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대마도

대마도 고조선계 아비루씨 와 화타족 소오씨 격..

설레임의 하루 2009. 3. 29. 13:17

*출처:블로그-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대마도 아비루 족과 소오씨의 격전지 카미자까공원 전망대 부산 야경이 보이는 한국전망대 한국 휴대폰이 터지는 에보시다케전망대-

맑은날 거제도가 보이는 전망대 카미자까전망대(上見坂公園) 표고 385m의 전망대로, 일본을 대표하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에 펼쳐지며, 멀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이 보이는 국경의 섬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즈하라 시가의 북방 약 4Km, 佐須[사스]방면으로 빠지는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펼쳐지는 높은 평지가 있는데, 여기가 카미지

까라 불려지는 곳으로, 주변 경치가 빼어나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대표적 익곡[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과 영산으로서 신비하게 둘러서 있는 "백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 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인데, 기존의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씨와 북큐슈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씨가 1245년

이곳 카미자까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씨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으나 소우씨는 하타족으로 신라계이며 아비루는 황룡사지 장인

아비지 계통의 백제계통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어떤 학설에는 아비루계통은 고조선의 유민계통이란 설이 있다. 그 증거로는 아비루 문자가 있다.

이 아비루문자가 단군시대의 문자 가림토문자였다. 문자로 보아 고조선의 유민이란 설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글돋선생의 주장)

 

이곳에는 공원 안쪽에 자리잡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대 진지 터와 내무반과 참호, 포대 등의 터가 지금은 무성한 덩굴로

뒤덮인 채 남아있다.

이즈하라마찌와 미츠시마마찌와의 경계이지만 카미자까공원이 개발되어 사계절을 불문하고 하이킹, 드라이브 등 가족 동반의 행락지가 되고 있는 곳이다.

(공원에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다) <카미자카 전망대 아래 잔디를 심어 만든 넓은 공원이 있다. 안내판> <위의 시비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가 쓴 시비이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콤파스를 돌려 그린 세계지도-야망을 드러낸 詩> <1964년 지금은 비록 번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귀족이지만,

아직도 대마도주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심정을 적은 시 1964년 신대마도지에 기고한 글과 그림이다.

대마도를 축으로 그린 세계지도, 대마도가 세계의 중심으로 아직도 야망을 접지않았다는 결의를 나타낸 詩 내용을 번역해 보자 "섬도

비쩍 말랐다, 친구도 말라있다 물고기 조각을 하면서 바다 조류를 본다.

 

 아직도 나는 꿈이 있다 이런 말을 한다면 친구들은 조롱할 지 모르지만 深夜에 세계지도를 펴고 콤파스를 잡고 대마섬을 축으로 크게

돌려본다" 카미자카전망대에서 본 대마도 동쪽 방향, 역시 산악 지대의 섬이다

<카미자카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공원, 멀리 가운데 솟아 있는 백색의 봉우리가 시라다케(白嶽)이다,

한국 등산애호가 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쓰시마 내 가장 북쪽의 마을 카미쓰시마 쵸 와니우라 뒷산에

위치한 한국 전망대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계획 단계부터 완성까지 한국산 재료를 구입.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식으로 1997년에 세워진 것이다.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으며, 전망대로 진입하는 도로 입구에 세워진 문은 부산국제여객

터미널의 것을 모델로 하였다.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의 거리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제도와 부산시의 윤곽을 육안으로 뚜렷이 볼 수 있어

그야말로 '국경의 섬' 임을 실감케 하며 밤이면 부산 광안대교의 불꽃이 환하게 비친다고 한다.

쯔즈자키 해상공원과 사오자키 공원, 그리고 에보시타케 전망대와 더불어 한국 휴대폰(SK텔레콤)이 터지는 장소라 잘 도착 했다는

안부 전화를 걸 수 있는 장소라고 하지만 2008년 5월 현재 거의 터지지 않았다.

 

※ 예전에는 대마도 전역이 통화 가능권이었으나 2004년 우리 나라 방송에 소개된 직후 방해전파를 발생시켜 지금은 통화가능

지역이 거의 없다

 

※우측에 보이는 섬이 우니시마이며 일본 항공자위대 레이더 기지이다 대마도에는 오오우라(大浦)에는 해상자위대가 있으며 이즈하라

(嚴源)에는 육상자위대가 있어 군사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국경의 섬이다

조선역관사 순국비(朝鮮譯官使 殉國碑) 대마도에는 우리의 우수한 문화유적을 많이 접할 수 있으나 무척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애절한 사건도 있었으니 조선 제19대 숙종 29년(1703년) 2월 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韓天錫이하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

도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한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선임된 이 사절은 正. 副兩使와 上官 28명, 中官 54명, 下官 2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대마도의

제3대 번주 종의진(宗義真)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번주인 제5대 종의방(宗義方)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국제외교

사절단이었다.

