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중국사람이 말하는 단군의실존

설레임의 하루 2009. 5. 19. 00:26

 *출처:다음블로그-학성산의 행복찿기  글쓴이-운영자  http://blog.daum.net/obk2030/15072140

 

 

 

 

[한국 상고사에 대한 중국자료]
1. 자료 소개

가. 서량지의 중국전사화

細石器時 文化部族最初乃居住 今西伯利的 貝加爾湖附近 他們及中國傳說中的炎帝神農氏 本族也.......

[나라역사 육천년, 안호상, ?뿌리, 1987, p. 14. <徐亮之, 中國史前史話, 276면>]


: 세석기 시대에 문화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에 있는 바이칼호 부근이다.

다른 나라들과 중국의 전설에 있는 염제신농씨는 본래 이 족속이다.


나. 동작빈의 중한문화론집 및 단기와 중국고대사연대

東海聖人作 會聞竝放勳 山椒遺廟在 檀木擁祥雲 : 明朝, 史道.檀君開國土 誅茅樹區宇 至今邦之人 稱爲朝鮮祖 :

明朝, 用卿.檀君血食線東土 松木森森蔭祠宇 三國五都何紛紛 此是朝鮮第一祖 : 明朝, 薛延寵,至於 從檀紀 到現

在的年數 自然是容易推算的依據民國三年 商務出版的 世界大事 年表 所列中國紀年 始自黃帝 堯元年爲甲辰 二

十五年爲戊辰 當西曆紀元前二三三三年 加本年西曆一九五五合於四二八八數 : 董作賓等, 中韓文化論集一.

董作賓, 檀紀和中國古史年代, 中華民國五十五年, 三版, 台北, 中華大典編印會. [위 같은 책, p.46]


: 동해의 성인이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웠는데) 듣기에 (요임금인) 방훈과 나란히 (병립) 했다고 한다.

산초는 묘에 남아 있고 단목은 상스러운 구름을 안고 있다 : 명나라, 사도.

 

: 단군이 국토를 열고 띠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어) 나누었으니 지금의 나라 사람들이 일컬어 조선의 조상이라 한다 : 명나라, 엄용경.

: 단군이 혈식하고 동쪽의 토지를 그어 (나누었으며) 소나무가 울창한 그늘에 사당이 있다.

삼국의 다섯 도읍지가 어찌 분분하냐. 이분이 조선의 제1대조이다 : 명나라, 설연총.

:단기로 현재의 연수를 계산함에는 자연히 추산이 용이해진다.

민국 3년에 의거하면 상무출판의 세계대사년표에 중국기년을 열거한 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요원년은 갑진이고 25년은 무진인데 의당 서력기원전 2333년이며 올해

1955년을 더하면 합 4288의 숫자가 된다 :  

동작빈 등, 중한문화론집1. 동작빈, 단기와 중국고대사연대, 중화민국 55년, 3판, 타이뻬이, 중화대전편인회.


2. 보충 해석

가. 바이칼호 문화와 염제신농씨
세석기 시대에 바이칼호 부근에 발달된 문화가 있었는데 바로 염제신농씨가 이 족속 출신이라 한다.
바이칼호 부근은 예로부터 옛한국, 배달나라, 단군조선의 역사 무대였다.

염제신농씨는 서기전 3218년경 사람으로 웅족이며, 배달나라 농사담당인 우가(牛加)를 지냈고, 제후국인  유웅국(有熊國)왕 소전(少典)의 아들이며, 陳땅에 염제국을

세워 나중에 곡부로 옮겼다.

염제신농씨의 나라는 뒤에 강성하여 배달나라와 경계를 정하기도 했다.


서기전 2697년경 신농씨의 8세손인 유망 때에 배달나라 제14대 치우천왕이 염제신농씨의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천하를 다시 제패하기 위하여 염제신농국을

병합하고자 먼저 군사를 일으키니 황제헌원도 군사를 일으켰는데, 탁록지전을 벌이기 이전에, 치우천왕이 판천이라는 들에서 유망의 무리인 소호를 사로잡았으며 

유망을 폐하고 유망의 아들 괴를 다시 공상의 땅에 봉하였다.

