동이족으로 흉노의 조상으로 험윤, 훈죽, 산융으로 북만(北蠻)에 거주하다가 읍루 말갈이

 된다.)의 침략을 받아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 기산(岐山)의 양(陽)에 도착한다.

4.양원설(兩源說).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하는 학자들이 뒷받침하는 학설로, 그들은 주족(周族)이
2가지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는 논점을 제시한다.

추형(鄒衡)은 『하상주(夏商周) 고고학 논문집』에서 말하기를, “선주(先周) 문화와 같은 시기에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유형의 도(陶), 력(鬲:솥 력)이

존재했으며, 이 두 종류의 도(陶), 력(鬲)은 서로다른 기원을 갖는다.

연당력(聯襠鬲)은 동방의 산서(山西)지구에서 비롯한 것이고, 분당력(分襠鬲)은 서방의 감숙지구에서
비롯한 것이다.”

서중서(徐中舒)는 『고문자(古文字)연구논문집』<주원갑골초론(周原甲骨初論)>의 글 가운데에서 칭하기를, 주문화(周文化)는 “동서 2개의 기원이 있다”는

관점은 “고고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연구해 얻은 결론으로 이는 과학적 개괄(槪括)이다”고 말한다.

드러난 대로, 주족(周族)의 선조는 마땅히 산서와 감숙 2개방면의 광활한 범위 내에서 활동했다.

5.신강설(新疆說). 일부 전설자료로 보면, 주족(周族)의 선조가 가장 먼저 활동한 지구는 멀리 서북의
 신강(新疆)지구다.

『산해경(山海經)․서차삼경(西次三經)』에 이르기를, “남쪽으로 곤창(昆倉)을 바라보니, 그 빛이 빛나고(其光熊熊:빛날 웅), 서쪽으로 대택(大澤)을 바라보니

 후직(后稷)이 묻힌바라” 했고 또 동서 <대황서경(大荒西經)>에 기록하기를, “서주국(西周國)이 있는데, 희(姬)씨 성(姓)이다.

제준(帝俊)이 후직(后稷)을 낳았는데, 후직은 백곡(百穀)을 융성하게 했다.

후직의 동생을 대새(臺璽)라 하는데 대새(臺璽)는 숙균(叔均)을 낳았는데, 숙균은 그 아버지와 후직(后稷)을 대신해 백곡(百穀)을 퍼뜨리고 경작을 시작했다.

적국(赤國) 처씨(妻氏)가 있다.”

『목천자전(穆天子傳)』 권 2에 기록하기를, 주목왕(周穆王)이 서쪽에 있는 “춘산(春山)”(총령산
(葱岭山)이라 칭하니 곧 지금의 파미이(帕米爾)임)에

노닐더니, 적조(赤鳥)씨의 나라에 이르렀다.

적조(赤鳥)인이 술 등 음식물을 진상하므로 목왕이 이를 받고 말하기를, “적조(赤鳥)씨는 주종(周宗)으로부터 먼저 나온 것이다”

이상의 기술을 종합해 보면, 주(周) 시조 후직(后稷) 숙질(叔侄)이 백곡을 파종한 지방은 지금의 신강(新疆) 서남 모퉁이다.

“적국(赤國) 처씨(妻氏)”는 마땅히 곧 “적조(赤鳥)씨”이며 이는 곧 주인(周人)의 겨레 족속이다.

주인(周人)은 동쪽으로 옮겨가 섬서로 들어갔으며 한 지맥 겨레는 거듭 신강에 머물렀다.

주족(周族) 선조의 활동 지역은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5종류의 학설이 있다.

필경 어느 학설이 비교적 역사사실에 부합되는지는 마땅히 문헌기재와 고고학 자료에 근거하면 더욱 진일보 할 것이다.(楊善群:안원전 번역)

 

출처:안원전의 21세기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