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우리 역사가 단절된 원인

설레임의 하루 2009. 5. 20. 00:39

*출처:블루7-개벽이야기      글쓴이- [자료제공 : 블루7 http://blue7.net ]   

 

 




 

동방의 한국은 이 지구촌에서 가장 오래되고 경이로운 역사를 간직해온 나라이다.

그와 동시에 전대미문의 과거단절도 경험한 나라이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능동적인 역사발전이나 역사혁명에 의한 단절이 아니라 외세의 침탈과 인위적인

역사말살의 비정상적인 단절의 악순환이었다.

 

  일찍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 고구려, 백제 멸망시 당군(唐軍)의 사료 탈취와 방화,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잦은 외침과 전란으로 인해 한민족 고유사서들이 대량으로 소멸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 : 우리민족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느냐?

왜적이 침범해서 역사책을 불태우고, 내란이 일어나서 우리나라 역사책을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이 되었다.  

  발해 망국 이후에 외래 종교 사상에 중독된 반민족적 사가들이 자기 역사 부정과 왜곡을 자행했으며,

이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유교에 의한 사대주의 사서들이다.
 

                   <외세침략>
우리민족은 3일에 한 번꼴로 외침을 당했다.

<김부식: 사대주의자의 전형>
 

 서구 제국주의 침략사를 자세히 관철해 보면 다른 민족을 침탈할 때는 반드시 그들의 종교가 기수역할을

하여 진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한 손에 성격과 한 손에 칼을 쥔 유일신 신앙자 들의 속성이며, 타민족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종속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제도적인 우리 역사 말살이 대표적인 예이며,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이념 도입도 이에 해당한다.

  근래서 서양에 유학을 다녀온 역사학자들을 보면 실증주의 사학인데 그들은 한마디로‘유물이 나오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즉 파편하나라도 나오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무대가 중국이었는데, 중국에 고고학자가 가면 출입을 막는 경우가 허다하고 또한

중국인들이 발굴한 유물조차 공개되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들이 학문 방법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일제가 물러간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민족 스스로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

                 <이병도>
이마니시류의 수사관보로 들어가 우리 고대사 왜곡에 헌신적 기여를 하였고 훗날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식민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마니시류(今西龍)>
   일제의 어용학자. 삼국사기 본래 표제인

   ‘삼국사(三國史)’에 ‘기(記)’자를 붙이고,

   우리역사를 제후국의 역사로 강등시켰다.
 

제1차

고구려 동천왕 18년(244)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략하여 많은  사서 소각. 이때 고구려『유기』 100권이 사라짐.

제2차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가 소진됨.

제3차

고구려  보장왕 27년(608) 당나라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함.

제4차

신라 경순왕 원년(972)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 책을 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당할 때 방화 소각됨.

제5차

고려 인종  4년(1129) 금나라에서 주체서적을 몰수해감.

제6차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의 침입으로 소각.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가 이때 없어짐.

제7차

조선 태종 11년(1411) 5부학당을 송제(宋制)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유고적서적 일체를 소각함.

제8차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이 방화 소실됨. 조선의 4대 사고 중 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소각 되었는데, 나중에 마리산 사고로 옮겼으나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강화공격으로 방화됨

제9차

병자호란(1639)으로 인한 손실.

제10차

일본강점(1910)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탈취?소각?개조됨.

 


 우리 역사가에 의한 왜곡

 


단재 신채호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보다, 조선사를 저작하던 기인들의 손에서 더 탕잔 되었다 하노라.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이전에 진리를 생각하려 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 아닌 특색이나

 

노예적 특색이다."

 

 


 

  A.D.650년 신라에서 당나라 고종 영휘(永徽) 원년의 연호를 갖다 쓰면서 사대주의가 시작됨.

 

당의 연호를 썼다는 것은 당의 속국(屬國)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되어버려서 완벽한

사대주의 뿌리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서술한 역사서는 아(我)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우리 역사를 쓰는 게 아니라,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다.

