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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시조 금함보는 과연 누구일까?

설레임의 하루 2009. 4. 23. 14:35

 *출처:다음블로그 : 煐元瀚帝國-天上帝國     http://cafe.naver.com/eequden13.cafe 
 

 

 

金의 始祖 금함보는 과연 누구일까? 三姓 淵源譜나 경주김씨 족보(북쪽 발행)를 살펴보면 항려운동을 주도한 왕자로 奮왕자와 鎰왕자

두 분을 들 수있다.

그런데 남쪽에서 발행된 경주 김씨 족보에는 奮왕자가 빠져 있다.

또 우리가 알기로는 경순왕의 부인이 竹房婦人박씨, 낙랑공주 王씨, 별빈 안씨부인 이렇게 세부인을 둔 것으로 알고 있는데, 三姓淵源譜

를 보면 첫째부인으로 松希부인(昔씨)이 나오고있다.

뿐만아니라 송희부인은 5왕자를 둔것으로 기록돼어 있는데 이 부분은 확실하게 고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왕자들 중의 한분이 금나라 시조 금함보와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松希 부인의 5왕자 함자를 보면 佺, 瑤(完山君), 琨, 英(廣州君), 奮(三大君)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 궁굼한 사항을 추론 해보기로 하자.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양위하였을 때 신라조정에서는 무기력하게 왕권을 넘겨

주었을까?
아니다! 삼성 연원보를 보면 왕 앞에서 자결한 왕자가 2명이나 나온다(松希婦人의 소생임). 佺왕자와 琨왕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간 왕자가 2명인데 송희부인의 다섯째 奮왕자와 박씨왕비의 첫째 鎰 왕자이다.

<개골산으로 들어간 왕자를 마의태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두 왕자 모두 마의태자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금강산으로 들어 갔다는 것은 신라 부흥운동을 위하여 떠났다고 볼 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신라에는 왕건의 반대 세력이 많았는데 아마 수 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떠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 군사를 지휘한 장군이 猛將軍으로 전해지고있다.
즉 한계산성과 설악산 일대가 신라 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추정 할 수 있는 곳이다
(역사 스페설 미스테리 마의태자에서 보여줌).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실제 군사행동에 돌입하기 위해서 군사훈련이 있엇을 것으로

보며 그 시기와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군사행동에 들어 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왕자들 입장에서 보면 고려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한편 부왕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군사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다만 군사행동을 하기위한 시기를 저울질 하였을 것이고 또 왕자들은신분을 노출하지 않을려고 이름도 가명으로 사용 하고, 승려로

위장하면서 때를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려의 군사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또 경순왕도 장수를(92세) 하였기 때문에 고려를 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로 지내다 결국 왕자들의 나이도 60세에 가까왔을 것이고 맹장군도 사망하여 고려땅에서 부흥 운동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두 왕자중의 한분이 만주로 건너 갔을 것아라는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금함보는 두 왕자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부터 금함보의 출생년도를 살펴 보기로 한다.


고려사 세가 예종편을 보면 아골타의 계보가 적혀 있는데 여길보면 아골타는 금함보의 5代孫으로 기록돼어 있다.

금함보=금준=금행 → 금극수 → 고을 → 활라 → 핵리발 → 아골타


문헌에 따라서는 6대손, 7대손, 8대손등 제 각각이다.

이것은 世와 代 구분을 잘못해서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5代孫=6世孫, 6代孫=7世孫이 올바른 표기이다.
그럼 두가지 경우로 금함보의 출생년도를 살펴보자. (금함보의 출생년도는 아주 중요함)

첫째 아골타가 금함보의 5代孫인 경우
1세대를 20년으로 보고 아골타가 금을 건국 하였을 때를 47세로 보면 20×5=100,
100+47=147, 그리고 금함보가 만주에 건너 갔을때 이미 60세 이므로(금사에 기록됨)
147+60=207 다시 말하면 金 나라 建國 207년전에 태어난 인물이 금함보인 것이다.

금의 건국이 1115년 이므로 1115-207=908 오차 범위를 5년으로 보면 908년 또는 913년에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신라의 멸망이 935년이니 이때 금함보의 나이는 22세 또는 27세로 추정되어 실제로 우리가 역사에서 아는 鎰왕자(마의태자)의

나이가 신라 멸망시 20세 초 였을 것이므로 금함보는 확실히 마의태자 자신이 된다는 것을 알 수있다.