이 나라가 바로 웅씨국의 나라로서 서기전 2357년부터 서기전 2333년까지 24년간을 단군왕검이 섭정하던 나라였다.


배달나라 말기에 요임금이 하늘의 도를 거역하고 난을 일으켜 웅씨국왕이 전쟁중에 붕어하므로 순방정치를하다 돌아온 단군왕검은 오가와 무리 800을 이끌고 동북의

아사달로 이동하여 서기전 2333년 10월 3일에 조선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단군왕검이 배달나라의 웅씨국을 떠나 동북으로 이동할 때 큰 고개를 넘었는데 이때 아리랑노래가 생겼다고한다.

아리랑이란 큰 고개를 뜻하는데 백성들이 단군을 따라 가겠다는 마음이 담긴 노래가 된다.

24년간을 웅씨국의 비왕으로 섭정하면서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어 신선으로 숭앙되었던 것이다.

황제헌원은 유웅국왕 소전의 후손인 공손씨의 자손으로서 염제신농씨의 8세손 또는 9세손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고 염제신농의 아들이 아니다.

헌원을 웅국의 왕이라고도 한다.

치우천왕은 소호를 선봉장으로 하여 황제헌원과 전쟁을 벌였으며, 10년간 약 70여회를 싸웠고 합 100여회를 싸웠다고 한다.

그러나 치우를 동두철액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치우천왕의 군사는 동철기를 쓰고 있었던 반면에 황제헌원의 군사는 석기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기록에는 치우가 지나간 자리에 피가 백리를 흘렀다고 적을 정도로 황제헌원의 무리는 상대가 되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황제헌원은 끈질기게 황토인들을 선동하여 도전하여 왔으며 무기를 동철기로 바꾸어 다시 도전해 왔다.

황제헌원은 지남거를 만들어 언제든지 남쪽으로 달아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치우천왕의 형제는 81명이었는데 그중에 치우비라는 자가 서두르다 전쟁중에 죽으니 중국의 기록에서는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적고 있기도 하다.

황제헌원이 응룡등을 대동하여 전쟁을 독려할 때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동원하여 헌원의 무리에게 앞을 못보도록 혼을 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서 풍백과 우사는 바로 배달나라의 직책인 바, 치우는 바로 치우천왕으로서 배달나라 제14대 자오지 한웅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전쟁의 끝에 대하여, 우리기록은 치우천왕이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아 자부 선인으로 하여금 삼황내문을 전수케 하여 도를 깨우치게 하였다고 적고, 중국기록에서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죽였다고 적고 있다.

치우천왕은 서기전 2707년부터 서기전 2599년까지 제위에 있었고, 황제헌원은 서기전 2698년부터 서기전 2598년까지 치우천왕보다 1년정도 늦게까지 왕위에 있었다.

염제신농씨와 황제헌원이 모두 웅족인데, 치우(蚩尤)천왕이 염제신농과 같은 강씨라고도 하나 서기전 3897년경 한웅천황이 배달 개천 때에 이미 치우(治尤)라는 직책이 병마를 담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바, 아마도 이 치우의 후손인 듯 하다.

치우의 후손은 단군왕검 때부터 서기전 1286년까지 대대로 번한이 되었고 황하 남쪽의 중국대륙 동쪽에서 계속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

조선 개국시조인 단군왕검은 원래 배달나라 마지막 제18대 거불단한웅의 아들로서 명성이 자자하여 14세 되던 해인 서기전 2357년에 염제신농국인 웅씨국왕 홍제가

나라를 섭정하게 하였으며, 요임금의 세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마침내 홍제가 돌아가시자 지금의 황하와 북경 근처에 있던 웅씨국을 떠나 동북지방의 송화강아사달로

이동하여 조선을 건국하여 요임금과 병립했으며 나중에는 순임금 등 사자를 파견하여 보내어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순임금이 요임금에 협조하여 요를 이어서 중국을 다스렸는데, 단군조선의 제후에 불과하였다.

