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북경대 부사년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 대한 소고 /이정찬

설레임의 하루 2009. 5. 19. 23:43

*출처:다음카페-죽계구곡  글쓴이: 자경       http://cafe.daum.net/juggyegugok/CXpW/427

 

 

 

 

북경대 부사년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 대한 소고

우리는 고조선(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생각할 때마다 다가오는 느낌은 아쉬움에 있습니다.

민족의 시원을 바이칼호에서 찾을 수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요동땅 그 언저리에서 누볐던 흔적들이 발견되는 새로운 유물을 통해 조금씩 밝혀지면서 의식있는 일부 중국학자들은

시각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역사왜곡은 일제에 의해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35년 동안 일본의 역사 1500년을 2500년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한국의 역사는 고조선을 신화시대로 날조하여 5000년을 2500년 이하로 끌어내렸지요.

중국도 근세기 100년 동안 한민족 5000년 그 이상의 역사를 속지주의(屬地主義)에 입각하여 자기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구요.

그런 까닭에 지금 중국이 고구려 역사조차 자기들의 변방으로 획책하고 있는 실정인데도 우리 사학계는 망상에 사로잡혀 꾸어온

보릿자루보다 못하여 왜인도 이미 버린 실증사학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는 랑케의 실증주의도 카아처럼 그들에겐 과거와 현재의 대화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 대한 북경대의 부사년 선생은 은나라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계설화와 흰옷을즐겨입었다는 백의민족과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천숭조(敬天崇祖)를 들어 동방의 '동이(東夷)의 역사'라 했습니다.

또한 대만의 임혜상이라는 학자도 중국역사의 앞대를 '동이(東夷)'에서 비롯되었고, 음악과 의술도 '동이문화(東夷文化)'라고

했습니다.

당랑이라는 사람은 황하문명의 이전의 한반도 세 배(倍)의 유적에서 소호라는 글자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동이족의 성씨였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즉 스스로도 제자들에게 밝히기도 했듯이 노자,

맹자, 공자가 동이족 후예들이고, 심지어 황제 헌원, 복희, 신농은 동이족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일부 중국학자들이 나서서 세계 3대 문명으로 알려져 있는 문명이 우리 겨레가 각지로 교화시키려 나간 문명이라는 것을

증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연대로 따져서 춘추전국시대 이후 열국시대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고조선 2096년, 그 이전 '동이(東夷)' 즉, '배달나라(檀國)' 1565년과 '한나라(韓國)' 3001년을 합하여 올해가

9200년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인배는 비웃을 역사요, 무리배는 무슨 얘기인지 까우뚱거릴 햇수입니다.

잘못 기술된 책으로 사색하는 지식의 껍데기가 학문이라 여기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학계에서 이름께나 알려져 있는 역사학자들도 고대 아시아의 역사는 하족(夏族)과 이족(夷族)의 싸움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족(夏族)은 지금의 중국의 혈통적 뿌리이고 이족(夷族)은 한국의 혈통적 뿌리인 것을 전혀 생각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그들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하족(夏族)과 그들이 타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이(夷),융(戎), 만(蠻), 적(狄)의

사람들이 거대한 나라를 이루면서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방언분포도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언 분포도를 보면 중앙내륙지방이 하나의 방언지역을 이루고 동방, 남방, 북방에는 서로 다른 많은 방언들이 산재되어 있고

서방은 거의 방언의 분포가 없습니다.

이러한 방언분포도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하족만이 그 땅을 차지했던 것이 아니라 융은 그 흔적이 없지만 나머지 이(夷), 만(蠻),

적(狄)은 모두 합하여 그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하족이 이민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중원을 지배한 경우가 매우 많았는데 그들이 내놓고 이민족으로 치부하는 원(元), 청(淸) 등이

지배한 것 말고도 우리가 막연하게 중국이라고 생각하는 위(魏), 수(隋), 당(唐) 등도 사실 하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소위 남북조시대라 불리우는 때에 북은 위(魏), 남은 송(宋)이었습니다.

송(宋)은 하족이 세운 나라이나 이 위(魏, 통칭 북위)는 하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던 것이죠.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남북조시대 바로 전 사마씨가 조씨의 나라를 빼앗아 진(西晉)을 세운 뒤에 5호(胡)의 난이 일어났고 이

난으로 서진(晉)의 관리와 백성이 양자강 하류의 건업(建業,東晉)으로 피난하였는데 그 수가 백성의 십중팔구라 하였으니 이는 하족이

5호(胡)의 난을 피하여 많은 사람이남쪽으로 피난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동진(晉)을 송(宋)이 계승하였으니 송은 하족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쪽에는 하족의 정치세력이 남쪽으로 피난하여 버린 상태에서 5호(胡)의 나라가 섰다고 했는데 그 중 선비족이 중심이 되어

위(魏)가 섰던 것입니다.

위(魏)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목민의 조직구조인 부락공동체를 없앴는데 이를 후세의 사가들이'중국화'하였다고 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국화'하였다고 하여도 혈통이 하족의 혈통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요.

지배관계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남북조'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갈 말이 있습니다. "중국화"라는 말은 지금의 중국 사람들이 모든 이민족의 역사를 자기들의 것으로 탈취하기

위해 만든 매우 은밀한 모략이 숨겨져 있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중국(中國)'이란 나라가 즉, '중국'이란 실체가 없었는데 어떻게 "중국화"하였다는 말입니까?