 

 

 오랑캐 색채를 지운다는 명분으로 철두철미한 공맹(孔孟) 제자가 되어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여 중화사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

 

<자세히 보기>

 

 이(夷)는 본래 중국인이 동방의 활 잘 쏘는(大+弓=夷) 우리 민족을 지칭하던 말로 ‘뿌리’, ‘어질다’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융적(戎狄)과 동일한 명칭으로 사용한 이래로 우리 나라 사대주의자들이 그대로 답습하여 한문 교과서에까지 이(夷)를 오랑캐라 부르고 있다.

 

춘추필법(春秋筆法): 중국의 경서(經書) 춘추와 같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춘추직필(春秋直筆)’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공자 자신부터가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고 수치스런 일은 감춰버렸으며(爲中國諱恥), 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깎아 내리며(矜而陋夷狄) 중국사는 상세히 쓰고 이민족 역사는 약술하는(詳內略外) 기만적 역사서술의 전형이 되어 후세 중화주의 날조사관의 표본이 되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환작(幻作)하여 우리 역사의 뿌리를 기자(箕子)로 하는 한국사 체계를

 

만들고 고조선을 건국하신 단군 성조는 신화도 역사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만들어 민족정기를

고갈시키고 기자동래교화설(箕子東來敎化說)을 만들어 우리 민족이 기자의 교화를 받아 비로소

문명국이 된 것처럼 꾸미고 기자 이전의 우리 역사를 오랑캐의 역사로 깎아 내려 일제가 우리

고대사의 범위를 반도로 몰아넣는 중요한 빌미를 제공.

 

 고려 때 송(宋)나라 사신이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묘(箕子墓)를 찾아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

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기자묘(箕子墓)라 하고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향을 올렸다.

 

그 뒤  평양의 사당에 주벽(主壁) 단군왕검의 위패를 배동서향(配東西向)로 낮추고 기자의 위패를

 

좌북남향(坐北南向)의 주벽(主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자는 삭망향축(朔望香祝)까지 올리는

제전(祭典)이 있었지만 봄 가을 두 번 지내는 단군 제사에는 제전(祭典)조차 없었다.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 정통사서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압수 소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철학,종교,문화의 중요한 자료들을 말살

 

이방원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고유사서들을 공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하여

소각

 

 

하  륜

 

구월산 삼성당에 있던 환인, 환웅, 단국의 목상을 혁파

 

최만리

 

훈민정음 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이래 지성으로 중국에 사사하고 모두가 중국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함.

 

조광조

 

도교행사라는 구실로 소격서를 철폐하자는 주장을 펴고 이를 여러 유신들과 조직적인 운동으로 관철시킴(1518). 삼신상제님과 천지신명에게 제사 올리던 오랜 전통을 말살해 버리고, 제목, 제기, 신위/가지 파묻어 버림.

 

송시열

 

사대주의 성지 만동묘를 세우고 말년에는 아예 중국의 관복을 입고 다님.

 


 

 

 

 저자인 김부식은 묘청의 북벌운동을 진압하고 낭가사상을 압살한 경력을 가진 삼국사기의 저자로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사용

을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이라고 칭함.

 

 -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비아(非我)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우리 역사를 편찬할 때 발해사(渤海史)를 논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을 지극 정성 섬기며 삼국사기 서술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 이미 그의 혈통계보에서 사대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김부식의 아버지인 김근(金覲)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송의

소식, 소동파, 소철이란 인물이 유명하니 그의 자녀들의 이름을 위의 인물에게서 한자씩 취하여 이름을 짓는다.

 

 -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망국멸족(亡國滅族)의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하며 공손하지 못하여 임금(당나라)께서 마땅히 우리를 꾸짓으시니, 임금(당나라)께서 장차

우리를 토벌하려고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조선조에서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그 환국을, 자신이 주석을 달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꾸고, 또한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하였다.

