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한단고기-임승국(역주) 출처:삼태극<펌>

설레임의 하루 2009. 2. 16.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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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桓檀古記

 

 

 

 

 

 

 

 

 

 

 

 

 

 

한단고기 해제

 

 

이 한단고기는 이 땅이 식민지시대로 접어든 후인 1911년에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그 내용은 삼성기단군세기, 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 4종의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설명)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지은 것 : 撰>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이니, 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 있다.

이는 우리 민족시발인 한국시대의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에는 신시역대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엮은 것 : 編> 책으로, 아도읍하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 왕검으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의 학자인 범장이 전한<지은 것 : 撰> 책이다.

국사책에서의 고구려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이보다 두 갑자(120년) 내지는 세 갑자(180년)가

앞선 것으로 생각되는데, 몇 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보아 북부여기가 바로 고구려의 전신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의심된다.

권․하권․가섭원부여기로 구성되는데,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엮은 것 : 編> 책으로, 한단고기의 압권을 이루는 부분이니, 한국

(桓國)․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에는 삼신오제본기․한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삼한관본기에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한단고기는 고대 우리 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신앙․풍습․정치․경제․철학․교육․지리․예술 등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져 있으며,

조국에 해서도 수많은 생각해봐야 될 점들을 제시하고 있다.

일례를 들면 주체의식입장에서 볼 때, 늘 우리의 귀에 익어온 발해라는 이름도 본명이 대진국(大震國)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발해라 함은 남이 부르던 이름일 뿐, 사실대진국임을 한단고기는 입증하고 있음이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의 임금을 왕이라고 말해왔다.

그 왕이라는 칭호는 제후들에게나 사용하는 것으로서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는 제후 나라의 백성이라고 암시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보라. 한단고기의 어디에 왕의 칭호가 있는가? 엄연히 고려시대까지 내내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실상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은 이미 우리 조국의 고대사가 대륙의 역사임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부분독자들은 내용의 허구를 의심할 것이다.

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국사와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를 이 한단고기는 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가 최초의 국가 형태를 갖춘 고대국가라고 간주했던 식민시대의 학설에 반해, 그 이전이미 찬란한 한인․한웅․단군시대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이 바로 이 한단고기이며, 또 그 역사의 주도가 매우 주체성 있는 강국의 면모를 갖추고 이루어지고

었던 것이다.

필자이 책을 번역해 가면서 평소에 주장해 왔던 바, 한반도만리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과 스스로 강국임을 포기하고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사관의 말살을 염두에 두고, 그 내용의 예증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그 어느 책보다도 많이 읽혀져야 할 이러한 책이 왜 그토록 묻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은, 역시 우리의 사가들이 젖어 있었던 반도사관과

민사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 책에 포함된 일부의 사서에서도 인습에 젖어 있던 그간의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으니, 잘못된 역사관의 해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결코 이 한단고기를 근거가 불확실하다든지, 신빙성이 없다든지, 편찬자들의 학문 업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내팽개칠 수는 없다.

 그러한 선입자체도 논리적인 근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이 책은 한국인에게 중시되어야 하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들먹이며 문화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가 제대로 된 상고하나 변변하게 전해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또는 고려사만이 우리의 역사책일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분명히 숱한 역사책을 편찬했고 전해 왔다.

그것들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던 것은 다른 못난 조상의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한단고기는 그렇게 사장되어 온 일부의 사서들을 모은 책이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갖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 얼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또 이를 통해 민족 정기부추기고자 하는 것은 하등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이에 이 책, 한단고기 한 권을 읽어 마칠 때쯤에는 우리의 참된 역사전통, 하느님 나라 백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맥박이 고동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번역 및 주해자 임 승 국

 

 

 

 

 

범례(凡例)

 

一. 古記引用始自一然氏之遺事而今其古記不可得見乃以三聖記檀君世紀北夫餘紀太白逸史合爲一書名曰桓檀古記

고기(古記) 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一然)(1206~1289)의《삼국유사(三國遺事)》로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삼성기(三聖記)》,《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 책으로 묶어《한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하였다.

 

一. 三聖記有二種而似非完編安含老氏所撰余家舊傳今爲三聖記全上篇元董仲氏所撰得於泰川白進士寬黙氏今爲三聖記全下篇總爲之三聖記全

 

《삼성기(三聖記)》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安含老)가 (撰 : 짓다)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삼성기전 상편(三聖記全 상편)》이라 하고 원동중(元董仲)씨가 (撰 : 짓다)하고 태천(泰川)의 백진사(白進士) 관묵(寬黙)씨로부터

얻은 것을 이제《삼성기전 하편(三聖記全 下篇)》으하여 통털어《삼성기전(三聖記全)》이라 한다.

 

一. 檀君世紀紅杏村叟所編乃杏村先生文貞公所傳也此書亦得於白進士進士文藻古家也素多藏書而今兩種史書俱出其家奚啻譬諸百朋之賜可謂祖國之萬丈光彩也

《단군세기(檀君世紀)》는 홍행촌(紅杏村)의 노인엮은 것<編 : 엮다, 이어놓다>로 행촌(杏村)선생 문정공(文貞公)이 전한 책이다.

이 책도 역시 백진사(白進士)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進士)의 집은 글로써 전통이 알려졌던 오래된 가문으로 본래 많은 책을 갖추고 있었는

데, 이제 두 종류의 사서(史書)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함은 어찌 다만 백 사람의 벗이 주는 선물에 비길 수 있을 건가?

조국에 만장의 광채를 비춤이라 할 것이다.

 

一. 北夫餘紀上下休崖居士范樟所撰也舊有以檀君世紀合編者得於朔州梨洞 李進士亨栻家檀君世紀與白進士所藏無一字異同今又有別本而行於世者 此本內容自與前書頗有所殊故更不及之也

《북부여기(北夫餘紀) 상(上)․하(下)》는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찬(撰)한 것다. 본래《단군세기(檀君世紀) 합편(合編)》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었던 바, 삭주(朔州)의 이동(梨洞) 이진사(李進士) 형식(亨栻)의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백진사(白進士)가 간직했던 것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도 없다<無一字異同>. 이제 또 별본(別本)있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있지만, 이는 그 내용이 앞의 책과는 매우 다른 바가 있을 뿐 아니라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一. 太白逸史一十堂主人李陌氏所編乃海鶴李沂先生所藏也蓋桓檀以來相傳之敎學經文悉備取材典據可一見燎然者也且其天符經三一神誥兩書全文 俱在篇中實爲郎家之大學中庸也嗚呼桓檀相傳之三一心法眞在是書果太白眞敎重興之基歟手自舞足自蹈興欲哄喜欲狂也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일십당(一十堂) 주인 이맥(李陌)이 펴낸 것<編>으로 해학(海鶴) 이기(李沂) 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대저 한단(桓檀)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 경문모두 사용한 전거(典據)가 한번 보아도 뚜렷한 것들이다.

또 저《천부경》과《삼일신고》두 책의 전문이 함께 편중(編中)에 있어 실로 낭가(郎家)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대학 중용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오호라! 한단 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심법(三一心法)은 참으로 이 책에 있는 바, 모름지기 태백진교(太白眞敎)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되

않을 것인가? 손도 저절로 춤을 추고 발도 저절로 춤추고 흥겨워 소리지르고 으니, 기쁨에 미칠 지경이로다.

 

一. 桓檀古記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而且余精勤繕寫又因洪範圖吳東振兩友之出金付諸剞劂一爲自我人間之發見主性而大賀也一爲民族文化之表出理念而大賀也一爲世界人類之對合共存而大賀也

《한단고기(桓檀古記)》는 모두 해학(海鶴) 이기(李沂)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 근면을 다하여 옮겨 쓴 것<繕寫 : 손보아 고쳐서 베끼다>이다. 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하나는 자아(自我)인간의 주성(主性)발견으로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민족문화의 표출이념이 됨으로써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세계 인류의 대합(對合) 공존으로써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神市開天五千八百八年卽光武十五年歲次辛亥五月廣開節太白遺徒宣川桂延壽仁卿書于妙香山之檀窟庵

신시개천 5808년(서기 1911년), 즉 광무(光武) 15년의 신해 5월 광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 유도(遺徒) 선천(宣川)의 계연수(桂延壽) 인경(仁卿)이 묘향산 단굴암(檀窟庵)에서 쓰다<書 : 기록하다>.

(참고)

 

 

 

 

 

 

 

 

 

 

차 례

 

□ 삼성기(三聖記) : 한국과 신시의 역사~고구려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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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 전 상편(三聖記全 上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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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 전 하편(三聖記全 下篇)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조선의 역사

단군세기 서(檀君世紀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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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檀君世紀)

 

□ 북부여기(北夫餘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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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 상(北夫餘紀 上)

: 해모수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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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 하(北夫餘紀 下)

: 동명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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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

: 동명계에 밀려 길림방면으로 이동한 해모수계의 역사, 동부여라고도 한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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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 삼신과 오제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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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본기(桓國本紀))

: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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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본기(神市本紀)

: 신시, 배달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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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마한세가 상(馬韓世家 上)

,

마한세가 하(馬韓世家 下)

: 마한의 역사

번한세가 상(番韓世家 上)

,

번한세가 하(番韓世家 下)

: 번한의 역사

-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천부경(天符經)

,

삼일신고(三一神誥)

 

-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 고주몽(高朱蒙, 高雛牟) 이후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 발해의 역사(남북국 시대)

-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 고려의 역사

․태백일사 발(太白逸史 跋), 한단고기 발(桓檀古記 跋)

 

삼성기전 상편(三聖記全 上篇)

- 안함로(安含老) 지음 -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일신(一神) 있어 사백력(斯白力)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온 우주를 비추고 교화만물을 낳았다.

 

長生久視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

오래오래 살면서<長生久視> 늘 쾌락을 즐겼으니<恒得快樂>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乘遊至氣> 그 묘함은 절로 기꺼웠다.<妙契自然> 모습 없이 볼 수 있고<無形而見> 행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無爲而作> 말없으면서 다 행하였다.<無言而行>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羣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童女童男)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한인(桓因)은 또한 감군(監羣)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리켜 천제 한인씨(天帝 因氏) 또는 안파견(安巴堅)이라 하며, 7세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丘持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子井女井>천평(天坪)을 마련하고 청구(靑邱)정지(井地)를 정했다. 천부인(天符印)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五事>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在世化>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다<弘益人間>.

 

立都神市國稱培達擇三七日祭天神忌愼外物閉門自修呪願有功服藥成仙劃卦知來執象運神命羣靈諸哲爲輔納熊氏女爲后定婚嫁之禮以獸皮爲幣耕種有畜置市交易九域貢賦鳥獸率舞後人奉之爲地上最高之神世祀不絶神市之季有治尤天王恢拓靑邱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칭했다. 삼칠일<21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괘(卦)를 그어것을 알며 상(象)을 잡아 신명(神命) 움직였다. 또 군령(羣靈)과 제철(諸哲)들이 보필하도록 하시고 웅씨의 여인<熊氏女>을 거두어 후(后)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해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治尤天王)이 청구(靑丘)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렸다.

 

後神人王儉降到于不咸之山檀木之墟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承詔繼天而建極巍蕩惟烈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神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設都阿斯達開國號朝鮮

뒤에 신인 왕검(神人 王儉)께서 불함산(不咸山)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建極>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檀君)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舊規>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阿斯達)에 설치하여 호(國號)를 조선(朝鮮)으로 하여 나라를 열었다.

 

檀君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得道接化羣生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高矢主種稼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尤作兵馬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얻어 여러 생명들을 두루 교화하였다.<接化羣生命>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도록 하였으며, (羲)에게는 점치는 일<卦莁>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겐 병마(兵馬)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후(后)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淳厖之治>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丙辰周考時改國號爲大夫餘自白岳又徙於藏唐京仍設八條讀書習射爲課祭天爲敎田蠶是務山澤無禁罪不及孥與民共議協力成治男有常職女有好逑家皆蓄積山無盜賊野不見飢絃歌溢域檀君王儉自戊辰統國傳四十七世歷二千九十六年

병진년(B.C.425, 44세 구물 단군 원년), 주나라 고(考)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바꾸고 백악(白岳)으로부터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 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 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여 2,096년을 누렸다.

 

壬戌秦始時神人大解慕漱起於熊心山

임술(B.C.239)년 진시황((秦始皇)(B.C.246~209)때 신인(神人)이신 대해모수(大解慕漱)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丁未漢惠時燕酋衛滿竊居西鄙一隅番韓準爲戰不敵入海而亡自此三韓所率之衆殆遷民於漢水之南一時群雄競兵於遼海之東至癸酉漢武時漢移兵滅右渠西鴨綠人高豆莫汗倡義興兵赤稱檀君

정미(B.C.194)년 한나라 혜제(惠帝)(B.C.195~188)때 연나라 추장이었던 위만(衛滿)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番韓)의 준(準 : 箕準)이 이를 맞싸웠으나 이길없자 바닷길을 택해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의 무리는 거의 한수(漢)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海)의 동쪽에서 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나라의 무제(武帝) (B.C.141~87)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乙未漢昭時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

을미(B.C.86)년 한나라 소제(昭帝)(B.C.87~74)때,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東明)이라고 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新羅)의 옛 땅이다.

 

至癸亥春正月高鄒牟亦以天帝之子繼北夫餘而興復檀君舊章詞解慕漱爲太祖始建元爲多勿是爲高句麗始組也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高雛牟)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삼성기 전 하편(三聖記全 下篇)

- 원동중(元董仲) 지음 -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它夢得天神之敎而自成婚禮則九桓之族皆其後也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耳斯它)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九桓)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擧身無病代天宣化使人無兵人皆作力自無飢寒傳赫胥桓仁古是利桓仁朱于襄桓仁釋提任桓仁邱乙利桓仁至智爲利桓仁或曰檀仁

옛날에 한국(桓國)이 있었는데 백성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한인(桓仁)께서 천산(天山)올라 도를 얻어 오래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교화<宣化>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赫胥) 한인, 고시리(古是利) 한인, 주우양(朱于襄) 한인, 석제임(釋帝任) 한인, 구을리(邱乙利) 한인에 전하고 지위리(智爲利) 한인에 이르렀다. 지위리 한인은 단인(檀因)이라고도 한다.

 

古記云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之國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句茶川國一羣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句牟額國賣句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禾卑 國(一稱豕韋國或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也天海今曰北海傳七世歷年三千三百一年或云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未知孰是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波奈留山) 밑에 한인씨(桓因氏)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도 하는데 그 땅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虞婁國 혹은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혹은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이국(鮮椑爾國 혹은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이니 합하여 12국이다. 천해(天海)는 지금 북해(北海)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桓國之末安巴堅下視三危太白皆可以弘益人間誰可使之五加僉曰庶子有桓雄勇兼仁智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可遣太白而理之乃授天符印三種仍勅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爲萬世子孫之洪範也

한국의 말기에 안파견이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을 내려다보시며「모두 가홍익인간(弘益人間) 할 곳이로다」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五加) 모두 대답하기를「서자(庶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좋겠습니다」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 가지<天符印 三種>내려주시이에 말씀을 내려,「사람과 물건의 할 바<人物業>가 이미 다 이루졌도다. 그 수고로움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開天> 가르침을 세워 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在世理化> 만세(萬世)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洪範>이 될지어다」라고 하셨다.

 

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而往請乃許之遂積財寶率十干十二支之神將與共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畎是謂盤固可汗也

때에 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어 기이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가기<分道>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화와 보물을 꾸리고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신장(神將)들을 거느리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 등과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납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군주가 되었는데 이를 제견(諸畎)이라 이르니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

 

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弘益人間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오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거느리고, 곡식․생명․형벌․병․선악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이치로 교화하였으니<在世理化>, 널리 인간세상에 유익함<弘益人間>이 있었다.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乃以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二族皆得而食之忌三七日熊能耐飢寒遵戒而得儀容虎則放慢不能忌而不得善業是二性之不相若也熊女者無與爲歸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乃假化爲桓而使與之爲婚懷孕生子有帳

때에 한 곰과 한 범<一熊一虎)>이 이웃하여 살았는데 일찍이 신단수(神檀樹)에서 빌었다.「원컨대 변하여 신계의 한 무리<神戒之氓>게 하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呪術)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神遺靜解靈>을 내놓았으니 즉,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이다. 이에 경계하여 가되,「너희들것을 먹 햇빛을 백 일 동안 보지 않으면 쉽게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便得人形>」하니, 곰과 호랑이 두 무리<熊虎二族>가 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 동기(忌)하였는데 곰<熊>은 기한을 잘 지켜타이름을 따르매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得儀容>, 범<虎>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 바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라.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단수(壇樹)의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였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한이 되고<假化爲桓>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帳>에 실리게 되었다.

 

桓雄天王肇自開天生民施化演天經講神誥大訓于衆自是以後治尤天王闢土地採銅鐵鍊兵興産時九桓皆以三神爲一源之祖主蘇塗主管境主責禍與衆議一歸爲和白竝智生雙修爲居佺自是九桓悉統于三韓管境之天帝子乃號曰檀君王儉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을 열고<肇自開天>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天經)과 신고(神誥) 가르치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후에 치우천왕(治尤天王)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興産> 때에 구한(九桓)은 모두 삼신(三神)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蘇塗)를 관리하고 관경(管境)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하나로 뭉쳐 화백(和白)을 하였다.(다른 해석) 아울러 지혜와 삶을 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다른 해석) 이때부터 구한(九桓)전부 삼한(三)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불렀다.(다른 해석)

 

密記云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作誓有勸懲善惡之法自是密有剪除之志

《밀기(密記)》에서 말한다.「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强族)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佺戒)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로부터 슬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其途也

이때에 무리의 이름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 원래 살던 무리는 범 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 무리였다. 범 무리의 성질은 잔악한 짓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 무리의 성질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 지 오래 되었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찍이 서로 도울 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이에 이르러 곰 무리의 여왕<熊女君>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원컨대 한 굴에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려주시고 신계(神戒)의 무리<神戒之盟>로 받아 주옵소서」하니 한웅이 이를 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有産>하였다. 그러나 범 무리<虎>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四海)로 내쫓았다.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後有葛古桓雄與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神勇冠絶以銅頭鐵額能作大霧造九冶而採鑛鑄鐵作兵天下大畏之世號爲蚩尤天王蚩尤俗言雷雨大作山河改換之義也

뒤에 갈고(曷古) 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慈烏智) 한웅 나셨는데,

신(神)

같은 용맹이 뛰났으니<神勇冠絶>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철의 모습<銅頭鐵額>을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불렀으니 치우(蚩尤)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蚩尤天王見炎農之衰遂抱雄圖屢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及軒侯之立也直赴?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淮岱)의 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鹿)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時天下鼎峙?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自相以兵欲專其勝而未也初軒轅稍後起於蚩尤每戰不利欲依大撓而未得又依倉頡而不得二國皆蚩尤之徒也大撓嘗學干支之術倉頡受符圖之文當時諸侯罔不臣事者亦以此也

한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大)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倉頡)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大撓)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찍이 간지(干支)의 술(術)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符都)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司馬遷史記曰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天下莫能伐軒轅攝政蚩尤有兄弟八十一人竝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丘杖刀戟太弩威振天下蚩尤古天子之號也

사마천의《사기》에 말하기를,「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신시 역대기(神市 歷代記)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배달한웅(倍達桓雄)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神市)라고 한다. 뒤에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一世曰桓雄天皇一云居發桓在位九十四年壽一百二十歲

1세를 한웅천황이라 하며 또 거발한(居發桓)이라 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 사셨다.

 

二世曰居佛理桓雄在位八十六年壽一百二歲

2세는 거불리(居佛理) 한웅이니 재위 86년 102세까지 사셨다.

 

三世曰右耶古桓雄在位九十九年壽一百三十五歲

3세는 우야고(右耶古) 한웅이니 재위 99년 135세까지 사셨다.

 

四世曰慕士羅桓雄在位一百七年壽一百二十九歲

4세는 모사라(慕士羅) 한웅이니 재위 107년에 129세까지 사셨다.

 

五世曰太虞儀桓雄在位九十三年壽一百一十五歲

5세는 태우의(太虞儀) 한웅이니 재위 93년에 115세까지 사셨다.

 

六世曰多儀發桓雄在位九十八年壽一百十歲

6세는 다의발(多儀發) 한웅이니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七世曰居連桓雄在位八十一年壽一百四十歲

7세는 거련(居連) 한웅이니 재위 81년에 140세까지 사셨다.

 

八世曰安夫連桓雄在位七十三年壽九十四歲

8세는 안부련(安夫連) 한웅이니 재위 73년에 94세까지 사셨다.

 

九世曰養雲桓雄在位九十六年壽一百三十九歲

9세는 양운(養雲) 한웅이니 재위 96년에 139세까지 사셨다.

 

 

十世曰葛古桓雄又曰瀆盧韓在位一百年壽一百二十五歲

10세는 갈고(葛古) 한웅 또는 독로한(瀆盧韓)이라 하니 재위 100년에 125세까지 사셨다.

 

十一世曰居耶發桓雄在位九十二年壽一百四十九歲

11세는 거야발(居耶發) 한웅이니 재위 92년에 149세까지 사셨다.

 

十二世曰州武愼桓雄在位一百五年壽一百二十三歲

12세는 주무신(州武愼) 한웅이니 재위 105년 123세까지 사셨다.

 

十三世曰斯瓦羅桓雄在位六十七年壽一百歲

13세는 사와라(斯瓦羅) 한웅이니 재위 67년에 100세까지 사셨다.

 

十四世曰慈烏支桓雄世稱蚩尤天王徙都靑邱國在位一百九年壽一百五十一 歲

14세는 자오지(慈烏智) 한웅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

 

十五世曰蚩額特桓雄在位八十九年壽一百一十八歲

15세는 치액특(蚩額特) 한웅이니 재위 89년에 118세까지 사셨다.

 

十六世曰祝多利桓雄在位五十六年壽九十九歲

16세는 축다리(祝多利) 한웅이니 재위 56년에 99세까지 사셨다.

 

十七世曰赫多世桓雄在位七十二年壽九十七歲

17세는 혁다세(赫多世) 한웅이니 재위 72년에 97세까지 사셨다.

 

十八世曰居弗檀桓雄或云檀雄在位四十八年壽八十二歲

18세는 거불단(居佛檀) 한웅 혹은 단웅(檀雄)이라 하는데 재위 48년에 82세까지 사셨다.

 

 

 

 

 

 

 

 

 

 

 

 

단군세기(檀君世紀)

- 행촌 이암(杏村 李嵒) 지음 -

 

 

단군세기 서(檀君世紀 序)

 

爲國之道莫先於士氣莫先於史學何也史學不明則士氣不振士氣不振則國本搖矣政法歧矣蓋史學之法可貶者貶可褒者褒衡量人物論診時像莫非標準萬世者也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은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은 무엇일까?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쳐질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 무릇 올바른 역사학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니, 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

 

斯民之生厥惟久矣創世條序亦加訂證國與史竝存人與政俱擧皆自我所先所重者也

이 백성이 생긴지도 오래되어 세상이 열린 이래의 여러 가지 질서도 많이 변화하였다. 나라와 역사는 나란히 이어지며 사람과 다스림도 따로 나누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모두가 한 개인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해야 됨이라.

 

嗚呼政猶器人猶道器可離道而存乎

아아! 다스린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사람은 오로지 바른 길을 생각해야 되나니, 사람의 뜻에 따른다는 것이 어찌 바른 길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겠는가?

 

國猶形史猶魂形可失魂而保乎竝修道器者我也俱衍形魂者亦我也故天下萬事先在知我也然則其欲知我自何而始乎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나라라는 것은 몸뚱아리와 같고,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혼과 같으니<國猶形史猶魂>, 몸뚱아리가 어찌 혼을 잃고도 몸뚱아리만으로 우쭐댈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른 길바로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몸뚱아리와 혼을 함께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일은 먼저 나 자신을 아는데 있음이라. 그런데 스스로를 알려고 하면 어떤 것부터 알아야 될까?

 

夫三神一體之道在大圓一之義造化之神降爲我性敎化之神降爲我命治化之神降爲我情故惟人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

 

무릇〈삼신이 하나(三神一體)〉라는 이치는 대원일(大圓一)에 그 뜻이 있으니 조화(造化)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性)을 이루고, 가르침(敎化)의 신은 내려와 나의 숨(命)을 이루고, 다스림(治化)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기(精)를 이룬다.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이다.

