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대진국(발해)

<스크랩> 渤海 上京유적박물관에서 보는 역사의 한 페이지

설레임의 하루 2009. 3. 21. 03:00

<스크랩> 渤海 上京유적박물관에서 보는 역사의 한 페이지

  • 출처 :구름에 달 가듯이  글쓴이: 운영자

 

 

黑龍江 寧安에서 불과 2키로 떨어진 곳에 허줄하지만 그나마 아담진 자그마한 단층집이 있다.

 

 

소나무숲에 묻힌 이 곳이 바로 이름난 중국의 국가급 중점문물보호단위인 발해상경유적박물관이다.

 

 

촬열을 금지하는 이곳 박물관에는 발해유적지에서 발굴된 여러가지 문물이 전시되여 있다.

 

 

옛 궁전앞에 놓였을 위엄스런 螭首, 螭는 용왕의 아홉 왕자중의 하나로 가장 평민적인 용으로 평가받으며

건축에 장식물로 많이 쓰인다.

 

 

1980년 연변의 和龍縣 龍海鄕 貞孝공주묘에서 출토된 벽화의 탁본들이다.

이는 처음으로 발견된 발해의 벽화다. 이 탁본은 연길 박물관에서도 한번 본 기억이 있다. 몸이 좀 뚱뚱한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여자가 남장을 한 벽화에서 중국 당나라 때의 심미관을 옅볼수 있다.

 

 

당나라 때 불교가 흥하였다. 발해 역시 불교를 중요시하였는바 여러 곳에서 사리가 발견되였다. 

이것은 사리를 보관하는 돌로 만든 사리함이다.

 

돌로 만든 사리함속에는 금은으로 정교하게 만든 작은 사리함이 있었다.

 

 

그외에도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문물들이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인 銅人,

 

 

三彩獸頭

 

 

건축재료도 많이 출토하였는데 그중에는 문자(대부분이 漢字라고 함)를 써넣은 기와도 있어 발해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남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2006년 5월 28일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중국이 반환을 요구했다고 보도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발해석비이다. 정확한 명칭은 崔忻의 ‘홍려정비(鴻臚井碑)이다.

홍려정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勅持節宣勞靺鞨使
鴻臚卿崔忻井兩口永爲
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


내용을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연관시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칙지절선로말갈사(勅持節宣勞靺鞨使)’라는 직책을 갖고 있는
홍려경 최흔(鴻臚卿 崔忻)이

 (713년 발해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이듬해인 714년 돌아오던 길에 오늘날 旅順의 황금산 기슭에)

두 개의 우물을 파고 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개원 2년(714) 5월 18일에 비를 세웠다.”

 

현재 이 비의 원본은 일본 황궁 建安府의 碑亭에 보관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