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대진국(발해)

大震國(대진국)을 海東盛國(해동성국)이라 칭송하였다

설레임의 하루 2009. 5. 2. 01:58

*출처:다음블로그-인류시조성전건립회   글슨이-한얼원    http://blog.daum.net/looktrue/35022

 

 

 

 

大震國本紀第七(대진국 본기 제 7.환단고기)를 이어서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遂軍帥

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大興

五十七年帝崩廟號曰世宗諡號曰光聖文皇帝


大興(대흥) 45년(서기:781년) 淄靑(치청)의 節度使(절도사) 李正己(이정기)는 장병을 출동시켜 唐軍(당군)과 항거전을 하니 황제는

장병을 파견시켜 항거전에 助力(조력) 하였다.

李正己(이정기)는 平盧(평로)에서 출생한 고구려 사람이였다.


22년에 장수들은 軍統帥(군통수) 李希逸(이희일)을 축출하고 李正己(이정기)를 세웠으나 곧 죽자 그의 아들 納(납)을 父(부)에 이어

軍統帥(군통수)로 받아 들였다.

56년에 統師(통사)이던 아들 納(납)도 죽었다


고대에는 그 직위에 있다 죽으면 家人(가인) 들은 초상을 당하여도 訃告(부고)를 발행하지 않고 조용히 問喪客(문상객)을 맞이하는

것이 師道(사도) 였으므로 은밀이 奉行(봉행)하였던 것이다.
大興(대흥) 57년에 황제가 붕어하시니 廟號(묘호)를 世宗(세종)이라 하고 諡號(시호)를 光聖文皇帝(광성문황제)라 하였다.
註: <1> 大興(대흥)은 大震國(대진국)의 제 3대 光聖文皇帝(광성문황제)의 연호이다.

★ 1949년 길림성 돈화현의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墓碑(묘비)가 출토되었다.그 묘비에서

 [ 大興 歷孝感( )( )( )法大王之二女也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 또 한편 1980년 10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수향 용해 용두산에서대진국의 제 3대 문왕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무덤도 발굴되었다,
정혜공주무덤과 마찬가지로 비석이 나왔다,

정효공주의 묘 碑銘(비명)에서
[皇上 罷朝興慟 避寢馳懸 喪事之儀 命官備矣)]
즉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매우 슬퍼하셨으며, 침식을 피하고 가무도 중지하셨다.
장례의식은 관에 명하여 준비하도록 하였다는 글귀가 있다.
황상(皇上)이란 자기나라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일반 제후국에서는 쓸수 없는 단어이다.
그 비문에서 (公主者 我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之第四女也)]라고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 금륜성법대왕의 넷째 따님이시다

하여 문왕의 연호인 대흥 보력과 함께 '금륜성법대왕'이라는 최고의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 2 > 淄靑(치청) 節度使(절도사) :중국의 하북성,하남성,산동성 일대이다.
< 3 > 淄靑(치청)의 節度使(절도사) 李正己(이정기)는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선지(?-755년) 장군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인물이다.

< 4 > 大興(대흥) 45년은 서기 781년이며 신라는 780년에 이찬 金志貞(김지정)과 상대등 金良相(김양상), 이찬 敬信(경신)등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하여 惠恭王(혜공왕)과 왕비를 살해하여 죽이고 781년에 宣德王(선덕왕)이 즉위하여 浿江(패강)의 주군

주민들을 按撫(안부)하고 2월에 漢山州(한산주)에 순행하여 民戶(민호)를 浿江鎭(패강진)을 옮겼던 것이다.

★ 중국은 상기의 묘비와 같이 한겨레와 연관된 모든 碑文(비문)을 고의적으로 훼손시키고 모든 사서를 불태워 三韓(삼한)의 역사를

말살하고 자국은 聖君(성군)의 나라로 조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기 비문과 같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것이 역시 진리인 것이다.

★ 중국의 전 대륙은
고조선 시대 <환웅천왕의 열두 자손들이 다스린 강역>이라고 중국 사서에 명확히 기록되있다.
한겨레는 왜곡된 국사교육에 역사관이 오염되어 이와 같은 진실한 말도 不信(불신)할 것이다.

그러나
고대 이래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家門(가문)의 혈통을 오늘날 까지 소중히 전승하고 있는 族譜(족보)를 생각하고 중국의 三皇五帝

(3황5제)의 歷代紀(역대기)를 탐구하면 중화민족은 韓民族(한민족)의 한 支流(지류:갈래)로서 <중국의 고대 역사는 없다> 는 사실을

확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깨우쳐야 韓民族(한민족)의 고대 역사는 저절로 풀어진다.