 

夫性者神之根也神本於性而性未是神也氣之炯炯不昧者乃眞性也是以神不離氣氣不離神吾身之神與氣合而後吾身之性與命可見矣

무릇 사람의 성품(性)이라는 것은 신(神)의 뿌리이다. 그렇지만 신(神)이 성품(性)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해서 성품(性)이 바로 신(神) 그대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氣)가 밝게 빛나며 어둡고 더럽지 않을 때 비로소 참성품<眞性>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神)은 기(氣)를 떠날 수 없는 것이며, 기(氣)도 또한 신(神)을 떠날 없는 것이다. 내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신(神)의 성품(性)과 기(氣)가 잘 조화되어 합쳐진 후에 스스로의 성품(性)이나 목숨(命)을 알 수 있는 것이리라.

 

性不離命命不離性吾身之性與命合而後吾身未始神之性未始氣之命可見矣

성품(性)은 목숨(命)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목숨(命)도 성품(性)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스스로성품(性)과 목숨(命)이 잘 어울린 뒤에야, 이 몸이 신(神)의 성품(性)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기운 넘목숨(命)에서 비롯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故其性之靈覺也與天神同其源其命之現生也與山川同其氣其情之永續也與蒼生同其業也乃執一而含三會三而歸一者是也

그렇기 때문에 그 성품(性)을 깨닫게 됨은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 함이고, 그 목숨(命) 세상에 나는 것은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이 함이며, 그 정기(精)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 그 업(業)을 같이 하는 것이다.「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故定心不變謂之眞我神通萬變謂之一神眞我一神攸居之宮也

따라서 굳은 마음이 바뀌지 않을 때 참나<眞我>라고 하며, 신통하여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을 때 신(神)이라고 하나니, 참나<眞我>는 신(神)이 머무르는 바른 곳이다.

 

知此眞源依法修行吉祥自臻光明恒照此乃天人相與之際緣執三神戒盟而始能歸于一者也

이 참된 근원을 알고 올바르게 수련한다면 좋은 징조는 스스로 몰려오고 밝은 빛이 항상 비추리라. 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렸을 때 이로부터 삼신(三神)의 성품(性)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一)라는 것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故性命情之無機三神一體之上帝也與宇宙萬物混然同體與心氣身無跡而長存

따라서 성품(性)․목숨(命)․정기(精)가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삼신이 하나(三神一體)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 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마음(心)과 기(氣)와 몸(身)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도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感息觸之無機桓因主祖也與世界萬邦一施而同樂與天地人無爲而自化也

감(感)․식(息)․촉(觸)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인(桓因) 그대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즐거우며, 하늘(天)․땅(地)․사람(人)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라.

 

是故其欲立敎者須先立自我革形者須先革無形此乃知我求獨之一道

이런 까닭에 가르침을 세우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자기 스스로를 바르게 하고, 그 모습을 뒤집어 바꾸려 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 없는 것에서부터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알아나가는 단 하나의 길이다!

 

嗚呼痛矣夫餘無夫餘之道然後漢人入夫餘也高麗無高麗之道然後蒙古入高麗也若其時之制先而夫餘有夫餘之道則漢人歸其漢也高麗有高麗之道則蒙古歸其蒙古也

오호라, 슬프도다! 부여(夫餘)는 부여 스스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는 한족(漢族)이 부여에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렸고, 고려(高麗)는 고려대로의 길을 잃었으니 그 뒤에 몽고(蒙古)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차지해 버렸다. 만약 그때에 이보다 먼저 부여에 부여다움이 고스란히 있었다면 한인(漢人)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며, 고려에 고려다움이 있었다면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라.

 

嗚呼痛矣向年潛淸輩之邪論陰與百鬼夜行以男生發岐之逆心 相應而合勢爲國者抑何自安於道器兩喪形魂全滅之時乎

아아, 슬프도다! 얼마 전에는 잠(潛)이나 청(淸)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鬼>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 남생(男生)이나 발기(發歧) 따위들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 바른 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 버린 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인들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今外人干涉之政去益滋甚讓位重祚任渠弄擅如我大臣者徒束手而無策何也國無史而形失魂之故也

지금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 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만 있을 뿐, 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一大臣之能姑無可求之爲言而乃擧國之人皆救國自期而求其所以爲有益於救國然後方可得以言救國也

한 벼슬아치의 힘으로는 조금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바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다 스스로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그 할 바를 찾을 때에 나라를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라를 구한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것이다.

 

然則救國何在哉向所謂國有史而形有魂也

그러면 나라를 구함은 어디에 그 중요함이 있을까?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에는 역사가 있어야만 되고 그 몸뚱아리를 가지려면 혼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라.

 

神市開天自有其統國因統而立民因統而興史學豈不重歟 書此樂爲檀君世紀序

신시(神市)에 하늘을 여니 이로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 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기쁘게 단군님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上之十二年(3696)癸卯 十月三日 紅杏村叟 書于江都之海雲堂

효경대왕(孝敬大王) 12년(1363년) 계묘(癸卯) 10월 3일 홍행촌(紅行村)의 늙은이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다.

 

 

 

 

 

 

 

 

 

 

 

 

 

 

 

 

 

 

 

 

 

단군세기

檀君世紀

 

 

古記云王儉父檀雄母熊氏王女辛卯五月二日寅時生于檀樹下有神人之德遠近畏服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熊氏王女>이며 신묘년(B.C.2370)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年十四甲辰熊氏王聞其神聖擧爲裨王攝行大邑國事

14세 되던 갑진(B.C.2357)년에 웅씨왕<熊氏王>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椑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混一九桓神化遠曁是謂檀君王儉在裨王位二十四年在帝位九十三年壽一百三十

무진(B.C.2333)년 제요도당(帝堯陶唐) 때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檀木之墟>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椑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戊辰元年大始神市之世四來之民遍居山谷草衣跣足至開天一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有神人王儉者五加之魁率徒八百來御于檀木之墟與衆奉祭于三神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奉詔繼天巍蕩惟烈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身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立都阿斯達建邦號朝鮮

무진 원년(戊辰元年 : B.C.2333),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 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 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법규를 도로 찾고<復神市舊規>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다.

 

詔曰天範惟一弗二厥門爾惟純誠一爾心乃朝天

단군왕검은 가르침을 내려 말했다.「천범(天範)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둘이 니다.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정성을 다하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으리라. <心乃朝天>)

 

天範恒一人心惟同推己秉心以及人心人心惟化亦合天範乃用御于萬

하늘의 뜻<天範>은 항상 변치 않는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알고 보면 하나이다. 러므로 스스로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의 뜻<天範>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잘 쓰일 수가 있느니라.

 

爾生惟親親降自天惟敬爾親乃克敬天以及于邦國是乃忠孝爾克體是道天有崩必先脫免

사람이 태어남은 조상과 부모에 연유했으며, 그 부모와 조상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다. 그러므로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敬天>이며,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이요 효도함이다.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화를 벗어날 수 있느니라.

 

禽獸有雙弊履有對爾男女以和無怨無妬無淫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녀는 서로 화목하며 서로 원망하지 말고 질투하지도 말며, 음란함을 삼가야 하느니라.

 

爾嚼十指痛無大小爾相愛無胥讒瓦佑無相殘家國以興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 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헐뜯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도운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爾觀牛馬猶分厥蒭爾瓦讓無胥奪共作無相盜國家以殷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로 빼앗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훔치지 않고 함께 일한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게 되리라.

 

爾觀于虎彊暴不靈乃作孼爾無桀騖以戕性無傷人恒遵天範克愛物爾扶傾無陵弱濟恤無侮卑爾有越厥則永不得神佑身家以殞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모든 것들을 사랑하여라. 너희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가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爾如有衝火于禾田禾稼將殄滅神人以怒爾雖厚包厥香必漏爾敬持彛無懷慝無隱惡無藏禍心克敬于天親于民爾乃福祿無窮爾五加衆其欽

 

너희가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쁜 것을 감추지 말 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로써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檀君勅語)

 

於是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 尤掌兵馬納斐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이에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書契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괘무(卦莁)>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겐 군대(兵馬)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후(后)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정사 50년(B.C.2284),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帝)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戊午五十一年帝命雲師倍達臣設三郞城于穴口築祭天壇於摩璃山今塹城壇是也

무오 51년(B.C.2283), 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扶婁與虞司空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勘定國界幽營二州屬我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갑술 67년(B.C.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庚子九十三年帝在柳闕土階自成草茆不除檀木茂陰與熊虎遊觀牛羊茁浚溝洫開田陌勸田蠶治漁獵民有餘物俾補國用國中大會上月祭天民皆熙皞自樂自此皇化洽被九域遠曁耽浪德敎漸得偉廣

경자 93년(B.C.2241), 단군께서 버들궁궐에 계셨는데 흙 계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단목(檀木)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은 물건들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 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耽浪)에 까지 미쳤으니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 갔다.

 

於是區劃天下之地分統三韓三韓皆五加六十四族是歲三月十五日帝崩于蓬亭葬于郊外十里之地萬姓如喪考妣奉檀旂晨夕合坐敬拜常念不忘于懷太子扶婁立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蓬亭)에서 붕어(崩御)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二世 檀君 扶婁 在位五十八年)

 

辛丑元年帝賢而多福居財大富與民共治産業無一民飢寒每當春秋巡省國中祭天如禮察諸汗善惡克愼賞罰浚渠洫勸農桑設寮興學文化大進聲聞日彰

신축 원년(B.C.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자가 없었다. 봄․가을로 나라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량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察>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初虞舜置幽營二州於藍國之隣帝遣兵征之盡逐其君封東武道羅等以表其功

제순유우(帝舜有虞)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神市以來每當祭天國中大會齊唱讚德諧和於阿爲樂感謝爲本神人以和四方爲式是爲參佺戒其詞曰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여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조상에 대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參佺)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於阿於阿我等大祖神大恩德倍達國我等皆百百千千勿忘於阿於阿善心大弓成惡心矢的成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絃同善心直矢一心同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一衆多矢的貫破沸湯同善心中一塊雪惡心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堅勁同心倍達國光榮百百千千年大恩德我等大祖神我等大祖神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끓는 마음 착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大祖神>이시여, 한배검<大祖神>이시여.

 

壬寅二年(紀元95年)帝召少連大連問治道先是少連大連善居喪三日不怠三月不懈朞年悲哀三年憂自是擧俗停喪五月以久爲榮此非天下之大聖其能德化之流行如是傳郵之速者乎二連以孝聞亦見稱於孔子夫孝者愛人益世之本放諸四海而準焉

임인 2년(B.C.2239), 단제께서는 소련(少連)․대련(大連)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었으니, 사흘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 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 동안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다섯 달 동안 상을 치루던 것이 이때부터 풍속이 변하여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서 알려졌으니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癸卯三年九月下詔使民編髮盖首服靑衣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계묘 3년(B.C.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 되와 저울 들 도량 형기를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庚戌十年四月劃邱井爲田結使民自無私利

경술 10년(B.C.2229)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壬子十二年神誌貴己製獻七回曆邱井圖

임자 12년(B.C.2229), 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戊戌五十八年帝崩是日日蝕山獸作隊亂叫山上萬姓慟之甚後國人設祭家內擇地設壇而土器盛禾穀置壇上稱爲扶婁壇地是爲業神又稱佺戒以全人受戒爲業主嘉利人與業俱全之義也太子嘉勒立

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 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을 가득 담아 단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業神)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業)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三世檀君 嘉勒 在位四十五年)

 

己亥元年五月帝召三郞乙普勒問神王倧佺之道普勒交拇加右手行三六大禮而進言曰

기해 원년(B.C.2182) 5월, 단제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神王倧佺之道)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神者能引出萬物各全其性神之所妙民皆依恃也

신(神)은 능히 만물을 이끌어 내어 각기 그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이는 신의 오묘한 바이백성들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王者能德義理世各安其命王之所宣民皆承服也

왕(王)은 능히 덕(德)과 의(義)로서 세상을 다스리며 각기 그 삶을 편안하게 하니, 이는 왕이 베푸는 바이라 백성들 모두가 받들고 따르는 것입니다.

 

倧者國之所選也佺者民之所擧也皆七日爲回就三神執盟三忽爲佺九桓爲倧

종(倧)이란 나라가 가려 선택하는 것이요, 전(佺)이란 백성들이 받들어 행하는 바로, 모두가 7일을 일회로 하여 삼신(三神)에 나아가 맹세하고 세 고을을 전(佺)으로 구한(九桓)을 종(倧)으로 삼습니다.

 

盖其道也欲爲父者斯父矣欲爲君者斯君矣欲爲師者斯師矣爲子爲臣爲徒者亦斯子斯臣斯徒矣故神市開天之道亦以神施敎知我求獨空我存物能爲福於人世而已

그 도(道)란 것은 아비 되는아비다워야 하고, 임금 되는 자 임금다워야 하고, 스승 되는 자 스승다워야 함이니, 아들과 신하와 제자 또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다워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神市開天)의 도(道)란 또한 신의 가르침으나를 알아 홀로 섬을 구하고 나를 비워 세상이 있게 함이니 능히 인간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代天神而王天下弘道益衆無一人失性代萬王而主人間去病解怨無一物害命使國中之人知改妄卽眞而

천신(天神)을 대신하여 천하의 왕이 됨은 도를 넓혀 무리를 유익하게 하고<弘道益衆> 한사람도 그 성품을 잃지 않게 함이며, 뭇 왕(萬王)대신하여 사람을 주관함은 병을 없애고 원통함을 해소하여 어느 것 하나도 그 목숨을 다치지 않게 하려함이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으로 나아감을 알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三七計日會全人執戒自是朝有倧訓野有佺戒宇宙精氣粹鍾日域三光五精凝結腦海玄妙自得光明共濟是爲居發桓也施之九桓九桓之民咸率歸一于化

이리하여 삼칠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戒)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朝廷)엔 훈(倧訓)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佺戒)가 있었다.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내리고, 삼광오정(三光五精)사람의 머리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라. 이를발한(居發桓)이라 하며 구한(九桓)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같이 되었다.

 

庚子二年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其文

 

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X ∋

ㅇ ㄱ ∪ ㅁ ㄴ △ ㅈ ㅊ ∧ ∧ ㆆ ∧ M

ㄹ ㅐ ㅒ ㅡ ㅡ  ∧ ㄱ ㅜ ㅠ 

△ ㄱ ㅈ ∧ ㅡ ㅡ ㅍ

 

경자 2년(B.C.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 안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정도 규모의 나라안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신축 3년(B.C.2180),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갑진 6년(B.C2177),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그를 용서하시고 그 땅을 다스리도록 봉하니 그가 흉노(匈奴)의 조상이 되었다.

 

丙午八年康居叛帝討之於支伯特夏四月帝登不咸之山望民家炊煙少起命減租稅有差

병오 8년(B.C.2175),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戊申十年豆只州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今轉音爲牛首國也其後孫有陜野奴者逃於海上據三島僭稱天王

무신 10년(B.C.2173),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수(斬首)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일러서 소시모리(素尸毛犁)라고 했는데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 가운데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癸未四十五年九月帝崩太子烏斯丘立

계미 45년(B.C.2138)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즉위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四世 檀君 烏斯丘 在位三十八年)

 

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爲基後云

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理汗)으로 봉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 후손이라고 한다.

 

冬十月北巡而回到太白山祭三神得靈草是謂人蔘又稱仙藥自後神仙不死之說 與採蔘保精密有關聯間有採得家所傳神異顯靈頗多奇驗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으니 이를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仙藥)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후

신선불사의

삼(蔘)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호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간혹 이를 얻은 이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이상스럽고 영험스러워서 매우 기적 같은 경험이 많다」고 했다.

 

戊子五年鑄圓孔貝錢秋八月夏人來獻方物求神書而去十月朝野別記書于石以公于民

무자 5년(B.C.2133),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圓孔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庚寅七年設造船于薩水之上

경인 7년(B.C.2131), 배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했다. (참고)

 

壬寅十九年夏主相失德帝命息達率藍眞弁三部之兵往征之天下聞之乃

임인 19년(B.C.2119), 하(夏)나라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령하여 람(藍)․진(眞)․변(弁)의 3부(部)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참고)

 

辛酉三十八年六月帝崩羊加丘乙立

신유 38년(B.C.2100)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壬戌元年命築壇于太白山遣使致祭

임술 원년(B.C.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壇)을 쌓고 사자(使者)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癸亥二年五月蝗虫大作遍滿田野帝親巡田野呑蝗而告三神使滅之數日盡滅

계해 2년(B.C.2098) 5월, 황충(蝗虫)의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선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乙丑四年始用甲子作曆

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己巳八年身毒人流漂到東海濱

기사 8년(B.C. 2092), 인도 사람<身毒人>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七月帝南巡歷風流江到松壤得疾尋崩葬于大博山牛加達門被選於衆入承大統

정축 16년(B.C.2084),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셔서 삼신(三神)의 단(壇)을 봉축(封築)하고 많은 한화(桓花)를 심었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시니 대박산(大博)에 장사지냈다. 우가(牛加)인 달문(達門)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六世 檀君 達門 在位三十六年)

 

戊寅元年

壬子三十五年會諸汗于常春祭三神于九月山使神誌發理作誓效訶其訶曰

무인 원년(B.C.2083)

임자 35년(B.C.2049)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九月山)제사케 하고 신지(神誌)인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사(詞)에 가로되,

 

朝光先受地三神赫世臨桓因出象先樹德宏且深諸神議遣雄承詔始開天蚩尤起靑邱萬古振武聲淮岱皆歸王天下莫能侵王儉受大命懽聲動九魚水民其蘇草風德化新怨者先解怨病者先去病一心存仁孝四海盡光明眞韓鎭國中治道咸維新慕韓保其左番韓控其南巉岩圍四壁聖主幸新京如秤錘極器極器白牙岡秤榦蘇密郞錘者安德鄕首尾均平位賴德護神精興邦保太平朝降七十國永保三韓義王業有興隆興廢莫爲說誠在事天神

「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녘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세상에 임하셨네. 한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 신들이 한웅을 보내고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치우는 청구에 우뚝 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淮岱) 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 수 없었더라.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魚水)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德化)는 새롭기하더라. 원한 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 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진한(眞韓)은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길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유신되리라. 모한(慕韓)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新京)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 그릇과 같음이라. 저울 그릇<마한(馬韓)>은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辰韓>는 소밀랑(蘇密郞). 저울추<番韓>는 안덕향(安德鄕)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 이뤄 나란히 있고, 덕을뢰하고 신정(神精)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왕업이 일어났다가는 망하는 법. 흥폐(興廢)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고 하였다.

 

乃與諸汗立約束曰凡我同約之人以桓國五訓神市五事爲永久遵守之案祭天之儀以人爲本爲邦之道以食爲先農者萬事之本祭者五敎之源宜與國人共治爲産先講重族次宥俘囚竝除死刑責禍保境和白爲公專以一施共和之心謙卑自養以爲仁政之始也

마침내 뭇 한(汗)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기기를,

지금 우리와 함께 이를 약속한 사람들은 한국의 오훈(五訓)과 신시의 오사(五事)영원히 준수하기로 한다.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림에는 식생활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五敎>의 근원이라. 마땅히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다스려 다스림을 자산으로 하고 겨레가 소중함을 우선으로 가르친다. 포로와 죄수를 풀어주고 아울러 사형제도를 없애고 책화(責禍)로 경계를 지키고 화백(和白)을 으뜸으로 한다. 오로지 이처하나같이 베풀고 함께 화합하는 마음을 갖고서 겸허하게 낮추며 스스로 수양한다면 어진 정치가 비롯되리라.」라고 하셨다.

 

時執盟貢幣者大國二小國二十墟落三千六百二十四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 곳이었다.

 

癸丑三十六年帝崩羊加翰栗立

계축 36년(B.C.2048),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인 한율(翰栗)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七世 檀君 翰栗 在位五十四年)

 

甲寅元年

丁未五十四年帝崩于西翰立

갑인 원년(B.C.2047)

정미 54년(B.C.1994),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서한(于西翰)이 즉위했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八世 檀君 于西翰(或曰烏斯含) 在位八

 

戊申元年定二十稅一之法廣通有無以補不足

무신 원년(B.C.1993), 이십 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己酉二年是歲豊登有一莖八穗

기유 2년(B.C.1992),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맺혔다.

 

辛亥四年帝以微服潛出國境視察夏情而還大改官制

신해 4년(B.C.1990), 단제께서는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피시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

 

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

갑인 7년(B.C.1987),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乙卯八年帝崩太子阿術 述立

을묘 8년(B.C.198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술(阿述)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九世 檀君 阿述 在位三十五年)

 

丙辰元年帝有仁德民有犯禁者必曰糞地雖汚降雨露有時置而不論犯禁者乃化其德淳厖之化大行是日兩日竝出觀者如堵

병진 원년(B.C.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지은 자를 그냥 놔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지었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丁巳二年靑海褥薩于捉擧兵犯闕帝避于常春創新宮于九月山南麓命遣于支于栗等討誅之後三年還都

정사 2년(B.C.1984), 청해(靑海)의 욕살 우착(于捉)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단제께서는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于支)와 우율(于栗) 등에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 버리도록 하시고는 삼 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庚寅三十五年帝崩牛加魯乙立

경인 35년(B.C.195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牛加)인 노을(魯乙)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十世 檀君 魯乙 在位五十九年)

 

辛卯元年始作大囿養畜外之獸

신묘 원년(B.C.1950),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任辰二年親臨墟落存問駕停野外賢者多歸之

임진 2년(B.C.1949),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乙未五年宮門外設伸寃木以聽民情中外大悅

을미 5년(B.C.1946), 궁문 밖에 신원목(伸冤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기뻐했다.

 

丙午十六年東門外十里陸地生蓮不咸臥石自起天河神龜負圖而現圖如柶板渤海沿岸金塊露出數量十有三石

병오 16년(B.C.1935), 동문 밖 십 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神龜)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두었다.

 

己丑五十九年帝崩太子道奚立

기축 59년(B.C.18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十一世 檀君 道奚 在位五十七年)

 

庚寅元年帝命五加擇十二名山之最勝處設國仙蘇塗多環稙檀樹擇最大樹封爲桓雄像而祭之名雄常

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像)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했다.

 

國子師傳有爲子獻策曰惟我神市實自桓雄開天納衆以佺設戒而化之天經神誥詔述於上衣冠帶釰樂效於下民無犯而同治野無盜而自安擧世之人無疾而自壽無歉而自裕登山而歌迎月而舞無遠不至無處不興德敎加於萬民頌聲溢於四海有是請

이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의관대일(衣冠帶釰)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시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 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 곳이라고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情)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冬十月命建大始殿極壯麗奉天帝桓雄遺象而安之頭上光彩閃閃如大日有圓光照耀宇宙坐於檀樹之下桓花之上如一眞神有圓心持天符印標揭大圓一之圖於樓殿立號居發桓三日而戒七日而講風動四海

겨울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한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컬어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듯 했.

 

其念標之文曰天以玄黙爲大其道也普圓其事也眞一地以蓄藏爲大其道也效圓其事也勤一人以知能爲大其道也擇圓其事也協一故一神降衷性通光明在世理化弘益人間仍刻之于石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니

모든 일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 이에 돌에 이 글을 새겼다.

 

丁巳二十八年設所而聚方物以閱珍奇天下之民爭獻陳設如山

정사 28년(B.C.1864),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丁卯三十八年徵民丁皆爲兵送選士二十人于夏都始傳國訓以示威聲

정묘 38년(B.C.1854),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夏)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岸舟楫器物大行于世三月祭三神于山南 供酒備膳致詞而醮之是夜特賜宣醞與國人環飮觀百戱罷仍登樓殿論經演誥顧謂五加曰自今以後禁殺放生釋獄飯丐竝除死刑內外聞之大悅

을해 46년(B.C.1846),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재주들을 관람하셨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해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論經演誥> 오가(五加)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여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丙戊五十七年帝崩萬姓慟之如考妣喪三年憂四海停聲樂牛加阿漢立

병술 57년(B.C.1835),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년 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 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牛加) 아한(阿漢)이 즉위했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十二世 檀君 阿漢 在位五十二年)

 

丁亥元年

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題一詩曰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苺苔碧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

정해 원년(B.C.1834),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乙卯二十九年命菁莪褥薩丕信西沃沮褥薩高士琛貊城褥薩突盖封爲列汗

을묘 29년(B.C.1806) 청아(靑莪)의 욕살인 돌개(突蓋)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戊寅五十二年帝崩牛加屹達立

무인 52년(B.C.1738),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十三世 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

 

己卯元年

甲午十六年定州縣立分職之制官無兼權政無越則民無離鄕自安所事 絃歌溢域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兵遮路欲敗禁盟遂與殷人伐桀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設官制

기묘 원년(B.C.1782).

