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함/중국연변문화발전추진회 력사는 흔히 북로군정서부대와 김좌진장군이 청산리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통합을 반대하여 나선 김좌진부대가 자기가 빚은 실책으로 청산리 어랑촌 전투에서 전군복멸 당할번한 일은 잘 모르고 있다. 이를 알자면 력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지 않을수 없다. <사진: 항일 명장 홍범도 장군>
한데서 1920년 여름에 이르러 동북경내에는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 군무도독부, 신민단, 의민단, 의군부, 광복단, 광복군총영, 대한독립군비단, 보합단, 의성단, 간도국민회, 대한정의군정사, 창의단 등 30여개의 반일단체와 무장대오가 건립되여 활동하고있었다. 해당통계 자료에 의하면 1919년 말까지 동북경내에 이미 45개의 반일무장대오가 실재했고 그 인수가 8450명에 달했다고 하니 경이롭지 않을수가 없다. 연변경내에만 해도 반일무장대오가 24개, 인수가 4650명에 달했다는 기꺼운 현실이다.
간도대한국민회(회장 구춘선, 사령관 안무) 주요한 무장단체들이 이러하다면 1920년 해당 통계수자는, 연변 각지에서 조직된 반일단체(일부 단체는 무장단체의 성격을 띠지 않음)는 26개에 달했다고 알려준다. 이 가운데서도 주도적역할을 한 단체는 구춘선이 이끄는 간도국민회였다. 《일본외무성 경찰서》(간도 부분) 《조선총독부경무국조사자료》에 의하면 연변지구의 무장단체 24개에 권총 390자루, 기관총11정, 수류탄 120개를 가지고있었다고 하는데 간도국민회에 보총 200자루, 의군부 보총 600자루, 신민단 보총 600자루, 군무독독부 보총 100여자루 갖고있었다고 한다.
가담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군과 602차의 전투를 벌려 연인수로 3184명이 전투에 뛰여들었다고 한다. 그중 조선서 벌린 전투가 87차, 동북경내서 벌린 전투가 73차로 나타난다. 일본외무성 보존서류(고경)과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에 반영된 수자들이다.
그 선두에 나선것이 간도국민회라고 볼수 있다.
간도국민회에서는 이파저파의 계선을 타파하고 홍범도부대의 작전을 적극 받들어나서는 한편 이해 11월에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여 정의단내부의 분렬과 일부 단체들에서 각기 자금을 모집하여 민중부담을 가중케 하는 등 행위를 비판하고 일치단결하여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간도국민회에서는 홍범도부대를 뜨거이 맞이하고 통합문제를 의논하여 일치한 견해를 가져왔다. 그후 국민회의 주도아래 제1차하마탕회의(2월 21일), 제2차 하마탕회의(3월 8일~10일), 제3차하마탕회의(3월 25일)가 연이어 소집되였다. 이런 속에서 서로 의견이 같은 국민회와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 등 4개단체의 련합이 이루어졌다. 련합부대는 《군무독군부》로 불리우면서 두만강대안의 온성, 종성, 회령 일대에서 빈번히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군의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7일전까지의 해당 통계수자를 보면 군무독군부는 온성, 종성, 회령 등 조선국내지구에 26여차나 출몰하며 적들을 타격하였다. 부장 최명록 이밖에 정일제1군사령부산하에 4개 대대와 1개 헌병대를 두어 무장력량을 집중하고 강화하였다. 이런 통합에 힘입고 신민단부대까지 힘을 합친데서 정일제1군은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에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유인, 매복전을 벌려 일본침략군 야스가와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에 섬멸적타격을 주는 휘황한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통합회의를 가지였다. 어떤 자료에는 4월 2일과 5월 7일에 봉의동(鳳儀洞)에서 제1차, 제2차 회의가 열리고 5월 15일에 왕청현 가야하 대지동(大地洞), 수전동(樹田洞)회의, 6월 21일에 장암동회의가 열리였는데 모두가 간도국민회의 주장과 창도결과라고 한다.
상기 6월 21일, 7월 1일, 7월 7일의 3차 련합회의에 앞서 국민회에서 먼저 통합방안을 작성하고 상해림시정부 측에서 파견된 류동렬, 리용과 안정근 등이 5월이래 여러 반일무장단체를 찾아 대량의 설복사업을 앞세운데서 통합문제는 비교적 순리로왔다.
나누어 실시하고 통합명칭은 7월7일에 토의, 결정하기로 한것 했으나 순탄하지 못한 일도 없지 않았다. 북로군정서의 실책이였다. 통합을 앞두고 북로군정서에서 《조선진공계획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면서 등을 돌리고 독립성을 강조한데서 북로군정서만이 통합의 밖으로 물러났다. 이해 1920년 7월 7일, 연길현 의란구 신계동회의에서 북로군정서가 통합에 동의하고 서명하였다고 하나 이는 표면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실책의 모든 원인은 북로군정서에만 돌릴수 없고 간도국민회에서 상해임시정부가 승인하는 《유일한 지방행정, 군사기관》 으로 자처하고 일을 처리하는데서 오는 불만도 있겠지만 북로군정서는 그번 실책의 대가를 그뒤 청산리전투에서 톡톡히 치러야 했다. <김좌진>
1920년 9월이후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분분이 원 근거지들을 떠나 동쪽으로, 서쪽으로 전이할 때 최명록의 행위에 격분한 홍범도는 부대를 이끌고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 이도구방면으로 이동해버렸다. 대부분 부대들은 홍범도를 따라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집결하였다. 봉오동주둔 최명록부대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왕청현 나자구로 이동한 부대는 소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의민단, 훈춘한민회 등 부대 대다수병력이였다. 총병력은 도합 850명안팎으로 알려졌다.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였다. 10월 21일 오전에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백운평일대 직소부근에서 청산리전투에서의 첫 승첩—백운평전투를 치른후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어랑천 갑산촌에 전이하였다. 김좌진부대는 이곳에서 이른 아침밥을 지어먹고 아침 5시경에 천수동의 적기병 한개소대를 섬멸한뒤 어랑촌 서쪽 야계골 부근에서 아침 7시부터 일본침략군 아즈마지대 주력부대와 혈전을 벌리였다.
이때 봉밀구방면으로 이동하던 홍범도연합부대가 천병마냥 야계골에 나타나 적들을 족치였다. 이것이 전반 청산리전투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치열한 어랑촌전투였다. 적토벌대는 합계 1000명가량을 이루어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전투가 자못 치열하였다. 허나 홍범도부대가 힘을 합친데서 북로군정서군은 사경에서 헤여났고 어둠이 깃들자 홍범도부대와 회합한후 어둠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때 맞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김좌진장군 등은 뒤미처야 통합에서 빠져나간 실책을 심장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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