 

 조선시대의 서거정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다루지만 저 바깥으로 중심을 떼어놓고는 다른 나라의 역사처럼 서술한다.

 

그 외의 정인지의 고려사,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우리의 역사를 기자箕子로부터 서술하여  단군왕검의 사적은 기자동래 箕子東來의 밑에다 적어 놓고 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등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이 우리 나라의 왜곡을 시켰다.

 

 

당시의 환경 또한 이상하게 변하여 주체적인 사관으로 주장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였다.

그래서 우리역사가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고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모든 역사가 왜곡이 되었다.

 

 


<조선 총독부>

  일제는 조선을 총칼로 침탈하고서 다시 영원히 조선을

탈취하기 위하여 광분하였다.

  조선의 민족혼 자체를 말살시켜 일본인에 동화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민족의 근간을 바꾸기 위하여 민족의 서적을 약탈하였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 까지 조선총독부 관보

(官報)를 근거로 하여 ‘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 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가관인 것은 자신들이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조선사(朝鮮史)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찬한다.

즉 1938년까지 엄청난 돈을 일본이 부담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자기만의 역사서를 편찬한다.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일제가 역사왜곡에 혈안이 된 이유>

   - 고대 일본의 역사가 동방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인 약점
   - 역사적 열등감과 이에 수반되는 침략 명분의 부재
   -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계획적인 역사날조

  대륙개척사를 반도수난사로 둔갑시키고 정신적으로 고유의 주체사상을 말살하여, 당쟁만 일삼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패배주의를

심어놓음

  단군을 하나의 신화로 돌리고, 고조선 실사(實史)를 은폐하여 고대사를 압축하고  만주하북성에서 찬란했던 조선족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

 조선은 자고(自古)로 북은 한(漢)의 식민지, 남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억설을 주장하여 조선강점을

논리적으로 합리화 기도.

  고고학계의 구석기 유물 조작 폭로 일본 고고학계는 지난 92년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되었다고 했다가 2000년 11월 일본

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짐.

<조선 총독부 3.5대 총독 시달 교육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

(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과 「동경제대 영인본」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고치고 동경제대 영인본으로 출판

 조선 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사의 길잡이』라는 책은 해방 뒤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지표로서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조선사』35권 (made in Japan)

치밀한 우리의 역사 개조작업을 한 일본은 드디어 1938년까지 35권의 조선사를 편찬하게 된다.

그곳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사람이 이병도였다.

그는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 공로자가 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에 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게 되어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하였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道)를 배웠고 그들을 인으로 숭배하고 있으나 만일 그들이

합하여 천당 극락을 세워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나는 절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이끌고 가지 않을 것이다.”

                                 - 백범 김구-

 

  서구 제국주의 침략사를 자세히 관철해 보면 다른 민족을 침탈할 때는 반드시 그들의 종교가 기수역할을 하여 진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한 손에 성격과 한 손에 칼을 쥔 유일신 신앙자 들의 속성이며, 타민족에 대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종속을 강요하였다.

 유교는 중국중심주의를 표방한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동이(東夷)를 말할 때 원래의 뜻은 대궁(大弓)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동쪽의 오랑캐라고 말한다.

지금도 이렇게 아(我)와 비아(非我)의 입장을 구분하지 못한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요 우리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 땅의 사대주의자들은 오랑캐 색채를

지운다는 명분으로 철두철미한 공맹의 제자가 되어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였다.

중화사관의 춘추필법을 맹목적으로 추종, 고대 한중(韓中)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우리 역사를 중국의 들러리로 전락시켰다.

 

 

삼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불교는 처음에는 낭가(郎家)에 소속되어 셋방살이를 하던 처지였다.

불교의 개인주의적 경향은 낭가의 공동체정신과 상무정신을 상쇄시키고 본말을 뒤집어 우리 역사를 창업한 주인공들을 온통

불제자로 날조시켜 버렸다.