갑오 16년(B.C.1767),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 단제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기(岐)의 땅 웅거하며 관청<관제(官制)>을 설치하였다.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爲國子郞國子郞 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花郞

무술 20년(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

 

戊辰五十年五星聚婁黃鶴來棲苑松

무진 50년(B.C.1733), 오성이 모여들고<五星聚婁>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己卯六十一年帝崩萬姓絶食而哭不絶仍命釋囚俘禁殺放生過歲而葬之牛加古弗立

기묘 61년(B.C.1722),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백성들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 후 우가인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十四世 檀君 古弗 在位六十年)

 

庚辰元年

乙酉六年是歲大旱帝親禱天祈雨誓告于天曰天雖大無民何施雨雖膏無穀何貴民所天者穀天所心者人也天人一體天何棄民乃雨滋穀濟化以時言訖大雨立降數千里

경진 원년(B.C..1721).

을유 6년(B.C.1716),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

하늘이 크다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말을 끝내자 큰비가 수 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辛酉四十二年九月枯木生芽五色大鷄生於城東子村家見者誤指爲鳳

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乙亥五十六年遣官四方査計戶口總一億八千萬口

己卯六十年帝崩代音立

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 8천만구였다. 기묘 60년(B.C.1662),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51년(十五世 檀君 代音(一云後屹達) 在位五十一年)

 

庚辰元年殷主小甲遣使求和是歲改八十稅一之制

경진 원년(B.C.1661),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辛巳二年洪水大漲民家多被害帝甚憐恤移其栗於蒼海蛇水之地均給于民冬十月養雲須密爾二國人來獻方物

신사 2년(B.C.1660),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己丑十年帝西幸弱水命臣智禹栗採金鐵及膏油秋七月虞婁人二十家 來投命定着于鹽水近地

기축 10년(B.C.1652),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弱水)로 가시더니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하여 금철(金鐵) 및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虞婁國)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丁未二十八年帝登太白山立碑刻列聖群汗之功

정미 28년(B.C.1634),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

기미 40년(B.C.1622), 단제의 동생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봉했다.

 

庚午五十一年帝崩牛加尉那立

경오 51년(B.C.1611),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우가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58년(十六世 檀君 尉那 在位五十八年)

 

辛未元年

戊戌二十八年會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亨之五日大宴興衆明燈守夜唱經踏庭一邊列炬一邊瓊舞濟唱愛桓歌愛桓卽古神歌之類也先人指桓花而不名直曰花愛桓之歌有云山有花山有花去年種萬樹今年種萬樹春來不咸花萬紅有事天神樂太平

신미 원년(B.C.1610)

무술 28년(B.C.1583), 구한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三神)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愛桓)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한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戊辰五十八年帝崩太子余乙立

무진 5년(B.C.155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68년(十七世 檀君 余乙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

庚申五十二年帝與五加歷巡國中至蓋斯城之境有靑袍老人獻賀曰長生仙人之國樂爲仙人之氓帝德無愆王道無偏民兮隣兮不見愁苦責禍以信管境以恩城兮國兮不見戰伐

기사 원년(B.C.1552)

갑신 52년(B.C.1501),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蓋斯城)의 근처에 이르니 푸른 도포를 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仙人)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이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고통․책화(責禍)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할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帝曰嘉納嘉納朕之修德日淺恐無以報民之與望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 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램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丙子六十八年帝崩太子冬奄立

병자 68년(B.C.148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49년(十八世 檀君 冬奄 在位四十九年)

 

丁丑元年

丙申二十年支伯特人來獻方物

정축 원년(B.C.1484)

병신 20년(B.C.1465),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乙丑四十九年帝崩太子緱牟蘇立

을축 49년(B.C.143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緱牟蘇)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55년(十九世 檀君 緱牟蘇 在位五十五年)

 

丙寅元年

己丑二十四年南裳人入朝

병인 원년(B.C.1435)

기축 24년(B.C.1412), 남상인(南裳人)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己未五十四年支離叔作周天曆八卦相重論

기미 54년(B.C.1382),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庚申五十五年帝崩牛加固忽立

경신 55년(B.C.138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홀 재위43년(二十世 檀君 固忽 在位四十三年)

 

辛酉元年

辛未十一年秋白日貫虹

신유 원년(B.C.1380)

신미 11년(B.C.1370)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丙申三十六年修築寧古塔作離宮

병신 36년(B.C.1345),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庚子四十年共工工忽製獻九桓地圖

경자 40년(B.C.1341), 공공(共工)인 공홀(工忽)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癸卯四十三年四海未寧而帝崩太子蘇台立

계묘 43년(B.C.1341),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二十一世 檀君 蘇台 在位五十二年)

 

甲辰元年殷主小乙遣使入貢

갑진 원년(B.C.1337), 은나라 왕 소을(小乙)(B.C.1349~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庚寅四十七年殷主武丁旣勝鬼方又引大軍侵攻索度令支等國爲我大敗請和入貢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크게 패하여 화친을 청하며 공물을 보내왔다.

 

壬辰四十九年蓋斯原褥薩高登潛師襲鬼方減之一群養雲二國遣使朝貢於是高登手握重兵經略西北地勢甚强盛遣人請爲右賢王帝憚之不允屢請乃許號爲豆莫婁

임진 49년(B.C.1289),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았으나 거듭하여 이를 청하므로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豆幕婁)라 불렀다.

 

乙未五十二年右賢王高登薨基孫索弗婁襲爲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右賢王聞之遣人勸帝止之帝綜不聽

을미 52년(B.C.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海城)에 이르러 부로(父老)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하늘에 제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五加)를 불러 제위를 물려주는데 대해 의논하셨는데 이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맡기고 싶어 셨다. 이에 살수(薩水)의 땅 백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攝主)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리게 하였다. 우현왕(右賢王)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으셨다.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帝不得已傳玉冊國寶廢徐于餘爲庶人帝隱於阿斯達以終是歲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이에 우현왕(右賢王)은 주변 좌우 신하와 사냥족<獵戶>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할 수 없이 옥책(玉冊), 국보를 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거하시다가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역시 고죽군(孤竹君)자손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二十二世 檀君 索弗婁 在位四十八年)

 

丙申元年帝命修築鹿山改官制秋九月親幸藏唐京立廟祀高登王十一月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得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垈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병신 원년(B.C.1285), 단제 명하사 녹산(鹿山)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시어 묘(廟)를 세우고 고등왕(高登王)을 사지냈다. 11월 몸소 구한(九桓)의 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辰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以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신축 6년(B.C.1280), 신지(臣智)인 육우(陸右)는,「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大運)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청컨데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乙卯二十年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逐諸賊南遷至俺瀆忽居之近於殷境使黎巴達頒兵進據邠岐與其遺民相結立國稱黎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을묘 20년(B.C.1266),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邠)․기(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살게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辛未三十六年邊將申督因兵作亂帝暫避于寧古塔民多從之

신미 36년(B.C.1250),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癸未四十八年帝崩太子阿忽立

계미 48년(B.C.1238),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홀(阿忽)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홀 재위 76년(二十三世 檀君 阿忽 在位七十六年)

 

甲申元年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遣熊乫孫與藍國君觀南征之兵置六邑於殷地殷人相爭不決乃進兵攻破之秋七月誅申督還都命釋囚浮

갑신 원년(B.C.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申督)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分封蒲古氏於淹盈古氏於徐邦古氏於淮殷人望風煌怯莫敢近之

을유 2년(B.C.1236), 남국(藍國) 왕 금달(今達)이 청구(靑邱) 왕, 구려(句麗)주개(周愷)에서 회합하여 몽고리(蒙古里)의 병력까지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부수고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한 뒤 포고씨(蒲古氏)를 엄(淹) 땅에, 영고씨(寧古氏)를 서(徐) 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각각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戊子五年召二韓及五加議停寧古塔移都事

무자 5년(B.C.1233), 이한(二韓) 및 오가(五加)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己亥七十六年帝崩太子延那立

기해 76년(B.C.11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二十四世 檀君 延那 在位十一年)

 

庚子元年命皇叔固弗加爲攝政

경자 원년(B.C.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辛丑二年諸汗奉詔增設蘇塗祭天國家有大事異災則輒禱之定民志于

신축 2년(B.C.1160), 여러 한(汗)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庚戌十一年帝崩太子率那立

경술 11년(B.C.1151), 단재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二十五世 檀君 率那 在位八十八年)

 

辛亥元年

丁亥三十七年箕徙居西華謝絶人事

신해 원년(B.C.1150)

정해 37년(B.C.1114),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 사절하였다.

 

丁酉四十七年帝在上蘇塗講古禮因間侫臣直臣之分三郞洪雲性進對曰執理不屈者直臣也畏威曲從者侫臣也君源臣流源旣濁矣流其求淸是爲不可故君聖然後臣直帝曰善哉

정유 47년(B.C.1104), 단제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영신侫臣>과 바른 신하<直臣>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를 바른 신하<直臣>라하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신하를 아첨하는 신하<侫臣>라 합니다. 임금이 물의 근원이라면 신하흘러가물이니 근원이 흐리면 흐름이 맑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거룩한 다음에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

 

己酉五十九年田穀豊登有一莖五穗之栗

기유 59년(B.C.1092),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戊寅八十八年帝崩太子鄒魯立

무인 88년(B.C.106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85년(二十六世 檀君 鄒魯 在位六十五年)

 

己卯元年秋七月白岳山溪谷白鹿二百作隊而來遊

기묘 원년(B.C.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무리 지어 와서 뛰놀았다.

 

癸末六十五年帝崩太子豆密立

계미 56년(B.C.998),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二十七世 檀君 豆密 在位二十六年)

 

甲申元年天海水溢斯阿蘭山崩是歲須密爾國養雲國句茶川國 皆遣使獻方物

갑신 원년(B.C.997),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이 수밀이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辛卯八年太旱之餘大雨注下民無收穫帝命發倉周給

신묘 8년(B.C.990), 큰 가뭄 뒤끝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己酉二十六年帝崩奚牟立

기유 26년(B.C.972), 단제 붕어하시고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二十八世 檀君 奚牟 在位二十八年)

 

庚戌元年帝有疾使白衣童子禱天尋瘉

경술 원년(B.C.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셨다.

 

庚申十一年夏四月旋風大起暴雨注下陸上魚類亂墜

경신 11년(B.C.961)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렸다.

 

丁卯十八年氷海諸汗遣使入貢

정묘 18년(B.C.954), 빙해(氷海)의 뭇 한(汗)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丁丑二十八年帝崩摩休立

정축 28년(B.C.944),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二十九世 檀君 摩休 在位三十四年)

 

戊寅元年周人入貢

무인 원년(B.C.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乙酉八年夏地震

을유 8년(B.C.936) 여름, 지진이 있었다.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尺

병술 9년(B.C.935), 남해의 조수(潮水)가 3척이나 물러갔다.

 

辛亥三十四年帝崩太子奈休立

신해 34년(B.C.91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했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三十世 檀君 奈休 在位三十五年)

 

壬子元年

帝南巡觀靑邱之政刻石蚩尤天王功德西至奄瀆忽會分朝諸汗閱兵祭天與周人修好

임자원년(B.C.909)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汗)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周)나라 사람과도 수교를 맺었다.

 

丙辰五年凶奴入貢

병진 5년(B.C.905),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丙戌三十五年帝崩太子登兀立

병술 35년(B.C.87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登屼)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25년(三十一世 檀君 登兀 在位二十五年)

 

丁亥元年

壬寅十六年鳳鳴白岳麒麟來遊上苑

정해 원년(B.C.874)

임인 16년(B.C.859),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노닐었다.

 

辛亥二十五年帝崩子鄒密立

신해 25년(B.C.850),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雛密)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三十二世 檀君 鄒密 在位三十年)

 

壬子元年

甲寅三年鮮卑山酋長 們古入貢

임자 원년(B.C.849)

갑인 3년(B.C.847),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癸亥十二年楚大夫李文起入朝

계해 12년(B.C.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甲子十三年三月日蝕

갑자 13년(B.C.837), 3월에 일식이 있었다.

 

丙寅十五年農作大饑

병인 15년(B.C.835),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辛巳三十年帝崩太子甘勿立

신사 43년(B.C.82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했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三十三世 檀君 甘勿 在位二十四年)

 

壬午元年

癸未二年周人來獻虎象之皮

임오 원년(B.C.819)

계미 2년(B.C.818),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戊子七年寧古塔西門外甘勿山之下建三聖祠親祭有誓告文曰三聖之尊與神齊功三神之德因聖益大虛粗同體個全一如智生雙修形魂俱衍眞敎乃立信久自明乘勢以尊回光反躬截彼白岳萬古一蒼列聖繼作文興禮樂規模斯大道術淵宏執一含三會三歸一大演天戒永世爲法

무자 7년(B.C.813),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맹세하여 올린 글이 있으니,

 

삼성의 존귀함은 신(神)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며 삼신의 덕은 성인으로 인하여 크게 유익하나니, 빈 것과 찬 것은 한 몸이요<虛粗同體>, 낱개와 전체는 오직 하나일 뿐<個全一如>,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智生雙修>,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히나니<形魂俱衍>, 이에 따라 참다운 가르침서고 믿음이 오래감은 자명한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되돌아본다면 저 백악(白岳)은 어딜 가나 끝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會三歸一>.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

 

乙巳二十四年帝崩太子奧婁門立

을사 24년(B.C.79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奧婁門)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三十四世 檀君 奧婁門 在位二十三年)

 

丙午元年是歲五穀豊熟萬姓歡康作兜里之歌其歌曰天有朝暾明光熙耀國有聖人德敎廣被大邑國我倍達聖朝多多人不見苛政熙皞歌之長太平

병오 원년(B.C.795),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兜里歌)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乙卯十年兩日竝出仍黃霧四塞

을묘 10년(B.C.786),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戊辰二十三年帝崩太子沙伐立

무진 23년(B.C.77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했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三十五世 檀君 沙伐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

甲戌六年是歲有蝗蟲大水

기사 원년(B.C.772)

갑술 6년(B.C.767), 이 해에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壬午十四年虎入宮殿

임오 14년(B.C.759),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壬辰二十四年有大水山崩壞谷充塡

임진 24년(B.C.748), 큰 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戊午五十年帝遣將彦波弗哈平海上熊襲

무오 50년(B.C.723),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甲戌六十六年帝遣祖乙直穿燕都與齊兵戰于臨淄之南郊告捷

갑술 66년(B.C.707), 단제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燕)나라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丙子六十八年帝崩太子賣勒立

병자 68년(B.C.705),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三十六世 檀君 賣勒 在位五十八年)

 

丁丑元年

甲辰二十八年有地震海溢

정축 원년(B.C.704)

갑진 28년(B.C.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戊申三十二年西村民家牛生八足犢

무진 32년(B.C.673), 서촌(西村)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辛亥三十五年龍馬出於天河背有星文

신해 35년(B.C.670),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甲寅三十八年遣陜野侯裵幋命往討海上十二月三道悉平

갑인 38년(B.C.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참고)

 

戊辰五十二年帝遣兵與須臾兵伐燕燕人告急於齊齊人大擧入孤竹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가 대거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甲戌五十八年帝崩太子麻勿立

갑술 58년(B.C.647),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했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三十七世 檀君 麻勿 在位五十六年)

 

乙亥元年

庚午五十六年帝南巡至淇水崩太子多勿立

을해 원년(B.C.646)

경오 56년(B.C.591),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45년(三十八世 檀君 多勿 在位四十五年)

 

辛未元年

乙卯四十五年帝崩太子豆忽立

신미 원년(B.C.590)

을묘 45년(B.C.54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三十九世 檀君 豆忽 在位三十六年)

 

丙辰元年

辛卯三十六年帝崩太子達音立

병진 원년(B.C.545)

신묘 36년(B.C.51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四十世 檀君 達音 在位十八年)

 

壬辰元年

己酉十八年帝崩太子音次立

임진 원년(B.C.509)

기유 18년(B.C.4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四十一世 檀君 音次 在位二十年)

 

庚戌元年

己巳二十年帝崩太子乙于支立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B.C.47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四十二世 檀君 乙于支 在位十年)

 

庚午元年

己卯十年帝崩太子勿理立

경오 원년(B.C.471)

기묘 10년(B.C.4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勿里)가 즉위하였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四十三世 檀君 勿理 在位三十六年)

 

庚辰元年

乙卯三十六年隆安獵戶于和沖自稱將軍聚衆數萬陷西北三十六郡帝遣兵不克冬賊圍都城急攻帝與左右宮人奉廟社主浮舟而下之海頭尋

경진 원년(B.C.461)

을묘 36년(B.C.426), 융안(隆安)의 사냥족<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是歲白民城褥薩丘勿以命起兵先據藏唐京九地師從之東西鴨綠十八城皆遣兵來援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아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였다.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니 동․서의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설명)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四十四世 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三月大水浸都城賊大亂丘勿率兵一萬往討之賊不戰自潰遂斬于和沖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臨理之制 而惟和戰之權不在一尊也七月命改築海城爲平壤作離宮

병진 원년(B.C.425) 3월,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于和冲)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에게서 추앙받는 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의 이름은 대부여라 고치고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오로지 한 분에게만 맡겨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離宮)을 짓도록 하였다.

 

丁巳二年禮官請行三神迎鼓祭乃三月十六日也帝親幸敬拜初拜三叩再拜六叩三拜九叩禮也從衆特爲十叩是爲三六大禮也

정사 2년(B.C.424), 예관(禮官)이 청하여 삼신영고(三神迎鼓)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三六)의 대례(大禮)라고 한다.

 

壬申十七年遣監察官于州郡糾察吏民擧孝廉

임신 17년(B.C.409), 감찰관을 각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戊寅二十三年燕遣使賀正

무인 23년(B.C.403),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인사를 올렸다.

 

甲申二十九年帝崩太子余婁立

갑신 29년(B.C.397),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四十五世 檀君 余婁 在位五十五年)

 

乙酉元年築城長嶺狼山

을유 원년(B.C.396),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辛丑十七年燕人侵邊郡守將苗長春擊敗之

신축 17년(B.C.380),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 군을 침범하니 수비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丙辰三十二年燕人倍道入寇陷遼西逼雲障番朝鮮命上將于文言禦之 眞莫二朝鮮赤派兵來救設伏來攻破燕齊之兵於五道河遼西諸城悉復

병진 32년(B.C.365),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番)조선이 대장군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眞)조선. 막(莫)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공격하여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모두 되찾았다.

 

丁巳三十三年燕人敗屯連雲島造船將來襲于文言追擊大破射殺其將

정사 33년(B.C.364),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辛未四十七年北漠酋長厄尼車吉來朝獻馬二百匹請共伐燕乃以番朝鮮少將申不私率兵一萬合攻燕上谷援之置城邑

신미 47년(B.C.350), 북막(北漠)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戊寅五十四年自上谷役後燕連年來侵至是遣使請和許之復以造陽以西爲界

무인 54년(B.C.343),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己卯五十五年夏大旱慮有冤獄大赦親幸祈雨九月帝崩太子普乙立

기묘 55년(B.C.342)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四十六世 檀君 普乙 在位四十六年)

 

庚辰元年十二月番朝鮮王解仁爲燕所遣刺客所害五加爭立

경진 원년(B.C.341) 12월,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戊戌十九年正月邑借箕詡以兵入宮自以番朝鮮王遣人請允帝許之使堅備燕

무술 19년(B.C.323) 정월, 읍차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니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丁巳三十八年都城大火盡燒 避御于海城離宮

정사 38년(B.C.304),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癸亥四十四年北漠酋長尼舍獻樂乃受而厚賞

계해 44년(B.C.298), 북막의 추장 이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乙丑四十六年韓介率須臾兵犯闕自立上將高列加起義擊破之帝還都大赦自此國勢甚微國用不敷尋帝崩無嗣高列加以檀君勿理之玄孫爲衆愛戴且有功遂卽位

을축 46년(B.C.296),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대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대사령(大赦令)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어, 고열가가 단군 물리(勿里 : 43세)의 현손으로써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四十七世 檀君 古列加 在位五十八年)

 

丙寅元年

己卯十四年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令有司四時祭之帝歲一親祭

병인 원년(B.C.295)

기묘 14년(B.C.282), 단군왕검의 묘(廟)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己酉四十四年燕遣使賀正

기유 44년(B.C.252),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왔다.

 

癸丑四十八年十月朔日蝕是歲冬北漠酋長阿里當夫請出師伐燕帝不從自是怨不朝貢

계축 48년(B.C.248). 시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壬戌五十七年四月八日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其先槀離國人也

임술 57년(B.C.239), 4월 8일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었다.

 

癸亥五十八年帝仁柔不斷令多不行諸將恃勇禍亂頻起國用不敷民氣益哀三月祭天之夕乃與五加議曰昔我列聖肇極垂統種德宏遠永世爲法今王道哀微諸汗爭强惟朕涼德懦不能理無策招撫百姓離散惟爾五加擇賢以薦大開獄門放還死囚以下諸俘虜翌日遂棄位入山修道登仙於是五加共治國事六年

계해 58년(B.C.238),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천제를 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

옛 우리 선조 열성(列聖)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고 하시고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를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五加)들이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先是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四境之內皆爲聽命於是封諸將陞須臾侯箕丕爲番朝鮮王往守上下雲障蓋北夫餘之興始此而高句麗乃解慕漱之生鄕也故亦稱高句麗也

이 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自檀君紀元元年戊辰至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凡三千六百十六年也

是歲十月三日紅杏村臾書于江都之海雲堂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今上陛下)의 천조(踐祚) 후 12년 계묘(B.C.1363)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북부여기(北夫餘紀)

- 휴애거사 범장 지음(休崖居士 范樟 撰) -

 

북부여기 상(北夫餘紀 上)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

 

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壬戌 : B.C. 238) 4월 8일이라.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蘭邊)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시며 오룡(五龍)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癸亥二年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分置五加之兵屯田自給以備不虞

계해 2년(B.C.238년), 이 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烟戶)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冬十月立公養胎母之法敎人必自胎訓始

기사 8년(B.C.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胎敎)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壬申十一年北漠酋長山只喀隆襲寧州殺巡使穆遠登大掠而去

임신 11년(B.C.229),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庚辰十九年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경진 19년(B.C.221), 기비(箕丕)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辛巳二十年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七月起新闕三百六十六間名爲天安宮

신사 20년(B.C.220), 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癸未二十二年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擧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

계미 22년(B.C.218),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왕정(秦王定 :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거(副車)를 박살냈다.(설명)

 

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

임진 31년(B.C.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에 연(燕)나라․제(齊)나라․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雲障)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己亥三十八年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灤河也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盧綰)(B.C.247)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灤河)다.

 

丙午四十五年燕盧綰叛漢入凶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是歲冬帝崩葬于熊心山東麓太子慕漱離立

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태자 모수리(慕潄離)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35년(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

 

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정미 원년(B.C.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설명) 이에 이르러 변(弁)․진한(辰韓)의 두 한(韓)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 리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戊申二年帝遣上將延佗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

무신 2년(B.C.193), 단제께서 상장(上將) 연타발(延佗勃)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戲觀戰龍圖知變也

기유 3년(B.C.192),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高辰)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中夫餘)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京鄕分守)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龍圖)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辛未二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신미 25년(B.C.17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高奚斯)가 즉위하였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

 

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임신 원년(B.C.169), 정월 낙랑왕(樂浪王)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195)년의 겨울이었다.

 

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庚申四十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경신 49년(B.C.121), 일군국(一群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高于婁)가 즉위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四世檀君 高于婁(一云解于婁) 在位三十四年)

 

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

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候)로 삼았다.

 

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甲子四年帝遣將攻海城三月而不克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九黎河)의 동쪽 모두가 항복해 왔다.