國人立其族弟元義性暴惡不能理國甲戌國人廢之迎立先帝之孫華興改元曰中興明年崩廟號曰仁宗諡號曰成皇帝

皇叔崇璘立是爲穆宗康皇帝歷毅宗定皇帝元瑜康宗僖皇帝言義哲宗簡皇帝明忠至聖宗宣皇帝仁秀天資英明德氣

如神才兼文武乃有太祖之風

나라 사람들이 그 왕족의 형제인 元義(원의)를 옹립하였으나 성품이 포악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나라 사람들이 갑술년에 폐하시키고

先帝(선제)의 손자인 華興(화흥)을 맞이하여 옹립시키니 개원하여 中興(중흥)이라 하고 이듬해에 붕어하시니 廟號(묘호)를 仁宗

(인종)이라 하고 諡號(시호)를 成皇帝(성황제)라 하였다

皇叔(황숙)인 崇璘(숭린)이 옹립되니 이분이 穆宗(목종)이 되며 康皇帝(강황제)가 역임하시고 毅宗(의종) 定皇帝(정황제)와 元瑜

(원유) 康宗(강종) 僖皇帝(희황제) 言義(언의) 哲宗(철종) 簡皇帝(간황제) 明忠(명충)까지 이르고 聖宗(성종) 宣皇帝(의황제)는 德性

(덕성)이 인자하고 뛰어난 天帝(천제)의 자질과 총명하고 영특한 德氣(덕기)는 文武(문무)와 神才(신재)를 겸하여 태조의 기풍을

갖추고 계셨다

南定新羅置泥勿鐵圓沙弗岩淵等七州北略鹽海羅珊曷思藻那錫赫及南北虞婁置諸部長白之東曰安邊鴨綠之南曰

安遠牧丹之東曰鐵利黑水之上曰懷遠 河之東曰長嶺

남쪽은 신라를 평정하여 泥勿(니물),鐵圓(철원),沙弗(사불),岩淵(암연)등에 七州(7주)를 설치하고 북쪽의 鹽海(염해),羅珊(나산),

曷思(갈사),藻那(조나),錫赫(석혁)과 남북의 虞婁(우루)를 功略(공략)하여 모두 부를 설치하고 長白(장백)의 동쪽을 安邊(안변)이라

하고 鴨綠(압록)의 남쪽을 安遠(안원)이라 하고 牧丹(모란)의동쪽을 ★ 鐵利(철리)라 하고 ★ 黑水(흑수)의 위쪽을 懷遠(회원)이라

하고 ?河(낙하)의 동쪽을 長嶺(장령)이라 하였다.

★ 鐵利(철리)와 黑水(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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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칼럼 2001년 01월 20일 <삼국사기 열전 제10 견훤>에서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王順·

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太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

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태조는 尙父(상부) 견훤과 병력을 관찰하고는大相(대상) 堅權(견권)·述希(술희)·金山(금산)과 장군 龍吉(용길). 奇彦(기언)등에게
보기병 3만명을 左翼(좌익)으로 삼고 大相(대상) 金鐵(김철). 洪儒(홍유)·守鄕(수향)과 장군 王順(왕순) 俊良(준량)등에게는 보기병

3만명을 거느리게하여 右翼(우익)으로 삼았다.
大匡(대광) 順式(순식)·太相(태상) 兢俊(긍준)·王謙(왕겸)·王乂(왕예)·黔弼(검필)과 장군 貞順(정순)·宗熙(종희)등은 鐵騎(철기병)

2만명과 보기병 3천명을 거느리게하여黑水(흑수)와 鐵利(철리)의 모든 道(도)에서 굳건한 기마병 9천 5백명을 中軍(중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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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이병도 박사는 黑水(흑수)와 鐵利(철리)에 대한 註釋(주석)이 없었다.
이병도 박사는 상기와 같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이 한반도 지형에 맞춰지지 않거나 납득할수 없는 지명에 대해서는 억지 주장을

펴거나 註釋(주석)을 피하고 있었다.
즉 이병도 註釋(주석)은 한반도에 억지로 꿰 맞추었던 것이다.

★ 黑水(흑수)와 鐵利(철리)는 본래 신라의 영토이고
후에 大震國(대진국)의 영토 였으나 왕건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 黑水(흑수)와 鐵利(철리)의 정확한 위치가 나왔다.

