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근세조선

고종의 조선국 御璽 모두 어디로 갔나?

설레임의 하루 2009. 3. 19. 03:03

*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황제어새>라 각인되어있다. 

 

고종 재위 13년째인 1876년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이 화재로 소실됐다.

이 화재로 이곳에 보관하던 국새(國璽)와 같은 '임금님 도장' 또한 대부분 소실되거나 손상됐다.
이에 고종은 나흘 뒤에 "화재로 소실한 옥새(玉璽)와 인장(印章)을 새로 만들도록 하라 "는 지시와 내린다.

이때 고종은 옥새와 인장을 "다시 주조하고 만들되 수리하는 일은 본소(本所. 무위소<武衛所>)와 호조(戶曹)에서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첨부했다.

보인(寶印) 즉, 임금이 사용하는 각종 도장은 원래 호조에서 제작을 담당했으나, 고종은 재위 11년(1874)에 이르러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이 일을 자신이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武衛所)에 맡겼던 것이다.

교태전 화재와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보인 제작의 상세한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라는 기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보인은 그 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 만든 '임금님 도장'을 보인소의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보(大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궁옥인(世子宮玉印)

▲조선왕보(朝鮮王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이덕보(以德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무위소(武衛所).

이때는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이었으므로 황제가 아닌 '조선왕'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각종 도장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고종은 1897년에 이르러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가 사용하는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새로 제작한 '황제 도장'은 모두 13과였음이 그의 황제 즉위과정을 파노라마처럼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1897)라는

문헌에 보인다.

 그 13과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이었다.

이 중 고종황제가 외국 원수에게 친서 등을 보낼 때 직접 사용한 국새는 대한국새와 황제지새, 황제지보 등 3과였으며, 나머지는

황제가 국내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통수권을 행사할 때 사용한 도장이었다.

고종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신분이 '조선왕'이건 대한제국 '황제'건 관계없이 조선시대 군주는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많은 국새를

제작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기간에 27명의 왕이 사용한 국새는 그 정확한 통계수치는 없지만 엄청나게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지금까지 조선시대 국새는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관련해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상설전시품으로 내놓은 '임금님 도장'은 도대체 뭐냐는 의문을 표시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도장들은 '어보'(御寶)라고 해서 종묘의 신실(神室), 즉, 각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공간에 안치한 의례용 도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어보는 실무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어보 무게가 대체로 4㎏ 안팎에 이르는 대형인 까닭은 이런 비실용성에 기인한다.

그 많던 국새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의문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혹여 각 왕릉에 매장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다만 고종의 국새가 어디로 갔는지는 그 단서를 포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순종실록 1910년 3월3일(양력)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차관(次官)인 고미야 사보마쓰(小宮三保松)라는 사람이 "옛 국새(國璽)와

보새(寶璽)를 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이 순종실록은 대한국새 1과, 황제지세 1과, 대원수보(大元帥) 1과, 제고지보 1과, 칙명지보 1과, 칙령지보

(勅令之寶) 1과로 적었다.

이 국새들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때문에 국새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심지어 고종의 잃어버린 국새 찾기를 소재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고종황제의 국새를 입수한 것이다.

박물관은 그 입수 경로를 해외문화재 환수 일환이라고만 밝히고 그 자세한 사정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지난해 12월 재미교포에게

구입하고 지금까지 약 3개월 동안 그 진위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고종 황제가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찍은 ‘황제어새’.

‘황(皇)’자는 ‘백(白)’자가 아니라 가로 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자 아래에 ‘왕(王)’자로 표기했다.

 

“삼가 우방국 이태리 군주폐하께. 가까운 시일 내에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 우리 국력은 이에 못 미치므로 우리식으로 이 전쟁을 예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 폐하께 진실로 바라노니 이런 사실을 낱낱이 적어 서로 상조하고 깊은 배려를 해 줄 것을 바랍니다.
1903년(광무7년) 11월 23일 경운궁에서 폐하의 우방 어휘.”


고종 황제가 100여 년 전 이탈리아 황제에게 쓴 친서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 인영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해 12월 재미교포 소장자로부터 구입해 17일 공개한 국새는 『대례의궤』(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에 수록된 ‘대한국새’나 ‘황제지보’ 등 13개 국새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고종은 이 황제어새를 독일·이탈리아·러시아·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친서에서 사용했다.

인영으로 확인된 황제어새는 두 종류이나 실물 도장은 사라진 것으로 일려져 있었다.

그중 1점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되찾은 국새가 바로 사진과 같은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황제어새’의 유리원판 사진.

발견된 황제어새와 일치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정계옥 유물과학과 과장은 “상서원에서 관리하게 돼 있는 공문서용 국새와는 달리, 고종이 비밀리에 제작해 직접

소지한 것으로 보인다”며 “국운이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절박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제어새의 글씨 중 황제의 ‘황(皇)’자는 ‘백(白)’자가 아니라 가로 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자 아래에 ‘왕(王)’자로 표기한 것도

특징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정종수 관장은 “조선의 자립을 강조하는 뜻에서 ‘자(自)’자를 썼으리라고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고 말했다.

황제어새가 찍힌 흔적은 1906년으로 끝난다.

1910년 총 6과의 옛 국새와 보새를 조선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일제강점기에 강탈당한 국새는 미군정 때 8과가

반환됐지만 한국전쟁 기간에 모두 잃어버렸다.

‘제고지보’ 등 3과만 되찾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 과장은 “황제어새의 발굴을 계기로 흩어져 있는 다른 국새들이 모습을 드러내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