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한사군과 백제이야기(임승국)

설레임의 하루 2009. 2. 14. 06:28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원저자 : 임승국


 

 

 

 

한사군과 백제 이야기

漢四郡 사건'의 실상과 朝鮮四郡


 저는 백제사를 연구한 사람이고, 주로 학계에서도 제가 주장한 것은 백제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단에 서면, '저사람, 백제사 얘기한다.'라고 아주 판이 박혀 있어요.

 

백제사 얘기를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저 자신도 판에 박혀 버렸나 봅니다.

 

오늘 한사군과 백제사를 강의하기로 되어있는데, 여기 오신 여러분들도 한사군에 대해 아주 깊은 인식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엊저녁에 정신문화원 원장(김철준)이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국의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가 죽었어요.

 

아마 지금쯤 그 빈소에 드나드는 사람은 '마피아 잔당'일 겁니다.

 

그는 생전에 나하고는 피맺힌 원수였습니다.

 

고인이 된 사람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매우 안 되었습니다만,漢四郡얘기가 나오면 그 분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김철준은 '漢四郡이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사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Thanks very much for 한사군', 다시 말해서 한사군 수위론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는 식민사관 청산을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민족사학자로 보도되었습니다.

 

신문기자들 신문 쓰는 것 보면 기가 막히게 내 놓습니다.

 

국회에서 저와 김철준이 싸웠던 그 현장을 방청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기사는 못썼을 겁니다.


 여기서 한사군에 대해서는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현재까지 학계에 남아있는 한사군의 설치문제, 도대체 한사군의 설치연대가 언제입니까?

 

서기전 108년이요. 좋아요.

 

 그러면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4군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된 것은 무슨 군이죠? 낙랑군입니다.

 

낙랑군의 멸망연대는 언제입니까, 그럼? 313년! 전부 박사들만 모였네! 설치에서 멸망까지 도합 421년입니다.

 

중국의 역대왕조 가운데 하나의 왕조가 400년 이상 존속한 것이 몇개나 됩니까? 단 한개도 없습니다.

 

그럼 3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는 몇 개나 될까요? 그것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500년 이하의 왕조가 거의 없습니다.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이하가 없고 중국은 이상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선 역사의 질(質)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200년에서 250년 사이의 왕조가 4개 있었는데, 즉 한(漢)·당(唐)·송(宋)·명(明)나라입니다.

 

그런데 한사군의 종주국가는 한나라입니다. 한나라는 서기 8년에 망합니다.

 

그러면 종주국인 한나라가 망해 버린 때부터 305년 동안 종주국이 없는 식민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낙랑군이 평양에 실존했었다는 것은 실사(實史)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동화 같은 얘기입니다.

 

아니 국민학교 학생한테 물어보아도 알 수 있는 얘기를 대학생한테 얘기해야 하는 저도 참 바보 같군요.


 여기서 저는 학문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말하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종주국가가 서기 8년에 망했는데, 그 식민지는 313년까지 존속했다는 것이 동화입니까,

 

역사입니까? 역사도 동화도 모두 아닙니다.

 

동화는 논리가 없어도 되는 겁니까?

 

오히려 동화야말로 어린애들이 알아듣기 쉽게 논리가 정연해야 됩니다.

 

김철준은 이런 논리가 없는 얘기를 실사라 했고, 또 한사군이 있어서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그런 논리를 평생 펴다가 어제 죽었습니다.

 

한국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경하할 일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한테는 인간적으로는 안 되었지만, 한국사의 발전이라는 또 다른 측면으로 봐서는 아주 축하할 일입니다.


 어찌되었건 한사군 얘기는 이제 끝난 얘기입니다. 금년부터 중학교 국사책에서 한사군을 없애겠다고 정부에서 공언을 했습니다.

 

내년부터는 고등학교 국사에서도 없애기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앞서 강의하신 박시인 박사도 한사군을 위해 참으로 많이 애썼습니다.

 

도대체 학문이 되지 않는 사안을 가지고 해방 후 40년 동안 떠들어 온 것입니다.

 

사기(史記)라는 사서는 한무제(漢武帝)의 신하였던 사마천이 쓴 목격기입니다.