 

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

정묘 7년(B.C.114), 목책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南閭)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

계유 13년(B.C.108), 한(漢)의 유철(劉澈)평나(平那)를 노략질하여 우거 멸망키더니 4군(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高豆幕)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甲午三十四年十月東明王高豆莫汗使人來告曰我是天帝子裝欲都之王其避之帝難之是月帝憂患成疾而崩皇弟解夫婁立之東明王以兵䝱之不己君臣頗難之國相阿蘭弗奏曰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腴宜五穀可都遂勸王移都是謂迦葉原夫餘或云東夫餘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와서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라고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海夫婁)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君臣)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國相)인 아란불(阿蘭弗)이,「통하(通河)의 물가 가섭(迦葉)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며 또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하(北夫餘紀 下)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

 

五世檀君 高豆莫(一云豆莫婁) 在位二十二年

 

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爲人豪俊善用兵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乙亥三年帝自將傳橔所至無敵不旬月衆至五千每與戰漢寇望風而

潰遂引兵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古槀離國之地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니 로 옛 고리국(藁離國)의 땅이었다.

 

甲午二十二年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帝遣將破裵川之漢寇與遺民幷力所向連破漢寇擒其守將拒以有備

갑오 22년(B.C.86)단군 고우루(高于婁)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裴川)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乙未二十三年北夫餘奉城邑降屢哀欲保帝廳之降封解夫婁爲候遷之岔陵帝前導鼓吹率衆數萬而入都城仍稱北夫餘秋八月與漢寇屢戰于西鴨綠可之上大捷

을미 23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海夫婁)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岔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西鴨綠河)의 상류에서 한구(漢寇)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壬寅三十年五月五日高朱蒙誕降于岔陵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분능(岔陵)에서 태어났다.

 

辛酉四十九年帝崩以遺命葬于卒本川太子高無胥立

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등극하였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六世檀君 高無胥 在位二年)

 

壬戌元年帝卽位于卒本川與父老會于白岳山立約祭天頒行事例內外大悅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史例)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帝生而有神德能以呪術呼風喚雨善賑大得民心有小解慕漱之稱時漢寇騷亂遍于遼左屢戰得捷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小解慕漱)라 불렸다. 이 때에 한(漢)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癸亥二年帝巡到寧古塔得白獐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

계해 2년(B.C.58)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先是帝無子見高朱蒙爲非常人以女妻之至是卽位時年二十三時下夫餘人將欲殺之奉母命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行至岔陵水欲渡無梁恐爲追兵所迫告水曰我是天帝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者垂及奈何於是魚鼈浮出成橋始得渡魚鼈乃解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의 나이가 23세였다. 이때에 하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岔陵水)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으므로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몰릴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에 물고기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가섭원 부여기(迦葉原 夫餘紀)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始祖 解夫婁 在位三十九年)

 

乙未元年王爲北夫餘所制徙居迦葉原赤稱岔陵宜五穀尤多麥又多虎豹熊狼便於獵

을미 원년(B.C.86), 왕은 북부여(北夫餘)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迦葉原) 은 분능(岔陵)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리가 많았고 또 범․표범․곰․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丁酉三年命國相阿蘭弗設賑招撫遠近流民使及時飽暖又給田耕作不數年國富民殷時有時雨滋岔陵民歌王正春之謠

정유(B.C.84) 3년,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岔陵)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壬寅八年先是河伯女柳花出遊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仍升天不是父母責其無媒而從之遂謫居邊室高慕漱本名弗離支或曰高辰之孫王異柳花同乘還宮而幽之是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支)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柳花)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歲五月五日柳花夫人生一卵有一男子破殼而出是謂高朱蒙骨表英偉年甫七歲自作弓矢百發百中夫餘語善射爲朱蒙故以名云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라 불렀는데 생김새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甲辰十年王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淚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及其長立爲太子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큰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壬戌二十八年國人以高朱蒙爲不利於國欲殺之高朱蒙奉母柳花夫人命東南走渡淹離大水到卒本川明年開新國是爲高句麗始조祖也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망하여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 새 나라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癸酉三十九年王薨太子金蛙立

계유 39년(B.C.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했다.

 

2세 금와 재위 41년(二世 金蛙 在位四十一年)

 

甲戌元年王遣使高句麗獻方物

갑술 원년(B.C.47),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丁酉二十四年柳花夫人薨高句麗以衛兵數萬返葬于卒本命以皇太后禮遷就山陵建廟祠于其側

정유 24년(B.C.24), 유화 부인이 돌아 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廟社)를 짓게 하였다.

 

甲寅四十一年王薨太子帶素立

갑인 41년(B.C.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三世 帶素 在位二十八年)

 

乙酉元年春正月王遣使高句麗請交質子高句麗烈帝以太子都切爲質都切不行王恚之冬十月以兵五萬往侵卒本城大雪多凍死乃退

을묘 원년(B.C.6),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烈帝)가 태자 도절(都切)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癸酉十九年王侵攻高句麗至鶴盤嶺下遇伏兵大敗

계유 19년(A.D.13), 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壬午二十八年二月高句麗擧國來侵王自率衆出戰遇泥淖王御馬陷不得出高句麗上將怪由直前殺之我軍猶不屈圍數重適大霧七日高句麗烈帝潛師夜脫從間道而遁去

임오 28년(A.D.22),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 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고구려 대장군 괴유(怪由)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설명)

 

夏四月王弟與從者數百人奔至鴨綠谷見海頭王出獵遂殺之而取其民走夷曷思水賓立國稱王是爲曷思至太祖武烈帝隆武十六年八月都頭王見高句麗日强遂擧國自降凡三世歷四十七年而國絶命都頭爲于台賜第宅以琿春爲食邑仍封爲東夫餘候

여름 4월 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 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曷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曷思)라 한다. 갈사는 태조(太祖) 무열제(武烈帝)의 융무(隆武)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于台)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시니, 혼춘(琿春)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東夫餘候)에 봉하였다.

 

秋七月王從弟謂國人曰先王身弑國亡人民無所依曷思偏安不能自國吾赤才智魯下無望與復寧降以圖存以故都人民萬餘口投高句麗高句麗封爲王安置椽那部以其背有絡文賜姓絡氏後稍自立自開原西北徙到白狼谷又近燕之地至文咨烈帝明治甲戌以其國折入于高句麗椽那部絡氏遂不祀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선왕께서는 시해(弑害)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 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떼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絡)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바로 연(燕)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 갑술(A.D.494)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태백일사(太白逸史)

- 이맥(李陌) 지음 -

 

삼신오제본기

三神五帝本紀

 

表訓天詞云大始上下四方曾未見暗黑古往今來只一光明矣自上界却有三神卽一上帝主體則爲一神非各有神也作用則三神也三神有引出萬物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不見其形體而坐於最上上之天所居千萬億土恒時大放光明大發神玅大降吉祥呵氣於包萬有射熱以滋物種行神以理世務

《표훈천사》에서 말한다.

「대시(태초)에 위․아래․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 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상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千萬億土)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하시고 크게 신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祥瑞)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 만물을 만드시고 열을 뿜어 만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시어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未有氣而始生水使太水居北方司命尙黑未有機而始生火使太火居南方司命尙赤未有質而始生木使太木居東方司命尙靑未有形而始生金使太金居西方司命尙白未有體而始生土使太土居中方司命尙黃

아직 기(氣) 있기 전먼저 물을 낳게 하여 태수(太水)로 하여금 북방에 있으면서 사명(司命)으로서 검은 색관장케 하시고, 아직 기(機) 있기 전에 먼저 불을 낳게 하여 화(太火)로 하여금 남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붉은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질(質)도 있기 전에 먼저 나무낳으시더니 태목(太木)으로 하여금 동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푸른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형(形)이 있기에 앞서 먼저 금을 낳아 태금(太金)으로 하여금 서방에 있으면서 흰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체(體)도 생기기 전에 먼저 흙을 낳더니 태토(太土)로 하여금 중앙에 있으면서 노란색을 관장케 하니라.

 

於是遍在天下者主五帝司命是爲天下大將軍也遍在地下者主五靈成効是爲地下女將軍也

이에 하늘 아래 두루 있으면오제(五帝)의 사명을 주관하는 바 이를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한다. 지하에 두루 있으면서 오령(五靈)의 이룸을 주관하는 바 이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한다.

 

 

 

稽夫三神曰天一日地一日太一天一主造化地一主敎化太一主治化

생각컨대 저 삼신을 천일(天一)이라 하고 지일(地一)이라 하고 태일(太一)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느니라.

 

稽夫五帝曰黑帝曰赤帝曰靑帝曰白帝曰黃帝黑帝主肅殺赤帝主光熱靑帝主生養白帝主成熱黃帝主和調稽夫五靈曰太水曰太火曰太木曰太金曰太土太水主榮潤太火主鎔煎太木主營築太金主裁斷太土主稼種

생각컨대 오제(五帝)는 흑제(黑帝). 적제(赤帝). 청제(靑帝). 백제(白帝). 황제(黃帝)를 말하나니, 흑제는 생명이 다함을 주관하고, 적제는 빛과 열을 주관하고, 청제는 낳아 기름을 주관하고, 백제는 성숙을 주관하며, 황제는 조화를 주관한다. 또 생각컨대 오령(五靈)은 태수(太水). 태화(太火). 태목(太木). 태금(太金). 태토(太土)라 하나니, 태토는 크고 윤택하게 하며, 태화는 녹이고 익히며, 태목은 지어 이루고, 태금은 재량하여 자르며, 태토는 씨뿌림을 주관한다.

 

於是三神乃督五帝命各顯厥弘通五靈啓成厥化育日行爲晝月行爲夜候測星曆寒署紀年 漁區出船以守海

農區出乘以守陸

 

이에 삼신(三神)은 곧 오제(五帝)를 감독하고 명령하사 각각 넓히고 나타내게 하고, 오령(五靈)으로 하여기르이루게 하도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고 달이 뜨면 밤이라 하며, 별의 움직임을 측량하여 춥고 더운 것과 연대를 기록케 하니라.(고기잡이는 배 띄워 다를 지키고, 농사에는 수레를 내어 땅을 지키니라.)

 

大矣哉三神一體之爲庶物原理而庶物原理之爲德爲慧爲力也巍湯乎充塞于世玄玅乎不可思議之爲運行也

도다 삼신일체(三神一體)의 만물<庶物>의 원리 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 힘이 됨이여! 높고도 넓어서 세상에 가득하며, 깊고 묘하여 불가사의하게 운행함이여!

 

然庶物各有數而數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理而理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力而力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無窮而無窮未必盡厥庶物也住世爲生歸天爲死死也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有死必有生有生必有名有名必有言有言必有行也

그런데 사물은 모두 사물<庶物>의 수(數)를 가졌으나 수(數)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이치<理>를 가졌으나 이치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힘<力>을 가졌으나 힘<力>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무궁함이 있으나. 무궁함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나니, 세상에 있으면 산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니라.

 

譬諸生木有根必有苗有苗必有花有花必有實有實必有用也譬諸日行有暗必有明有明必有觀有觀必有作有作必有功也則凡天下一切物有若開闢而存有若進化而在有若循環而有

이를 산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가 있으반드시 싹이 있고 싹이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고, 꽃이 있으며 반드시 열매가 있으며,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쓰임이 있나니라. 이를 또 태양의 움직임에 비유컨대, 어둠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살핌<觀>이 있고, 살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있고, 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이룸<功>이 있나니 대저 천하일체의 물건은 개벽을 쫓음으로써 존재하고, 진화를 닮는 일 있음으로써 존재하며, 순환에 닮음 있음으로써 존재하느니라.

 

惟元之氣至玅之神自有執一含三之充實光輝者處之則存感之則應其來也未有始焉者也其往也未有終焉者也通於一而未形成於萬而未有

유원(惟元)의 기(氣)와 지묘(至妙)의 신(神)은 저절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여 가득히 빛났으니 있을 곳에 있고 감응하여 대응하니라. 오되 시작된 곳이 없고 가되 끝나는 곳이 없으니 하나에 통하여 만 가지를 이루지 못함이 없음이라.

 

大辯經曰惟天一神冥冥在上乃以三大三圓三一之爲靈符者大降降于萬萬世之萬萬民一切惟三神所造

《대변경》에서 말한다.

「생각컨대 천일의 신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삼대(三大)와 삼원(三圓)삼일(三一)을 가지고 이를 영부(靈符)로 하여 크게 내리시사<大降> 만만세의 만만백성에게 내리시니, 일체는 오로지 삼신께서 만드신 바니라.

 

心氣身必須相信未必永劫相守靈智意三識卽爲靈覺生三魂赤因其素以能衍形年魂

심(心)․기(氣)․신(身)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서로 의지해야 할 일이로되, 아직은 반드시 영원토록 서로 지키지 못하고, 영(靈)․지(智)․의(意) 삼식(三識)은 곧 영(靈)․각(覺)․생(生)의 삼혼(三魂)이 되고, 또 그 소질에 따라 형(形)․년(年)․혼(魂)을 넘치게 하느니라.

 

嘗與境有所感息觸者而眞妄相引三途乃岐故曰有眞而生有妄而滅於是人物之生均是一其眞源性命精爲三關關爲守神之要會性不離命命不離性精在其

일찍이 경계에 따라서 느끼고(感), 숨쉬고(息), 접촉함(觸)이 있으니, 참됨(眞)과 망령됨(妄)은 서로 삼도(三途)끌어들여 갈라지고 말았도다. 때문에 이르기를 참 있음으로써 살고, 망 있음으로써 멸하니라고 했느니라. 이에 사람과 사물의 생겨남은 다같이 그 참된 근원을 <하나(一)>로 하느니라. 성(性)․명(命)․정(精)을 삼관(三關)이라 하나니 관(關)수신(修身)의 요회(要會)라 하느니라. 성(性)은 명(命)을 떠나지 않고, 명(命)은 성(性)을 떠나지 않나니, 정(精)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心氣身爲三房房爲成化之根源氣不離心心不離氣身在其中

심(心)․기(氣)․신(身)을 삼방(三房)이라 하고 성화(成化)의 근원이라 한다. 기(氣)는 심(心)을 떠나지 않으며, 심(心)은 기(氣)를 떠나지 않나니, 신(身)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感息觸爲三門門爲行途之常法感不離息息不離感觸在其中

감(感)․식(息)․촉(觸)을 삼문(三門)이라 한다. 문을 행도(行途)의 상법(常法)이라 한다. 감(感)은 식(息)을 떠나지 않으며, 식(息)은 감(感)을 떠나지 않으며, 촉(觸)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性爲眞理之元關心爲眞神之玄房感爲眞應之玅門究理自性眞機大發存神求心眞身大現化應相感眞業大成

성(性)을 진리(眞理)의 원관(元關)이라 하고, 심(心)은 진신(眞神)의 현방(玄房)으로 하고, 감(感)을 진응(眞應)의 묘문(妙門)으로 한다. 이를 탐구하고 성(性)에 의해 진기(眞機)를 크게 발하나니, 신(身)을 분명히 하고 심(心)을 구한다면 진신(眞神)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고 진업(眞業)을 크게 이룰 것이니라.

 

所驗有時所境有空人在其間庶物之有虛粗同體者惟一氣而己惟三神而己有不可窮之數有不可避之理有不可抗之力有或善不善報諸永劫有或善不善報諸自然有或善不善報諸子孫

조짐에는 때가 있고 만남에는 장소가 있으나 사람은 빔(虛)과 참(粗)이 사이에 있느니라. 만물은 이에 있는 바, 동체인 것은 일기(一氣)뿐으로, 다만 삼신(三神)뿐이니라. 추궁치 말아야 할 이치가 있고 피하지 말아야 할 도리가 있으며, 거스르지 말아야 할 기능이 있나니, 혹은 선(善)․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영겁에 보답하고 혹은 선(善)․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자연에 보답하고, 혹은 선(善)․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자손에 보답하느니라.

 

經云人物同受三眞惟衆迷地三妄着根眞妄對作三途父道法天眞一无僞師道法地勸一无怠君道法人協一无違

경(經)에서 말한다.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리고, 진(眞)과 망(妄)이 어울려 삼도(三途)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모범 삼나니 참됨으로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지 않으며, 다스림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高麗八觀記三神設云上界主神其號曰天一主造化有絶對至高之權能無形而形使萬物各通其性是爲淸眞大之體也

《고려팔관기》에 삼신설(三神說)이 있나니, 가로대「상계(上界)의 주신은 그 호를 천일(天一)이라 하나니, 조화(造化)를 주관하시며 절대지고의 권능을 갖고 계신다. 무형으로써 형을 삼으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성(性)을 통하게 하시느니라. 이를 청진대(淸眞大)의 체(體)라 한다.

 

下界主神其號曰地一主敎化有至善惟一之法力無爲而作使萬物各知其命是爲善聖大之體也

하계(下界)주신은 그 호를 지일(地一)이라 한다. 교화(敎化)를 주관하며 지선유일(至善唯一)의 법력이 있어 하는 없이 만들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명(命)을 알게 하니, 이를 선성대(善聖大)의 체(體)라고 한다.

 

中界主神其號曰太一主治化有最高無上之德量無言而化使萬物各保其精是爲美能大之體也然主體則爲一上帝非各有神也作用則三神也

중계(中界)의 주신은 그 호를 태일(太一)이라 한다. 치화(治化)를 주관하며 최고무상의 덕량(德量)을 가지고 말없으면서 교화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정(精)을 보전하게 하니, 이를 미능대(美能大)의 체(體)라 한다.

 

故桓仁氏承一變爲七二變爲六之運專用父道而注天下天下化之神市氏承天一生水地二生火之位專用師道而率天下天下効之王儉氏承徑一周三徑一匝四之機專用王道而治天下天下從之

한인씨(桓因氏)는 한 번 변화하여 칠(七)이 되며, 두 번 변하여 육(六)이 되는 운을 받아 오로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쏟으매, 천하가 이에 교화된다. 신시씨(神市氏)는 천일(天一)의 생수(生水)와 지이(地二)의 생화(生火)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로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하매, 천하가 이에서 배운다. 왕검씨(王儉氏)는 지름이 둘레를 한바퀴 도는 길이인 3,14의 기(機)를 받아 오로지 왕의 도를 써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한다.

 

五帝設云北方司命曰太水其帝曰黑其號曰玄玅眞元其佐曰桓仁在蘇留天是爲大吉祥也東方司命曰太木其帝曰靑其號曰同仁好生其佐曰大雄在太平天是爲大光明也南方司命曰太火其帝曰赤其號曰盛光普明其佐曰庖犧在元精天是爲大安定也西方司命曰太金其帝曰白其號曰淸淨堅虛其佐曰治尤在鉤和天是爲大嘉利也中方司命曰太土其帝曰黃其號曰中常悠久其佐曰王儉在安德天是爲大豫樂也

《오제설(五帝說)》에서 말한다.

「북방의 사명(司命)을 태수(太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흑(黑)이니 그 호를 현묘진원(玄妙眞元)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한인(桓仁)이라 하고 소류(蘇留)의 하늘에 계시며, 이를 대길상(大吉祥)이라 한다. 동방의 사명을 태목(太木)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청(淸)이니 그 호를 동인호생(同仁好生)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대웅(大雄)이라 하며 태평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광명(大光明)이라 한다. 남방의 사명을 태화(太火)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적(赤)이니 그의 호를 성광보명(盛光普命)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포희(庖犧)라 하고 원정(元精)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안정(大安定)이라 한다. 서방의 사명을 태금(太金)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백(白)이니 그의 호를 청정견허(淸淨堅虛)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치우(治尤)라 하고 구화(鉤和)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희리(大喜利)라 한다. 중방의 사명은 태토(太土)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황(黃)이니 그의 호를 중상유구(中常悠久)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왕검이라 하며 안덕(安德)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예락(大豫樂)이라 하느니라.」

 

五帝注曰五方各有司命在天曰帝在地曰大將軍督察五方者爲天下大將軍督察地下者爲地下女將軍也龍王玄龜主善惡朱鵲赤熛主命靑龍靈山主穀白虎兵神主刑黃熊女神主病

《오제(五帝)의 주(注)》에 말한다.

「오방(五方)에 각기 사명이 있으니 하늘에서는 제(帝)라 하고 땅에서는 대장군(大將軍)이라 한다. 오방을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용왕현구(龍王玄龜)는 선악을 주관하며, 주작적표(朱雀赤熛)는 목숨을 주관하며, 청룡령산(靑龍靈山)은 곡식을 주관하며, 백호병신(白虎兵神)은 형벌을 주관하며, 황웅여신(黃熊女神)은 병을 주관한다.」

 

三神山爲天下之根山以三神名者蓋自上世以來咸信三神降遊於此化宣三界三百六十萬之大周天其體不生不滅其用無窮無限其檢理有時有境神之至微至顯神之如意自在終不可得以知也其迎也僾然而如有見其獻也愾然而如有聞其讚也欣然而如有賜其誓也肅然而如有得其送也恍然而如有慊是爲萬世人民之所以認識追仰於順和信悅之域者也

삼신산(三神山)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삼신으로 이름 삼음은 대저 상세 이래로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노닐으시고 삼계(三界)를 널리 감화하심을 믿기 때문이라. 360만의 큰 둘레의 하늘은 그 체(體)가 불생불멸이시며 그 용(用)이 무궁무근이나, 그의 법식과 이치는 때가 있으며 장소가 있으니 신의 지극히 자상하고 지극히 현명하여 여의자재(如意自在) 하심은 끝내 이를 알 수가 없다. 그를 맞이함에는 흡사 눈앞에 보이는 듯이 하고, 그 바치는 일은 문득 들리는 바 있는 것 같이 하고, 그 찬탄함에는 기꺼이 하사 받음이 있는 듯이 하고, 그 서약함에는 숙연하여 얻는 것이 있는 듯 하며, 물건을 바칠 때에도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바침이니, 이렇게 만세인민이 인식추앙(認識追仰)하여 모두가 다 기쁘게 믿는 것이다.

 

三神惑說有以三爲新新爲白神爲高高爲頭故亦稱白頭山又云蓋馬奚摩離之轉音古語謂白爲奚謂頭爲摩離也白頭山之名亦起於是矣

삼신산에 어떤 설에서「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新)은 또 백(白)으로 되며, 백(白)은 신(神)이 되고 신(神)은 고(高)가 되고 고(高)는 바로 두(頭)가 된다. 때문에 또 백두산(白頭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의 전음(轉音)이다.」라고 했다. 고어에는 흰 것을 해(奚)라 하고 두(頭)를 마리(摩離)라고 하니 백두산의 이름도 역시 이에서 생긴 것이다.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偶之處曰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日夢得神啓而自成昏禮明水告天而環飮山南朱鵲來喜水北神龜呈瑞谷西白虎守嵎溪東蒼龍升空中有黃熊居之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사타(阿耳斯它)라 한다. 또 사타려아(斯它麗阿)라고도 한다. 어느 날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에 알린 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산남(山南)의 주작(朱雀)이 날아와서 즐기고, 수북(水北)의 신구(神龜)가 상서(祥瑞)를 나타내고, 곡서(谷西)엔 백호가 산모퉁이를 지키고, 계동(溪東)엔 창룡(蒼龍)이 하늘로 승천하고, 가운데 황웅(黃熊)이 있었다. 천해(天海)․금악(金岳)․삼위(三危)․태백(太白)은 본디 구한(九桓))에 속한 것이며 9황(皇)의 64민(民)은 모두 그의 후예이다.

 

然一山一水各爲一國群女群男亦相分境從境而殊國別積久創世條序後無得究也久而後有帝桓仁者出爲國人所愛戴曰安巴堅亦稱居發桓也蓋所謂安巴也堅乃繼天立父之名也所謂居發桓天地人定一之號也自是桓仁兄弟九人分國而治是爲九皇六十四民也

그러나 일산일수(一山一水)가 각각 한나라가 되매, 사람들도 역시 서로 따라가 경계를 나누니 경계에 따라 나라를 달리하게 되었다. 나라를 달리 한지 오래되니 창세의 조서(條序)의 뒤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뒤에 한인(桓仁)이란 분나타나셔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어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고 거발한(居發桓)이라고도 하였다. 이른바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의 이름이고, 거발한이라 함은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호칭이다. 이로부터 한인(桓仁)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皇) 64민(民)이라 한다.

