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반 환단고기

설레임의 하루 2009. 3. 23. 03:30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고람거사님 씀.


 

 

 

 

반 환단고기

 

0. 서
일찌기 coo2라는 사이트에서는 고준환 선생님이 허성정 선생님의 논의 등을 취합하여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23개의 질문"이라는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많은 《환단고기》를 지지하시는 분들에 의해 복사되고, 

다른 게시판에도 올랐을 뿐더러, 저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만, 별도로 스레드를 써서 논한 일은 없습니다. 

이에, 이번에는 직접 스레드를 써서, 그 23개의 질문에 대하여 

답하려 합니다. 그 원문은 coo2의 운영자 칼럼 게시판에 있을 것이나, 여기에서는 

http://seensundo.com/gun/?doc=bbs2Fgnuboard.php&bo_table=no_7&sselect=&stext=&ssort=wr_datetime&sorder=asc&page=11&wr_id=211  

"4.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의거하여 논하기로 

합니다.

1.오성취루에 대하여
《환단고기》를 지지하시는 분들이 이를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어 가장 선수에 두는 것이 바로  《환단고기 · 단군세기 · 

흘달단군 50년》조의 "五星聚婁"란 기사입니다. 

이것은 1993년, 《한국상고사학보》에 실린 박창범-라대일의 <檀君朝鮮時代 天文現象記錄의 科學的 檢證>이란 논문에 

의거하지요. 

본 논문에서는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기원전 1734년 1월에 다섯 행성의 평균 각거리가 10도 이내였음을 확인하고, 흘달단군 

50년을 《동국통감》의 기록에 맞추어 계산한 단군 개국년도 기원전 2333년을 기준으로 1733년으로 고증하여 《환단고기》의 본 

기록이 약간의 오차가 있을 뿐, 매우 정확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천문학적인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가 천문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검토해야 하는 문헌-서지학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있습니다. 

소햏은 여기에 대하여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하며, 이것이 명쾌하게 되지 않는 한, 오성취루에 대한 박-라의 논문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자료로써 사용될 수 없음을 밝힙니다.

1) 흘달단군 50년의 연대 추정에 대한 근거는?
 박-라의 논문에서는 흘달단군 50년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단군기원인 기원전 2333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연대를 기원전 

1733년으로 추산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단군기원인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대에 있지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동국통감 · 외기 · 단군조선》 의 다음과 같은 글에 따릅니다.

(원문은 일일이 적기 번거로워 그림으로 대신합니다)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

(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 서기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 [신등은 살펴보건대,] 

"고기(古紀)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더불어 무진년(戊辰年)에 함께 즉위하여, 우(虞)나라와 
하(夏)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

(武丁) 8년 을미(乙未)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는데, 1천48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요 임금이 즉위한 것은 상원 갑자(上元甲子)인 갑진년(甲辰年 ; 서기전 2357)에 있었는데, 단군의 즉위가 그 후 

25년 무진년에 있었다면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하였다'라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당(唐)나라와 우나라로부터 하나라와 상나라에 이르러서는 세상 인정이 점점 야박해져서 인군(人君)이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한 

자가 5,60년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단군만이 홀로 1천48년의 수명으로 한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꾸며낸 것임을 알겠습니다. 

전배(前輩)가 이르기를, '그 1천48년이라고 한 것은 곧 단씨(檀氏)가 대(代)로 전하여 지나온 햇수이고, 단군의 수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근세(近世)에 권근(權近)이 천정(天庭 명나라)에 들어가 뵈니,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권근에게 단군을 시제(詩題)로 하여 시

(詩)를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권근의 시에 이르기를, '세대(世代)를 전한 것은 얼마인지 모르나 역년(歷年)은 일찍이 천년(千年)을 

지났다.[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라고 하니, 황제가 보고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의논에서도 권근의 말한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보존하여 뒷날의 참고에 대비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동국통감》의 찬자는 《고기(아마도 《삼국유사》가 인용한 그 책)》의 '무진년'설을 지지하는 대신, 그것을 고기의 

기록처럼 중국의 요임금 원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요임금 재위 25년인 '상원 무진년'으로 보았습니다. 