말도 안되는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화"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역사의 배후에 일관된 성격의 문화가있다는 것을 관념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자기들의 문화(中華思想), 즉 지금의 중국의 문화라고 주장하기 위한 포석인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지역중심주의와 결합하여 남의 것이라도 자기들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모두자기들의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역사관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고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혈통이었지 지역도 아니고 문화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역사를 바라볼 때는 양심있는 중국의 역사학자중에 한사람인 '부사년의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이라는 학설을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하족(夏族)'은 중국 서방계의 종족이며 채도문화(彩陶文化)의 주인공이고, '은나라'는

동이의 한 부류이며 흑도문화(黑陶文化)의 주인공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역사서에 기술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하족이 아닌 5호의 종족을 주 구성원으로하는 위(魏)를 바탕으로

북제(濟), 북주(周), 수(隋), 당(唐)이 차례로 이어지며 세계 제국이라는 당(唐)도 역시 선비족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당태종이 주위의 여러 유목국가로 부터 그들의 천왕 (天汗,텬칸,단간)이 되어 달라는 글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비족은 옛 상(商, 은(殷)의 선조)나라의 후예로서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 때 그 난을 피해 흥안령산맥으로 이주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 후에 그들의 세력이 커져서 다시 중원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상(商)은 명백한 이족(夷族)으로서 이것은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입니다.

모택동 자전에도 언급된 중국의 대학자인 부사년(傅斯年:1896-1950)은 생전에 우리 한국을 '스승의나라'라고 불렀고 "이하 동서설

(夷夏東西說)"에서 한족은 이족(夷族)과 하족(夏族)의 양족이 섞이어 형성되었으며 그 문화는 이족(夷族)의 문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문화의 핵심은 철학이며 그 철학을 담는 것은 글입니다.

우리 동양 철학의 핵심은 유학(儒學)이며 이 유학은 이족(夷族)이 가졌던 사유체계였습니다.

상(商)의 삼현(三賢) 중 하나였던 기자(其子)가 주나라 왕에게 배달나라의 정치이념인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통치철학을

가르쳐주었는데 이는 유학의 최상급의 학문체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소위 한자의 뿌리는 갑골문인데 그 갑골문이 우리 이족(夷族)인 상(商)나라의 유물이니 어찌 지금의 한자를 만든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갑골문이 이족(夷族)인 상(商)나라의 유물임은 세계 고고학계에서도 정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신용하교수는 우골문(소뼈에 기록된 문자)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황하변의 갑골문보다 앞선 시기에 만주 지역에서

소뼈에 갑골문과 같은 문자를 기록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였고 갑골문을 남긴 상(商)나라 사람들이 이족(夷族)이므로 이는

만주지역에서 거주하던 이족(夷族)이 소뼈에 문자를 기록하다가 황하변으로 이동하여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구갑(龜甲)으로

재료만 바꾼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족(夏族)에게 철학과 문자를 제공한 사람이 모두 우리 이족(夷族)이기 때문에 부사년같은 학자가 우리나라를 스승의

나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죽했으면 중국혁명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는 중국인 손문(孫文, 쑨원, 1866.11.12 ~ 1925.3.12)이 3황(三皇)을 가르켜

동이인(東夷人) 즉, 조선(朝鮮)의 사람이니 중국의 역사에서 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겠습니까?

이러한 주장들은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의 '우왕의 신서'와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도 찾아 볼 수있는데 '오행사상(五行思想)'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은 나라의 우왕이 오행에 대한 기록을신서(神書)로서 숭상한데서부터 시작됐다는 이론과, 홍범구주

(洪範九疇)로부터 시작됐다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왕의 신서'란 하늘의 별자리를 오행의 성좌로 관측하여 홍수를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즉 중국 지역에 살던 어린 무명의 우씨가 자신의 부족이 매년 홍수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동이족

배달나라에 가서 홍수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고, 이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자 단군은 가상히 여겨 그의 아들 부루로 하여금 우씨와 같이

현장에 가서 도와 주라고 명했다는 것입니다.

배달나라의 왕자, 부루는 현지에서 오행의 천문을 관찰한 후에 홍수가 일어나는 이유와 그 시기 등을 판별하는 방법 등을 우씨에게

알려 주었으며, 우씨는 부루에게 배운 대로 천문을 관측해 홍수가 발생할 시점을 예견하고 주민들을 안전한 지대로 대피시켰던

것입니다.

그후 과연 우씨가 예견한 대로 홍수가 발생했으나, 미리 대피했으므로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일로 우씨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아 왕으로 추대되었고, 부루에게 배운 오행의 천문에 관한 기록을 왕이 된 후에도

‘신서’라고 말하고 높이 받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행의 시초가 되는 신서란 단군의 아들이 중국에 건너가서 가르쳐 준 천문 관찰의 방법이었습니다.

오행사상의 다른 발생 근거가 되는 ‘홍범구주’는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는 기준으로서, 9가지의 원칙을 오늘날의 헌법과 같은 내용으로 만든 것을 말합니다.

이 홍범구주의 내용은 모두 오행의 이론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데, 홍범구주는 바로 배달나라에서 사용한 왕실의 국가 경영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중국으로 넘어가 마치 중국의 이론인 것처럼 잘못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대만의 또다른 역사학자 임혜상과 중국 북경대의 부사년이 중국역사의 근본을 이루는 상고사를 동이(東夷)에서 비롯되었고, 천문학, 주역을 비롯하여 한자와 음악 그리고 의술도 '동이문화'라고 한 이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세계에 알려지지 않아 숨겨져 있는 위대한 동방의 역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