 

竊想三神生天造物桓仁敎人立義自是子孫相傳玄玅得道光明理世旣有天地人三極大圓一之爲庶物原義則天下九桓之禮樂豈不在於三神古祭之俗乎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사 물건을 만드시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도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天)․지(地)․인(人) 삼극(三極)은 있었고, 대원일(大圓一)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九桓))의 예악(禮樂)이 어찌 삼신고제(三神古帝)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傳曰三神之後稱爲桓國桓國天帝所居之邦又曰三神在桓國之先那般死爲三神夫三神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曰人物同出於三神以三神爲一源之祖也

전(傳)에서 말한다.

「삼신의 후(後)를 일러 한국(桓國)이라 하니 한국은 천제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니라.」

또 가로되,「삼신은 한국의 선대(先代)에 있었고 나반(那般)이 죽어 삼신(三神)이 되셨으니 그 삼신이라 함은 영구생명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니, 그래서 또 말한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桓仁亦代三神爲桓國天帝後稱那般爲大先天桓仁爲大中天桓仁與桓雄治尤爲三皇桓雄稱大雄天治尤爲智偉天乃黃帝中經之所由作也

한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여 한국의 천제가 되었다. 뒤에 나반을 대선(大先)의 천(天)이라 하고, 한인을 대중(大中)의 천(天)이라 하고, 한인․한웅․치우를 삼황(三)이라 하며, 한웅을 대웅(大雄)의 천(天)이라 하고, 치우(蚩尤)를 지위(智偉)의 천(天)이라 한다. 곧《황제중경》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三光五氣皆在視廳感覺而世級日進攢火焉發語焉造字焉優勝劣敗之相競始乎起耳熊族之中有檀國最盛

삼광오기(三光五氣)가 모두 시청 감각에 달려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불을 피우고 말을 하게 되고 글자를 만들었으니, 뛰어나고 열등하여 이기고 지는 다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웅족(雄族) 가운데 단국(檀國)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王儉亦自天而降來御于不咸之山國人共立爲檀君是謂檀君王儉也生而至神兼聖圓滿統合九桓三韓管境復神市舊規天下大治擧世視同天神自是崇報之禮永世不替者也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한(九桓))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회복하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崇報)의 예(禮)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게 되었다.

 

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貌爲別也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夫餘爲俗水旱兵疾國王有責忠邪存亡匹夫同歸是其一證也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부여는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충성됨과 사악함과 살고 죽음은 필부에게도 같이 돌아오는 법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한 증거가 된다.

 

色族如黃部之人皮膚稍黃鼻不隆頰高髮黎眼平靑黑白部之人皮膚晢頰高鼻隆髮如灰赤部之人皮膚銹銅色鼻低而端廣顙後傾髮捲縮貌類黃部之人藍部之人一云風族又棕色種其皮膚暗褐色貌猶黃部之人也

색족(色族)은 어떤 것일까? 황부인(黃部人)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白部人)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赤部人)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藍部人)은 풍족(風族)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三韓古俗皆十月上旬國中大會築圓壇而祭天祭地則方丘祭先則角木山像雄常皆其遺法也祭天韓必自祭其禮甚盛可知也是日遠近男女皆以所産薦供鼓吹百戲是俱衆小諸國皆來獻方物珍寶環積邱山蓋爲民祈禳乃所以繁殖管境而蘇塗祭天乃九黎敎化之源也自是責禍善隣有無相資文明成治開化平等四海之內莫不崇飾祀典者也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땅에 제사지냄을 방구(方丘)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지냄은 각목(角木)이라 하나니, 산웅상(雄常)의 상(像)을 만듦은 모두 그 유법(遺法)이다. 하늘에 제사지냄에 있어서 반드시 한(韓)(임금)이 몸소 제 지내니 그 예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멀리 가까이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산한 것을 바치고는 북 치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니 진기한 것들이 언덕과 산처럼 둥그렇게 쌓인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관경(管境)번식케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蘇塗)의 제천(祭天)은 구려(九黎)를 교화하근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당하여 함께 힘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祝兒之生曰三神祝禾之熱曰業山爲群生通力之所業爲生産作業之神故亦稱業主嘉利發願岱土曰土主大監發願家宅曰成造大君亦歲成嘉福之神也墓園漁獵戰陣出行皆有祭祭必擇齋以利成也蘇塗之立皆有戒忠孝信勇仁五常之道也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三神)이라 하고 벼가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業)이라 하였다. 산(山)을 군생통력(群生通力)의 장소라 하고 업(業)을 생산작업의 신(神)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도 한다. 집터에 발원하면 토주대감(土主大監)이라 하고 집에 발원하면 성조대군(成造大君)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이루는 신이다. 묘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모두 각각 제(祭)가 있으니 제(祭)는 반드시 날짜를 골라 재(齋)를 올려야 복을 이루는 것이라.

 

蘇塗之側必立扃堂使未婚子弟講習事物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並術釗六藝之類也

소도(蘇塗)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

 

諸邑落皆自設三老三老亦曰三師有賢德者有財施者有識事者皆師事之是也又有六正乃賢佐忠臣良將勇卒明師德友是也又殺生有法上自國王下至庶民須自擇時與物而行之一不濫殺自古夫餘有馬不乘禁殺放生者亦其義也故不殺宿不殺卵是擇時也不殺幼不殺益是擇物也重物之義可謂至矣

모든 부락에서는 스스로 삼로(三老)를 모셨으니, 삼로는 또 삼사(三師)라고도 한다. 어진 덕을 갖춘 자가 있고 재물을 베푸는 자, 지혜를 갖춘 자가 있으니, 누구나 그들에게 사사함이 이와 같다. 또 육정(六正)이 있는바 곧 현좌(賢佐), 충신(忠臣), 양장(良將), 용졸(勇卒), 명사(名師), 덕우(德友)가 그들이니라. 또 살생에 법이 있으니, 위론 국왕으로부터 밑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스스로 때와 물건을 가려서 했다. 그리하여 살생을 함에 있어 첫째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나니, 옛부터 부여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깃든 짐승은 죽이지 않으며 알을 품은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 함은 그 번식할 때를 가려서 죽이지 않기 때문이라.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이로운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살림은 그 짐승의 종류를 가림이라. 물건을 중하게 여김이 이처럼 지극했다 할 것이니라.

 

源花稱女郞男曰花郞又云天王郞自上命賜鳥羽冠加冠有儀注時封大樹爲桓雄神像而拜之神樹俗謂之雄常常謂常在也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하며 또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는다. 모자를 쓰는 데에도 의식이 있다. 주해에 이르기를「때에 큰 나무를 모시어 한웅의 신상(神像)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라.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七月七日卽那般渡河之日也是日天神命龍王召河伯入龍宮使之主四海諸神天河一云天海今曰北海是也

하백(河伯)은 천하(天河)의 사람으로 나반(那般)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나반이 강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왕에게 명하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의 뭇신을 주관케 하시느니라. 천하는 다른 이름으로 천해(天海)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北海)가 바로 그것이다.

 

天河注曰天道起於北極故天一生水是謂北水蓋北極水精子所居也

천하의 주에 가로되「천도(天道)는 북극(北極)에서 일어났다. 고로 천일(天一)의 물을 낸다. 이를 북수(北水)라 한다.」라고 했다. 대저 북극(北極)은 수정자(水精子)가 기거하는 곳이다.

 

한국본기

桓國本紀

 

 

朝代記曰昔有桓仁降居天山主祭天神定命人民攝治群務野處而無蟲獸之害群行而無怨逆之患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적에 한인(桓因)이 계셨나니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천산(天山)에 사시면서 천신제사지내고, 백성에겐 목숨을 정하시고, 모든 일을 두루 다스리시니 들에는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어지고, 무리와 함께 행하시니 원한을 품거나 반역하는 일 또한 없어졌느니라.

 

親疎無別上下無等男女平權老少分役當此之世雖無法規號令自成和樂循理去其病而解其冤扶其傾而濟其弱一無憾且怫異者

친하고 멀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따로 하지도 않았고, 늙은이와 젊은이의 일을 구별했으니, 이 세상에 법규가 없었다 하지만 계통은 저절로 성립되고 순리대로 잘 조화 되었도다. (다른 해석) 질병을 없게 하고 원한을 풀며 어려운 자를 도와 일으키며 약자를 구제하니, 원망하고 일부러 어긋나는 자 하나도 없었다.

 

時人皆自號爲桓以監群爲仁仁之爲言任也弘益濟人光明理世使之任其必仁也故五加衆交相選於大衆以必求業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호를 한(桓)이라 하고 감군(監羣)을 인(仁)이라 불렀다. 인(仁)이란 임(任)이란 말이니 널리 유익한 것으로 사람을 구제하고<弘益濟人> 세상을 이치대로 밝히는 것<光明理世 : 광명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은 이를 반드시 어질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 때문에 오가(五加)의 무리가 서로 바꿔가면서 대중에게서 뽑힘은 반드시 업(業)을 구하기 때문이다.

 

故愛憎有別各以其所心主辨之而自擇其所求鵠惟在九桓爲公大同歸一焉者則亦當自較得失無一人異然後從之諸衆亦不敢遽下獨術以處之蓋處衆之法無備有患有備無患必備豫自給

사랑하고 미워하는 구별있음은 각각 마음먹는 바에 따르는 법이니, 그 마음을 잘 판단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 정곡선택하기 때문이라. 생각컨대 구한(九桓)에 사는 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모두 함께 하나뭉쳤던 것도 역시 마땅히 스스로 득실을 선택하매 한 사람도 딴 의견이 없었던 것이니, 그런 후라야 이에 따르게 됨이라. 여러 대중도 역시 감히 갑자기 한쪽으로 편향치 않으며 오직 꾀로써 이에 대처하느니라. 대저 무리에 대처하는 법은 무비(無備)면 유환(有患)이며 유비(有備)면 무환(無患)이니라. 반드시 예비하고 자급할지니라.

 

 

善群能治萬里同聲不言化行於是萬方之民不期而來會者數萬衆自相環舞仍以推桓仁坐於桓花之下積石之上羅拜之山呼聲溢歸者如市是爲人間最初之頭祖也

선군(善羣)은 만리를 능히 다스려 한 소리에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니, 즉 여기에 이르러 만방의 백성들이 기약하지 않고서도 와서 모이는 자 수만이더라. 무리는 저절로 환무(環舞)하며 저절로 한인을 추대하여 한화(桓花)가 피어난 돌무지 위에 앉으시게 하더니, 그에게 줄지어 경배하고 환호 소리 넘쳐흐르니 귀의하는 자가 성시를 이루었다. 이를 인간 최초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三聖密記云波奈留山之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國也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勾茶川國一群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勾牟額國賣勾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卑爾國一云豕韋國一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是也天海今曰北海

《삼성밀기(三聖密記)》에서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인(桓因)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桓國)이요, 갈라서 하면 곧 비리국(卑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또는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이국(鮮椑爾國)(또는 시위국(豕韋國), 통고사국(通古斯國)이라 함.), 수밀이국(須密爾國)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天海)는 지금의 북해(北海)라 한다.」

 

密記注曰蓋馬國一云熊心國在北蓋馬大嶺之北距勾茶國二百里勾茶國舊稱瀆盧國在北蓋馬大嶺之西月漬國在其北五百里稷臼多國或稱賣句餘國舊在五難河後爲瀆盧國所破遂移于金山居之勾茶國本艾蒜所産也艾煎服以治冷蒜燒食以治魔也

《밀기(密記)》의 주(註)에서 말한다.

「개마국(蓋馬國)은 일명 웅심국(熊心國)이라 하니 북개마(北蓋馬) 대령(大嶺)의 북쪽있으며 구다국(句茶國)으로부터의 거리가 2백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 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니라.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백리에 있고, 직구다국(稷臼多國) 혹은 매구여국(賣句餘國)은 옛 오난하(五難河)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瀆盧國)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金山)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구다국(句茶國)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써 냉을 치료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써 재앙을 다스린다.」

 

朝代記曰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治身無病代天興化使人無兵人皆力作以勤自無飢寒也傳赫胥桓仁古是利桓仁朱于襄桓仁釋提壬桓仁邱乙利桓仁至智爲利桓仁或曰檀因傳七世歷三千三百一年或曰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풍족하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시고, 사람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근면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赫胥) 한인, 고시리(古是利) 한인, 주우양(朱于襄) 한인, 석제임(釋帝任) 한인, 구을리(邱乙利) 한인에 전하여 지위리(智爲利) 한인이르니 혹은 지위리 한인은 단인(檀因)이라고도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이라고도 다.」

 

桓國有五訓神市有五事所謂五訓者一曰誠信不僞二曰敬勤不怠三曰孝順不違四曰兼義不淫五曰謙和不鬪所謂五事者牛加主穀馬加主命狗加主刑猪加主病羊加一作鷄加主善惡

「한국(桓國)에 오훈(五訓)이 있으며 신시(神市)엔 오사(五事)가 있나니, 이른바 오훈이란 이른바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 것, 둘째, 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 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이른바 오사(五事)란 우가(牛加)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豬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혹은 계가(鷄加)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하는 것이라.」

 

桓國注曰桓者全一也光明也全一爲三神之智能光明爲三神之實德乃宇宙萬物之所先也

한국의 주에서 말한다.

「한(桓)은 전일이며 광명이라.<全一也光明也> 전일(全一)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朝代記曰古俗崇尙光明以日爲神以天爲組萬方之民信之不相疑朝夕敬拜以爲恒式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

 

太階者光明之所會三神之攸居人得光以作而無爲自化朝則齊登東山拜日始生夕則齊趨西川拜月始生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 산에 올라가 해가 처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녁엔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先是桓仁生而自知化育五物敷演五訓主治五事五加衆皆勤苦使至善修行開心光明作事吉祥住世快樂桓仁高御上上天惟意懇切百途咸自和平時稱天帝化身而無敢叛者九桓之民咸率歸于一

이에 앞서 한인께서 태어나시어, 절로 다섯 가지 사물을 만들고 기름을 아시고 다섯 가지 가르침을 가르치시고 다섯 가지 일들을 다스리시었다. 오가의 무리는 모두 어려움을 참고 부지런하여 잘 배워 지닌 끝에 마음의 빛을 얻어 상서로운 일만들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었더라. 한인께선 높고 높은 하늘에 오르사 홀로 생각하시며 차분히 온갖 일을 다스리시니 모두 절로 화평하였다. 때에 천제로서 몸을 나타내시니 감히 따르지 않는 자 없어 구한(九桓)의 백성이 모두 하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시본기

神市本紀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서 말한다.

「한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가짐을 보시곧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산에 들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 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얻는 법이로다> 라고 말하며 오래된 홰나무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다음날 다시 교목들의 숲에 가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줄무늬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 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한웅천왕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出納獻替)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에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흐트러져 연결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써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뿐이리라>라고 하며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하여 다시 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아마도 역시 그 만들어 놓은 것이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듣기로 <남해도(南海島)의 낭하리(郎河理) 계곡 및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烏蘇里)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가 아직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 동굴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스며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에게는 질병을 일으켰다. 또 새 짐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버려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니 잡아서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雨師) 왕금영(王錦營)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소․말․개․독수리․돼지․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 이용을 관장케 하고,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治尤)는 곧 세세토록 병마도적(兵馬盜賊)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들 중 치우(治尤), 고시, 신지의 후손들<苗裔>이 가장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九冶)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刀戟)․대궁(大弓)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의 여러 족속들은 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 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說文)》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夷)는 큰 것(大)으로부터, 활(弓)로부터 나온 글자로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 함이 이것이다. 공자의《춘추(春秋)》에 이르러 이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戎狄)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이를 우환으로 여겼다. 한웅께나라를 위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만드셔서 은밀하게 전제(剪除)의 뜻을 가졌다. 그때는 종족의 이름이 서로 달랐으니, 풍속도 차츰 달라져원래 살던 백성을 호랑이라 하고 새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이라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만을 일삼았고 곰은 어리석어 사람을 따르지 않고 자부하는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거부하였으니, 같은 굴에 살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지금까지 한번도 서로 돕지도 않고 혼사도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마다 서로 따르지도 않고 아직 한번도 뜻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웅녀의 여왕(熊女之君)은 한웅에게 신덕(德)이 있다 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시기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들이시고 아들을 낳하였다. 호랑이는 종내 깨우칠 수 없는지라 이들을 사해로 쫓아 버렸다.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庶子部)에 한웅이라는 대인(大人)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두루 금악(金岳)․삼위(三危)․태백(太白)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業)은 이미 이루어진 듯 하다. 그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지니라.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서 하늘의 뜻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린이보살펴서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 사도(師道)를 세워서 세상을 이대로 교화(在世理化)하자손 만세의 큰 귀감이 되도록 할지어다”하시며 마침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은 신단(神壇)의 나무 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 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在世理化>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때에 한 곰과 호랑이가 있었는데 이웃하여 같이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기도하며 또 한웅에게 청하기

원컨대 변화하여 천계의 백성<天戒之氓>이 되게 하소서」라하였다. 한웅은 이에 신비한 주문을 외워 환골이신(換骨移神) 하도록 하면서 신이 내리물건으로써 신령스러운 삶을 얻게 하였으니, 바로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라. 이에 경계할 바를 말하니,

너희들 이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참된 평등을 이루어 물을 구제하고 쉽사리 사람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곰과 호랑이의 양가는 모두 이를 얻어 이를 먹고 조심하기 3․7일에 스스로 수련에 힘쓰니 곰은 굶주림․추위․아픔․고통에 견디어 경계함에 순종하고 한웅의 약속을 지켜 건강한 모습의 여자로 되었지만 호랑이는 태만하고 조심하여 경계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끝내 천업(天業)에 함께 할없었다. 이것이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고집세고 어리석고 강정하여 저들과 더불어 혼인하는 자가 없었고, 항상 신단수 밑에 여럿이 모여 아기를 가져 낳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이에 한웅은 임시로 화하여 한이 되어<假化爲桓> 관경(管景)을 얻고 그와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여자와 남자들은 차츰 윤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朝鮮三韓)이라 하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은 그의 관경이었다.」

 

신시(神市)의 세(世)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첫 회의 날엔 천신(天神)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月神)에 제사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水神)에 제하고, 4회 날에는 화신(火神)에 제 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木神)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金神)에 제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土神)에 제 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듦은 이에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 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六癸)는 신시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癸)를 처음으로 시작한다. 계(癸)는 계(啓)요 해(亥)는 핵(核)이니, 일출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癸)를 소라(蘇羅)라하고, 갑(甲)을 청차이(淸且伊)라 하고, 을(乙)을 적강(赤剛)이라 하고, 병(丙)을 중림(仲林)이라 하고, 정(丁)을 해익(海弋)이라 하고, 무(戊)를 중황(中黃)이라 하고, 기(己)를 열호수(烈好遂)라 하고, 경(庚)을 임수(林樹)라 하고, 신(辛)을 강진(强振)이라 하고, 임(壬)을 유부지(流不地)라 했다. 해(亥)를 지우리(支于離), 자(子)를 효양(曉陽), 축(丑)을 가다(加多), 인(寅)을 만량(萬良), 묘(卯)를 신특백(新特白), 진(辰)을 밀다(密多), 사(巳)를 비돈(飛頓), 오(午)를 융비(隆飛), 미(未)를 순방(順方), 신(申)을 명조(明條), 유(酉)를 운두(雲頭), 술(戌)을 개복(皆福)이라 한다.

 

신시(神市)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산에는 길도 없고 못에는 배도 다리도 없고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나무들과 풀들이 자란 곳에는 짐승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과 짐승의 무리들은 서로 어울렸고 새의 둥지에서까지 놀면서 서로 의지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셨으니 그 피와 고기를 항상 쓸 수 있었다. 옷감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함에 편리한 대로 다 되었으니, 이를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백성은 살아도 일 같은 것을 모르고, 걸어다닌다 해도 특별한 목적지도 필요 없었으니, 길을 가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담담하였다. 먹을 것을 모아 놓고 기꺼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쉰다. 대저 하늘의 혜택을 널리 입어 궁핍을 알지 못함이라. 뒤이어 후세에 이르러 백성들과 사물들은 날로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리 하게 되고, 절름발이도 있게 되고, 몹시도 마음 쓰일 일이 생기고, 기운 없고 피로하여 허덕일 일 생기고, 빈둥빈둥하는 이도 있게 되어 처음으로 생계를 염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밭가는 자는 이랑을 다투게 되고 물고기 잡는 자는 바다의 구역을 가지고 다툰다. 다투지 않고 이를 얻게 되면 장래에 궁핍을 면키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된 이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들은 도망치고 그물을 치니 물고기 새우가 숨게 되었고 칼과 창과 병사들도 생기게 되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고, 이를 갈며 피를 흘리고, 간과 뇌를 땅바닥에 뿌리게 된다.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 참으로 이러했던가? 아아,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겠다.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일그러질 날이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 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양인들이 노리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 것인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 번 전하여 태우의(太虞儀)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조식보정(調息保精)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술(術)이다. 아들 열 둘을 두었으니 맏이를 다의발(多儀發) 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太皥)라 하니 또는 복희씨(伏羲氏)라고 한다. 어느 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어 만 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곧 삼신산으로 가서 제천(祭天)하고 괘도(卦圖)를 천하(天河)에서 얻으시니, 그 획(劃)은 세 번 끊기고 세 번 이어져 자리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妙)가 있고 삼극(三極)을 포함하여 변화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에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나란히 그 이름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佩)․관(觀)․임(任)․기(己)․포(庖)․이(理)․사(姒)․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처있다. 임(任)․숙(宿)․수(須)․구(句)․수유(須臾)의 여러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대변경(大辯經)》에서 말한다.

「복희(伏羲)는 신시(神市)로부터 나와 우사(雨師)가 되었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卦圖)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癸亥)를 바꾸어 갑자(甲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女媧)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았다. 주양(周襄)은 옛 문자에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전했다.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少皥)와 함께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穀麻藥石)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춰져서 낮에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유망(楡罔)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백성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어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河朔)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楡罔)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 될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도개(釛鎧)․모극(矛戟)․대궁(大弓)․호시(楛矢)를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鹿)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정복하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여 구야(九冶)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개발하여 예과(芮戈)와 옹호(雍狐)의 창을 만들어 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小昊)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관자(管子)》가 말하는 바의「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兗)의 회대(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함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라는 책에 <치우(蚩尤)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우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 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신시(神市)를 본 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指南)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당(宗黨)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蚩尤飛)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岱)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은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 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光烈)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관향성(關鄕城)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疋絳)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사기》에 이르되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번도 편안히 있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나니>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상서(尙書)》여형(呂刑)에서는「고훈(古訓)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앗긴 탓」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訓)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계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顓頊)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王儉은 감군(監羣)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椑王)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景)으로 삼한(三韓)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서쪽 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職)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燧人)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뒤에 갈고(葛古) 한웅이 있었는데,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천왕(慈烏智天王) 한웅에 이르렀다. 자오지 한웅은 귀신같은 용맹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九冶)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고 함께 떠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더라.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의 사이에 웅거했다. 헌원황제가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鹿)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를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吳)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씨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신시씨(神市氏)는 전(佺)으로써 계(戒)를 닦고 사람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 지내었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이 스스로 완전이라 여기는 바를 쫓아 능히 그 성품에 통하이로써 참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靑邱)씨는 선(仙)으로써 법을 만들고 사람에게 관경(管境)을 가르친다. 선(仙)이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따라 명(命)을 알고 이로써 선(善)을 넓힘이다. 조선씨(朝鮮氏)는 종(倧)으로서 왕을 세우며 사람들에게 가르쳐 화(禍)를 공동으로 책임지게 하였다. 이른바 종(倧)이란 사람이 스스로 근본이라 여기는 바에 따라 능히 정신을 잘 지키고 이로써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佺)은(虛)하면서도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밝음에 있으면서도 땅에 근본을 두며, 종(倧)은 건전하면서도 사람에 근본을 둔다.」

 

주(注)에서 말한다.

