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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빈기의 금문(은나라문자)으로 푼 상고사 핵심

설레임의 하루 2009. 5. 19. 00:28

 *출처:다음블로그-학성산의 행복찿기   글쓴이-운영자  http://blog.daum.net/obk2030/13455964

 

 

 

 

낙빈기의 상고사 핵심, 금천(金天)의 금(金)은 쇠라기보다는 새(鳥)와 태양을 뜻하여 신농족의 불족, 밝은족(火族), 태양족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천(天)에는 장인인

신농이 들어있어 소호금천이라는 이름 속에 직계와 외가가 모두 담겨있다.

 

낙빈기가 비판 제시하는 상고사의 핵심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황제헌원과 우임금, 순임금에 관한 내용만 추려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漢)족의 역사가 황제헌원 유웅(有熊)씨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낙빈기는 " '염제의 덕이 쇠해져 여러 제후들이 서로 침벌하였으나 능히 그것을 제어할 수 없어
황제가 대신했다'는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사마천은

어째서 염제를 역사인식체계에서 제외했는가" 하고 묻고 있다.

그리고 청동기 명문의 해석을 통해, 염제신농이 최초의 문자를 만든 인물이자 겨레의 시조이며 역사의 단초여야 옳다고 논증하고 있다.

또 「사기」는 한(漢)왕실인 유(劉)씨를 종(宗)으로 역사를 꾸미려는 의도에서 3황5제시대를 모조리 유씨의 선조로만  한 꾸러미에 엮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공자가 전승되어오던 문헌을 모조리 없애고 요순시대의 말만으로 정교훈령(政敎訓令)을 꾸민 「서경(書經)」식 수법과 같은 것으로서 하족(夏族)을 하토(夏土)

역사주인으로 설정해 여기에다 꿰어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의도적인 오류 외에 당시 상식으로는 고문자의 체계적인 내용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마천은 「사기」의 서두에서 헌원 유웅씨를 첫 번째 역사인물로 내세우고 있지만 낙빈기의 말대로 그의 기록에는 유웅씨 이전에 이미 신농씨를 등장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황제는 제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때문인지 황제를 뜻하는 글자는 상고금문에 보이지 않는다.

낙빈기의 해석으로는 신농(유망)이 황제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황제는 치우와 전쟁 때문에 탁록을 벗어날 수 없었는지 아들 소호 금천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곡부를 지키게 한다.

하지만 신농계열에서 일어난 '구려의 난'을 견디지 못하고 7년 만에 사위 전욱 고양에게 왕위를 넘긴다.

몇 년 전 별세한 이고선(李固善)이 쓴 「심당전서(心堂全書)」에는 "환웅이 처음 나라를 열었을 때 웅족을
후(侯)에 봉해 유웅국이 됐다. 임금의 호를 소전이라 하였으니

 곧 신시의 후군(侯君)이다.

호를 세습하는데 소전씨에 이르러 유교(有嬌)씨의 여자를 취하여 살더니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 신농이 여와(女 )의 대를 이어 중토(中土)에서 임금이 되고 신농과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동생은
유웅국(有熊國)의 임금자리를 받았고 또 세습하여 소전씨가

되니 성(姓)이 공손으로 되었다가 그 후손에 이르러 헌원으로 성을 바꾸어 희(姬)씨가 되었다.

신농의 후손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임금을 칭하기를 황제라고 하였으니 중토에서 한족의 시조가 된다'하였다.

또 「진주소씨족보(晋州蘇氏族譜)」에는 "중국의 조상인 화서족(華胥族)은 적제 축융의 29세손이다.

휘(諱)가 강희(强熙)로 축융이 동부왕(산동성 태산쪽)으로 삼아 화서(華胥)라고 하였다.

화서족은 헌원을 내세워 황제라 하고 그들의 조상으로 삼았다"하였으니 치우와 싸워 치우를 물리쳤다 거짓
기록한 황제의 정체는 바로 앞서 인민일보의 기록에서 본

바와 같이 치우의 청동기 문명(청동기의 순수 국산말이 구리인데 九黎국 수장인 동두철액(銅頭鐵額)치우와 걸맞게 九黎의 발음은 구리이다.)과 싸운 일개 석기문명의

씨족집단 내지 부족집단의 수령에 불과했다.

낙빈기는 사마천이 자(子)가 자기 아들이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위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황제가 소전의 아들이라는 진의를 오해해 역사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지적하며 소전의 아들은 신농이며황제는 신농의 사위아들이라고 결론내린다.

황제의 누르 황(黃)은 밭을 쫓아 광(빛)이라 읽는데 이 말은 염제 신농의 딸을 쫓아 신농계의 부호인 빛(炎)
광으로 읽는다는 뜻이며, 양급제의 모계사회제도 아래에서

누님인 여자를 쫓아 살아가는 염제의 사위아들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금문에서 누르 황(黃)과 호랑이 인(寅)이 비슷하게 새겨져 황제 유웅씨족을 호(虎)족이라고도 하는

연유를 알게 해준다.