 

가.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석유환국(昔有桓國)” 아래 주석을 달아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천제(天帝)의 환국을 제석

(帝釋)의 환국으로 풀이하여 환인을 한낱 불법의 수호신으로 인식케 함

 

나. 해모수 단군의 혁명일인 4월 8일을 석가탄신일로 조작하고 환웅천황의 제호(帝號)를 절간의 대웅전으로 만들었으며 단군성조께서 제천하신 유서 깊은 마리산(摩利山)을 불교식으로 개칭하여 마니산(摩尼山)으로 만듦.

 


      - 조선민족의 계통 왜곡 : 혈통적 뿌리 → 노아의 방주로
      - 정신적 뿌리 → 베들레헴 마구간  
      - 고유문화의 진수를 전혀 못 보게 만듦
      - 일제의 식민사관에 편승하여 국조단군을 공공연히 신화시


<기독교의 고대사 말살 이유>

  광복과 더불어 이승만과 서구 물질문명을 등에 업고 들어온 기독교는 오로지 승리주의를 내세우며 우리민족의 고유정신을

유린해왔는데 만일 환인,환웅,단군시대의 유구한 역사를 정통사로 채택한다면 그들의 교리상의 문제에 봉착되고, 국조단군을

민족 시조신의 차원에서 숭배한다면 그들의 유일신관에 배치된다는 지극히 편협한 사고방식 이 고대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근본

이유

  그들이 서구 과학물질문명과 복지를 이 땅에 심어준 공로가 있다할지라도 민족정신의 입장에서는 대배반 사건을 감행한 자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서구 제국주의 침략사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다른 민족을 침탈할 때는 반드시 그들의 종교가 기수역할을 하여 진주하게 되는데,

이것은 한 손에 성경과 한 손에 칼을 쥔 유일신앙족들의 속성이며, 타민족에 대한 정치.경제.군사.문화(종교)적 종속을 강요함

<황사영의 백서>

 “청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어…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을 감독하게 할 것....

조선에 위협을 가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해줄 것 등.”

 



역사 복원 안되는 이유

 


           <이병도>

  조선사편수회는 1927년 6월 조선사편찬을 한다는 구실로 조직을 확대 정비했는데, 이때 해방 이후

강단사학을 대표하게 될 이병도(李丙燾)씨가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의 수사관보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병도씨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미국의 후원을 업고 귀국한 이승만은 권력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역사청산을 목표로

결성된 반민특위를 반공이념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 해산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끌어들여 요직에

앉혔다.

 

게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면서 민족사학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구 친일사학의 무리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타고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하여 한국 역사학계를 독점하였다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생 말년의 이병도는 최태영옹의

설득으로 한국상고사입문 등 저서와

인터뷰에서 식민사학을 답습한 자신의

학설을 전면 뒤집고 단군을 국조로

인정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모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온

이병도에 대해그의 학설을 신의 말씀으

로 신봉하던 그의 후배들은“노망들었

다”는 비아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몇몇 선각자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규원사화, 단군세기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 간 민족사서의 고갈 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보 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 '황당하다'는 이유로 천시되고 따돌림받는

이유는 어인 일인가?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등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조시대 왕조실록 등에

 엄연히 존재하며,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황실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다.

< 98.9.26 한겨례신문 보도>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일본 황실문고에서 일하다 해방직후에 귀국한 박창화氏 (당시 56세, 이미 사망)는 “일본 황실문고에는

한국의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이 모두 있다고 할 만큼의 역사서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단군관련 자료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한 박씨는 해방후에 이들 자료를 되찾아야 한다고 수차 당국에 호소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7천년간의 왜곡된 역사를 되찾는 일에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에 당당히 공개적으로 공식 요구해야 한다.

일본 황실문고에 소장된 수탈자료의 목록공개와 반환을! 우리 정부대표단의 일본 황실문고 방문 및 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