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야후블로그-역사의천존고 http://kr.blog.yahoo.com/shim4ro/1478
발 해 고
유득공 원저
머 리 말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후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십여 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십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규장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의 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왕, 신하, 지리, 관청 및 관직, 의식 및
복장, 물산, 국어, 국서, 후예 국가에 관해 고찰하는 아홉 목록의 글을 지었다.
이를 세가, 전, 지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진년(1784) 윤삼월 이십오일
[왕에 관한 고찰]
걸걸중상 (대중상)
걸걸중상은 성이 대씨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대씨가 대정씨에서 나왔고, 배달족에 대씨가 있게 된 것은 대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중상은 아들 대조영과 함께 집안 식솔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사리라 칭하였다.
사리란 부락의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 말이다.
효소왕 5년(696)에 거란족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영주를 함락시키고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이에 걸걸중상이 두려워하여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오루하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를 시켜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다.
이 무렵에 걸걸중상은 이미 사망하였다.
고왕
고왕의 이름은 조영으로 걸걸중상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걸걸중상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하여 도망하였다. 이해고가 그를 뒤쫓아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크게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맺고, 부여·옥저·고조선·변한 등 바다 북쪽의 십여 국을 정복하였다.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 거란에 이르고, 남쪽으로 신라와 이하를 경계로 이웃하였다.
그 나라 땅은 사방 각 오천 리에 달하였고, 호구는 십여 만 호였으며, 정예의 병사가 수만 명이었다.
또 중국의 문자를 잘 익혔으며, 풍속은 고구려·거란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효소왕 7년(698)에 나라 이름을 진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이 되었다.
홀한성을 쌓아 살았으니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때에 해와 거란이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서 도로가 가로막히자 측천무후가 발해를 침략할 수 없었다.
당나라 중종이 즉위한 뒤에 시어사 장행급을 발해에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자,
고왕도 아들을 보내 중종을 모시도록 하였다.
16년(713)에 말갈이란 칭호를 버리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부여부에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였다.
22년(719)에 왕이 사망하였다. 당나라에서 좌문감솔 오사겸을 보내 조문하였다.
무왕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이다. 왕은 연호를 인안이란 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풍속에 따라서 관과 역을 두지 않고 곳곳에 촌락을 두었다.
말갈을 백성으로 삼았고 큰 촌락의 책임자로 도독을 두었으며, 그 다음은 자사, 그 아래는 수령이라 하였다.
동북의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었다.
인안 8년(726)에 흑수말갈의 사자가 당나라 현종을 알현하자, 현종은 그 땅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를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무왕이 신하들을 불러, "처음에 흑수말갈이 우리의 길을 빌려서 당나라와 통하였고, 또 다른 때에는 돌궐에 토둔을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먼저 알린 뒤에 우리 사신과 동행하였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와 공모하여 우리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동생 문예가 외삼촌 임아상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예는 간하면서 따르지 않다가 당나라로 도망가 버렸고, 이 때문에 당나라와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인안 9년(727)에 고인의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인안 14년(732) 9월에 왕은 대장 장문휴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육군은 따로 마도산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가게 하였다.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선왕의 치욕을 씻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문예 사건에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현종이 크게 노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침략하게 하였다.
인안 15년(733)에 현종은 다시 문예로 하여금 유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침략하게 하였다.
또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덕왕에게 부절을 주며 발해 남쪽 변방을 침략하게 하였다.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등 네 명의 장군을 시켜서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만나 공격하도록 하였다.
마침 눈이 십 척이 넘게 내리고 산 길이 험준해서 얼어죽은 병사가 반이 넘자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에 신라인 김충신이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현종의 뜻을 받들어 귀국하여 발해를 토벌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현종이 허락하였으나 끝내 아무 성과도 없었다. 흑수말갈의 땅이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자, 일본 사신 아송 무시마로가 왔다.
인안 18년(737)에 왕이 사망하였다.
문왕
문왕의 이름은 흠무로서 무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대흥으로 연호를 고쳤다.
왕은 국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대흥 2년(738)에 당나라에서『당례』,『삼국지』,『진서』,『삼십육국춘추』를 필사해 왔다.
대흥 3년(739)에 약홀주도독 서요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0년(756)에 전 해 11월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피해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평로유후 서귀도가 과의도위 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을 발해에 보내서 "금년 10월에 안녹산을 칠 것이니 발해왕은 군사
4만 명을 징발하여 역적을 평정하는 데에 돕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서귀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하여 장원간을 억류시켰다.
12월 병오일에 서귀도가 과연 유정신을 북평에서 죽이고, 몰래 안녹산 및 유주절도사 사사명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고자
공모하였다.
안동도호 왕현지가 그 공모를 알고 정예의 병사 6천여 명을 이끌고 유성을 함락시켜 서귀도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평로절도라 칭하며 북평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대흥 22년(758) 4월에 왕현지가 장군 왕진의를 발해에 보내서, "천자가 이미 서경으로 돌아왔고, 피신해 있던 태상황을 촉에서
맞이하여 별궁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적의 무리를 소탕하게 됨에 따라 저를 보내어 아뢰게 하였습니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왕이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왕진의를 머무르게 하고, 따로 사신을 보내서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였다.
숙종이 왕에게 칙서 한 권을 보냈다. 행목저주자사 양승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3년(759)에 현도주자사 고남신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8년(764)에 당의 사신 한조채가 발해에서 신라로 갔다.
대흥 35년(771)에 일만복을 사신으로 보내 스스로를 천손이라 칭하고 양국 관계를 외삼촌과 조카 사이로 규정하였다.
대흥 38년(774)에 유신의 일환으로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고쳤다.
보력 3년(776)에 사도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보력 4년(777) 정월에 왕이 일본 무희 11명과 토산물을 당나라에 보냈다. 4월에 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가 사망하였다.
정원 연간(785∼805)에 다시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대흥 56년(792)년 2월에 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가 사망하였다.
왕이 11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사신 조신전수, 기촌전성, 양후사영구, 연익마려, 무생조수, 조신전계가 왔다.
대흥 57년(793) 3월 4일에 왕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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