서경에 순임금이 사근 동후하였다는 말은 순임금이 단군조선의 회대지방의 제후를 감독하는 자로서 동후 즉 단군왕검 때 삼한의 하나인 진한이며 순방정치를 하는

단군조선의 사자인 태자 부루를 찾아뵈었다는 뜻이다.


나. 단군과 단기

동해의 성인은 바로 단군왕검을 가리키며 요임금인 방훈과 나라를 병립하였던 것이다.

단군이 조선의 시조가 된다. 요임금은 탁록부근의 서쪽 지역을 다스렸고, 단군왕검은 요임금의 나라를 에워사다시피한 지역 전제를 다스렸는데 특히 나라의 중심이

동북지방인 송화강 아사달이므로 동쪽나라라 하는 것이 된다.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 단군의 사당이 있어 그 실존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단군조선의 세나라인 진조선, 마조선, 번조선과 진조선의 수도인 아사달, 백악산아사달,

장당경과, 번한 땅의 수도와 마한 땅의 수도 5군데가 말이 분분하냐? 단군왕검이 바로 조선의 제1대 단군이다.

단기로 따지면 요임금의 원년이 갑진년이므로 25년이면 무진년이 되고 서기전 2333년이 된다.

여기에 서기 1955년을 더하면 4288년이 되는 것이다.

3. 여론
중국의 역사가들이 단군왕검의 실존을 인정하고 조선의 제1대 단군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데도 진작 우리는 우매하기 짝이 없게도 실존여부를 논쟁거리로 삼고 있다니 참 어리석기도 하다.

앞으로는 단군왕검이 왜 아사달에서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상고사를 알아야만 한다.

특히 요임금이 누구인지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요순시대는 태평시대가 아니다.

단군시대가 태평시대 홍익인간의 시대였다.

요순임금은 단군왕검의 가르침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늘의 도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따라야만 하였다.

그래서 중국 사료에는 요순임금 외에 천제에 해당하는 주인공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천제가 바로 단군왕검인 것이다. 제후국이 본국을 가리켜 천국이라 하는 것이 된다.

천국의 임금을 천제, 천왕이라 부른다. 단군조선은 당시 20여개에 달하는 제후국의 천국이었다.

상고시대 역대 중국의 임금들이 동이족 출신이 많았으며 피로 따지면 중국의 역대 임금들은 모두 웅족의 후손이 된다.

반면에 상고시대 한국의 임금들은 모두 천제의 아들로서 대를 이었으며, 제후국의 임금들은 웅족이 많았다.

배달나라 때 진제국을 세운 태호복희는 제5대 태우의한웅의 아들이고 우사(雨師)를 지냈으며, 염제국을 세운신농씨는 웅족출신으로 우가를 지냈고, 중국의 시조인

황제헌원 이후 역대 왕들이 거의 모두 웅족의 후손이며, 치우천왕의 후손이 단군조선의 번한이 되었고, 웅족의 후손이 마한이 되었으며, 서기전 1285년부터는 웅족의

후손인 高씨가 단군이 되었고, 이때 단군 색불루에게 선양했던 소태단군의 종실인 한서여(서우여)가번조선의 왕인 번한이 되어 소위 기자(奇子)조선으로 불리우며,

서기전 323년에 은나라 출신 箕子의 후손인기후가 군사를 일으켜 번조선왕이 되면서 기씨가 번한이 되어 서기전 194년까지 이어졌다.

서기전 239년에 북부여를 세워 단군조선을 이은 해모수는 고씨 단군의 종실이므로 고씨이고 또한 웅족의 후손이 되며, 단군이라 불리었고 그후 고두막한, 고주몽이

고씨 단군의 후손으로서 천제의 아들이라 자칭하였다. 단군은 곧 천제이기 때문이다.

단군왕검은 한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웅씨국왕녀이므로 웅족의 외손이 된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인은 천손족이자 웅족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