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한배달 글쓴이: 마고지나 http://cafe.daum.net/hanbaedal/F45t/137
단군신화 탄생지 고찰
곰을 숭상했던 치우천왕 황제 유망의 시대
수분하는 황하의 서북쪽에서 본류로 흘러들어오는 지류입니다.
단국의 홍제 8년에 제곡고신이 수분하 동쪽으로 쳐들어왔을 때, 기성곤오가 나가 맞아 싸워 물리칩니다.
수분하는 곤오가 제곡고신과 싸운 곳이고, 단국과 제곡고신국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따라서 발해연안에서부터 서쪽으로 수분하에 이르는 땅이 단국의 강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곤오가 제곡고신을 물리칠 때, 단군왕검은 웅심국의 왕검으로 있었고, 또한 단국의 태자로 있었습니다.
웅심국은 황하 가까운 곳 어디엔가 있었던 나라로 생각됩니다.
단군신화에서 웅熊은 곰인데, 마고여신을 의미합니다. 곰은 마고여신의 화신이고, 모계사회를 대표하는 웅족의 여인입니다
.
곰이 들어가 3,7일 동안 환골탈퇴를 기도한 굴은 오늘날의 사원, 즉 절의 원형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기도하는 굴을 토굴이라고 합니다.
굴의 어원이 단군신화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곰이 여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기도 후에 여사제로 득도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그가 삼신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웅심국의 심心자는 인간의 마음을 듯하기도 하지만, 웅熊자의 화灬자와도 상통합니다. 마음의 불이자, 생명의 불입니다.
곧 마음의 태양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고 즉 곰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단군왕검은 웅심국왕의 딸과 혼인합니다. 그가 웅녀熊女입니다. 그는 웅족의 여사제와 혼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웅심국은 당시에 마고의 신상을 모시어 숭상하는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마고를 모신 산을 곰뫼-웅심산이라고 하였다고 봅니다.
상고시대의 역사에서 웅족이 역사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하는 때가 치우천왕, 유망, 황제의 시대입니다. 치우천왕은 웅족이라고 하였고, 황제와 유망은 유웅족有熊族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웅족이 황하를 중심에 두고 활동하고 있었던 때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종족을 통틀어 배달나라에 속한 구려족이라고 하였는데, 웅족은 구려족에 속한 한 종족입니다. 상간하桑干河 유역 중심에 사산斯山이 있는데, 이 산을 웅이산熊耳山이라고 하였습니다. 웅이산 동남쪽에 후세에 열산烈山, 역산으로 부르게 된 용문산龍門山이 있습니다. 상간하에 있는 산이 웅이산입니다. 웅이산의 중심이 되는 곳을 웅심산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곳에 웅심국이 있었을 것입니다. 곰신앙의 진원지 수분하 동쪽과 탁록 사마정司馬貞은 단군왕검의 조상이 되는 염제 유망에 대하여 “웅이와 용문 등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유웅有熊 마을입니다. 유웅 마을의 지형이 홍토구릉紅土丘陵이라 붉은 곰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홍토구릉에 성을 쌓아 청구靑丘라고 하였습니다. 청구는 자오지한웅인 치우천왕의 居城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헌원軒轅이 정착하여, 헌원지구軒轅之丘로 불리기도 하였고, 헌원지대軒轅之臺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상대商代 이후에는 탁록涿鹿이라고 칭했고, 서한西漢이 탁록현이라고 하였습니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성城을 폐지하였습니다. 지금은 탁록현에 있고, 성의 동남쪽의 반산진礬山鎭에 삼보촌三堡村이 북쪽에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진대晋代의 황보밀皇甫謐이 하남河南 신정新鄭이 유웅부락有熊部落이 된 소재지所在地라고 말하였습니다.1) 하남 신정지방은 황제와 염제가 나누어 다스리던 남북의 중간의 공상空桑입니다. (이상 <黃帝故城行>黃帝戰蚩尤,戰炎帝,建都涿鹿遺址考 曲辰 159쪽 華齡出版社 1996.7 참조) 이 외에도 웅이산이 있는 지명은 하남河南, 호남湖南, 섬서陝西, 사천四川 등 네 곳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 있는 웅이산이 진짜 웅심산으로 불릴 수 있는 웅이산인지 알 수 없습니다. 황보밀은 신정을 유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정이 유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 사람도 있습니다. 