<대진국 본문>
長嶺之東曰東平虞婁在北大蓋馬之南北地廣九千里境宇大開文治熙洽上自國都下至州縣皆有學九誓五戒朝夕誦

習春秋考績衆議薦貢人旣畜力家盡待用自是國勢富强內外安悅自無盜竊姦謀之端

長嶺(장령)의 동을 東平(동평)이라 하고 虞婁(우루)는 북쪽의 大蓋馬(대개마)에 있고 남북으로 지역의 넓이는 9천리가 국경이 되었다.
대륙을 開物敎化(개물교화)시켜 바야흐로 문명의 시대를 열었으니 위로 부터의 덕치는 흡족히 全國都(전국도)로 흘러 내려가 州縣

(주현)의 백성들은 모두다 학문에 열중하여 九誓五戒(구서오계)를 朝夕(조석)으로 독송하며 학습에 열중하였다

春秋(춘추:봄과 가을)에 회의를 열어 군중들이 가축이나 농사에 힘을 쏟아 공적이 될만한 인물을 추천하면 고려하여 곡물로

포상하거나 國事(국사)에 등용시켰다.
이때의 國勢(국세)는 富國强兵(부국강병)으로 내외가 두루 안정되어 백성들은 기쁨에 넘쳐흘렀고 도적이나 절도를 自行(자행)

하거나 간음이나 중상모략자도 없이 모두가 품행이 단정하였다.

唐倭新羅及契丹莫不畏服天下萬邦皆以聖人興治之海東盛國欽頌之更五代耶律雖頻數加兵終不能服也後經莊宗

和皇帝彛震順宗安皇帝虔晃明宗景皇帝玄錫至哀帝인 爲契丹所滅自世祖傳十五世共二百五十九年

唐(당)이나 倭(왜)나 신라. 및 거란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두려워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고 천하 만방이 모두 聖人(성인)의

덕치로 부흥한 大震國(대진국)을 흠모하며 칭송하기를 海東盛國(해동성국)이라 하였다

5대를 지나 耶律(야율)은 빈번히 병력을 증가하여 침략하였으나 끝내 항복시키지 못하고 終末(종말)을 맞았으며 얼마를 경과 한후에

莊宗(장종) 和皇帝(화황제) 彛震(이진) 順宗(순종) 安皇帝 虔晃(건황) 明宗 景皇帝(경황제) 玄錫(현석)까지 이르고 哀帝(애제) <인선>

은 契丹(거란)의 침공을 받아 멸망되었다.

대륙을 누빈 大震國(대진국)은 世祖(세조)로 부터 15세를 전하고 공히 259년 이였다.

穆宗改元曰正歷毅宗改元曰永德康宗改元曰朱雀哲宗改元曰太始聖宗改元曰建興莊宗改元曰咸和順宗改元曰大

定明宗改元曰天福哀帝改元曰淸泰

穆宗(목종)은 改元(개원)을 正歷(정역)으로 毅宗(의종)은 개원을 永德(영덕)으로 康宗(강종)은 개원을

朱雀(주작)으로 哲宗(철종)은 개원을 太始(태시)로 聖宗(성종)은 개원을 建興(건흥)으로 莊宗(장종)은 개원을

咸和(함화)로 順宗(순종)은 개원을 大定(대정)으로 明宗(명종)은 개원을 天福(천복)으로 哀帝(애제)는 개원을

淸泰(청태)라 하였던 것이다

穆宗(목종)은 改元(개원)을 正歷(정역)으로 毅宗(의종)은 개원을 永德(영덕)으로 康宗(강종)은 개원을 朱雀(주작)으로 哲宗(철종)은

개원을 太始(태시)로 聖宗(성종)은 개원을 建興(건흥)으로 莊宗(장종)은 개원을咸和(함화)로 順宗(순종)은 개원을 大定(대정)으로

明宗(명종)은 개원을 天福(천복)으로 哀帝(애제)는 개원을淸泰(청태)라 하였던 것이다

大震國南京海府本南沃沮古國今海城縣是也西京鴨綠府本膏離古國今臨潢今西遼河卽古之西鴨綠河也故舊地安

民縣在東而其西臨潢縣臨潢後爲遼上京臨潢府也乃古之西安平是也

大震國(대진국)은 南京(남경)을 海府(해부)라 하였으며 본래 南沃沮國(남옥저국)의 고대 국명을 지금은 海城縣(해성현)이라 하고

西京(서경) 鴨綠府(압록부)는 본래 거대 膏離國(고리국)이다.

지금은 臨潢(임황)이라 하며 지금의 西遼河(서요하)를 즉 고대에는 西鴨綠河(서압록하)라 하였던 것이다.

고로 舊地圖(구지도)에서 安民縣(안민현)은 동에 있고 서에는 臨潢縣(임황현)이 있다 하였고 臨潢(임황)은 후에 遼國(요국)에서 上京

(상경)을 臨潢府(임황부)라 하였고 고대에는 西安平(서안평)이라 하였던 것이다.

註: 臨潢縣(임황현):열하성 林西縣(임서현)에 潢水(황수)가 있다.
지금의 西遼河(서요하)를 고대에는 西鴨綠河(서압록하)라 하였으니 현재의 鴨綠江(압록강)과 다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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