이 요임금 재위 25년이 현재 기원전 2333년으로 추산되는 그 연도입니다. 

그렇다면, 요임금 재위 25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근거는 또한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송대의 상수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소옹의 《황극경세 관물편지이십오》의 기록에 의거합니다. 

이 책에서는 요임금의 재위연도를 상원갑자 갑진년으로 보았는데, 상원갑자 갑진년은 이 책에 제시된 연표를 서력으로 변환하면 

기원전 2357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추산하여 동국통감이 단군의 재위연도로 생각한 상원갑자 무진년을 계산하면, -24가 되어 기원전 2333년이 되지요. 

이로써 기원전 2333년이 계산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하는 단군기원을 계산토록 해 주는 《황극경세》라는 책은 
체계적으로 분석된 역사연표라기 

보다는, 도참적이고 상수적인 측면을 많이 띄는 서적입니다. 

특히, 성인의 출현 주기 같은 데에 매우 집착한 책이므로, 요와 순과 같은 전설적인 인물의 연대를 이것으로 실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단기 2333년의 과학적 근거는 상당한 의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럴 시, 과연 우리가 단기를 기준으로 흘달단군 50년의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2)과연 오성취루의 기준은?
박-라 선생님의 논문과 언론에 공개된 시뮬레이팅 화상을 보면, 기원전 1734년에 있었던 오성취(?) 
현상은 다섯 행성들이 평균 

각거리 10도 내에 선상으로 늘어서 있었음을 확인 가능합니다. 

또한 그들이 모인 위치는 환단고기에 적힌대로 婁가 아닌, 그보다 130도 떨어진 바다뱀자리였음도  알 수 있었습니다. 

평균 각거리 10도라면 대단히 좁은 분야이긴 합니다. 

하지만, 과연 직선으로 늘어서있는 것을 고대인들은 오성취라고 했을까요? 또한, 아무리 28수의 체계가 있었는지 알기 어려운 

상고의 일이라곤 하지만, 과연 전혀 다른 구역에 있었다고 가필한다면, 그 신빙성은 어찌 될찌요.

  여기에 대하여,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중국에서는 지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소위 '하상주 공정'이라고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으므로, 고대의 오성취 기록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오성취기록은 《태평어람》에 인용된 《춘추원명포>의  "殷紂之時, 五星聚房"이란 기록이었습니다. 

이것을 사용한다면 당시의 연대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 중국 학자는 놀랍게도 이 기록을 연대 산정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기원전 1100-1000년간에 있었던 오성취루 중, 기껏 해 봐야 기원전 1019년 8월 29일-9월 21일에 
있었던 한 차례만이 房의 

주변에 붙어 있었으나, 이를 "방에 모였다"라고 하기에는 실로 매우 어렵다. 

더불어 "殷紂之時"와 같이 모두 불명확한 시간개념과, 앞의 제 8조에서 말하였던 갑자일의 

"日月若合璧, 五星若連珠"같은 말은, 더욱이 명백히 이상화되고 과장된 표현이다.

  이 외에도, 오성취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정의의 문제이다. 

다섯 대 행성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범위에 모여야 오성취로 생각할 수 있는가? 

지금 찾아 볼 수 있는 고적 중의 정의는 모두 벌주(伐紂)의 시대로부터 천년 이상 지난 것들이고, 우리는 무왕벌주(武王伐紂) 시대의 

천문학자들이 어떠한 정의를 사용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 만약 그들이 진짜 "五星聚房"을 기록했다면. (후략)
  (江曉原 紐衛星(2000) 《紂王伐紂與天文史年代學》 上海人民出版社 p.p.93-94)

  박 선생님의 경우에서는 무시되었던 별자리의 문제가(물론 은 말이라면 적어도 흘달단군의 때로
부터 600여년은 후의 일이긴 

합니다), 

여기서는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하는 문제로 비화됩니다. 

또한 그 범위나 오성취의 형태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고, 결국은 연대를 책정하는 데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고려된 사항이 박-라의 논문에서는 고려되지 말아야 했을까요? 