「한인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天)은 곧 큰 것이요, 하나이다. 한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하니 왕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니라. 단군(檀君)은 또한 천군(天君)이라 하니, 제사를 주재하는 우두머리이다. 왕검은 또한 바로 감군(監羣)이며 관경(管景)의 우두머리이다. 때문에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한(桓)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한은 구한(九桓)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곧 크다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라 한다. 가(加)는 곧 가(家)이다. 오가(五加)를 하자면,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며, 마가(馬加)는 목숨을 주관하며,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豬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는 선악을 주관한다고 한다. 백성은 64종족이 있었고 무리는 3,000이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려보낸 것을 개천(開天)이라 한다. 개천(開天)은 고로 능히 서물(庶物)을 창조하는데 이것은 바로 허(虛)와 같은 것이다. 인간세상을 구한다함을 개인(開人)이라 한다. 개인(開人)은 때문에 능히 인간 세상의 일을 순환시킨다. 이는 혼(魂)의 구연(俱衍)을 뜻한다. 산을 다스리고 길을 내는 것을 개지(開地)라 한다. 개지(開地)는 때문에 능히 세상의 일들을 개화(開化)한다. 이는 지혜를 함께 닦음이라.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대저 백두의 큰 산은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자리잡았으니 세로는 1,000리에 걸치고 높이 200리를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倍達天國)진산(鎭山)이라 한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다만 낭림산맥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으로써 능히 그와 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세상의 속담에는 이미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쪽에 치우쳐 압록강 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조종(祖宗)을 곤륜산(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다니 이야말로 글을 폐하고 장탄식하는 이유거늘. 그런데 동방의 뭇 산을 태백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 세속에는 영변에 있는 묘향산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일연의《삼국유사》의 설에 비롯하였음이라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구멍은 콩알이라 할 것이요, 큰 콩알과 같다 할지언저. 이제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거늘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는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天池)란 한웅씨가 구름 타고 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니 묘향산은 일찍이 한웅큼의 물구덩이조차 없었던 즉 한웅천왕이 내려오신 땅을 태백산이 아니라고 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라고 했는데 위(魏)에서는 이를 태황(太皇)이라고 했다. 범․표범․곰․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고 길을 가는 이마다 모두 물건을 가득 채워 가지고 가게 되니, 이는 아마도 한웅천왕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이미 이 산에 계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산을 신주흥왕(神州興王)의 영지(靈地)라 하니, 반드시 소도제천(蘇塗祭天)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고, 옛부터 한족의 숭경(崇敬)도 역시 이 산에서 시작된 일이니, 단순히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짐승들도 빠짐없이 신(神)의 교화로 목욕하듯 하여 안락하게 이산에 서식하며 일찍이 사람을 상처낸 적 없고, 사람도 감히 산 위에 오르지 않고 오줌 누어 신을 모독하지도 않으며, 항상 끝없이 공경하고 보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저 우리 한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은 있다. 하지만 실은 한단(桓檀) 한 줄기의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 자 없으며, 신시에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傳誦)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들이 그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대저 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의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神風)과 성속(聖俗)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 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神聖理化)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명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 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바다 위에 괴상도사의 얘기도 나왔다. 대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는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산(瀛州山)으로 발해 바다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써 세상을 미혹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쪽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뿐 보이는 것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 개의 섬에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箂徑)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閣)으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洲島)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솟는 곳이라.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上帝)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金剛)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漢拏)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찍이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仙人) 및 죽지 않는 약은 그곳에 있다 하며, 그곳의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선가서(仙家書)》엔 가로대「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 사슴, 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괄지지(括地志)》가 말하는 바「새․짐승․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서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마도 혼을 되돌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세기》에 가로대,「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라 여겨진다.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줄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은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녀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시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나라의 왕 유철(劉澈)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 말한다.

「제(齊)의 풍속에 8신(神)의 제(祭)가 있다. 8신(神)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천(天)은 음(陰)을 좋아한다. 고로 천(天)을 제사함에는 반드시 높은 산의 밑인 작산 위에서 한다. 곧 하늘을 태백산 기슭에서 제사 지내는 유법인 것이다. 땅은 양(陽)을 좋아한다. 그래서 땅에 제사지낼 땐 반드시 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제사지냄은 역시 곧 천(天)을 참성단(塹城壇)에서 제를 지내던 습성이라 할 것이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武神)으로서 용강(勇强)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 도술의 조종(祖宗)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모든 귀신들을 부른다. 이로써 태시(太始)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奄)․람(藍)․양(陽)․개(介)․우(隅)․래(萊)․서(徐)․회(淮)의 8족(族)이 자리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8신(神)의 설은 8족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번성하던 설이 되었다.

 

유방(劉邦)은 동이(東夷)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豊沛)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흔고(釁鼓)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월에 패상(灞上)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왕(漢王)이 되었던 바 이로 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 역시 동황태일(東皇太一)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를 존경하기 이와 같았다.

 

진나라의《천문지(天文誌)》는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倉頡)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 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연나라 제나라의 선비들이 신비하고 괴상스러운 소리에 탐닉한 지도 역시 오래 되었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산을 찾았으니, 진한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교(正伯僑)․극상(克尙)․이문자고(羡門子高)는 최후의 무리로서 즉 연나라 사람들이요, 문성오리공(文成俉利公)․손경(孫卿)․신공(申公)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들이다. 옛날 여상(呂尙)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때문에 역시 성은 강(姜)이다. 대저 치우는 강수(姜水)에 살았다. 아들들을 모두 강씨라고 한 것이 아닐는지?

 

강태공(姜太公)은 제나라를 통치하기에 앞서 도술을 닦고 천제못(天帝池))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 그리하여 역시 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8신(神)의 풍속이 이 땅에 더욱 번성하였다. 후세엔 그 땅에 도술을 즐기는 자가 많이 배출되어 신선 사상과 도가의 사상을 섞어서 널리 퍼뜨리고 또 다듬었으니, 바로 강태공이 이를 장려함이라. 일찍이《음부경(陰符經)》의 주를 만들어 자부삼황(紫府三皇)의 뜻을 조술하였다. 그런즉 연나라 제나라 선비들이 어찌 괴상스럽고 신비스런 말들을 즐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의 법과《황제중경(黃帝中經)》이라는 책은 태자 부루(扶婁)로부터 나와서 우사공(虞司空)에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주왕(紂王)에게 말했다함은 역시《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인 것이니, 대저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으로부터 전해진 법일지라.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지석(支石)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 제석단(祭夕壇)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며 산을 파고 성단(城壇)을 만들어 놓은 것을 천단(天壇)이라 했다. 산골짜기에 있고 나무를 심어 토단(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 승도(僧徒)들이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이라 부르는 것은 곧 옛 고사를 말함이 아니다. 삼신을 지키고 사람의 목숨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의 시종랑(侍從郞)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서 말한다.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교화하복종하게 함을 주관하는 자를 랑(郞)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을 이루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한다. 즉 옛날에 시작된 신도(神道)이니 모두가 영(靈)을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은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종종 적중하기도 한다. 지금 혈구(穴口)에 삼랑성이 있는바, 성은 곧 삼랑이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던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僧徒)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혹은 말한다. 옛날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장사지낼 정놓은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중고시대(中古時代)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크기․넓이․폭․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의 벽과 바깥쪽의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陵墓)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삼한관경 본기

三韓管境 本紀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菲西岬)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風伯)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雲師)는 백검(伯劍)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君)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부모는 공경해야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로(長老)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 공장(工匠), 축산, 농사, 측후,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熊氏)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 한웅 말기에 소전(少典)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한웅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다른 지파<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軒丘)로 유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斯瓦羅) 한웅 초기의 일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자가 천 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椑王)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되,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했는,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세가(馬韓世家) 상(上)

 

곰 무리과 범 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苗桓)은 구황(九皇)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한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神市)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積)을 하나로 하고, 음(陰)은 십거(十鋸)를 세우고 양(陽)은 무궤(無匱)를 만들고 충(衷)은 여기에서 생했다.<一積而陰立 十鋸而陽作 無匱而衷生> 봉황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白牙岡)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法首橋)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한역(桓易)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적은 바로 부(天符)의 유의(遺意)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 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았다. 그 글에 가로되「일신(一神)은 충(衷)내리고 <一神降衷> 성(性)은 광명으로 통하니 <性通光明>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 따라 교화하여 <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한다<弘益人間>」고 했다. 이때부터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형상의 웅상(雄常)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여 이를 징벌코자 하여 크게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싸움이 있기 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1종당(宗黨)의 대인(大人)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되,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 뿐으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自性求子 降在爾腦>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에 숨어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나를 위해서 도(道)를 말하라」고 청했다. 대답해 가로되

 

도의 대원(大原)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입니다.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경우)에 따르는 것이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이라, 나타남(쓰임)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틀(機)은 내 마음의 기틀에서, 땅의 모양은 내 몸의 모양에서, 사물의 주관(宰)은 나의 기(氣)의 주관에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감<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인 것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명에 통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불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서 교화를 폄은 마음다스림이니 바로 인삼(人三)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大始)에 삼신님은 삼계(三界)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

 

라고 하니, 임금께서는「옳을시고 그 말씀이여!」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 1대)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江)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馬韓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되,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治亂)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馬韓)은 글을 올려 가로되,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聖主)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무오 B.C.2283)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혈구(穴口)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摩璃山)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B.C.2280)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熊伯多)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盧德利 : 2대)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弗如來 : 3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부루 12년 임자(B.C.2229)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七回)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참고) 이듬해(계축년 B.C.2228)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년(B.C.2225)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우게 했다. 경신년(B.C.2221)에 도전(稻田)을 일구고 기해년(B.C.2182)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다.

 

단군 가륵(3세, 기해년 B.C.2182~계미45년 2138) 제3년(신축 B.C.2180) 불여래(弗如來)가 죽고 아들 두라문(杜羅門 : 4대)이 즉위했다. 을사년(B.C.2176)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큰 근본은 내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어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를 성취할 수가 없으며, 사물이 중일을 잃으면 기울어져 엎어지게 되나니, 임금님음은 위태로워지고 뭇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질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잘 통찰하여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을 것이며, 이를 어기지 않은 후에야 마침내 한결 같음을 얻으리라.

중심이 잡힌 한결같은 도<惟中惟一之道>란, 아비는 자애롭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하고, 임금은 마땅히 의롭고,하는 마땅히 충성스럽고,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노소는 마땅히 차례가 있어야 함이다. 몸가짐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배움을 닦고 업을 익히며, 지혜를 열고 능력을 드러내어 널리 유익케 하고, 서로 근면하여 스스로 이루되 만물을 열어 평등케 함이다. 천하를 맡음으로서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고 나라 법을 준수하며, 각기 그 맡은 바 직책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장하여 산업을 보전함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시에는 몸을 던져 의(義)를 온전하게 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용감히 나아가 만세 무강한 복을 도움이다. 임금과 나라 사람 모두가 이를 적절히 새겨 변함없도록 할 것이로되, 모두가 완전하게 이루고자 하는 지극한 뜻이니 공경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두라문(杜羅門)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乙弗利 : 5대)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우지(近于支 : 6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을유년(B.C.2136)이다. 경인년(B.C.2131)에 장정 30인 파견하여 선박을 (薩水)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년(B.C.2109)(韓)은 명령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 10월에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閱兵)하도록 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조의(皂衣)를 하사하여 가관(加冠)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B.C.2107)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乙于支 : 7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弓戶 : 8대)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杜羅門)의 동생인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 : 9대)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B.C.1993)단군 우서한(于西翰)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 구(區)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一乘)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魯乙)제임인년(B.C.1939)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阿火 : 10대)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道奚)가 바야흐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三忽)로 전(佺)을 삼아 경당(扃堂)을 설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훈(訓)을 강론하게 하니, 한도(桓道)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夏)나라의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B.C.1864)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沙里 : 11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阿漢)의 을묘년(B.C.1806)에는 사리가 죽었으니 동생 아리(阿里 : 12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古弗帝)의 을유년(B.C.1716)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曷智 : 13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代音帝)의 무신년(B.C.1633)에 갈지의 아들 을아(乙阿 : 14대)가 즉위하였다. 기유년(B.C.1632)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餘乙帝)의 신미년(B.C.1550)에 아들 두막해(豆莫奚 : 15대)가 즉위하였다. 임신년(B.C.1549) 3월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B.C.1472)에 아들 독로(瀆盧 : 16대)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홀제(固忽帝)의 경오년(B.C.1371) 아들 아루(阿婁 : 17대)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B.C.1323)에 동생 아라사(阿羅斯 : 18대)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高登)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을미년(B.C.1286)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高登)의 아들 색불루(索弗婁)가 즉위(B.C.1285)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馬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番韓․馬韓)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B.C.1285)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 : 19대)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반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聖帝)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다. 조선(朝鮮)이란 관경(管景)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친히 다스리니 그 땅은 곧 옛날의 진한(辰韓)이다. 삼한(三韓)이 모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番韓)을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檀君)의 관경(管景)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藉供厚斂)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로되「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B.C.1243)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B.C.1232)아들 아실(阿實 : 20대)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阿闍 : 21대)가 즉위했다. 기묘년(B.C.1122 ?)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B.C.1119 ?) 아들 서여(胥餘)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B.C.1031)에 아들 아화(阿火 : 22대)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병술년(B.C.995)에 동생 아사지(阿斯智 : 23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摩休)의 정해년(B.C.934)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 : 24대)이 즉위하였다. 아리이 죽으니 아들 소이(所伊 : 25대)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B.C.934)에 아들 사우(斯虞 : 26대)가 즉위했다. 무자년(B.C.933)에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B.C.737)에 아들 궁홀(弓忽 : 27대)이 즉위하더갑인년(B.C727)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倭人)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東杞 : 28대)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多勿)의 계유년(B.C.588)에 아들 다도(多都)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B.C.509)아들 사라(斯羅 : 30대)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迦葉羅 : 31대)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加利 : 32대)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B.C.426)융안(隆安)의 사냥족들 수만이 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B.C.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于和冲)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典那 : 33대)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進乙禮 : 34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B.C.366)에 아들 맹남(孟男 : 35대)이 즉위하였다. 무술년(B.C.323)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王)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高列加)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왕(秦王) 정(政)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효제(孝悌)가 먼저이다. 9년 홍수를 당해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황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塗)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司空)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虞 : 舜)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의「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마침내 동쪽의 왕<東后>을 찾아 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巡狩)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렀다. 순(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하네 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險瀆)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蚩頭男 : 1대)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B.C.2321)에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百濟)․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琅邪 : 2대)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可汗城)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B.C.2267)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泰山)에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岱)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皇鋸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B.C.2238)에 아들 물길(勿吉 : 3대)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B.C.2187)에 아들 애친(愛親 : 4대)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道茂 : 5대)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B.C.2098)에 아들 호갑(虎甲 : 6대)이 즉위하였다. 정축년(B.C.2084)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達門)의 기축년(B.C.2072)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했다. 갑신년(B.C.2017)에 하나라왕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B.C.2015)에 아들 이조(伊朝 : 8대)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阿述)병인년(B.C.1975)동생 거세(居世 : 9대)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B.C.1960)에 아들 자오사(慈烏斯 : 10대)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B.C.1946)에 아들 산신(散新 : 11대)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B.C.1893)에 아들 계전(季佺 : 12대)이 즉위했다. 경인년(B.C.1891) 명을 받아 삼신의 단을 탕지산(湯地山)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安德鄕)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B.C.1864) 아들 백전(伯佺 : 13대)이 즉위했고, 백전이 죽은 뒤 을미년(B.C.1826)에 중제(仲弟) 중전(仲佺 : 14대)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B.C.1770)에 아들 소전(少佺 : 15대)이 즉위했다. 갑오년(B.C.1767)에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B.C.1766)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임금의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B.C.1727)에 아들 사엄(沙奄 : 1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棲韓 : 17대)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B.C.1664)에 아들 물가(勿駕 : 18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B.C.1660)에 아들 막진(莫眞 : 19대)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B.C.1614)에 아들 진단(震丹 : 20대)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B.C.1608)에 아들 감정(甘丁 : 21대)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蘇密 : 22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B.C.1588)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何亶甲)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沙豆莫 : 23대)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甲飛 : 24대)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B.C.1441)에 아들 오립루(烏立婁 : 2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徐市 : 26대)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B.C.1393)에 아들 안시(安市 : 27대)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奚牟羅 : 28대)가 즉위(B.C.1352)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素胎) 5년(B.C.1333) 우사(雨師)의 소정(小丁 : 29대)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番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 왕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 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蓋天齡)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椑王)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徐于餘 : 30대)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B.C.1282)에 진조선은 천왕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되「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속죄하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제(武帝)가 번한을 거쳐 천왕께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B.C.1225)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B.C.1224)에 아락(阿洛 : 31대)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B.C.1184)에 솔귀(率歸 : 32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B.C.1137)에 임나(任那 : 33대)가 즉위하였다. 신미년(B.C.1130)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진정으로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皇運)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B.C.1105)에 동생 노단(魯丹 : 34대)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B.C.1092)에 아들 마밀(馬密 : 35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B.C.1074)에 아들 모불(牟弗 : 36대)이 즉위했다. 을해년(B.C.1066)에 감성(監星)을 두었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B.C.1054)에 아들 을나(乙那 : 37대)가 즉위하였다.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B.C.1014)에 마휴(麻庥 : 38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B.C.1012)에 동생 등나(登那 : 39대)가 즉위했다. 이극회(李克會)가 말씀 올려서 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B.C.983)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위하였다. 임인년(B.C.979)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墓)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常春)의 가(朱家)의 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B.C.942)에 아들 오문루(奧門婁 : 41대)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B.C.894) 아들 누사(婁斯 : 42대)가 즉위하더니 무인년(B.C.883)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登屼)과 작은아들인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를 공경할지라.

항상 터럭 같은 작은 일로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마오.

말(馬)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이루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자잘한 말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B.C.866)에 아들 이벌(伊伐 : 43대)이 즉위하였다. 병신년(B.C.865)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B.C.842)에 상장(上將) 고력(高力)을 파견, 회(淮)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신유년(B.C.840)에 아들 아륵(阿勒 : 44대)이 즉위했다. 병인년(B.C.835) 주나라의 이공(二公)이 사신을 보내와 특산물을 바쳤다. 아륵이 죽으니 을축년(B.C.836)에 아들 마휴(麻혹은 麻沐 : 4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B.C.785)에 아들 다두(多斗 : 46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축년(B.C.752)에 아들 나이(奈伊 : 47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B.C.722)에 아차음(次音 : 4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676에 아들 불리(不理 : 49대)가 즉위했고, 그도 죽을사년(B.C.676?)에는 아들 여을(餘乙 : 50대)이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갑술년(B.C.647)에 엄루(奄婁 : 51대)가 즉위했다. 무인년(B.C.643),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아들 감위(甘尉 : 52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무신년(B.C.613)에 아들 술리(述理 : 53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무오년(B.C.603)에 아들 아갑(阿甲 : 54대)이 즉위하였다. 경오년(B.C.591)에 천왕은 사신 고유(高維)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像)을 나누어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아갑이 죽고 계유년(B.C.618)에 고태(高台 : 55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蘇台爾 : 56대)가 즉위(B.C.574)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556)에 아들 마건(馬乾 : 57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B.C.545)에 한(天韓 : 5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인년(B.C.535)에 아들 노물(老勿 : 59대)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B.C.520)에 아들 도을(道乙 : 60대)이 즉위했다. 계미년(B.C.518)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風)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켰다. 도을(道乙)이 죽고 병신년(B.C.505)에 아들 술휴(述休 : 61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B.C.471)에 아들 사양(沙良 : 62대)이 즉위하였고, 사양이 죽고 무자년(B.C.453)에 지한(地韓 : 63대)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B.C.438)에 아들 인한(人韓 : 64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B.C.400)에 아들 서울(西蔚 : 65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B.C.375)에 아들 가색(哥索 : 6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B.C.341)에 아들 해인(解仁 : 67대)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山韓)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B.C.340)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했다. 임오(B.C.339)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기후(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韓)의 병력과 함께 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B.C.323년)에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箕詡 : 69대, 수유족)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 : 70대)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B.C.290)에 아들 기석(箕釋 : 71대)이 즉위했다. 이 해 각 주(州)와 군(郡)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B.C.282)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B.C.27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B.C.251)에 아들 기윤(箕潤 : 72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232)에 아들 기비(箕丕 : 73대)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箕丕)는 종실의 해모수(解慕漱)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箕丕)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 : B.C.221)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 고조선의 삼 단계 도읍시대

 

1.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蘇台)(B.C.2333~1286 : 1048년간)

2. 백악산 아사달(農安․長春) 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 : 860년간)

3.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소도경전본훈

蘇塗經典本訓

 

신시 때에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있었는데 대호(大皥)와 동문으로 학문을 배우고 도를 이미 통하여 바야흐로 저(渚)와 풍산(風山) 사이에서 노닐으니 그 이름널리 알려졌다. 아사달에서 제천(祭天)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대일(大一) 그 극(極)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良氣)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 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三一)은 그 체(體)는 일(一)이요, 그 용(用)은 삼(三)이라.

혼묘(混妙)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體)와 용(用)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大虛)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神)의 형상(像)이고

대기(大氣)의 오래도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神)의 화(化)로서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 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衷)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圓覺)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 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圓)은 일(一)이 되어 무극(無極)이고

방(方)은 이(二)가 되어 반극(反極)이며

각(角)은 삼(三)이 되어 태극(太極)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一神)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性)은 광명(光明)에 통(通)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은 이를 신시(神市)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한역(桓易)은 우사의 관리로부터 나왔다. 때에 복희(伏羲)는 우사가 되어 여섯 가축을 기르게 하였으또 신룡(神龍)이 해를 쫓는 것을 살펴 하루에 열두 번 색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에 한역(桓易)을 만들었다. 한(桓)은 곧 희(羲)와 같은 뜻이고 역(易)은 옛날 용(龍)자의 본 글자다.

 

자부선생은 발귀리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 신명하여 도를 얻어 날아 오르사, 일찍이 해와 달을 측정하여 이를 정리하고 다음으로 오행(五行)의 수리를 따져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저작하니, 이것이 칠성력의 시작이다. 뒤에 창기소(蒼其蘇)또 그 법을 부연하여 이로써 오행치수의 법을 밝혔다. 이 역시 신시황부(神市黃部)의 중경(中經)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인(虞人) 사우(姒禹)는 회계산(會稽山)에 이르러 조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紫虛仙人)을 통해 창수(蒼水) 사자(使者) 부루를 뵙기를 청하여《황제중경(黃帝中經)》을 받으니 바로 신시황부의 중경이다. 우(禹)임금이 이를 취하여 쓰니 치수에 공이 있었다.

 

한역(桓易)의 체(體 : 모습, 외형)는 원(圓)이며 용(用 : 쓰임)은 방(方)이다. 모양 없음으로부실(實)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理)다. 희역(羲易)의 체(體)는 방(方)이며 용(用)은 원(圓)이다. 모양 있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體)이다. 지금의 역(易)은 서로 체(體)이면서 용(用)이니, 스스로 원(圓)이면서 원(圓)하고, 스스로 (方)이면서 방(方), 스스로 각(角)이면서 각(角)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命)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圓)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허무의 공(空)일 뿐이니 어찌 체(體)가 있다 하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본래 체(體)가 없으면서 스물 여덟 가지의 별자리를 체(體)로 한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이름을 갖고 이름 있는 것은 곧 모두 수(數)를 가진다. 수(數)가 있으면 곧 모두 힘을 가진다. 이미 수(數)가 다고 말함은 곧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틀리는 바 있음이고, 또 힘이 있다고 함은 곧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구별이 있음이니, 고로 천하의 사물은 말(言)이 있으면 모두 있는 것이고, 말(言)이 없으면 곧 없는 것이다.