둘째 아골타가 금함보의 6대손인 경우
마찬가지로 20×6=120, 아골타(1068~1123)가 47세에 금을 건국하였으므로 120+47=167,금함보가 만주에 들어 갔을 때 60이므로 167+60=227 즉 금 건국 227년 전에 태어난 인물일 것이다.

1115-227=888이므로 신라 멸망시 47세가 된다고 볼 수있다.
다만 1세대를 20년으로 보는 것은 정확한 것은 아니고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오차 범위가 10-20세까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경우도 우리 派祖의 22代孫인데 계산법으로는 20×22=440이지만 실제로는 547년으로 107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러한 대수 계산에서는 한세대별로 4-5년정도 오차범위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상기연대는 오차범위 안에 들기 때문에 금함보는 일왕자 또는 분왕자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 보아야 할것은 금사와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기록돼어있는 3형제에 관한 부분이다. 

원래 송희부인의 소생은  5형제 이지만 두 왕자가 경순왕 앞에서 자결 하였기 때문에 삼형제만 남은 것이다. 

그렇다면 금사와 동사강목에서 삼형제라고 기록된 부분과도 완전히 일치 하는 것이다.

삼형제의 함자는 요(완산군),  영(광주군), 분(삼대군)이다. 

<다만 이 글에서 분왕자를 거론한 것은 분왕자가 개골산으로 들어 갔다고 기록돼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왕자인 영왕자도 금함보가 될 수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때 망명한 왕자는 鎰왕자가 아닌 奮왕자 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분왕자는 일왕자의 형님이기 때문에 연령에 있어서는 정학하게 일치하고 또한 분왕자에대한 기록이 삼국사기 정사를

비롯해서 당시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고려 조정에서 볼때에는 매우 껄끄럽고 기피하는 인물로 보았을 것이다.
특히 송희 부인과 소생 5왕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 조정에서 경계 대상 제1호의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러분은 가끔 이러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자식이 있는데 부모의 속을 섞이고 말도 안듣고 할때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 할것이다.

"저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니 우리 족보에서 떼어 나가든지 아예 우리 족보에서 없에 버려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고려 시대의 모든 역사서에서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그만큼 奮왕자는 고려에대한 적개심이 더욱 컸을 것이고 고려 조정 또한 분왕자를 사로 잡을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鎰왕자의 경우도 그렇다.

삼국사기에 약간 비추어 질 뿐이다.

그만큼 일왕자도 고려 조정에서 볼떄 기피 인물이기 떄문에 삼국사기에 간단히 언급 했을 정도다.

또한 경주김씨 계보 연구회에서 발표 한 것을 보면 김부식 자신이 일왕자의 6대손 이다.

이제부터 아골타와 김부식의 관계를 살펴 보기로하자.

역사 문헌에 나오는 아골타의 언행을 보면 아골타는 자신의 출자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김부식과 아골타는 동 시대의 사람이다.

즉 아골타는 1068-1123년대 인물이며, 김부식은 1075-1151년대 인물로 둘 사이에는 가까운 혈연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아골타가 자신의 출자에 대하여 알고 있는데 김부식이 200년 정도 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모를리 없는 것이다.

즉 김부식은 경순왕의 아들인 왕자들에 대한 비밀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鎰왕자에 대한 기록만 간단히 언급하였고 송희 부인과 왕자에 대한 기록이 빠져있는 것은 당시 고려

조정의 분왕자에 대한 거부감이거나 또는 경순왕의 유지 때문에 의도적으로 역사 기록에서 지운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김부식의 금나라에 대한 생각은 남 다르다.

예를들면 송나라에서 함께 힘을 합쳐 금나라를 치자는 제안을 고려 조정에 하였을때 김부식은 그동안의 송나라와의 우호 선린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 하였으며, 도리어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의 예를 취하는등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뿐만아니라 금국정벌론을 외쳤던 묘청의 난을 제압 한거라든지 금태조에 대하여 칭신 한것등을 살펴보면  당시 김부식이 아골타와의

혈연 관계를 알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금함보가 분왕자라면 둘 사이에는 촌수가 가까운 형제지간 또는 숙질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부분도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고 욕만 할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심도있게 고찰해야 할 부분이다.