설령, 이 기록이 사실이며, 婁가 가필이라고 해도, 문제는 또 생깁니다.
《今本竹書紀年》의 "五星錯行"
  흘달단군시에 중국에 존재하였던 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입니다. 

이 걸왕은 《환단고기》에 따르면 흘달단군 재위 16년째에 퇴위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今本竹書紀年 ·卷上 ·帝癸(즉 걸왕) 10년》에는 "五星錯行"이란 기사가 있습니다. 

錯行이라는 것은 교착되어 지나갔다는 말이므로, 어느 시점에서는 오성이 한 곳에 모여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두 기록 사이에 어느 정도 연대차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현재로서는 사실상 공화 원년 

이전의 역사연대를 정확히 고증할 방도는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두 군주의 기록에 동시에  五星이 모이는 현상이 적혔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대에 있어서, 오성이 모인다는 것은 

단순한 천체의 운행이 아니라, 국가의 변고, 행운 등을 알려주는 하늘의 징표로 여겨지는 중대사였기  때문입니다. 

위의 "殷紂之時, 五星聚房"이 그러하며, 한 고조 원년에 나타났다고 하는 

"五星皆聚于東井"의 현상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 현상으로서 기록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만약, 五星聚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婁가 가필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今本竹書紀年(서지적으로는 양나라 

심약이 주석을 달았다고 전하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이 책을 후대의 저작으로 봅니다)》의 "五星錯行"을 참고했을 심증을 떨쳐버리기는 

힘듭니다. 

무엇보다도, 환단고기자체가  위서성이 높다고 의심받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것들은 《환단고기》의 신빙성에 대하여 더욱  더 

의문점을 남겨둘 뿐입니다.

2. 발해 문왕 대흠무의 연호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환단고기 등장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서 ‘대흥(大興)’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

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 문왕의 연호인 대흥이 출토문헌이 아닌 전세문헌으로서는 《환단고기》에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며, 

《환단고기》의 사료성이 입증되는 대사이겠습니다. 

그러나, 《신당서 ˙ 북적전 · 발해》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군요.

  武藝死,其國私謚武王.子欽茂立,改年大興.
  무예가 죽자, 그 나라에서는 사사로이 시호를 붙여 무왕이라 하였다. 

아들인 흠무가 왕위에 올랐는데, 연호를 대흥이라 고쳤다.

  《신당서》는 북송대에 《구당서》를 손질하여 성립된 문헌입니다. 

고준환 선생님과 같이 훌륭하시며, 나름대로 명망도 있으신 분이, 이 정도를 모르셨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3. 고구려 유장 이정기의 기록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대하여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의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또한 위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정기의 기록이 《환단고기》에만 있다면 중요한 일이겠지만, 아래의 많은 기록을 볼 때에는 어떠한 

심경일는지요.

休明奔東都.甲申,以平盧淄青節度觀察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檢校工部尚書、青州刺史李正己
檢校尚書左僕射;前隴右節度副使、

隴州刺史馬燧為商州刺史,充本州防禦使.( 《구당서 본기 대종 대력 10년》 )

來薄戰.淮西兵亂,乃退軍於滎澤.戊辰,九月乙丑,李忠臣等兵進營鄭州,靈耀之, 
淄青李正己奏取鄆、濮二州.

( 《구당서 본기 대종 대력 11년》)

十二月丁亥,加平盧淄青節度使、檢校尚書左僕射、青州刺史、饒陽王李正己為檢校司空、
同中書門下平章事,成德軍節度使、

太子太傅、檢校尚書左僕射、隴西郡王李寶臣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 《구당서 본기 대력 11년》 )

  二月戊子,淄青節度使李正己之子納為青州刺史,充淄青節度留後.丁未,以朗州刺史李國清為黔州刺史、經略招討觀察使.

 (《구당서 본기 대력 12년》)

十三年春正月戊申朔.辛酉,壞白渠碾磑八十餘所,以奪農溉田也.壬戌,刑部尚書、魯郡公顏真卿三抗章乞致仕,不允.

