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황제어새>라 각인되어있다.
고종 재위 13년째인 1876년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이 화재로 소실됐다. 이 화재로 이곳에 보관하던 국새(國璽)와 같은 '임금님 도장' 또한 대부분 소실되거나 손상됐다. 이때 고종은 옥새와 인장을 "다시 주조하고 만들되 수리하는 일은 본소(本所. 무위소<武衛所>)와 호조(戶曹)에서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첨부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이 일을 자신이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武衛所)에 맡겼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보인은 그 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 만든 '임금님 도장'을 보인소의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궁옥인(世子宮玉印) ▲조선왕보(朝鮮王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이덕보(以德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무위소(武衛所). 것이다. 그러다가 고종은 1897년에 이르러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가 사용하는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새로 제작한 '황제 도장'은 모두 13과였음이 그의 황제 즉위과정을 파노라마처럼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1897)라는 문헌에 보인다.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이었다. 황제가 국내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통수권을 행사할 때 사용한 도장이었다. 제작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기간에 27명의 왕이 사용한 국새는 그 정확한 통계수치는 없지만 엄청나게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지금까지 조선시대 국새는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않는다. 따라서 이런 어보는 실무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어보 무게가 대체로 4㎏ 안팎에 이르는 대형인 까닭은 이런 비실용성에 기인한다. 다만 고종의 국새가 어디로 갔는지는 그 단서를 포착할 만한 기록이 있다. 보새(寶璽)를 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이 순종실록은 대한국새 1과, 황제지세 1과, 대원수보(大元帥) 1과, 제고지보 1과, 칙명지보 1과, 칙령지보 (勅令之寶) 1과로 적었다. 심지어 고종의 잃어버린 국새 찾기를 소재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고종황제의 국새를 입수한 것이다. 구입하고 지금까지 약 3개월 동안 그 진위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 황제가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찍은 ‘황제어새’. ‘황(皇)’자는 ‘백(白)’자가 아니라 가로 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자 아래에 ‘왕(王)’자로 표기했다.
“삼가 우방국 이태리 군주폐하께. 가까운 시일 내에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 우리 국력은 이에 못 미치므로 우리식으로 이 전쟁을 예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 폐하께 진실로 바라노니 이런 사실을 낱낱이 적어 서로 상조하고 깊은 배려를 해 줄 것을 바랍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재미교포 소장자로부터 구입해 17일 공개한 국새는 『대례의궤』(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에 수록된 ‘대한국새’나 ‘황제지보’ 등 13개 국새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고종은 이 황제어새를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친서에서 사용했다. 인영으로 확인된 황제어새는 두 종류이나 실물 도장은 사라진 것으로 일려져 있었다. 그중 1점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되찾은 국새가 바로 그 사진과 같은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황제어새’의 유리원판 사진. 발견된 황제어새와 일치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정계옥 유물과학과 과장은 “상서원에서 관리하게 돼 있는 공문서용 국새와는 달리, 고종이 비밀리에 제작해 직접 소지한 것으로 보인다”며 “국운이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절박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제어새의 글씨 중 황제의 ‘황(皇)’자는 ‘백(白)’자가 아니라 가로 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자 아래에 ‘왕(王)’자로 표기한 것도 특징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정종수 관장은 “조선의 자립을 강조하는 뜻에서 ‘자(自)’자를 썼으리라고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고 말했다. 1910년 총 6과의 옛 국새와 보새를 조선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일제강점기에 강탈당한 국새는 미군정 때 8과가 반환됐지만 한국전쟁 기간에 모두 잃어버렸다. ‘제고지보’ 등 3과만 되찾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 과장은 “황제어새의 발굴을 계기로 흩어져 있는 다른 국새들이 모습을 드러내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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