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한국고대역사문화

분류3 빗살무늬토기문명 예맥구려 사해 문화

설레임의 하루 2009. 4. 9. 04:52

출처:카페-한국고대역사 문화지도

 

 

 

 

빗살무늬토기문명 예맥구려 사해 문화 bc6200~bc4000
1. 예맥구려穢貊九黎의 발생지 사해문화           

2. 동아시아 최초 촌락유적지 흥륭와문화

 

우리 민족의 선조는 예맥濊貊 민족이며, 지금부터 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석기 예술의 정수인 옥기 문화를 오랑캐문화로부터 받아서 이어갔다.
“예穢”라는 글자는 이십사절기를 알고 농사를 짓는 민족이라는 의미가 있고, 맥貊은 호랑이나 표범
꼬리를 머리에 매고 다녀서

얻어진 이름인데 예인은 호랑이를 숭상했다. 곰이 아니다.

단군왕검 신화에서 환웅에게 밀려난 민족이 바로 예족이기도 한데 한반도의 토템이 역시 호랑이, 산군山君이다.

[후한서後漢書]와 [위지魏志]의 <예전濊傳>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언급되는데, 마지막 왕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까지 무려

40여세를 전한 국가로 적고 있다.

비록 고조선古朝鮮을 언급하지 않고, 고작 고조선의 변방인 중국계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기록했지만 이 고조선이나 기자조선의 중심

민족도 바로 예맥족이다.

[후한서]에, 예국濊國에서는 현재 압록강鴨綠江가의 궁간목弓幹木에 의한 강력한 활인 낙랑단궁樂浪檀弓이 만들어졌고, 조기班魚가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설문說文]에서는 예야두국?耶頭國에서 참조기?魚를 수출한다고 했다.

조기는 발해 연안에 알을 낳고 회귀하는 물고기이다. 이로 인해, 낙랑군 동쪽 예국 위치는 한반도 동해안이 아니라, 요동반도

동해안으로 고증된다.

 

한편 [후한서]에서는 부여국에 대해서 본래 예의 땅本濊地也이라고 기록하였고, 예성濊城도 있고,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晋書]에서 벼 화禾변의 예穢자가 출현하며, 만주를 다스리던 백제 담로제의 지방관직으로 추정되는

임예태수臨穢太守 관인官印이 요동반도 신금시新金市에서 발견되었다.

신금시는 백제 국모 소서노가 세웠던 어하라於瑕羅 영역이고 뒷날 대방백제의 영역이다.

[위서魏書-두막루전豆莫婁傳]에서도 송화강 북쪽 두막루땅이 구북부여舊北夫餘의 후손이고 본래 예穢의 땅이라고 했다.

[후한서-구려전句麗傳]의 구려는 맥궁貊弓을 사용하던 일명 맥이족貊夷族, 소수맥족小水麥族인데, 고구려의 기저 바닥 세력이고 이

역시 예맥인이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이기도 하다.

맥麥은 보리, 려黎는 좁쌀을 의미하는데 좁쌀이 먼저 재배되었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에서는 모란강 동경성 일대가 예맥고지다.

[삼국사기]에서 신라 남해왕 때에 북명北溟(= 강원도 강릉) 사람이 예왕濊王 도장을 주워서 바쳤다.

위만衛滿 침략 때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의 이십만호는 서남으로 이주하여 중국 천진시天津市 남쪽의 창해군蒼海郡에 옮겨갔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예맥인의 영역은 만리장성 동쪽의 요녕지방, 길림지방, 흑룡강지방과 한반도가 다 포함되고 일본 열도의

원주민도 되며 이는 빗살무늬토기문화권과 같다.

 

 

지금부터 8000년전, 신석기시대에 예맥인은 황해 연안을 따라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산동반도, 중국 동남해안에서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을 일으켰다.

북방 지역은 기장쌀黍에 의한 농경이 발달하였고 화북 지방은 지금보다 따뜻하여 벼禾농사를 지었고, 양자강 이남은 오늘날의

아프리카 열대림처럼 미개척지였다.

그 당시 만주는 따뜻했으며, 마지막 남은 털코끼리와 코뿔소를 사냥했다.

예맥인은 돼지나 개 가죽 옷을 입고, 코뿔소 가죽은 귀족들의 전투용 갑옷卒이었으며, 호랑이나 표범 꼬리로 머리를 장식했다.

이때 부족 사회가 연합한 왕권 체제가 생겨났는데, 이 예맥 문화의 모습은 내몽고 적봉시赤峯市 오한기敖漢旗 흥륭와문화

興隆窪文化와 요녕성遼寧省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에서 보이는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다.

두 유적지 중에서 화려한 것은 부신시 사해문화인데 왕권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사해문화에서는 왕권의 상징인 용토템이 출현하는데, 이 지역을 고대에 구려(句麗 =九黎)라고도 하였다.

[전한서]에서 중국이 현도군을 설치하고 이를 구려의 서북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현도군은 부신시 북쪽에 있었고, 그 동남의

사해 문화 유적지가 바로 고대 구려로서 구려九黎의 중심이었다.

[사기]에서는 청동무기로서 중국에 진출한 치우천왕을 구려九黎의 왕이라고 하였다.