淄青節度使李正己請附屬籍,從之.(《구당서 본기 대력 13년》)

  加李正己司徒[二]、太子太傅,崔寧、李勉本官同平章事.(《구당서 본기 덕종 건중이전》)

  癸丑,上誕日,不納中外之貢,唯李正己、田悅各獻縑三萬匹,詔付度支.

( 《구당서 본기 덕종 건중 원년》 )

三月庚申朔,築汴州城.初,大曆中李正己、洺、貝、澶七州之地,梁崇義有襄、鄧、均、房、復、郢六州之地,各聚兵數萬.

有淄、青、齊、海、登、萊、沂、密、德、棣、曹、濮、徐、兗、鄆十五州之地[七],李寶臣有恆、定、易、趙、深、冀、滄七州之地,

田承嗣有魏、博、相、 、洺、貝、澶七州之地,梁崇義有襄、鄧、均、房、復、郢六州之地,各聚兵數萬.

( 《구당서 본기 덕종 건중 2년》 )

  八月辛卯,平盧淄青節度觀察使、司徒、太子太保、同中書門下平章事李正己卒.
( 《구당서 본기 덕종 건중 2년》)

  庚寅,李納上章稟命,乃贈李正己太尉.(《구당서 본기 덕종 흥원 원년》)

  李正己上表請殺晏之罪,指斥朝廷.炎懼,乃遣腹心分往諸道. (《구당서 양염열전》)

  時李正己畏懼德宗威德,乃表獻錢三十萬貫.(《구당서 최우보열전》)

  遂與田承嗣、李正己、薛嵩、李寶臣為輔車之勢,奄有襄、漢七州之地,帶甲二萬,連結根固,

  未嘗朝覲,然於兇,地最褊,兵最少,法令最理,禮貌最恭.(《구당서 양숭의열전》)

《구당서 이정기열전》 전문
李正己軍聚觀,約軍討史朝義,至鄭州.迴紇方強暴恣橫,諸節度皆下之,正己時為軍候,獨欲以氣吞之.因與其角逐,,高麗人也.本名懷玉,生於平盧.乾元元年,平盧節度使王玄志卒,會有敕遣使來存問,懷玉恐玄志子為節度,遂殺之,與軍人共推立侯希逸為軍帥.希逸母即懷玉姑也.後與希逸同至青州,累至折衝將軍,驍健有勇力.寶應中,軍呼笑,虜慚,繇是不敢為暴.約曰:「後者批之.」既逐而先,正己擒其領而批其背,迴紇尿液俱下, 軍呼笑,虜慚,繇是不敢為暴.

節度使侯希逸即其外兄也,用為兵馬使. 正己沉毅得 心,希逸因事解其職,軍中皆言其非罪,不當廢.會軍人逐希逸,希逸奔走,遂立正己為帥,朝廷因授平盧淄青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尚書、兼御史大夫、青州刺史,賜今名.尋加檢校尚書右僕射,封饒陽郡王.大曆十一年十月,檢校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十三年,請入屬籍,從之.為政嚴酷,所在不敢偶語.初有淄、青、齊、海、登、萊、沂、密、德、棣等州之地,與田承嗣、令狐彰、薛嵩、李寶臣、梁崇義更相影響.大曆中,薛嵩死,及李靈曜之亂,諸道共攻其地,得者為己邑,正己復得曹、濮、徐、兗、鄆,共十有五州,內視同列,貨市渤海名馬,歲歲不絕.法令齊一,賦稅均輕,最稱強大.嘗攻田承嗣,威震鄰敵.歷檢校司空、左僕射、兼御史大夫,加平章事、太子太保、司徒.

後自青州徙居鄆州,使子納及腹心之將分理其地.建中後,畏懼朝廷,多不自安.聞將築汴州,乃移兵屯濟陰,晝夜教習為備.河南騷然,天下為憂,羽檄馳走,徵兵以益備.又於徐州增兵,以扼江淮,於是運輸為之改道.未幾,發疽卒,時年四十九.子納擅總兵政,祕之數月,乃發喪.納阻兵,興元元年四月,歸順,方贈正己太尉.