 

日本이 에도시대의 쇄국제체 하에서도 유일하게 정식으로 국교를 유지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과의 신뢰를 지켜 온 선린외교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조선에서 에도까지 왕복했던 통신사와는 달리 대마도의 부중이었던 이즈하라(嚴原)까지 왕복했던

백 명정도의 국가 사절이 역관(訳官)이었다.

에도막부가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일본측의 권한을 대마번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진정한 선린외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역관이라고 하겠다.

에도시대 조선과의 사료를 보면 역관들이 대마도를 방문한 것이 무려 51회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험한 풍랑속에 묻힌 이 역관들의 배에는 4명의 대마번사도 타고 비운을 함께 하였다 한다.

이비는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이다.

당시는 수장된 사람들의 명단을 알지 못했는데, 대마도주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종가문집(宗家文庫)를 정리하던 중 사망자들의

명단이 발견되어 순국400주년을 맞이하는 2003년 3월7일에 순국자들의 이름을 적어 추가로 건립했다.

기단석은 112개의 돌로 쌓아 당시 희생된 112명을 추모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 조난비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이러한 유래와 함께 당시 사망한 112명 역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국경의 섬 대마도에서도 한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이러한 위치적 이유로 자연히 이곳이 한국과 대마도 간의 주요 항로가 되어 왔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조선 제19대 숙종 29년(1703년) 2월 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韓天錫이하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鰐浦)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한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선임된 이 사절은 正. 副兩使와 上官 28명, 中官 54명, 下官 2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대마도의 제3대 번주 종의진(宗義真)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번주인 제5대 종의방(宗義方)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국제외교 사절단이었다.

 

<역관사일행들이 대마도 와니우라로 오는 배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 주위의 무궁화는 누가 심었을까? 대마도에도 무궁화가 많고 대마도인들도 무궁화를 심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무궁화만 심는 것이 아니라 <무궁화혼>도 같이 심기 때문에 대마도인들은 한국인이 심은 무궁화는 뽑아버리고

자기들이 심는다.

실제로 2007년 1월 25일 골든벨 퀴즈 당첨 학생들이 심은 무궁화는 뽑히고 말았다

 

※ 통신사-1413 ~ 1876년 조선시대에 일본의 막부(幕府) 장군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 역관사-조선에서 강호(江戸)까지 왕복했던 통신사(通信使)와는 달리 대마도의 부중(府中)이었던 엄원(이즈하라)까지 왕복했던

일행 백명 정도의 국가 사절이 역관(訳官)이다.

강호막부(에도가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 일본측의 권한을 대마도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진정한 선린외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역관(訳官)이라고 하겠다.

강호시대 조선의 사료(史料)를 보면 역관이 대마도를 방문한 것이 무려 51회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일본국왕사-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 <한국 전망대에서 부산쪽으로 본 전경, 뒷편에 길게 누운 섬이 '우니시마'

이다. 일본 항공 자위대 레이더 기지가 있는 섬이다.

대마도를 국경의 섬이라 부른다.

그것은 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우니시마를 보면서 실감한다>

<부산야경이 보인다. 바로 눈앞에 펼쳐져있다. 해운대,중앙동, 불빛이 눈앞이다.

항공자위대 레이더 기지의 불빛과 함께 있는 지척거리다> 에보시타케 전망대 아소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해발 176m의 유일한

전망대이며 깎아지른 듯한 산과 푸른 바다,107개의 섬이 절묘하게 펼쳐진 대마도 최고의 비경으로 흔히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들

한다.

차에서 내려 60M 정도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면 좋은데 대개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온다

 

※<에보시>는 일본 <관리>, 평상시 <무사>들이 쓰던 모자이다 <보오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오시'란 '까마귀모자'라는 뜻이다

<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본 아소만> <이 전망대에서 사방으로보면 대마도는 역시 평지가 없는 섬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아소만이 깊숙히 펼쳐져 있다>

<아소만 사이 협곡으로 난 조그만 평지와 도로> <섬 속의 산이라 표현해도 좋다>

<이동통신 송신탑이 보인다. 이 곳에선 한국과 핸드폰이 터진다.

일부 사람들은 통화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촌들...대마도의 어촌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