곡진曲辰이란 사람이 그가 쓴 <黃帝故城行> 華齡出版社 1996.7 159쪽에서, 유웅으로 보는 웅이산과 신정이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황제 이전에 그곳에 웅족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으므로 황보밀의 주장에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헌원의 지구’라는 곳에 살았고, 도읍을 탁록으로 정하여 그리로 옮겼는데, 탁록이 유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 나온 지명이 유웅, 유웅지허, 웅이산, 신정, 축융지허, 헌원지허, 헌원지대 등인데, 이들 지명을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치우천왕이 청구국을 세운 청구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청구가 곧 곰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곰 숭배신앙이 웅심국의 도성인 청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한인천제의 후예 위홍이 도읍한 신정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정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정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신정은 풍이족 - 즉 한인천제의 땅이었습니다. <부소보서>가 이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적제 축융(주,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10세손 화인和仁이 오이烏夷2)의 여자 여서女瑞를 후后로 삼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이름을 호昊라고 하였다. 적제 부통扶統(주, 한인천제의 적통을 이었다는 뜻)이 되었다. 둘째 아들은 밀유密由라고 하는데, 적제 호가 31년에 서역으로 가서 살도록 명하고, 그곳을 봉지로 하니, 동막東莫의 시조가 되었다. 이 곳을 수미을須美乙(주, 수메르)라 하는데, 수미을이란 새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이상의 기록을 <부소보서>가 일실된 <한국사桓國史>에서 인용했다고 밝혔음)
적제 위홍衛弘 때, 남쪽으로 4천여 리를 가서 청원靑原에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신정新鄭(새나라)이다. 때문에 이곳을 축융의 허(墟:檀墟)라고 하였다.” (<부소보서>) <제왕세기>에서는 신정현은 ‘유웅씨의 허’이며 ‘황제가 도읍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정이 웅족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신정이 한국시대에 ‘축융의 허’였고, 후대에 와서 황제시대에 ‘유웅의 허’가 되었으니, ‘축융의 허’시대에 이곳에 사는 사람은 풍이족으로 불렸고, 유웅의 허 시대에 이 곳에 사는 사람은 웅족으로 불렸습니다. 풍이가 웅족으로 변한 것입니다.
<사기>는 항하 유역에는 강姜씨 집성촌이 허다하게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강씨들은 유망족인데, 이들이 신농의 후예이므로 신농의 후예로 부릅니다. 이들은 구려족3)을 구성하는 여러 종족에 속한 한 종족이었습니다. 구려족이 번성하면서, 종족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이 이끄는 종족들과 황제가 이끄는 종족이 둘로 나뉘어 싸우게 됩니다. 말하자면 웅족들 사이에 두 우두머리가 나와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신정에 황제가 도읍하여 유웅의 허라고 하였다는대목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황제가 도읍하였다는 것은 후대에 누군가 갖다 붙인 말이 아닐까요? 그리고 강씨가 허다하게 살았다고 했는데, 이 말도 검토해 보아야 할 말입니다. 당시에 강성한 종족이 풍이족이었고, 풍이족에서 풍성風姓, 강성姜姓, 기성己姓, 희성姬姓이 나왔습니다. 강성은 유망이 대표하고, 희성은 황제가 대표하고, 기성은 곤오가 대표합니다. 풍성을 누가 대표하는지 단정할 수 없으나, 치우의 치蚩와 풍성의 풍風가 같은 충虫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치우를 대표로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네 성 중에서 일찍이 신정을 선점한 족성이 풍성(풍이) 출신의 위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막각한 세 족성을 제치고 황제가 신정에 도읍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라고하겠습니다. 필자는 황제와 유망과 치우천왕 세 분과 신정과는 무관하다고 봅니다. 그분들이 당시에 관심을 두었던 곳은 신정이 아니라 ‘축융의 허’로 불리다가 ‘유웅의 허’로 불리게 된 탁록입니다. 그들의 관심이 이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탁록의 기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유망, 황제, 치우천왕이 무려 10년 동안 싸웠습니다. 이 전쟁의 당위성을 놓고 동이족의 기록과 하화족의 기록이 상반됩니다. 동이족의 기록은, 당시의 패권을 쥐고 있던 청구의 치우에게 반란을 일으켜 유망(駱賓基의 년표, 서기전 2517-2474 년)을 핍박하는 황제(동작빈의 년표, 서기전 2692-2592 년, 윤희병 년표, 황제즉위 서기전 2689년)를 토벌하기 위하여 희대에서 군사를 일으켜 탁록에서 싸웠다고 하였습니다. 하화족의 기록은, 이복형제 사이인 유망과 황제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구려족의 수령 치우와 탁록에서 싸워 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치우천왕과 황제와의 싸움은 구려족이 둘로 나누어지기 위하여 싸운 싸움이기도 하지만, 웅족이 숭상하는 마고를 누가 차지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느냐 하는 싸움이기도 하였습니다.