지금도 삼성연원보를 놓고 진본이니 위보니 말들이 많은데 이부분은 경주 김씨네 문제가 아니라 우리역사에 뜻이 있는 모든 학자들이

연구하고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金나라의 역사를 밝힐 수 있을 뿐 아니라 淸나라의 역사와도 관계돼는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증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역사에 뜻이 있는 분이라면 모두 동참하셔서 三姓淵源譜에 대하여 진위를 가리고 고증하고 연구 검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출처카페 : 煐元瀚帝國-天上帝國 링크 

금나라의 역사는 한국사이다.
아골타는 금(金) 나라의 시조입니다.
금은 거란이 세운 요 나라를 멸망시키고 황하이북과 양자강 일부를 차지할 정도로 큰 세력을 떨쳤으며, 

고려와는 우호관계를 맺은 나라입니다.(물론 고려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할지도 모르지만..)
재미있는 일은 이 금나라는 '신라'의 후손을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1.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

(1). [ 금사(金史) <세기>] * 금나라의 실록. 세기는 금태조와 그 이전 자료 수록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합부(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참고로 '함보'는 법명입니다.

그리고 이 함보란 사람이 왕이된게 아니라 7대손이 왕이 된 사람입니다.

(2).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청나라 건륭제때 만들어진 북방민족을 다룬 역사서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3).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 남송 때 만들어진, 송과 거란, 여진의 역사 저자 서몽신(徐夢莘)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4). [고려사(高麗史)]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

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

(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섰다고 한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금의 아골타가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금나라가 발해 유민들을 회유할 때)"

(5). [송막기문(松漠紀聞)] * 남송(南宋) 때 만들어진 금나라 견문록 저자 홍호(洪皓)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6). [동사강목(東史綱目)]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


2. 아골타(阿骨打)와 신라와의 관계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위의 자료에서는 금나라의 아골타는 분명하게 신라의 후손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골타의 조상이 되는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은 신라와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요?

(1). 김행(金幸)혹은 김준(金俊)은 두가지의 이름의 상반된 기록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金傅)를 시조로 하는 부안김씨의 족보에는 김행(金幸)이 마의태자의 아들로 나오고, 형제를 둘 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김행은 두 형제를 고려에 놔두고 홀로 만주로 떠났다고 합니다.

안정목의 동사강목에서는 '김준(金俊)이 여진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또한 위에 적혀있듯이 형제가 셋으로 나오죠.

적어도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아들인 이 둘중, 김행(金幸)이냐 김준(金俊)하는 것은 이름의 차이이지 한사람이 확실히 '아골타'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2).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누구인가? 그리고 실존인물?
마의태자에 관해서 흔히들 알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경순왕 김부(金傅)가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하자 홀로 분개하여

개골산으로 갔따고 한 인물입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머리를 깍고 해인사에 들어간 인물로 나오죠. 사람들이 전설이라고 여기는 인물이라는 것 입니다.

하지만, 마의태자는 실존인물입니다. 다만 한명이 아닌, 두명의 마의태자가 있었습니다.

신라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에 김부의 아들들이 태자란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 두명의 마의태자는 바로 '김일(金鎰)과 김분(金奮) 바로 이 두사람입니다.

다만 김일(金鎰)은 부안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만, 김분(金奮)와 다른 역사서 에도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일설에 '김일'이 마의태자로 알려진 것은, 부안김씨와 경주김씨의 족보에서 경순왕 김부와 첫째 석씨 부인사이에 난 아들(김분)을

넣지 않고, 둘째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김일'만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에서는 석씨, 박씨 부인이 모두 들어감)

이것은 조선시대에 나온 신라시대 박(朴)·석(昔)·김(金) 세사람의 족보를 적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인조 20년, 1642년)에 ''김일(金鎰)'과 '김분(金奮)' 이 두사람이 모두 나타납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

위로 종합해볼 때 마의태자는 두명이었고, 현존인물이었음이 확인이 된 것입니다.

