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박교수의 연구에 대한 비판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천문학 논문이 아닙니다. 천문학 기록 몇 개가 맞다고 그 책이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 몇 개 나와 있지 않은 천문학 기록이 이토록 정확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환단고기와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를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단순히 몇 개의 천문학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정말로 많은 천문학 기록이 있습니다.. 책 안 읽고서 그냥 상식으로 비판하신거죠? --;;
2. 환단고기 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왕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 에서는 大興이라고 기록 되어 있는바 이는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이라 한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실증적 가치를 알수 있다.
-1949년 이후 환단고기가 쓰여졌거나 그 후 가필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 우선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씨가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 4종을 묶어 만든 책입니다. 또한 계연수씨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경에 일본인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돌아가신 계연수씨가 환단고기를 쓰신건 아닐테고....
물론 1949년 이유립씨가 오형기에게 정서시킨 필사본을 토대로 79년 인쇄본이 발간된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헤 공주 묘는 1949년 중국 돈화의 계동중학과 연변 대학 역사과 학생들이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언뜻보면... 위의 반박이 옳은 것 같지만..1949년 당시 우리 나라 정세를 살펴보십시오.
1950년 전쟁납니다.. --;; 그 당시 좌익 우익 대립 무지 심했슴돠... 잘 생각해보세용
그럼 1949년 이후에 또 가필 된 것일까요?
숙대에 보관되어 있는 환단고기 맨 뒷편을 보시면.. 위의 반박은 단순히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넣고자 하는 개인적인 상식으로 밖엔 볼 수 없을겁니다.
3.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 (大齊, 평로치청) 라는 큰 나라를 세운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고구려를 위하여' 라는 책에 (김병호저)
처음 역사적으로 증명 되었다.
-평로지청에 관한 기록은 신구당서를 참고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정기는 고구려 복권과는
아주 무관합니다. 그는 중국의 반기를 든 수 많은 세력 중 하나일 뿐입니다.
-> <고구려를 위하여> 책은 읽어보시고 반론하신건가요?--;;
책 내용을 다 인용할 수 없어서 읽어보시라고만 말씀드리고 넘어갑니다.
책 다시 읽어보시고 반론다시 하삼!
4. 강화도 제천단에 참성단이 있어 지금도 매해 천제를 지내는데 그 기록이 환단고기중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51년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참성단은 고려 시대 초제를 지내던 장소입니다.
단군 관련 기록은 후대 근거 없는 전설을 그냥 차용한 것 뿐입니다.
-> 국어 공부도 좀 하셔야겠습니다^^
전설은.. 어떤 증거물이 있어야 전설이 된다는걸 아시나요?
백과사전에서도 참성단은 단군 조선 때 쌓은 것이라 나옵니다.
5. 환단고기의 단군조선 실재를 보여주는 평앙도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능릉이 1993년 북한 당국자들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까지 발견 되었고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모금 운동까지 하여 북한
당국자와 함께 성역화 하였다.
-고조선의 수도 평양이 현 평양인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 단군릉은 북한이 정치적으로
꾸민 것입니다. 무덤 양식등은 고구려시대 무덤입니다
-> 북한 단군릉에 대한 논문을 읽어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직접 읽어보시고.. 반론을 제기하시고.. 정 논문을 구하기 힘드시면.. <고조선 사라진 역사>
란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길어서 책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단군이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졌느냐 아니냐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 그 책의 의견이 100% 동감합니다. 결론적으로 단군릉은 단순한 정치적 목적이 아닙니다!
차라리 정치적 목적을 따지시려면.. 중국의 경우를 생각하시는 건 어떨까요?
중국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치우상을 세우고 웅녀상을 세우는 그 일이 진정 정치적 목적
아닐까요?
6.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장수왕이 즉위하자 建興이라는 년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이 년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光背銘 에 建興五年歲
在丙辰으로 나타난다.
광대토대왕 비문에 따르면 대왕은 壬子년인 412년에 붕어 하는데 卽位年 稱元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보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바로 병진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광배명과 태백일사를 통해 建興이 장수대왕의 년호라는 것까지 알 수
있다.-1915년 이후에 쓰여진 아주 중요한 자료지요
->1915년 이전에 환단고기가 씌여졌다는 확실한 증거이지요.
7. 환단고기에는 조대기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太祚이고 조부는 子遊이며 증조부는 廣 이라 서술했다.
이 연개소문의 조부와 증조부의 이름은 환단고기 기록 이외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이 子遊로 나타나고 있다.
-1923년 이후 쓰여졌다는 증거이고요. 아니면 가필되었거나.
-> 님의 말대로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습니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학자들은 남생의 묘에서 출토된 비석을 보지 않고서는
알수없는 내용이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습니다. 환단고기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를 보면 광무 15년 에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썼다고 편찬 과정을 소상히 적고 있습니다.
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천남생묘지의 기록을 보고 썼다면, 그것은 편찬자 스스로 1911년에 쓰지 않았음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용의주도하게 역사를 조작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처럼 누가 봐도 금새 알아차릴 만큼 상호 모순되는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저자가 1923년 남생의 묘 발굴 이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요.