  구당서에 그 열전까지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더 찾아볼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사서를 찾아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인데도,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라 쉽게 말할 수 

있을는지요. 

고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4. 마니산 참성단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는젨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마니산 참성단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천제를 올린 곳일까요? 

마니산 참성단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세가 26의 원종 5년》의 기록에서 풍수사 백승현이 왕에게 초제를 거행할 것을 권유하는 

기록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그 이전의 참성단에 대한 기록은 어쨌든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려사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고려 말 까지는 그러한 인식이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려 말의 지식인들의 진술에 의해 알 확인 가능하지요. 

가령 고려 공민왕 때 밀직부사를 지낸 이강(그의 아버지 이암은 강화도 선원사에 대단히 자주 다녔던  사람입니다)은 참성단을 두고

 "疊石靈壇太古前"이라 읊긴 했지만, 단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아니하였고, 목은 이색의 경우, <摩尼山紀行 次韻山上作> 이란 시에서 

"此壇非天成, 不知定誰築"하여, 아예  그 건조자를 모르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 참성단과 단군을 연결시키는 전승은 그다지 널리  보급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고인돌 127기의 이야기를 하셨지만, 본래 강화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장기간에 걸친 간척
사업으로 확장된 섬이며, 고대의 

마니산은 독립된 하나의 섬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니산 근처에서는 동막리의 고인돌 1기가 발견될 뿐, 그 외에 고조선과 연결시킬 고리는  그다지 없어 보입니다.

(강화도에서 발견된 팽이형 토기를 근거로 대기도 하나, 팽이형 토기의 北限은  겨우 청천강을 넘을 뿐입니다. 

본래 요동에 본거지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고조선의 강역과는 무관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볼 때, 단군과 참성단의 실제적 

관계는 의심스러워지며, 적어도 

《환단고기》의 진서론을 주장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능력을 일정부분 상실합니다.

(삼랑성의 경우, 연대가 불명이긴 합니다만, 기단의 축성술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환단고기》에 따르면 사백력과 파나류에서 기원하여 중원을 진동했다는 환국과 배달신시국, 그리고 고조선이, 

구태여 고대에는 서해 갯벌의 작은 섬에 불과하였던 마니산을 중시하고 제단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만. 

마니산과 삼랑성을 인정함으로서 생기는 《환단고기》의 모순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5. 단군릉에 대하여
  북한이 발굴하였다고 하는 평양 단군릉은 물론 많은 학자들로부터 이미 상당한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차치하고서 만약 

이것이 인정된다고 하여도, 이것은 현 사학계의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물론,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고 하는 재야의 이론과도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자가당착이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단군의 묘가 평양에 있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이장이라고 해도, 이미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 번은 평양으로 옮겨갔다라는 말이 

되므로, 자연스럽게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단군릉에 의한 단군의 실재성과 재야가 기존에 주장하고 있는 

고조선의 강역이 봉합되지 않는 한, 이것은 계속적으로 모순을 파생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6, 7의 고고학적 발견
  이 경우는 《환단고기》의 성립과 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환단고기는 그 서문에서 이 책이  1911년에 발간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ㄴ《환단고기》의 1911년 판본은 지금껏  그 실물이 없으며,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1970년대 이후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환단고기》가 이러한 고고학적인 발굴(병진년 불상 광배명은 1915년에, 남생묘지의 증조부명은 1923년에 

발견되었습니다)을 참고하여 넣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1979년에 발간된 《환단고기》에 정오표가 달려있었기 때문에 진서로서의 원본이 있었다는 주장도, "『환단고기』가 1949년 

정서되었다고 하므로 이유립은 1949년 이전 멀지 않은 시기에 『환단고기』의 초고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 그것을 수정·보충하여 l979년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라 하는 조인성 교수의 주장에 대한 완전한 답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유립이 정오의 대상으로 삼은 원본이 1949년에 스스로 초고를 만든 《환단고기》라면, 정오표는 진서의 증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환단고기가 정말 확실히 진서로 인정되려면, 1911년의 초간본이 발견되든가,   환단고기에는 있으나 다른 사서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내용이 최소한 1940년 이후의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되어야 합니다만, 현재까지 그러한 것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8. 태국의 아유타국과 백제상인의 교역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재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명의 <<유기>>는 말한다. '옛날 백제의 장사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벌어 돌아왔다. 그 곳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을 따라와 내왕했던바, 날로 교제하여 친밀해졌다. 