아홉 부족을 의미하는 구려에는 창려, 옥려, 부려, 무려 등이 속했었다.

 


예라고 불리운 곳 종합

 

 

 

 

 

 


용조각 빗살무늬토기


19.7m에 달하는 용의 조각

옥부와 옥환

빗살무늬토기와 생활 도구

 

부신시阜新市 사라향沙拉鄕 사해촌?海村 천수구泉水溝에서 방유적지房址가 발굴되었고 지금부터 8000년전 유물이다.

사해문화의 도기는 황갈색이고 지자문之字?이 많고 뱀과 두꺼비를 숭상했는데 용과 함께 농경문화를 의미한다.

도기에서 용龍무늬가 발견되었고 또한 2003년에는 바위에 새겨진 20 미터 길이의 대형 용조각이 발굴되었다.

농사를 짓는 민족은 비를 뿌려주는 용龍과 한발旱魃(=가뭄의 신)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의 호랑이를 숭상한다.

그중에서 용은 이 시대에 왕권王權의 출현을 의미한다.

아울러서 20여건의 옥기가 발굴되었고 옥비玉匕, 옥부玉斧, 옥분玉?, 옥관玉管, 옥주玉珠 등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전에 시작되었다.

이 토기는 산동반도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bc5000-3000년)와 한반도, 압록강 집안, 요동의 대련반도 소주산문화素珠山文化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bc5500년) 길림시吉林市 서단산문화西丹山文化와 장춘시長春市 좌가산문화左家山文化, 그리고 서요하西遼河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문화紅山文化(bc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훨씬 작았던 황해를 둘러싸고 예맥의 문화가 퍼져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11600년전 이후의 더운 날씨로 인해 내륙은 사막화가 되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발해 바다가 50m 이상 차오르고, 바다

주변은 차오른 물로 인하여 예전보다 더 추워졌다.

8200년전에 일어난 지구 냉각기 200년의 사건이다.

그중 중심이 되는 bc6000년의 부신시 사해문화査海文化와 오한기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는 심양의 신락문화新樂文化보다 1000년

이상 빠르고, 적봉의 홍산문화紅山文化보다도 2000년 정도 이르므로 선홍산문화先紅山文化라고 한다.

 

옥도끼玉斧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새로운 옥병玉兵 시대를 열었다.

더욱이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의 어떤 무기보다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월절서越絶書]에 신농, 혁서 때에는 석병石兵을 쓰고, 황제시대(bc2700년)에는 옥병玉兵을 쓰고, 하우夏禹(bc2100년) 시대에는

동병銅兵을 쓰고, 그 후에 철병鐵兵을 썼다고 한다.

예맥 문명에서 옥병의 출현은 중원보다 빠른 bc6000년이다. 

중원의 옥기 문화는 흥륭와문화, 사해문화로부터 대문구문화를 거쳐 태호太湖의 양저문화良渚文化에서 가장 꽃피는데 bc3000년

이후다.

 

2 촌락유적지 흥륭와문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촌락은 내몽고 오한기 흥륭와興隆窪 지역으로서 지금부터 8200년전의 촌락이고 사각형의 반지혈식

半地穴式 방이 150개, 묘장이 10개, 탄갱이 12개가 있으며, 촌락 주위에 방어호圍壕가 만들어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정주定住 민족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목 기마 민족의 도래 이전이다.

이와 같이 성을 쌓고 혈거하는 것은 축성혈거築城穴居라 하여서 [위서魏書-물길전勿吉傳]에 소개되어 있는데, 당시 장춘시長春市

동북방 송화강가 유수시楡樹市 부근에 있던 물길국은 본래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했다.

마한馬韓 말갈靺鞨, 물길勿吉, 숙신肅愼, 여진女眞이 결국 모두 같은 뿌리이다.

 

  

 

흥륭와 유적지에서는 소형 옥기장식 3개 귀걸이 등(아래 사해문화의 옥기 사진 중 오른쪽 옥결 귀걸이와 거의 비슷)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중국 최초의 옥기이다.

그외 화강암으로 만든 67cm, 40cm의 돌조각 여인상 2개도 발굴되었다.

질그릇은 회색이 많고, 기하문 토기의 모든 것이 나타나는데 주로 요현문凹弦紋(회전시키면서 파내어 새기는 줄무늬)이 기본적으로

있고, 더하여 물결무늬나, 돗자리무늬를 덧새기기도 했다.

우리 한반도인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이들 예맥인들은 모계사회 농경민족이었으며, 이미 개와 돼지 등의 가축을 길렀고 흙과 함께

살고 죽었다.

산군山君 호랑이를 섬기는 한반도의 풍속은 예맥인들의 고유한 것이다.

환웅의 도래로 웅족, 즉 부여족에게 밀려난 적도 있지만 결국은 융합한다.

이 예맥문명은 황해 주변의 모든 신석기 문화지에 펼쳐져 양자강 아래 광동성까지 퍼져나갔다.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우리말 “옛-날”은 바로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예”의 “날”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옛날옛날 고리적에”라는 말은 즉 “예의 날”, “고구려의 날” 등 오래된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