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전성기 시대 고구려,백제,신라영토 강역

설레임의 하루 2009. 3. 19. 01:58
 *출처:다음블로그-만주몽골조선땅임님

 

 

 

 

 

 

 

전성기 시대 고구려,백제,신라영토 강역

 

고구려영토 강역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1)愼帛2)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服3)

 

광개토호태왕비문에 적힌  글이다.

영락8년에 일부병력에 명령을  내려 토욕과 신부족을 두렵게 하고 비단을 뺏고 근처의 성을 노략질하고 남녀3백명을 잡아왔다.

이에 그들이 조공을 하고 복종하였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1)麗不△△△2), 躬率往3)討. 過富山負4)5), 至鹽水丘

 

영락5년에  패려가 복종치 않아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을 지나 염수에 다다랐다.

세종이 이르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고구려 문자태왕13년 504년때 고구려사신 예실불이 북위에 갔을때 북위왕이 한 말중에서 후위서의 내용으로 북위 주변이 누구에게

복속되었는지 나타내고 있다.


 

요사(遼史)》에는, “개황(開皇) 8년에 거란(契丹)의 별부(別部)로 고구려에 붙어 살던 출복(出伏)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부(內附)

하였다.

이에 앞서 원위(元魏) 말기에 기수(寄首)팔부(八部)가 고구려와 유유(蠕蠕)침입을 받아 겨우 1만여 구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는데,

이들이 모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나라 문선제(文宣帝)가 평주(平州)로부터 세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와 남녀 10여 만 구(口)를

포로로 잡아갔다.

계속해서 돌궐(突厥)의 핍박을 받아 고구려로 도망쳐 가 붙어산 자가 1만 호에 불과하였으며,

부락이 흩어져서 다시는 옛날의 팔부(八部)가 되지 못하였다.

개황 말기에 여러 부족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자, 출복 등이 고구려를 두려워해 내부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갈해나안

(渴奚那顔)의 북쪽에 이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 하였다. -해동역사중에서-

 

고구려군이 출정할때 유유즉 유연군대가 같이 나아갔다.

이는 고구려군에 복속된 나라가 유연임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기록된 "고구려(高句麗), 백제가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북의 유연제노(幽燕齊魯)와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여 중부국가에 큰 좀이 되었다

유연이 누구에게 복속이 되었는지 신라학자 최치원이 설명해주었다.

 

 

 

중원고구려비 賜寐錦之衣服 建立處

[출처] 겨울비 내린 후 [국원성] 중원고구려비 원문|작성자 인드라망

신라왕매금에게 고구려태왕께서 의복을 하사했다.

고대에 다른나라의 관복을 그나라왕이 입는다는것은 사실상 다른나라에 속해있다는 증거이다.

돌궐이 수나라의 상전이었으나 패망하여 수나라문제에게 귀순할때 문제가 수나라관복을 입으라고 돌궐의 칸에게 명령했으나

그것만은 못하겠다며 버틴기록도 있다.

신라는 중국기록에 원래 백제의 제후국이었으나 고구려광개토호태왕때 고구려에 복속된후 고구려가 약해진틈을 타서 독립했다.

이후 백제가 종속관계를 요구하며 핍박하자 당나라에 속국이 되길 원한다며 당나라관복을 선덕여왕때 이용했다.

즉 신라가 당에 귀순했으니 백제가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백제는 당과 신라를 무시하고 신라를 또 공격한다.  

 

호태왕때 고구려는 서로는 위구르와 토욕까지 동으로 동해 남으로 일본까지 서남으로 황하까지 진격했다.

 

백제전성기영역

송서(宋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고 한다.

진평군은 중국역사지도에 산둥성 서쪽끝부분이다.


2월,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고이왕 백제본기-

부산은 대릉하에 있는 지명이름으로 백제수도가 이곳과 멀지 않음을 알수있다.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경명왕(景明王) 8년(924)에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또한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경애왕(景哀王) 4년(927)에 당 명종(唐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 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4월에 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林彦)을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보내어 조공하니, 명종이 중흥전(中興殿)에서 사신을 불러보고

선물을 내렸다

 

천주가 원래 백제땅이었다가 백제가 망한뒤 신라땅이된다는 증거가 위에 있다.

천주 남쪽 강주즉 광둥까지 원래 백제땅이었다.

 

 

구당서

백제의 남쪽으로 바다를 따라 3개월을 가면  탁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천여리되고 동서로 수백리정도된다.

사슴이 많고 백제에 속해있다.

 

 

탁모라국은 큐슈를 말한다. 유구(대만)도 백제땅이다.

 

 

당나라가 남쪽의 양나라를 정벌할 때 정벌군 사령관인 이정이 양나라땅은 남으로 령표를 넘었고 동으로 동정과 떨어져 있다고 했다.

즉 동정호 서쪽이 양나라 영토의 동쪽경계라고 했다.

그럼 동정호의 동쪽은 양나라땅도 아니요 당나라땅도 아니다.즉 백제외에는 그땅의 주인이 없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제노오월을 백제가 제압했다고 했다.

오월은 바로 동정호 동쪽을 말하는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근구수왕 동성왕, 무왕당시에 최고로 강했으며 한반도대부분과 일본 대만 하북 산둥 강소 산서일부분 양자강남쪽의

절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에도 땅이있었다.

로마군은 전성기에 15만 가량이라고 한다.

백제는 북조의 기록에 의하면 지방군이 50개 각군에는 3천명의 병사 즉 지방군대만 15만이다.

중앙군을 합치면 30만이상은 된다.

로마보다 영토도 더 넓고 병력도 더 많으며 인구또한 더 많다. 

 


신라영토 강역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신라 헌덕왕 신라본기 -

 

절동은 절강의 동쪽을 말한다. 바로 위쪽강소가 누구땅인지 위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백제땅이었으나 신라가 차지했다.

21년 여름 5월, 오곡·휴암·한성·장새·지성·덕곡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경덕왕신라본기-


해주목(海州牧)

 

본래 고구려내미홀군(內米忽郡) 인데,지성(池城) 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 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


조선의 해주는 신라의 지성이라고 한다. 조선의 해주는 고죽국으로 베이징동쪽을 말한다.

원래 백제땅이나 신라가 차지했다.

 

거란지리도에는 요동반도가 고려신라 여진 발해땅이라고 써있다.

즉 요동반도가 신라땅이기도 했고 발해땅이기도 했으나 고려가 차지한다는 것이다.

압록강동쪽은 전부 신라국땅이라고 쓰여져 있다.

 

 

16년, 수 나라 황제가 조서를 주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배수하였다.

 

-진평왕 신라본기-

 

백제왕에게 주어지던 낙랑군의 칭호가 신라에 넘어갔다.

즉 진흥왕때 낙랑군을 신라가 백제로부터 뺏은 것이다.

낙랑군은 하북성에 있는것으로 황해도가 아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 멸망후 그 땅을 당과 나누어 가지고 특히 백제땅을 많이 가졌다.

백제땅중 대륙땅의 절반이상을 차지했고 고구려땅중길림성까지 차지했다.

(만주원류고에 그렇게 써있다.)이는 나중에 고려로 넘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