그렇지만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통제되고 제약을 받게 되었다.'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듯 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그리고 부남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秋九月, 百齊聖明王遣前部奈率眞牟貴文, 護德己州己婁與物部施德麻奇牟等, 來獻扶南財物與奴二口.
  가을 구월, 백제 성명왕이 전부나솔진모귀문, 덕호기주기루와 물부시덕마기모등을 보내, 부남의 
재물과 노예 둘을 바쳐왔다.

( 《일본서기 긴메이천황 4년》 )

  여기서의 백제는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관계처럼 소개되어 있다는 점에 있어 저 기록의 신빙성 
문제를 두고는 논의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고준환 선생님은 이러한 이 기록의 신빙성을 《환단고기》의 해당 기록으로 뒷받침 할 수 있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부남 관련 기록을 《환단고기》의 해당 기록으로 뒷받침하려면, 먼저 

《환단고기》의 내용이 확실히 믿음직하다고 판명이 난 후여야 합니다. 아직 《환단고기》의 위서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 때에, 

《환단고기》의 내용으로 기존 역사서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것이 《환단고기》의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은 앞 뒤가 전도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이병도박사의 진술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씨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史實)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계 이병도 박사라 하면, 한국 사학계의 태두이며, 특히 실증사학을 매우 강조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소위 ‘실증적 방법론’은 경우에 따라 오히려 비실증적인 연구방식으로 전이되는 경우(대표적인 것이 

仇台=古爾설입니다)가 종종 있어서, 사후에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며,

더불어 그는 ‘실증적이면 사관은 아무래도 좋다’란 태도로 역사 연구에 임했기 때문에, 근대 역사연구의 본령인 ‘사관의 정립과 역사 

발전 과정의 규명’과는 동떨어진 말류적인 지명 비정에 너무 치중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있는 것만 봐도, 모든 현재의 모든 주류 학자들이 이병도의 학설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태두임은 분명하지만, 그가 가진 한계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이병도씨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순순히 모든 학자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무리가 아닐는지요. 

사학계는 종교집단과 같이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두 따르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병도 박사가 설령 《환단고기》 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들, 그것이 우리들까지 《환단고기》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음은 명백합니다.

10. 환단고기의 실제 저작자
  고준환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하여(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위서의 개념부터 정립해야 할 듯싶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적에 대하여 위서라 한다면, 그것은 서문이나 간기에 있는 서지사항과 실제의 저작자나 그의 시대가 다른 것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위서들은 주로 실제의 저작자나 시대보다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탁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서들의 경우, 구태여 우리가 

실제의 저작자를 밝혀내야만 위서 판정이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서적에 제시된 서지사항보다 후대에 지어진 것’일 시에는 그 실제 저작자가 누구든, 언제 사람이든, 그 책은 위서로 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서에 있어 실제의 저작자와, 그것이 저작된 시기를 파악하는 것은, 이미 위서로 판정된 고적의 성립과정을 고찰할 때 필요한 것이지,

위서로 판정할 때 필요한 사항은 아닙니다. 따라서, 10번과 같은 질문은 《환단고기》의 진위판정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11. 무정의 귀방 정벌 기록
  여기에 대한 고준환 선생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 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은나라의 귀방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殷主武丁旣勝鬼方又引大軍侵攻索度令支等國爲我大敗.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였다.

  뭐, 이와 같이 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갑골문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정사에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떨까요?