(3).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유적


또한 강원도 인제군 김부리는 '마의태자'의 자취가 묻어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은 아직까지 대동제를 통해 마의태자를 모시고 있읍니다.

또한 이곳에는 마의태자의 위패가 봉안되 있는데, ‘김부대왕 제1자(金富大王 第一子)’’라고 명기돼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석탑에는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

(干支)가 나왔습니다.

마의태자의 후손중에 한명이 이곳에다가 탑을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이상으로 볼 때, 아골타의 조상은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울 때 '신라의 얼'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국명으로 천명했다는 것입니다.

발해가 고구려의 역사를 뒤은 것이라고 볼 때, 금나라도 당연히 고려와 함께 신라의 역사를 뒤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사에 이르기를...
金國자료실  eequde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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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사>에 이르기를

金之始祖諱函普,(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였다)
初從高麗來,(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年已六十餘矣.(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兄阿古好佛,(그의 형 아고는 불교를 숭상했는 데)
留高麗不肯從,(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獨與弟保活里俱.(그래서, 동생인 보할리하고만 왔다)
始祖居完?部僕幹水之涯,(그는 완안부의 복간수 근처로 갔다)
保活里居耶懶.(동생 보할리는 야뢰로 갔다)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그후, 호십문이라는 부족이 갈소관이라는 곳을 태조께 바쳤는 데)
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말하기를 그들은 시조와 같은 삼형제의 후손이며)
蓋自謂阿古之後.(그들은 아고의 후손이고)
石土門、 迪古乃, 保活里之裔也.(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及太祖敗遼兵于境上, (후에 태조가 요의 군대를 국경에서 격퇴했는데)
獲耶律謝十,(요의 장군 야율사십을 사로잡고)
乃使梁福, 斡答刺(태조는 두 명의 사절 양복、斡答刺을 보내서)
招諭渤海人曰(발해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女直渤海本同一家」("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라고 했는데)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이것은 원래 다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백련정사

2. 위의 내용에서 밝혀진 대로,
금金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는 고려의 후손이었습니다.
또한 그 후손이었던 청淸날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 역시 그러한 배경
즉, 고려의 후손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는 자신의 성을 애신각라라 했는데, 도대체 어째서 '애신각라愛新覺羅'에서 신라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 단서 중의 하나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6대조,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22대조 라는 고려(신라) 사람 '김함보

金函普'의 성인 '김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고려의 김씨들은 모두 신라를 거쳤다고 생각됩니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阿骨打'로 부터 6대조라고 한다면, 그의 즉위(서기 1115년)로 부터 대략 150여년을 앞당겨 생각할수가

있습니다. 

그 자신의 나이를 최소 30세 이상으로 보고 그로부터 6대조를 20년으로 생각한다면, 대략 150여년 전의 '김함보金函普'는 실제로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시기(서기 935년)에 전후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즉, 기록의 원래의 내용은 고려 사람 '김함보金函普'가 아닌 신라 사람 혹은 신라의 유민 '김함보金函普'였을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입니다.

신라가 고려麗에 합병되자 고려의 화합정책을 뿌리치고 북쪽으로 이동한 신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위의 기록에서 나타난 '김함보金函普'의 형 '김아고金阿古'에게서도 찾을수 있습니다.
불교를 숭상했다는 그의 형은 숭불정책을 펼친 고려를 택한것으로 보여집니다.

결국, 신라 사람 '김함보金函普'는 고려에 반대해 북쪽으로 이동해왔으며, 그의 후손 '아골타阿骨打'는 후에 주변의 여진족을 규합하여

거란족의 요나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금나라 왕조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금사金史>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바로, 요나라를 가리켜 발해라고 칭하는 부분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대진국(발해)을 무너뜨리고 그 지역을 차지한 요나라 세력 중에서도 대진국(발해)의 유민출신 혹은 그 지역에 근거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여진족과 같은 뿌리임을 자각케하는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금나라조를 일으킨 여진족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3. 여진女眞족은 누구인가.
만주족은 금 왕조를 건국했던 여진족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후금(청)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만주족이 계승한 여진족은 애초에 고구려의 '려麗'와 대진大辰의 '진辰'을 합쳐 원래 려진(麗辰)이었던 것이 후에 음양오행을

따져서 여진女眞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대진(발해)에 속했던 말갈족의 후신이라 전해졌습니다.
또한, 말갈족은 발해에 속해있던 말갈족과 당나라에 복속했던 흑수말갈로 구분됩니다.