 

《천부경》은 천제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은 역시 일찍이 신지(神誌)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거늘 본조(本朝)에 이르러 뜻을 오로지 유가(儒家)의 글에 두더니 다시 조의(皂衣 : 皁의 속자)더불어 의논하여 보존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라! 때문에 특히 표하여 이에 내어 뒤에 오는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天 符 經

 

一始無始一析三極無

盡本天一一地一二人

一三一積十鋸無匱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妙

衍萬往萬來用變不同

本本心本太陽昂明人

中天地一一終無終一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 온 하나이다.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 세 갈래로 이루어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변함도 없고 다함도 다. 하늘의 본체가 첫 번째로 이루어지고,하늘을 바탕으로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체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변함없는 하나가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의 완성되면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새로운 하나는 한정도 없고 테두리도 없다. 새로운 하나바로 형상화된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과 형상화된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면서 음과 양, 겉과 속, 안과 밖이 생겨난다. 하늘에는 밤과 낮이 있고 땅에는 물과 뭍있으며,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어서 이의 조화를 통해 천지는 운행을 하고 사람과 만물성장․발달해 나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과 사람이 원래의 근본상태, 형상화되기 이전의 상태, 형상화된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 이 네 단계를 거우주만물완성되며, 우주 만물은 본래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다함이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진다. 이렇게 마음을 밝힌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끝이 없는 하나이다. (참고)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義)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삼청궁(三淸宮)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名華)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推演)하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神仙陰符)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주나라․진나라 이래로 도가(道家)의 무리들의지하는 바가 되어 민간에 연단복식(鍊丹服食)하는 자가 생기고 허다한 방술(方術)의 설이 어지럽게 마구 나와서 의혹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는 망했지만 역시 회사(淮泗)의 출신이기에 평소 진나라을 배반할 뜻이 있었으니, 이에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는다고 말로는 하고 도망쳐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의 기이(紀伊)에 서불(徐巿)이라는 제명(題名)의 각자가 있다. 이국(伊國)의 신궁(新宮)에는 서불(徐巿)의 묘지요 사당이 있다. 서복은 일명 서불이니 불(巿)은 복(福)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삼일신고》는 본디 신시개천의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5장으로 나뉘어져 천신조화(天神造化)의 근원과 세상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이다. 그 일(一)에는「허공은 일(一)로 함께 시작되지만 같지 않고, 일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끝을 같이 함이 없다. 밖은 허하고 안은 공한 가운데 항상함이 있다」라고 하였고, 그 이(二)에서는「일신(一神)은 헛 것은 가고 실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듯하나 삼신(三神)이 대제(大帝)로서 실로 공이 있음이라」하였으며, 그 삼(三)에서「천궁(天宮)은 진아(眞我)의 거처하는 곳이라. 만 가지 착함을 스스로 갖추어 영원토록 쾌락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 사(四)에서는,「세계의 뭇별은 해에 속해 있으니 든 백성들과 큰 인물들이 여기에서 태어난다」라고 하였다. 그 오(五)에서는,「사람․물건은 같이 삼신(三神)에게서 나와 하나의 참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대아(大我)라 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은《삼일신고》를 가지고 도가의 제사지낼 때 올리는 말씀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한국(桓國)은 한웅으로부터 개천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신고(神誥)를 조술하였으며, 산하를 널리 개척하였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오호라, 신시는 천황께서 세우신 이름으로 이제 이미 삼신상제께서 열으신 끝없는 큰 은혜를 받아 웅(熊)․호(虎)를 잘 다스려서 이로써 세상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천신을 위해, 홍익(弘益)의 뜻을 높이 하고, 아래로는 사람 세상(人世)을 위해 무고(無告)의 원(怨)을 푸나니 이에 사람은 절로 하늘에 순종하여, 세상엔 거짓과 망령됨이 사라지니, 하는 바 없이도 절로 다스려지고 말없어도 절로 교화되었다.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여 서로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서로 굴복함을 귀하게 여겼으며 목숨을져 남의 위급을 구제하였다. 이미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고루 나누어졌지만 또 권리를 평등하게 하였다. 함께 삼신에게 돌아가 의지하여 서로 기쁘게 맹세하고 원을 세웠다. 화백(和白)으로 의견을 모으고, 서로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믿음을 지켰으며, 힘을 모일을 쉽게 하였고 직업을 나누어 서로 도왔으니 남녀가 모두 그 직분이 있었고 늙은이와 어린아이도 똑 같이 복과 이익을 누였다.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어 재판하는 일도 없었으며 나라들끼리 서로 침입하여 빼앗는 일도 없었으니 이를 일러 신시태평지세(神市太平之世)라고 한다.

 

삼일신고(총366자)

 

제1장 허공(36자)

 

帝曰爾五加衆아 蒼蒼이 非天이며 玄玄이 非天이라 天은 無形質하며 無端倪하며

제왈이오가중 창창 비천 현현 비천 천 무형질 무단예

無上下四方하고 虛虛空空하야 無不在하며 無不容이니라.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무부재 무불용

 

제 가로되,「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만 것이라고 하늘인 것은 아니다. 하늘은 얼굴(形)과 바탕(質)이 없으며 첫끝(端)과 맞끝(倪)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하며 속은 텅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일신(51자)

 

神은 在無上一位하사 有大德大慧大力하사

신 재무상일위 유대덕대혜대력

生天하시며 主無數世界하시고 造兟兟物하시니

생천 주무수세계 조신신물

纖塵無漏하며 昭昭靈靈하야 不敢名量이라

섬진무루 소소영영 불감명량

聲氣願禱하면 絶親見이니 自性求子하라 降在爾腦시니라.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신은 위 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없는 세계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티끌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으로부터 씨를 찾으라. 너의 머리끝에 내려 계시나니라.

 

제3장 천궁(40자)

 

天은 神國이라 有天宮하야 階萬善하며 門萬德하니 一神攸居오

천 신국 유천궁 계만선 문만덕 일신유거

群靈諸哲이 護侍하니 大吉祥大光明處라. 惟性通功完자라야 朝하야 永得快樂이리라.

군령제철 호시 대길상대광명처 . 유성통공완 영득쾌락

 

천은 신국이라, 천궁(天宮)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군령(群靈)과 선관((諸哲)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 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세계(72자)

 

爾觀森列星辰하라 數無盡하고 大小明暗苦樂이 不同하니라.

이관삼열성신 수무진 대소명암고락 부동

一神이 造群世界하시고 神이 勅日世界使者하사 轄七百世界하시니 爾地自大나 一丸世界니라.

일신 조군세계 칙일세계사자 할칠백세계 이지자대 일환세계

中火震盪하야 海幻陸遷하야 乃成見象하니라.

중화진탕 해환육천 내성현상.

神이 呵氣包底하시고 煦日色熱하시니 行翥化游裁物이 繁殖하니라.

신 가기포저 후일색열 행저화유재물 번식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이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라. 일신께서 뭇 세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日世界)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 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울리어서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되었고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느니라. 일신께서 김(氣)을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을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제5장 인물(167자)

 

人物이 同受三眞하니 曰性命精이라 人은 全之하고 物은 偏之니라.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 인 전지 편지

眞性은 無善惡하니 上哲이 通하고 眞命은 無淸濁하니 中哲이 知하고

진성 무선악 상철 통 진명 무청탁 중철

眞精은 無厚薄하니 下哲이 保하나니 返眞하야 一神이니라.

진정 무후박 하철 보 반진 일신

惟衆은 迷地에 三妄이 着根하니 曰心氣身이라 心은 依性하야 有善惡하니 善福惡禍하고

유중 미지 삼망 착근 왈심기신 심 의성 유선악 선복악화

氣는 依命하야 有淸濁하니 淸壽濁妖하고 身은 依精하야 有厚薄하니 厚貴薄賤이니라.

기 의명 유청탁 청수탁요 의정 유후박 후귀박천.

眞妄이 對作三途하니 曰感息觸이라 轉成十八境하니 感엔 喜懼哀怒貪厭이오

진망 대작삼도 왈감식촉 전성십팔경 희구애노탐염

息엔 芬蘭寒熱震濕이오 觸엔 聲色臭味淫抵니라.

분란한열진습 촉 성색취미음저

衆은 善惡淸濁厚薄을 相雜하야 從境途任走하야 墮生長消病歿의 苦하고

선악청탁후박 상잡 종경도임주 타생장소병몰

哲은 止感하며 調息하며 禁觸하야 一意化行하야 返妄卽眞하야 發大神機하나니 性通功完이시니라.

지감 조식 금촉 일의화행 반망즉진 발대신기 성통공완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三眞)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렸고 진(眞)과 망(妄)이 서로 삼도(三途)를 지었다.

 

가로되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 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上哲)이 통하고,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고,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되 심(心)과 기(氣)와 신(身)이라. 심(心)이 성(性)에 의지하녀 선악(善惡)을 이루나니 선(善)은 복(福)이 되고 악(惡)은 화(禍)가 된다. 기(氣)가 명(命)에 의지하여 청탁(淸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가고 탁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심(心)이 정(精)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厚薄)을 이루니라. 두터움(厚)은 귀(貴)하고 엷음(薄)은 천(賤)하다.

 

가로되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라. 굴러 열 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쁨․두려움․슬픔․성냄․탐함․싫음이요, 숨쉼에는 향내․술내․추위․더위․개․습기요, 부딪침에는 소리․빛․냄새 맛․음탕․다침이니라. 뭇 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境途)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 달문(達門) 때의 사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 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제천(上古祭天)의 참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으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신지비사(神誌秘詞)》를 가지고 도참(圖讖) 성점(星占)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數)를 추리하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진단구변도(震檀九變圖)》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口訣)로 예언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말하기를「저울대는 부소량(扶蘇樑)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 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 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의 하르빈이다. 또「저울의 추오덕지(五德地)라 함은 번한의 옛 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湯池堡)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熊伯多)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 가지 형석(衡石)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함께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 복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행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행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추궁함과 이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南海縣) 낭하리(浪河理))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옛 조각있다. 부여(夫餘) 사람 왕문(王文)이 쓴 바의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 부루의 오행(五行)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殷學 : 갑골문자)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유기》에「신획(神劃)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곧 그 획은 직일(直一)과 곡이(曲二)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管制)의 모양도 있다. 그 형과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대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고로 신인(神人)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참된 가르침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에 있고 노유(老幼)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義)에 복종한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理化)의 한 길이다.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되「대시(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氣)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氣)는 곧 극(極)이다. 극(極)은 즉 무(無)다. 저 하늘근원은 곧 삼극(三極)을 꿰뚫어 허(虛)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宮)곧 빛이 모이는 곳, 만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一神)은 능히 그 허(虛)를 체(體)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一氣)는 즉 천(天)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中一)의 신이 있어 능히 삼(三)이 된다. 삼신(三神)은 곧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의 신이다. 일기(一氣)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造), 가르치고(敎), 다스리(治) 삼화(三化)의 신이 된다. 신(神)은 기(氣)이고 기는 곧 허(虛)이며, 허는 즉 일(一)이다. 때문에 땅에는 삼한(三韓)이 있으니 진(眞)․변(弁)․마(馬)의 삼경(三京)의 한(韓)이다. 한은 곧 황(皇)이며 황은 대(大)이다. 대는 곧 일(一)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三眞)이 있다. 성(性)․명(命)․정(精)의 삼수(三受)의 진(眞)이라 한다. 진(眞)은 즉 충(衷)이고, 충은 곧 업(業)이고, 업은 곧 속(續)이며, 속은 즉 일(一)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眞)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一)은 즉 삼(三)이라고 하는 것은 선(善)에 대합(大合)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一)로 되돌아오는 미(美)이다. 곧 성(性)의 선(善)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命)의 청(淸)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精)의 후(厚)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眞)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 한다. 이 물듦을 망(妄)이라 하고 선(善)을 불식(不息)이라 한다. 그 식(息)을 악(惡)이라 하고 청(淸)불산(不散)이라 한다. 산(散)을 탁(濁)이라 한다. 후(厚)를 불축(不縮)이라 한다. 축(縮)을 박(薄)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執一含三> 이유는 곧 그 기(氣)하나로 하며 그 신(神)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 하는 이유는 역시 신(神)을 셋으로 하고 기(氣)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는 자의 체(體)는 일기(一氣)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智)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그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모두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會)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시(神市)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蚩尤)에게 투전목(鬪佃目)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書算)이 있었다. 그 산목(算木)이라 하는 것은 一二三≣ l ⊢⊩⊪llll- X이다. 또 전목은 이다. 단군 가륵 제2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옥진총담(玉塵叢談)에는「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삼국사기》엔 「헌강왕 12년의 봄 북진(北鎭)으로부터 적국인(狄國人)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新羅國)화통하고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서 저명한 사람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吳越)에 이르렀다. 월씨(越氏)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東國寒松亭)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境浦)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 마리 바다 갈매기여!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왜(倭)․진(辰)․여국(餘國)은 혹은 횡서(橫書)하고 혹은 결승(結繩)하고 혹은 계목(楔木)한다」고 있다. 오로지 고려만이 영법(穎法)을 모사했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模刻)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을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세상전하기를「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紫府)에겐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蚩尤)에게는 화서(花書)가 있어, 투전문(鬪佃文)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伏羲)에겐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흑수․청구․구려에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夫餘) 사왕문(王文)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사용했다. 진나라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를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이다. 진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은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王文)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神市)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삼일신고》의 구본에는 분장(分章)이 없고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서 1장에 허공, 2장에 일신, 3장에 천궁, 4장에 세계, 5장에 인물이라 했다. 저 허공을 하늘의 질량이라 하고, 일신을 하늘의 주재(主宰)라 하고, 천궁을 하늘의 조화를 갖춘 곳이라 하고, 세계를 만세라 하였다. 인물은 곧 시(市)이다. 인물은 우주의 삼계의 원훈(元勳)이다. 대저 태백진교(太白眞敎)는 천부(天符)에 근원하여 지전(地轉)에 합치고 또 사람의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정사를 일으킴에 있어 화백(和白)보다 앞섬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책화(責禍)보다 선한 것이 없다.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여 거짓이 없고, 지전을 취하여 게으름이 없고, 인정에 합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천하의 공론이 어찌하여 한 사람인들 아니라 할 자 있으리요? 신고(神誥)의 오대(五大) 지결(旨訣)도 역시 천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신고도 역시 천부 가운데 하나의 이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자(字)의 근원이 오래됨을 알았다. 글자의 의미는 크고도 크도다.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牧隱) 이색(李穡) 휴애(休崖) 범세동(范世東)은 모두《천부경》을 주해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의 풍속은 한자(一字)라 할지라도 정주(程朱)에 합치지 않으면 뭇 화살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을 정도로 유가(儒家)의 예봉은 바야흐로 번득거린다. 저 천경(天經)과 신고(神誥)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가 있으리요?

 

신시의 음악을 공수(貢壽)라 하거나 공수(供授)라 하기도 하고 또 두열(頭列)이라고한다. 무리를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백호통소의(白虎通疏義)》에서는 조리(朝離)라 했고《통전악지(通典樂志)》에서는 주리(侏離)라 하였고《삼국사기》는 도솔(兜率)이라 했다.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를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있음이라. 단군 부루 때 어아(於阿)의 악(樂)이 있었으니, 대저 신시의 옛 풍습으로, 삼신을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즉 가로대, 대조신(大祖神)을 삼신이라 부르고 하늘의 주재자라고 하였다. 고로 태양으로써 의상(儀象)을 삼고, 광열로써 공능(功能)으로 삼고, 생화발전(生化發展)으로써 마음을 삼고, 화복보응(禍福報應)으로써 정의(正義)로 삼는다. 이때부터 풍속은 참전(參佺)으로 계(戒)를 가졌다, 예복에도 법칙이 있었으니 의관한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잘 쏘는 자는 반드높은 자리를 얻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짐을 수업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가상의 악귀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제사는 반드시 조심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알게 하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스스로 여러 목숨 가진 것들을 가까이하여 교화하였다. 안으로는 닦고 겉으론 겸손하여 모든 것이 때알맞아 배달국의 영광은 백백천천년이 되게 쌓여서 높아질 것이니, 이 커다란 은덕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을 손가?

 

옛날에는 제천에 무천(舞天)의 악(樂)이 있었다.《요사(遼史)》예지에 말하는 바요천(繞天)과 같은 것은 이것을 말한다. 이 제사는 반드시 먼져 생을 상징시켜 평상시 살아있을 때처럼 정성을 드리려고 한다. 신주를 세우고 상을 차리고 공물을 올리는 것은 곧 친견을 표하려 하는 의식이다. 멀리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근본에 보답함은 곧 금생을 거듭하여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코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개원(開原)이며 역시 평양(한반도의 평앙이 아님)이라고도 한다. 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삼조선이란 분권관경(分權管境)의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큰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였으니 사람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연나라의 침입이래 전화가 여러 차례 있어 왔다. 해를 거듭하여도 일은 잘 풀리지 않으니 치화(治化)를 잃고 국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어느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고 다스림을 크게 바꾸고자 하여, 천제묘의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달도록 하였다. 3․7일을 기한으로 연령순으로 서로 술을 마시면서 서로 권하여 덕화를 이루자는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다. 이 모임을 구서지회(九誓之會)라 하였고, 그 때 서로 맹세한 내용을 ‘구서지문(九誓之文)’이라 하였습니다.

 

한 번 절한 뒤에 무리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집에서 효도를 다하라. 집에 부모 처자가 있으니 정성스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헤아려 우애있게 하고, 성심으로 제사를 받들어 한 뿌리 근본에 보답할 것이며, 손님을 공손히 접대하여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자제를 가르침에 게으름이 없도록 하여 영재를 기르니, 이 모두가 인륜교화의 큰 덕목이라. 이 같은 효와 자비와 순종과 예<孝慈順禮>를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절하고 서약하여 말한다.

모름지기 형제 사이에는 우애 있도록 힘쓰라. 형제란 한 부모에서 나뉜 바이니, 형이 좋아하는 바는 아우도 좋아하고 아우가 싫어하는 것은 형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물대하여 좋고 싫음은 나와 남이 같을 것이니, 나의 몸에서 사물에까지, 가까운 것에서 소원한 것에까지 미쳐야 하느니라. 이 같은 도리로서 향리와 나라를 헤아리면 향리와 나라가 흥할 것이며, 천하에 미치면 천하가 교화될 것이라. 이 같은 우애와 친목과 어짐과 헤아림<友睦仁恕>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절하고 서약하였다.

모름지기 스승과 벗에는 믿음을 다하라. 스승과 벗은 도와 법이 서는 곳이니, 덕과 의를 서로 연마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여 학문을 세우라. 사업의 성취는 두 스승과 벗의 힘이로다. 이 같은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근면함<信實誠勤>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 절하여 맹세한다.

모름지기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라. 나라는 선왕이 세우신 바요 백성들이 먹고사는 곳이라. 국정을 쇄신하고 나라의 부를 늘리고 국토를 수호하고 국권을 널리 펼쳐 국세를 굳세게 하고 역사를 빛냄은 모든 나라의 미래상이라. 이같은 충성과 의로움과 기개와 절개<忠義氣節>를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모름지기 뭇 사람들에게 겸손을 다하라. 뭇 사람들은 곧 천제의 백성으로 나와 세 가지 참됨<三眞>을 받았으니 주체상의 근본이요 국력의 원천이라. 위가 겸치 않으면 아래가 떠나고, 우측이 겸손치 않으면 좌측이 벗어나고, 앞이 겸손치 않으면 뒤가 물러가고, 아래가 겸손치 않으면 위가 싫어하고, 좌측이 겸손치 않으면 우측이 떨어지고, 뒤가 겸손치 않으면 앞이 소원해지리라. 이제 겸손하고 양보하고 서로 존중하여 무리를 모아 힘을 통하면, 밖으로는 업신여김이 그칠 것이요 안으로다스림을 이루어질 것이로다. 이 같은 겸손과 양보와 공경과 삼가함<遜讓恭謹>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여섯 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모름지기 정사는 밝게 알도록 힘쓰라. 정사란 다스림과 혼란에 관계되는 바이니, 풍백(風伯)은 약속을 세우고, 우사(雨師)는 정치를 베풀고, 운사(雲師)는 형벌을 행하고, 각기 직권있으니 서로 침범하여 넘어서지 않는도다. 이제 식견이 고매해지고 언로(言路)를 널채택하고 기예를 연마하고 경험을 두루 쌓아 가면, 나라 일은 고르게 될 것이요, 백성의 살림살이는 펴질 것이로다. 이 같은 밝음과 앎과 결단과 식견 <明知達見>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일곱 번째 절하여 맹세하여 말하길,

모름지기 싸움터에서는 용맹하도록 하라. 싸움터란 나라의 존망이 결정나곳이니, 나라가 없다면 임금과 아비가 깍은 나무 인형이 될 것이고, 주인이 서지 않는다처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리라.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함이 모두 나의 길이 아님이 고, 세상에 가르침을 전함이 또한 나의 일이 아님이 없도다. 나라 없이 살고 주인 없존재함이 정녕 나라있어 죽고 주인 있어 삶을 마치는 것과 같겠는가. 이제 나를 비우고 희생하는 풍조가 확연하고, 규제와 정숙함으로 무리가 스스로 잘 다스려지고, 상과 벌이 반드시 바르고 공평하게 행해지고, 나와 남이 또한 신의로서 서로 도우니, 뭇 사람들을 양육하고 능히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리라. 이 같은 용기와 담력과 위엄과 의협<勇膽武俠>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여덟 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모름지기 몸가짐이 청렴하기를 힘쓰라. 행동이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이 저절로 어두워지고 능히 청렴하면 신명이 저절로 통하리니, 치우쳐 사사로운 이익을 쫓으면 반드시 습한 병을 앓을 것이고 독선적으로 교만해지면 반드시 부패할 것이다. 어리석게도 스스로 만족하니 자신과 남을 해치고 인습이 돌아 쌓이면 그 곳에 빠져 구제받지 못하라. 이 같은 청렴과 곧음과 고결함과 맑음<廉直潔淸>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모름지기 맡은 일에는 의로움을 다하라. 사람이 맡은 바 일을 하여 일을 성취하는 데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하나라도 의롭지 못함이 있다면 순식간에 극진함을 잃게 되어 업신여김을 당하고 헐뜯겨 무너질 것이고, 만약 정의롭다면 공신력을 리니 누가 업신여기고 헐뜯고 침탈하겠는가. 의로움이란 무리의 힘이 일어나는 바이고 바른 기운이 나오는 바탕이니, 거두면 한 몸에 갈무리 될 것이고 펼치면 천지에 그득할 것이라. 이 같은 바름과 의로움과 공평함과 도리<정의공리>를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 공동의 이익에 힘쓰며, 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 공덕(公德)에는 밝았다. 선업은 권하고 과실은 바로잡고 스스로 예의 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단군세기》에서 말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 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揖)을 한 후 꿇어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 읍(揖)은 이를 가리켜 취(聚)라 한다. 마음을 모아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순(順)이다. 기(氣)를 순(順)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배(俳)는 헌(獻)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獻)은 또 현(現)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叩頭)라 한다. 고두(叩頭)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참전계경》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찍이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天書)를 얻으니 이를《참전계경》이라 했다.「대시(大始)에 철인(哲人)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사(事)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條)가 있나니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보(報)․응(應)이라 한다. 성(誠)은 충심(衷心)이 발하는 것으로서 진실(眞實)에서 나오는 정성(精誠)을 관장하는 곳이라, 6체(體) 47용(用)이 있고, 신(信)은 천리의 필합(天理之必合)으로서 인사의 필성(人事之必成)이라, 5단(團) 35부(部)가 있다. 애(愛)는 자심의 자(慈心之自然)으로 인성의 본질(仁性之本)이다. 6범(梵) 43위(圍)가 있다. 제(濟)는 덕의 겸선(德之兼善)으로서 도가 잘 미치는 것(道之賴及有)이라, 4규(規) 32모(模)가 있다. 화(禍)는 악이 부르는 것(惡之所召有)이다. 6조(條) 42목(目)이 있다. 복(福)은 선의 여경(善之餘慶有)이다. 6문(門) 45호(戶)가 있다. 보(報)는 천신(天神)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惡人以禍報) 선인에 보하는 데 있어서는 복으로 한다(善人以福有). 6계(階)와 30급(及)이 있다. 응(應)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惡受惡報)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善受善報有). 6과(果) 39형(形)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으나 척강(陟降)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서람이 계(戒)를 받음이라.」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신시이화(神市理化)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經)을 삼고 5사를 위(緯)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弘益濟物)하였으니, 참전(參佺)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佺戒)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보냐?」

 

 

고구려국 본기

高句麗國本紀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 곳이다.《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 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管境)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239)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왕정(秦王政)의 8년이다.