  九三, 高宗伐鬼方三年克之, 小人勿用.
  구삼은, 고종이 귀방을 쳐서 삼년만에 물리쳤으니, 소인은 쓰지 말라.( 《주역 기제》 )

  正義曰高宗伐鬼方三年克之者高宗者殷王武丁之號也.
  《주역정의》에서 이르길, “‘고종이 귀방을 쳐서 삼년만에 물리치다’라 할 때의 고종은 은왕 
무정의 호칭이다"(공영달의 소)

  이미 당대에 무정이 귀방을 정복했다라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 1974년에 하북성 평산현 중산국묘에서 발굴된 중산후월(中山侯鉞). "天子建邦中山侯惟, 
作玆軍鉞以警厥衆

(천자가 봉토를 세운 중산후 유, 이 군월로써 그 무리에게 경계삼는다)"란 글이 적혀있습니다.

하: 1976년, 섬서성 부풍현 장백가촌 1호 청동기 교장갱에서 발견된 서주시대의 사장반(史牆盤). 
天子란 명칭이 여러차례 보입니다. 

 

 

12. 비파형 청동검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단군조선의 비파형청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비파형 청동검이 요녕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 그리고 더 깊숙히는 하북성 북부에서도 발견되는, 중국의 동주식 단검과 대비되는 

특징적인 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발견 분포가 그대로 고조선의 영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특정 유물의 분포가 곧바로 ‘정치세력’(이것이 

국가발전과정의 어떤 단계를 의미하는지 도통 모를 애매한 단어입니다만)의 영역과 일치된다고 본다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동~요서 지역에서는 동주식 단검이 비파형 청동검과 섞여서 발견되는 예도 상견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코카콜라캔이 발견되는 지역은 모두 미국의 영토인지를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령식 

동검(=비파형 동검)의 분포지역에서 출토된 동검과 기타 공반 청동기가 모두 유사하다 해도, 하나의 통일된 문화로 볼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지적이 있듯, 이들 청동기들이 하나의 집단에 의해 영유된 것 조차 아니기 때문에, 섣부른 추정이랄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고고학적으로 면밀하게 살핀 후에 주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13. 고인돌 유적
  고준환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존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로부터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

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고인돌 자체는 환단고기가 위조되었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던 유물입니다. 

이것이 환단고기에 나온다고 해서 진서의 증거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환단고기에 기록된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 장묘문화에 대한 기록이 가치를 얻으려면,  환단고기가 사료적 가치가 있는 

진서로 인정된 후의 일이 되겠지요.
 
14. ‘중산후월’과 도자기 부호
  고준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 까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일단, 위에서 언급된 ‘천자건방중산후(天子建邦中山侯)’의 명문이 적힌 유물은 1974년에 중국의 
하북성 평산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청동도기(설마하니 靑銅陶器는 아니겠지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鉞이라고 하는 도끼의 일종이며, 거기에 적힌 소유주의 

이름에 따라 ‘중산후월(中山侯鉞)’ 로 불립니다. 

같이 발견된 청동기에 조상의 이름으로 武祖, 桓祖 등이 있고, 사기 조세가 헌후10년(기원전 414)의 기록에  “중산 무공이 처음으로 

즉위하였다(中山武公初立)”이란 기사가 있음을 보아, 이들 유물은 전국 초~중기에 존재하였던 白狄의 제후국 中山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기원전 9세기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天子建邦中山侯’란 단어는 ‘천자가 봉국을 세워준 중산후’란 의미입니다. 

이 때의 천자는 당연하지만, 주나라의 천자를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에서 천자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주대부터이며, 주대의 무수한 청동기에 天子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적어도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또한, ‘서요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원전 22세기의 도자기 부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유적의 

어떤 것을 지칭하는지는 안타깝게도 이 글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약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도기기호라면, 

직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의 것들이라, 아무리 봐도 ‘전국문자’로 적힌  이 명문과는 유사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비슷한 수준의 기호라면 양사오 문화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기기호(혹은 도기부호)는 어디까지나 부호일 뿐, 언어를 적는 문자가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것을 문자와 같은 레벨에서 비교하여, 그 양식이 천 수백년도 지난 전국시대의 유물에 적힌 문자와 같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성립하기 어려운 비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