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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와 高麗의 <평양성> 위치 비정도<펌>

설레임의 하루 2009. 3. 21. 02:27

高句麗와 高麗의 <평양성> 위치 비정도

  • 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평양이란 보통명사로 서울과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본인의 비정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은 장수왕시기 이미 산서성 임분에 평양성을 세우고 국내성을 陽城에세웠다고

비정합니다.

고구려가 668년 망하고 8세기초 고덕무가 만주 요동으로 와서 국내성,평안도 평양성을수도로 재축조한것으로 보는것이

타당하고 고려는 冀지방,산서지방을 재건하고 백제고지,신라고지를 기반으로대제국을 형성한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주무대는 산동,하남으로 하남 서화(몽성)부근에 평양성이 있다는 <명일통지>기록과 <고려사절요>

기록으로보건데 후에 산동,하남,절강,복건을 회복한것으로 보입니다.

 

거란과의 전쟁으로 보아 거란은 하남까지 진출하였으며 고려와 하남故地에서 부딛히며 이후 금나라와 경계를 산동,

절강,만주지역으로 고구려보다 더 광대한 지역까지 장악한것으로 보입니다. 

거란과 대진과의 전쟁은 만주지방이 아니라 하남의 서로 가까운 경계선에서 발생하여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발해왕의

군영이 항복함에 따라 망한것이지 교과서의 일설대로 백두산의 噴火로 망한것이 아닌것으로 파악됩니다.

고려사절요 태조왕건의 기록에 산동에서의 動線을 표시하였습니다.(서경-> 황주->해주) (운영자 심제)

 

 

▲ 今王城(고려)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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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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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

유마자수출말갈지백산,색약압두,호압록수.역국내성서,여염난수합,우서남지안시,입우해 .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은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이평양재압록동남,이거호제인,인시이위참.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백제인과 커다란 배이물과 같이 믿을 만한 참호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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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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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낙랑군(樂浪郡)이며, 당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

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高麗。自唐以前。蓋居平壤。本漢武帝所置樂浪郡。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以唐志考之。

平壤城乃在鴨綠水東南。唐末。高麗君長懲累世兵革之難。稍徙而東。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

千餘里。非平壤之舊矣。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 遼東) 에서 5백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 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

(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케 민중이 이미 멸망되었고, 금(金) 나라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

(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黃岩)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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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史 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 遼陽路 東寧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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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 晉義熙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裡 非平壤之舊 至王建 以平壤為西京(元史 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 )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또한 장안성이라 한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 땅이다.

진(晋) 의희(AD405~418년) 후 고구려왕 고련(장수왕)때부터 이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이 평양을 빼았자 고구려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 동남 千餘里에 있으며 옛 平壤이 아니다.

王建 때에 이르러 平壤을 西京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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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문무왕 8년(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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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二十一日, 與大軍合圍平壤. 高句麗王先遣泉男産等, 詣英公請降. 於是, 英公以王寶臧,王子福男·德男,

大臣等二十 餘萬口廻唐. 角干金仁問, 大阿湌助州, 隨英公歸, 仁泰·義福·藪世·天光·興元隨行. 初大軍平高句麗,

王發漢城指平壤, 次肹次壤, 聞唐諸將已歸,還至漢城.

 

9월 21일에 당군과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고려왕은 먼저 천남산(泉男産) 등을 보내 영공을 찾아뵙고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당 이세적)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갔는데,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수행하였다.

처음에 대군이 고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다가힐차양(肹次壤)에 이르렀는데, 당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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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일통지(大明一統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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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고 성밖에 기자묘가 있다.

기록이 추가되는대로 보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