삼위태백이 조응하는 막고야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맥족과 곰족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한국桓國의 서자庶子 한웅桓雄이란 이가 있어, 자주 나라를 가져 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지망하더니, 그의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伯 땅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에게 큰 이익을 줄 직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어 여기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 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삼위태백이나 천부인간은 생소한 어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직접 그것을 본 사람들이 없으니 이해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 뜻을 풀어 쓴 글을 읽었다고 해도, 그 글이 정확하게 맞는다고 볼 수 없는 모호한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삼위태백에 대하여 학자들은 지나에 있는 삼위산과 태백산이라고 말합니다. 필자는 이 말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산은 막고굴이 있는 둔황에 있는 산, 즉 서역에 있는 산입니다. 태백산은 중원의 서북쪽에 있는 산입니다. 두 산의 거리가 남북한을 횡단하는 거리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필자는 비행기를 타고 둔황에 가서 삼위산을 멀리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태백산은 서안에서 멀지 않으므로 버스를 타고 가서 직접 올라가 보았습니다. 이들 산 사이에 타클라마칸이라는 거대한 사막이 가로놓여 있어서, 단군신화에 나올 만한 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우리 조상의 활동무대는 황하유역과 발해만 일대입니다. 그래서 삼위산과 태백산이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산으로 믿기가 힘든 것입니다. 필자는 삼위태백을 하늘에 뜬 별로 봅니다. 삼위는 삼수參宿와 위수危宿로, 태백太白은 태백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삼수는 오리온별자리에 속하여 삼태성으로 불리는 3개의 별입니다. 오리온은 하늘의 중심을 잡아주는 별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서,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伯) 땅을 내려다보니”라고 한 말은 “삼수가 기준점을 잡아주고, 위수와 태백성이 조응하는 땅을 내려다보니”로 풀어 써야만 그 뜻이 통합니다. 삼수는 서방백호칠수에 속한 별자리입니다. 위수는 북방현무칠수에 속한 3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입니다. 북두칠성이 동북쪽 하늘에 뜰 때, 오리온은 하늘의 중심에 떠있습니다. 그래서 별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별자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수가 하늘의 정중앙에 있을 때 위수가 조응하는 곳을 한웅천왕이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정착한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태백성은 해를 호위하는 별입니다. 해가 뜰 때 해를 호위하고, 낮에 사라졌다가, 해가 질 때 나타나서 호위하고, 해가 지면 다시 사라집니다. 아침저녁에만 나타나는 별입니다. 금성이 태양을 호위하면서 8자 형상의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므로 금성의 궤도의 형상을 따라 8이란 숫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옛날에 신전을 지을 때에 주신을 호위하는 신을 모시는 전각을 8각의 건물로 지었습니다. 금성의 위력을 호위하는 힘으로 쓰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초기백제의 신전 터인 이성산성에는 8각건물지가 남아 있습니다. 필자는 청소년을 위한 동북공정 강좌 10에서, “북극오성을 우리 시조님들의 신명을 올린 로열패밀리 별자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북극오성의 중심을 잡아주는 현신賢臣의 역할을 담당한 별들이 삼수이고, 또 나라의 터를 잡아주는 별들이 위수3성입니다. 로열패밀리를 경호하는 별은 태백성입니다. 삼위태백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이 황궁 터를 잡은 곳을 험독險瀆이라고 하였습니다. 험독이란 위험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험독이 있는 곳이 지금의 묘도열도廟島列島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곳이 삼신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천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태백산으로 불리기도 한 곳입니다. <산해경>은 “삼신산은 오제五帝의 시조인 소호의 나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제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의 5분을 뜻합니다. 순은 단군왕검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고, 한인, 한웅보다 후대의 사람입니다. 이 기록으로 보아서, <산해경>을 쓴 사람은 상국商國 이후의 사람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제의 시조 운운하는것은 역사 왜곡입니다. 우리의 로열패밀리를 구성하는 마고 한인 한웅 단군왕검의 4분을 오제로 대체한 것입니다. <산해경>에는 “동해 밖의 대학大壑(큰 웅덩이)에 5개의 산이 있는데, 대여, 원교, 방호, 영주, 봉래”라고 하였습니다. <사기> 봉선서에서는 대여, 원교의 2 산을 빼고 “발해 상에 영주 방산 봉래의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에서 이 곳을 험독이라고 한 이유는, 바다 한가운데에 울돌목과 같은 소용돌이가 있어서, 접근하는 배가 물살에 휩쓸려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가려면 발해 연안을 따라 돌다가 뱃길을 찾아 들어가야 하였습니다.
묘도열도의 묘廟자에 조선朝鮮을 뜻하는 조朝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고, 또한 단군을 뜻하는 탱그리라는 지명도 있어서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시연구가 장동균씨가 현지를 답사하고, 그곳에 천후사天后寺가 있는데, 배를 타는 사람들이 언제나 무사함을 비는 여신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에 삼신산이 있으므로, 천후사에 모신 여신을 마고로 볼 수 있습니다. 삼신산의 주인이 마고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장자는 그가 쓴 <제물편>에서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사는 여신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막은 마의 변음이고, 고는 여신이라는 뜻입니다. 야는 산의 이름인 듯 합니다. 그러니까 마고여신이 사는 야산이라는 뜻이겠지요. 후대에 와서 막藐이 맥貊으로 변하여 맥족貊族이 된 듯 합니다. 이들이 마고를 숭상하는 종족이므로 맥족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마고에서 막이 변하여 맥이 되었고, 고가 변하여 고마-곰이 되었다면, 마고의 후예가 막족과 곰족으로 갈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고를 숭상하여 생긴 고마, 즉 곰족과 막이 변하여 맥이 된 맥족은 같은 종족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위태백에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단군신화가 역사천문 해설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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