전욱고양( 頊高陽기원전 2467-2421)은 신농의 아들인 희화 주와 황제의 딸 상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농, 누조, 소호, 상아의 금문은 한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신농의 아들 희화 주의 금문 글자는 10여 개에 달하고 전욱고양대에 이르면 비로소 금문의 형태가 비로소

문장의 형태로 다양해진다.  

소호금천(기원전 2474-2468)은 누조와 황제 사이에서 태어나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사기」에 "누조가 황제의 정비가 되어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가 청양이라고도 하는 현효로 강수에 내려가 살았으며,

둘째는 창의로 약수에 내려가 살다가 촉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고양을 낳았다"하였으니 첫째 아들 현효(청양)가 바로 한국 김씨의 시조인 '소호금천'인데 신농의

자일급차비(둘째부인)가 낳은 딸 소진에게 장가들었으니 황제는 신농의 큰 사위였고 소호는 곧 신농의 작은 사위다.

소호금천은 새(鳥)로 관직명을 정했다.

좌구명의 「좌씨춘추」에 "가을에 담( )나라 임금이 노나라로 와서 조회했다.

소공(昭公)이 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소공이 묻기를 '소호씨가 새(鳥)로 관명을 지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담자가 말하기를 '우리 선조니까 내가 알고 있다. 옛적에 황제는 구름(雲)으로 관명을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백관(百官)과 사장(師長)을 모두 구름으로 이름지었고 염제씨는 불로 본을 삼았다.

그러므로 백관을 화(火)로 이름지었고, 공공(共工)씨는 물(水)로 기본을 삼았으므로 백관을 수(水) 자로 이름지었고, 태호씨는 용(龍)으로 기틀을 잡았으므로 백관을

용자로 이름하였다.

우리 고조 소호지(少 摯)는 즉위할 때 마침 봉조(鳳鳥)가 날아왔으므로 새(鳥)에 기틀을 두어 새로써 백관
사장의 이름을 붙였다....

봉조(鳳鳥) 씨는 봉황이 천시를 알므로 역정(歷正)의 관명을 삼은 것이고, 현조씨(玄鳥) 씨는 제비가 춘분에 왔다가 추분에 감으로 이분(二分)을 관장하는 관명으로

삼은 것이다.

백조(伯鳥) 씨는 백로가 하지에 울어 동지에 그침으로 이지(二支)를 관장하는 관명으로 삼은 것이고, 청조
(靑鳥) 씨는 청조와 창안(  :왜가리(꾀꼬리) 창, 메추리(

종달새) 안)이 입춘에 울어 하지에 그침으로 입춘에서 하지 사이를 관장한 것이고, 단조(丹鳥) 씨는 별치( 雉:꿩)니 입춘에 왔다가 입동에 감으로 입추에서 입동을

관장하는 관명으로 삼았다.

축구(祝鳩)씨는 축구인 초구( 鳩:黃雀 남방 神鳥로 鳳과 비슷)가 효성스런 새이므로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
(司徒)의 관명으로 하였고, 저구( 鳩:물수리 저)는 징경이로

 정리가 지극하여 법률을 담당하는 사마(司馬)의관명으로, 시구( 鳩:접동새 시)는 뻐꾸기니 평균하므로 수토를 다스리는 사공(司空)으로 상구( 鳩) 씨는 매니 치안을

 담당하는 사구(司寇)로,...전욱으로부터 먼 상서(祥瑞)를 본받아서 백성으로 사장을 삼아 백성의일로써 명하였으니, 곧 잘하지 못한 때문이다'라 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담나라 임금을 만나고 나서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내 듣건대 천자가 천자의 직분을
잃으면 학문이 사방 오랑캐에 있다는 소리가 오히려 믿을 만

하다' 하였다.

새(鳥)는 해를 뜻하고 임금을 뜻한다.

금천(金天)의 금(金)은 쇠라기보다는 새(鳥)와 태양을 뜻하여 신농족의불족, 밝은족(火族), 태양족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천(天)에는 장인인 신농이 들어있어

소호금천이라는 이름 속에 직계와 외가가 모두 담겨있다.

왕(王)이라는 글자는 소호금천 다음으로 제위에 오른 전욱고양이 스스로 부르는 씨칭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신농때는 어떤 명칭을 썼는지 지금으로는 알 수 없다.

단 소호금천때는 분명히 조(鳥)라는 말로써 임금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술잔 작(爵)을 벼슬 작, 새 작, 참새 주둥이 모양의 술잔 작'으로 읽는데, 새 작(爵)은 새(鳥)의 수컷머리위에돋아난 벼슬(볏)을 상징한 '조관인황(鳥冠人皇)'의 조관

(鳥官)을 말한다.

신라 계림왕(鷄林王)이 계관을 쓴 것은 소호금천의 후손이라는 설과 일치하며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 한
것 또한 진(秦) 나라가 서천에서 일어나 '백제(白帝) 금방신

(金方神)인 소호를 '서치(西 )'에 모셨던 것과도일치한다.

소호가 곡부에서 신농의 천자위를 계승하였음은 소호가 신농 때 백공의 우두머리로 금관(金官)인 공공이었다
가 신농이 하야한 다음 천자위를 잇고 소위 갱명개제

(更名改制)한 것이 조관(鳥官) 제도인 '벼슬'길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