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대마도는 우리 땅" 역사 근거 오히려 많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국교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같이 썼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 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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