 

고리군(藁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解慕漱)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弗離支)는 고진(高辰)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衛滿)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弗離支)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河伯女) 유화(宥和)를 만나 그녀맞아 들여 고주몽(高朱蒙)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년(B.C.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熊心山)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외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 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년(B.C.27)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B.C.26)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2대, B.C.19~A.D.17)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大武神) 열제(3대, A.D.18~43)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했는데 오직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山上帝 : 10대, A.D.197~226)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 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되,

 

「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 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 교화이다. 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을파소(乙巴素)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요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皁衣)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애하여 몸을 바친다. 일찍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神市)이화(理化)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되다. 때문에 참전(參佺)의 계(戒)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道)는 이로써 천신(天神)을 섬기고 덕(德)은 이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는 이런 말이 천하에 있음을 안다. 삼신일체(三神一體)의 기(氣)를 받아 이를 나누어서 성(性)․명(命)․정(精)을 얻으니 광명(光明)을 마음대로 하고 양연하여 움직이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道)는 이에 통한다. 체(體)가 삼물(三物)인 (德)․혜(慧)․력(力)을 행하고 삼가인 심(心)․기(氣)․신(身)이 되며 즐겨 도(三途)인 감(感)․식(息)․촉(觸)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이화(在世理化)하고 조용히 경도를 닦아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한국은 5훈(訓)을, 신시는 5사(事)를, 조선은 5행6정을, 부여는 구서(九誓)를 말한다. 삼한의 통속도 역시 5계(戒)가 있어 효(孝)․충(忠)․신(信)․용(勇)․인(仁)이라 한다. 모두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올바름과 공명함을 가지고 무리를 정리함에 뜻이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동천제도 역시 단군이라 한다. 한맹의 절기가 될 때마다 삼신을 평양에서 제사하맞이한다. 지금의 기림굴은 즉 그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했다. 크게 맞이하는 의식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졌다. 구제궁에 조천석이 있었으니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택되었으니 국인이 그 선출됨을 긍지로 여기는 바였다. 그렇지 않다면 영광으로써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광개토경호태왕(19대 광개토(廣開土), A.D.392~412)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월했다. 사해안에서는 모두 열제(광개토대왕)라고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등극하고 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지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어아의 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摩璃山)에 이르러 참성단(塹城壇)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슬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 제천하고 돌아오셨다. 때에 곧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馬韓)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 가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 바로 구야(九耶) 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加羅)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케 했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 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 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忽本)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치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여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 구주(九州)의 웅본성(구마모또 시로)이 그것이다.

 

왜는 회계군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에 이르른다. 또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야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쯔시마, 가라산, 지 가도로부터 비로소 말로호자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 한국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재계하기 사흘 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 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고 한다.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며 산월 과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옮겨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에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단주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장수홍제호태열제(20대 장수(長壽), A.D.413~491)는 건흥(建興)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북연(北燕) 시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

 

문자호태열제(21대 문자명(文咨明), A.D.492~518)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 제, 노, 오, 월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25대 평원(平原, A.D.559~589)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대 영양, A.D.590~617)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 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케 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야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皂衣)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공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되「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겼는가?」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 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되,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 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 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고 크게 깨달았다. 3월 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적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수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遼東城)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도 또한 엄명하여 이를 추격케 하였다.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밀어붙여 한쪽은 현도로부터 태원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에 쳐들어가 이를 다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했다. 무두 옘처럿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프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산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정부이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수원호태열제(26대 영양, A.D.590~617)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위충을 잡아 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百濟)는 병력으로써 제(齊)나라, 노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지를 평정한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시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이니, 산동 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 왕세적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고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 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老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 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道敎)를 강(講)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 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라 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27대 영류(營留), A.D.618~641)를 내어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28대 보장(寶藏), A.D642~668)로 삼다. 소문은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 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하다. 세민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 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 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 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 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필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이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깔)로 에워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해도 위험을 이와 같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 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 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 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 이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 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져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 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 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 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취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빛으로 흘러라.

바람 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 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연타발(延佗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嫡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努)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浿)․대(岱)의 땅이 기름지고 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召西努)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臣) 등이 듣기는 마한(馬韓)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溫祚)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백제(百濟)라는 이름은 백 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서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하하여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九州)와 대마도(對馬島)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사>에서 서역(西域)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 듯 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 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이명(李茗)의 <유기(留記)>는 말한다. '옛날 백제의 장사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벌어 돌아왔다. 그 곳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을 따라와 내왕했던 바, 날로 교제하여 친밀해졌다. 그렇지만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통제되고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해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乙密臺)가 있는 바, 세상에선 말하기를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뽑히어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파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는 풍속을 고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노래에서 말한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위라는 것은 그래서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지

사람 가운데 하늘도 땅도 하나일 뿐이고

마음은 신과 더불어 근본에 닿나니

하나이기 때문에 빈 것도 찬 것도 같은 것이며

근본에 닿기 때문에 신이라 함이나 사물이라 함이 둘이 아닐 뿐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은 참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 때문에 세 가지 참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 때문에 일신은 곧 셋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 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공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혼의 생을 낳고 각을 낳고 영을 낳음이여

일신의 그윽한 거처는 천궁이 되네

삼혼은 그래서 지혜와 지혜와 생을 함께 닦을 수 있고

일신은 그래서 모습과 혼을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 착하게 나라를 이룸이여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그래서 다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을밀선인은 일찍이 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를 비워 사물이 있게 하고 몸을 버려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의 사표가 됨이니, 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이다. 역시 사람들의 존경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 했으며, 바로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대진국본기

大震國本紀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大仲象)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A.D.699)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진숙열황제라 하였다.

 

태자 조영(祚榮, 2대 태조(太祖), A.D.699~719)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00리가 개척되었다. 천통 21년(A.D.719)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성무고황제라 하였다. 태자 무예(武藝, 3대 광종(光宗), A.D.719~738)가 즉위하였다. 개원하여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십리에서 황수를 굽어본다. 이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렀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케 하였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新羅)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해설)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 사람 셋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 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였다. 서압록하는 고리(高離)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欽茂, 4대 세종(世宗), A.D.738~794)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이듬해엔 태학(太學)을 세우고 천경(天經) 신고(神誥)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弘益)하는 교화(敎化)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해설)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逐軍帥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

대흥(大興) 45년(A.D.782)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李正己)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우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52년(A.D.789) 장수들은 군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A.D.793)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고를 모셨다.

 

대흥 57년(A.D.794)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세종(世宗) 시호(諡號)를 광성문황제라했다. 국인은 그의 족제(아우) 원의(元義)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A.D.794)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여(華璵, 6대 인종(仁宗), A.D.794~795)를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이듬해(A.D.795)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인종(仁宗) 시호(諡號)를 성(成)황제라 하였다. 황숙(皇叔)인 숭린(崇璘, 7대, A.D.795~809)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穆宗) 강(康)황제라 한다. 의종(毅宗, 8대) 정(定)황제 원유(元瑜), 강종(康宗, 9대) 희(僖)황제 언희, 철종(哲宗, 10대) 간(簡)황제 명충(明忠)을 지나 선(宣)황제 인수(人秀, 11대 성종(聖宗), A.D.818~832)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으로는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이라 하고 모란의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로는 국도로부터 으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 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여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 왜, 신라, 거란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이로써 성인흥취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오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 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애제인 청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히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받을 것을 걱정하다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 간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伊國)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安羅)에 속한다. 안라(安羅)는 본래 홀본(忽本)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九黎)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 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 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 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 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 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 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挹婁)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 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말갈(靺鞨)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여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하였다. 중상(仲象)이 죽고 아들 조영(祚榮)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었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乞乞仲象)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牝)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이 월(越)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제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윤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이라고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보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 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을 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며 대비를 해야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저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정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 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장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전하는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馬韓)의 땅을 남김없이 모두 남김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988~989)으로부터 순화(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왕황으로 삼았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노상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이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천 필을 할 것을 약속케 했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고려국본기

高麗國本紀

 

 

태조 신성대왕의 천수 2년 서울을 송악의 남쪽으로 정했다. 25년 어제훈요를 발표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 예악이 빠짐없이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방을 달리하고 땅을 달리하는 사람은 성품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고 적어도 반드시 같을 순 없는 것 아닐까?'

 

태봉국의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이라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의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임성 사암 모잠 대형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후고구려왕으로 삼고 원조를 신라에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두었다가 뒤에 개명하여 보덕왕이라 했다. 신문왕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을 삼고 그의 족자 대문을 금마저에 살게 하였는데 모반하여 왕을 칭했기 때문에 주살되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하다가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신아의 평정을 받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대진국 명종 경황제의 천복 9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옥상에는 흰빛이 비추이고 긴 무지개의 끝은 하늘에 닿은 듯 보였다. 신라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 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이를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뇌물을 쓴 후에 애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 10세에 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했다. 장년이 되자 방일하여 원래부터 계율에 따르지 않으며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어느 때 바루를 들고 재를 모시러 가는데 까치가 부적 하나를 물어서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이를 펴본즉 왕이라는 글자가 있는지라,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고생이 많았거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고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 하나를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대를 물려서 원망을 갖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번번이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궁예는 죽주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훤이 업신여겨 이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래 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어 북원의 적, 양길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맡겼다. 병력 100기를 나누어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라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부르게 했다. 힘들고 쉬운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천복 27년 태수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왕 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나의 장자 건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상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에 따랐다. 때에 이훤은 병을 무진주에서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즉 마한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이제 나는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려고 한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이야.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

 

라고 했다.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건원하여 무태라 하였다. 남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화상이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쳤다. 궁예는 마음속으로 신라를 합치고자 그 서울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치며 신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 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경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였는데 승 석총은 말하기를 “모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천수 원년 무인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의 제장에게 추대되어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거를 들었다'하고 외치게 하니,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먼저 궁문에 이르니 북 치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 여명이라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했다. 여기에서 태봉왕 궁예는 변을 듣고 평복을 한 채 문을 나서 도망하다가, 얼마 못 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니 봉산을 격파하여 우리의 선봉을 아 부쳤다. 성종 문의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 이는 항복을, 어떤 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는데, 중군의 서희만이 홀로 말한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돌려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 상견의 예를 청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하니 서희는,

 

“양국의 대인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손녕이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서희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여진을 쫓아 우리 옛 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지 않을손가.“

 

하니 말솜씨가 강개한지라 손녕은 강변함이 쓸모 없음을 알고, 병을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송별했다.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고 격파하여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보내 표를 올리고 축하하게 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은 선정전에 들어가 이에 대하여 극론했다.

 

“윤관과 오연농과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켜 군을 파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 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과 이재등 역시 계속하여 탄핵하기를,

 

“임금이 토지를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을 다투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 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말썽이 생길 것이옵니다.”

 

라고 했다. 제 가로되 “무슨 말썽인가” 하시니 김연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처음 9성을 쌓았습니다. 거란에 표징을 고함에, ‘여진의 궁한리는 곧 우리의 옛 땅이다. 백성도 역시 우리의 편맹이다. 근래 변두리를 노략질함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수복하여 그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사가 그렇다면 궁한리의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일 것이니 거란을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망언을 하며 우리를 책양할 것입니다. 만약 동쪽을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을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삼한의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라고 했다. 간의 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제는 선유하여 가로대 '양원수는 여진을 정벌하여 선제의 유지를 받은 바라, 짐이 몸소 말하는 것을 행하여 몸은 활과 창을 무릅쓰고 깊숙이 적진에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100리의 땅을 열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갚았다면 그 공은 크다고 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 저 남은 무리들이 있지만 의지할 곳은 없다. 고로 추장이 항복해 오며 평화를 청해오매, 군신이 모두 좋다고 하므로 짐도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 유사가 법에 따라 여러 차례 탄핵을 논하는바 있어서 갑자기 그 직을 빼앗으려 한다. 짐은 종내 이를 허물로 여기진 않는다. 바라건대 속히 다시 복직하게 되기를 비노라'고 하였다.

 

예종 문효대왕 4년 가을 7월, 9성에서 철수하여 여진의 옛 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 태사 영가는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 태사의 지위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재상 추밀원 대성 지재고 시신 병마판관 및 문무의 3품 이상을 만나 다시 9성을 돌려주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가 '띰다'고 했다. 옛 사서에서 말한다.

 

'두 장군은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이라고 했다. 선춘령은 두만강으로부터 700리 밖 송화강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광주목 윤언이는 자해표에서 말한다. '중군 금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에는 건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하도록 하였으니, 대저 대금국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타서 제 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은 재삼 거듭하여 읽고 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건원칭제를 청한 근본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했어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 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강한 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 텐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라고 하는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둘 곳조차 없어질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으로 정벌의 전장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로써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

 

<금사>에 말하기를 '세종은 대정 15년(1175)9월,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가지고 내부코자 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있다.

 

<고려사>에 말하기를 '예종 11년(1115) 3월 을미에 상은 요의 내원과 포주의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보내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은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 두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하게 되었는데,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 상은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초유하니 야율령은 왕의 어지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교여는 달려와 이를 주상했다.

 

“추밀원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춰 이를 보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재신과 간관은 말하기를 “저가 왕의 어지를 요구하지만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고로 이를 말리도록 요청한다”고 하니, 상은 곧 사신을 보내 금나라에 가서 청하기를 “포주는 본래 우리옛 땅이다. 바라건대 요나라를 이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하니, 금나라 왕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 땅 내원성을 직접 취하라”고 하였다. 후암 이존비(-1287)는 고려 경효왕 때의 인물이다. 한 때 서연에 있으면서 자주부강론을 상주하였다. '우리 나라는 한단조선, 북부여, 고구려 때부터 모두 부강자주해 왔다. 또 원을 세우며 칭제하는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사대의 논은 정해져국시가 되고, 군신상하가 굴욕을 감수하고 스스로 혁신할 기도를 하지 않음은 하늘두려운 바라. 나라를 보전함을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는가? 바야흐로 왜와 원한을 사려 하다가 원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무엇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칭제하는 일이 시기를 핑계로 기피하는 된다면 참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니, 자강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채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듣는 자 이를 그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뒤에 또 왜에 대비한 5사를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잘 파악하여 병사로 삼을 것. 둘째, 군대와 농사일을 하나로 하여 수륙 공히 나라를 지킬 것. 셋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조하는 일. 넷째, 수군을 확장하며 겸하여 육전도 익혀둘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 등을 말했다. 일찍이 당상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쓰임이 있는데 누가 있어 쓴 오얏이 씨까지 많다고 싫다고 하는가? 맏아들은 천자되어 조정에 남지만 둘째부터는 새로 법왕의 가문을 이룬다네. 충성을 바침은 진실신하의 본분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남은 그게 바로 출세가 아니련가. 돌아보며 웃늙은이 상념에 빠지면 때로 꿈속에 들어 하늘 끝까지 아득해라. 상께서 일찍이 연경에 계실 때에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손에 연꽃을 한 개 쥐어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막상 다하는 것으로 십시오'하다. 며칠 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하여 죽으려 하는지라, 상은 여인의 죽음을 염려하여 다시 연나라로 가려하니, 존비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여인을 찾아보았다. 연나라 여인은 울며 시를 바쳐 가로대,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잘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 님과 같아라. 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이 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임금의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했다. 뒤에도 임금은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는지라 존비는 상주하여 '신은 그 때에 임금님의 봉환을 서두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권사를 했사오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뺏고 유배시켰다. 문의 태자와 조신이 반복하여 유배풀 것을 장계한 고로 임금은 다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가 채 미치기 전에 존비는 숨졌다. 부음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상을 치룸에 말하였다. '이존비의 정직은 가의 사직이다. 어찌하여 요절함이 이 같을까?'라고. 곧 장사를 왕명으로 왕례를 행하고 마침내 형강의 변두리에, 그 산을 에워싼 4리로써 그를 봉하여 지금에 이르있다. 동을 왕묘라 하고 리를 산사라 한다. 행촌 이시중 암(1297~1364)은 일찍이 권신은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말려 청하여 행성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략에 이르기를 '하늘 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국계를 서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 말라. 하물며 우리 나라는 한단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어, 절로 분봉하는 제후와 근본이 서로 갖지 않다. 지금 일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있기는 하이미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있어 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게 곧 신시개천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아래 만세에 만들게 된 연고이다. 우리 천수태조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 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었다. 때로 강한 이웃이 생겨 틈을 타 횡포를 일삼았으니, 유영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 군신이 밤낮으로 떨치고 나서서 도모하고 자주부강의 계책을 감히 세우고 있는 이유인데, 잠청과 같은 간사한 무리가 있어 기량을 자랑하남몰래 꾀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세력비록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째서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제 그러한 행동거지는 두 간사한 소인배의 포도에서 나온 바요 국민이 아닌 자의 공언일 뿐,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고 하였다. 행촌시중은 저서가 세 가지 있으니 <단군세기>는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바 현저하고, <태백진훈>은 도학심법을 소개한 것이요, <농상집요>는 경제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 목은선생 이색은 이에 서문을 붙여 가로되,

 

“대저 의식에 말미암아 족하게 되는 것, 재물을 쫓아서 풍부해지는 것, 자식 후손들이 의지하여 두루 갖춰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문을 가르고 비슷한 것을 모아 세하게 나누어 밝히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할지니 실로 이치를 살리는 좋은 책이라.”라고 하였다.

 

행촌선생이 일찍이 천보산에 노닐 때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처럼 신서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의 진결이라. 그 통달박고의 학문은 탁연하다고 찬할 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은 대저 성(性)을 엉기게 하여 지혜(智慧)를 만들고, 명(命)을 엉기어 덕(德)을 이루고, 정(精)을 엉기어 힘(力)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우주에 있으며 삼신(三神)은 오래도록 존재한다. 저 사람과 사물에 있어 삼진(三眞)이 멸하지 않음은 마땅히 천하만세의 대정신과 혼연히 그 체를 같이하고 생화하여 무궁한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가로되 '도(道)는 하늘에 있을 땐 삼신(三神)이요, 도(道)는 사람에 있을 때 삼진(三眞)이라고 한다. 그 본(本)을 말한다면 곧 일(一)이 된다. 유일을 도(道)로하고 불이를 법(法)이라 한다. 클지로다. 한웅은 우두머리로서 서물(庶物)에 나오셔서 길을 천원(天元)에 얻으시고 가르침을 태백에 세웠도다. 신시개천은 뜻을 처음으로 크게 세상에 밝혔노라. 지금 우리들 곧 글로 도를 구하고 참전하야 계를 받는다. 나의 가르침을 높이는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또 듣는 일은 백가지라 하나 만나기 어렵고, 나이 들어 어느덧 백발이 발치에 이르렀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어라'고 했다.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도이 흥행촌으로 퇴거하시고, 스스로를 흥행촌의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쓰시집에 간직하셨다. 현효왕의 뒤 5년 행촌 이암(李嵒)은 명을 받들어 참성단(塹城壇)에제천하시고 백문보에게 말씀하시기를 “덕(德)을 믿고 신(神)을 수호함은 첫째로 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기르고 나라를 지킴은 공이며 발원이다. 곧 신은 사람의존하고 사람은 신에 의존해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나라는 영원토록 안강을 얻으리라. 제천의 성은 보본으로 필경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서 것을 구해 봐야 갑자기 사라질 거품과 같은 것을”이라 했다. 정지상은 하동사람이다. 일찍이 그의 누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입시하여 수종함에 공이 있었으므로, 왕이 즉위하게 되자 즉시 뽑히어 감찰 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리함에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염사가 되어 암지에 가서는 세도가를 만나보더니 별안간 그를 사로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온 도가 다 가슴이 써늘했다.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사람이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1332~1370)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형 서신주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었다. 세력을 믿고 위복을 갖춰 국인이 그를 꺼렸다. 불화는 향사로서 본국에 르러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멋대로 하였으니, 존무사나 안림사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게 거칠게 굴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했는데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접사 홍원철은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고 불화는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를 업신여긴다.”고 했다.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니 지상은 성을 내며 게 주의 관리를 속여 외쳐 말하길, “국가 이미 기씨를 주살(誅殺)하고 다시는 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이 사신을 제어하기 쉽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서의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 하느냐?” 했다. 읍리들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주었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 원철 등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가두고는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 돌아왔는데, 공주를 지나면서 응여를 체포하고 철퇴로써 이를 치니 며칠만에 죽어 버렸다. 지상은 달려와서 왕께 고했다. 왕은 경악하여 순군을 내리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 및 읍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을 보내 내온을 주고 화를 위로하며 그 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하였다. 왕은 뭇 기씨를 주살하고는 지상을 석방하여 순굿제공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를 거쳐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대개 큰 죄를 다스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지상의 과부로 담양에 살다가 왜인은 해를 입어 죽으니 아들박위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했다.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들을 설득하계 하였다. 말을 시키기를 “진짜 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고 하니 몽고인은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공격하는데 아주 급하게 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했다. 판관 이희적은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했다.

 

경순왕12년(1351)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 이강은 명을 받고 참성단에 제 지내고 나무판에 글을 새겨 시를 읊었다.

 

봄바람에 풍경은 풍션인냥 화사롭고

명을 받고 오는 길은 멀기도 해라.

날쌘 말에 채찍을 더해 아침에 궁궐을 떠났는데

배 띄운 저녁엔 하얀 갈매기 파도만 쫓네.

창공은 푸른빛에 비취빛 산 색깔 묻어나고

골짜기엔 가득 기운이 차서 풀잎 절로 꽃피우지.

묻노라 봉래산은 어디라 할꼬

사람들은 이 땅을 선가라 한다네.

마음 고요하고 몸이 한가로우면

뼈는 절로 신선이 되려 하는데

사람세상 여러 가지 일은 참으로 정신없지

부평초 가득한 신비의 자리 중흥한 뒤에나

돌 쌓은 제단은 옛날로 돌아갈까.

이미 순으로 천리 땅을 바라보는데

어찌 몸이 구중 하늘에 있음을 의심할까.

이 길은 짝도 없는 길이지만 있는 것만 같아

모름지기 서울의 일년과도 같아라.

 

강능왕 우의 5년(1391) 3월 신미,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대제학 권근(1352~1409)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바치니 그 글에 가로대, '초헌에, 바다 위에 산은 높고 멀리 뜬세상의 번요를 끊었노라. 단은 가운데는 하늘에 가까와 선어의 강림을 맞을 지며, 조촐한 공물을 지열하니 명신은 있느나 싶네. 재배에, 신이 들으심은 미혹하지 않으사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삿됨이 없어 땅을 다 덮으시니, 이를 예로써 섬기면 마침내 트일지니.

 

그윽이 생각하니 마리산은 단군이 제사하신 곳. 성조로부터 백성들을 위해 극을 세우시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우셨네. 후왕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셨지만, 역시 여기를 의지하사 근본에 보답하시었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이를 지켜 끊이지 않았도다. 그래서 짐은 작은 자식으로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다. 하늘이시어, 어찌 왜구의 개 같은 도둑떼에 의해서 우리 백성을 어란으로 하시겠는가? 먼 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늘은) 아직도 우리의 표문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들으시노라. 하물며 저 읍민들이 오랑캐에 침략되는 것을 옳다고 참고 계시겠는가? 어째서 이름 떨칠 효험이 없을까보냐? 그럴리 없다. 덕의 좋음이 없음이로다. 참말남을 책하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를 책하는 데 있나니. 그렇지만 사람이 만일 그 업주저앉지 않는다면 신이 마상 돌려주려고 해도 줄 곳이 없을지며, 이에 구전의 준법을 쫓아 감히 당시의 우환을 고하노라. 진실은 관관하며 보감은 명명이라. 하늘이시여, 명을 밝히시옵고 크게 사직의 반석을 이루도록 빛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다.

 

천수기원 439년은 경효왕 5년(1357)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예, 기철, 권겸, 노이 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물리치게 하였다. 때에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 장사성은 강소에서 기병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하였다. 최영 등은 이 때 고우로부터 돌아왔다. 상께서는 처음 최영 등과 의논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 최영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첩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성 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10년 겨울 10월, 홍두적 번성 사유 주원장 등 10만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침략해왔다. 11년 적은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름과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12월 상께서는 복주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이래 밤낮으로 울분하며 우려하며 홍두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상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종종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시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여 사신을 각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상께서는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은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서 군에 몸담지는 못한다. 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라!”라고 했다. 세운은 도당을 뵙고 분언양성하여 유숙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라고 했다. 막 떠나려는데 이암이 세운에게 말하였다.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르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한다.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일거에 달려있으니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

 

라고 했다. 이렇게 격려하여 이를 내보내고 매일 제장을 독려케 하였다. 의를 부르짖으며 모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의 종질 순과 한방신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 첩목아는 백호 보개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왔다. 윤3월 기미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 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는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명나라에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 복주, 개평해성, 요양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청론을 떠드는 자들의 무기력함이여, 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고는 마침내 옛 강토를 회수하지 못하였구나. 뜻는 이의 원한 이처럼 깊은 것을!

 

강능왕이 선제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 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보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되 ,'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 한안 여진 달달 고려는 곧 요동에 속한다'운운하니 조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았다.

 

 

 

 

 

 

 

한단고기(임승국_역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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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역사는_또_하나의_고려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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