말갈족은 일반적으로 만주의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근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나라 왕조 때는 숙신, 한나라 왕조 때는 읍루(邑婁)라 불렸다고 합니다.
송화강 유역을 지배하던 물길(勿吉)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靺鞨)이라 한다고 합니다.

이 말갈에는 예맥(濊貊)계로서 농업을 위주로 한 속말(粟末), 백산(白産), 퉁구스계로서 수렵을 위주로 한 백돌(伯 ), 불녈(拂涅),

호실(號室), 안차골(安車骨), 흑수(黑水) 등의 7개 부족이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중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굳이 말갈족으로 규정할 이유가 없는 예맥족으로서 애초부터 고구려에 속해있었던

고구려인입니다.

또한, 나머지 부족 역시, 그 근거지가 고구려의 관경내에 위치하며, 주나라 왕조 에 불리었다는 숙신(肅愼)이라는 말은 조선이라는

말과 중국식 발음에서 차이가 없는 '쥬신'으로 통한다는 점을 보면, 애초에 말갈족이라는 종족이 존재한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부여로, 다시 고구려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고구려인들을 당시 또는 후대에 비하한 속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있습니다.

위와 같이 말갈로 비칭된 고구려인들은 대진(발해)에서 다시 대진인(대진인)으로 그 정체성이 유지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갈 비칭된 고구려인중 유독, 흑수말갈만은 대진에 저항하며 오히려 당나라에 복속합니다.

흑수말갈은 멀리 연해주인근에 근거했다고 알려져있는데 대진국 발해의 패망후에는 거란족의 요나라 왕조에 복속했다고 합니다.

그 거란족의 요나라에 복속했던 흑수말갈이 여진(女眞)이라 불리게 되며, 후일 다시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뉩니다.

바로 여기서의 생여진이 요나라를 무너트리고 금나라를 건국한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금나라를 건국한 주체세력인 여진족이 고구려를 말하던 속말말갈인가,

혹은 발해에 대항하고 당나라에 복속하다 후에 다시 요나라에 복속한 흑수말갈인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수 있습니다.

금나라를 건국한 주체세력들이 속말말갈이었든지 흑수말갈이 되었든지 간에 금사와 고려사가 전하고 있는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

(신라)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진족의 기원에 관한 것 언급은 고려사를 보면 나와 있는데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김씨나라라는 명칭으로 금(金)이라 했다. ......

아골타는 김행의 후손이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

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

다른 기록으로는 부안김씨 즉 마의태자의 자손들의 족보와 비교해서 설명한 글인데 야후 백과사전에
정리되어 있는 내용을 올립니다.

금나라 시조인 김준(金俊)이란 인물 또한 외자이다. 과연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으나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은 바로

망국의 한을 달래며 신라천년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마의태자 본인이거나 혹은 일족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역사가인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현재 마의태자 후손은 부안 김씨이다. 부안 김씨는 경주 김씨를 조상으로 하고 고려 때 갈라져 나온
성씨이다.

현재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 김씨 족보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 김행 즉 김준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야후 백과사전 참조)

이런 부분이 어느정도 사실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좁게 해석한다면 여진족중 소위 완완가문이라는
금의 황실이 신라

마의태자의 후손들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여진족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말갈이라 불리던 사람들도 이쪽에서 살았다고 알려진 관계로 여진족의 계통은 크게
고구려계와 신라계로 나누어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 고구려 유기 http://www.uoogi.com/cgi-bin/ez2000/ezboard.cgi?
db=05storage&action=read&dbf=6&page=0&depth=1
출처 : 고구려 유기 링크 


중국 청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운 것?


신라부흥의 꿈은 금나라로 이어진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

(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상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꿈에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하셨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물론 이 글은 역사소설이다.

그러나 근거 없는 소설가의 소설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는 역사가의 소설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상동리 삼층석탑및 석불좌상

※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유한을 풀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중국의기록)에는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인? 신라인들의 부흥의지는 만주대륙으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