8.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 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있다.
이는 백제가 현재 캄보디아인 扶南國과 교역 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까지 뒷바침 해 준다.
-미지의 백제 사료가 있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아유타국은 태국이 아니라 인도에 있었습니다.
아요디야지요. 우연히도 아요디아와 똑같은 이름의 왕조가 태국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이 것이 사실인데 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것에 변함이 없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단순히 문항을 늘렸을 뿐입니다. 아니면 반박은 해야 하는데.. 반박할 자료가 없으셨던지..
9. 사대 식민사학 의 거두 이병도 조차도 말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환단고기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조선일보 일면등에 투고한 사실이 있다.
-이병도는 사대 식민사학자가 아니라 지나친 실증주의자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 믿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기존의 자세에서 한 발 물러선 것 뿐입니다.
-> 이병도가 식민사학자가 아니라구요 ? 그래서 이마니시 류 밑에 들어가서 갖은 역사 왜곡을 했군요...!
일본은 한국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한군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요지의 이른바 반도사관론을 대량 유포시켰으며, 우리 역사 사료들을 전부 빼앗아가고 불태우고서는 전부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한다는 식의 소위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채택하였던 것입니다.
1920년대 '조선사 편수회'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병도는 나중에 고대사 연구에 "일본학자들의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 라고 회고 하고 있습니다.
최태영 박사가 쓴 <한국 상고사>를 읽어보시길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네요!
또한 이병도 최태영이 공저한 <한국상고사입문>을 읽어보십시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왜 위서라고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단군이 실존 인물이 아니란 가정에서 나옵니다. 아니.. 실존인물일지라도.. 4
7대 단군이 계셨음을 인정하지 않아서입니다.
환단고기는 단군왕검에 대해서 너무도 정확히 기술하는 정말 소중한 우리의 역사서임을
다시 한번 밝혀주고 계시네요!
10.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위서라는 사실을 육하원칙에 의하여 밝혀야 하는 데 아직까지는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학자가 없다.
-많습니다. 논문 뒤져 보세요-> 논문쓰신 분들.. 환단고기 다 읽어보셨나요?
11. 갑골문의 귀방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이 입증되는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환단고기에는 BC1291 년 단군조선 21대 소태단군이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첫다는
기록이 있는데 얼마전 출토된 유물 갑골문의 기록에 은나라 귀방정복 사실이 그대로 밝혀저 세상을 놀라게 한 사실이 있다.
- 갑골문은 19세기 후반 발견되어 환단고기가 쓰여질 무렵에는 이미 해독이 되어 있던
상황입니다
-> 환단고기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기록되어 내려져 왔다고 볼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으로 환단고기가 위서란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12. 비파형 동검
환단고기에 고조선의 영토는 지금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드넓은 중국 대륙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지금 사실상 고조선만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환단고기의 기록과 그대로 일치 한다.
-대고조선설과 소고조선설이 있는데 대고조선설을 지지하는 증거가 될 수는 있습니다만....
-> 그런데요? 그래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
13. 고인돌
환단고기에 장묘문화에 자세히 써 있는데 그 모양과 지역이 그대로 일치 한다.
-고인돌이 선사시대 무덤이라는 것은 근세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인돌이 전국에 퍼져있다는 것은 중앙집권 국가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중앙집권이 있었다면 전국 중 특정 부분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 > 고인돌이 선사시대 무덤이라고 근세에 밝혀졌을 뿐이지 환단고기가 위서여부에 대해선 논할 수 없습니다. 계속 뭐가 발견된 후에.. 환단고기가 씌였다는 둥의 논리를 펴시는데..
지금 환단고기에는 쓰여있지 않은 증거들이... 몇 년후에 나타난다면..
그 때도 환단고기는 2천 몇년 뒤에 씌여졌다고 하실 겁니까?
왜 자꾸 자신의 상식을 객관적인 사실로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뭐가 발견되기 전 이미 환단고기에서 그 부분이 인용되었다는 양면성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중앙집권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환단고기가 위서란 것에 대한 증거일 수은 없습니다. 즉 님의 반론엔 논리가 없습니다.
객관적 사실을 가장한 당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반도는 세계의 고인돌 절반 이상이 모여있는 지역입니다.
역으로 한반도가 세계 곳곳의 중심 세력임을 알려 주는 단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은 환국에서 모든 문명이 뻗어 나갔다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기에 더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단군도 부정하는데 환국은 오죽이나 부정을 당하고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반론을 제기해서 환국문명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 감사합니다.
14 청동기 도끼
중국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 세기 경으로 보이는 청동도끼가 발견 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 건방중산후" 라는 명문이 새겨저 있다. 이는 BC 22 세기부터 10세기 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단군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 내용과 그대로 일치 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 당신의 답 중에서 가장 맘에 듭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셔야 그게 아는 겁니다.. 환단고기 진짜 맞지요? ㅋ
15 은 도장
중국 요녕성 대집둔 지역에서 은 도장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단군 조선때 삼한중 하나인 번한(番汗)이라는 글자가 새겨저 있다.
즉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때 번한( 황하/ 하북성)과 마한 (만주/ 한반도)등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나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