 

사기가 완성된 때가 서기전 100년입니다. 사마천의 그 때 나이 27살이었습니다.

 

약관의 27세 때 한사군 전쟁을 직접 보고 적은 기록이 조선열전(朝鮮列傳)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4군이 없습니다. 사학에서는 이런 자료를 1차사료라고 합니다.

 

1차사료인 목격담 속에 낙랑현도진번임둔이 없는데, 우리는 뭐가 아쉬워서 자꾸 그 이름들을 외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기 다음에 쓰여진 중국정사가 한서(漢書)입니다.

 

한서는 서기 80년 경에 쓰여졌는데, 한사군 사건으로부터 말하면 200년이 채 안되는 180년 이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그런데 한서는 사기의 조선열전을 복사기로 복사를 해 놓은듯 똑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기 조선열전의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四群)'이라는 기록을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

 

(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반고)이 8글자를 가필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서에서부터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8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남대문을 구경한 사람이 서울얘기를 하는 것과 남대문 구경도 못한 사람이 서울 얘기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한사군 전쟁이 일어난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반고(班固)가 적은 한서(漢書)가 정확하겠어요,

 

아니면 한사군 전쟁이 났을 때 한무제의 신하였던 약관 27세의 사마천이 적은 기록이 정확하겠습니까?

 

게다가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상상하는 한사군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기록이 나옵니다.


 한국사람의 마음속에는 '한국은 외국과 싸우면 의례히 진다'라는 패배의식이 한국사관에 의해 알게 모르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와서 배운 역사라는 것이 전부 싸움에서 지는 것이었습니다.

 

한무제의 육해양군(兩軍)과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으니까, 보나마나 또 졌겠지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에 진 결과로 이긴 자가 설치한 것이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저 김철준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무제의 군대와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는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한무제의 군대가 졌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조선이 이겼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전쟁이 일년동안 지속되다가 끝나고 난 뒤, 한무제는 논공행상을 합니다.

 

육군사령관 순체, 해군사령관 양복(楊僕), 천자의 사신인 공손수(公孫遂)와 위산(衛山) 등 네 사람을 앞에 대령시켰습니다.

 

만약 이들이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이라면 계급을 높여주거나 황금으로 상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은커녕 벌을 내립니다. 

 

벌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벌인 사형을 내립니다. 사형 중에서도 최고의 사형을 내립니다.

 

제일 악랄한 사형, 조선조 같으면 능지처참에 해당되는, 사람을 죽여 사지를 찢어서 중국의 장안 사대문에 걸어놓는 사형[棄市]을 내려 죽입니다.

 

네사람 중 천운(天運)이 기시(其時)한 사람도 살아남질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논공행상 하나만 보더라도 한나라가 전쟁에 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이렇게 자기 한나라가 졌다고 했는데, 우리 한국인은 오히려 우리가 졌다라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통터질 일입니다.


 그리고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사군이 생겼습니다. 평주·날양·추저·홰청이라는 네군의 책임자(최, 참, 음, 협)가 전부 조선사람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거꾸로만 알고 세상을 살아왔니다.

'

한사군 사건'이야말로 우스꽝스런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일 마지막에 가서 '태사공 왈(太史公 曰)'이라고 한 부분이 있는데,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한나라의 육해양군은 모두 졌다'라고 했습니다.

 

사마천이 자기의 한나라가 싸움에 졌다고 했는데, 김철준이 나와서 '아니다, 우리가 졌다'라고 하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진 걸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사마천 자신이 '육해양군이 모두 졌다(兩軍俱辱 將率莫侯矣)'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만사 본은 무상하다라고 탄식하며 조선열전의 붓 끝을 놓았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서도 한사군얘기를 하는 사람은 도저히 정상인으로 볼 수 없는, 장님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서울대학에서 한사군을 얘기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아직 사십도 안된 젊은 사람인데, 젊은 놈을 두드려 팰 수도 없고 해서 분통이 터집니다.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쳐 평주, 추저, 날양, 홰청이라는 사군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이 땅이야말로 위만조선의 땅입니다.

 

위만조선이 무너지면서 그 땅이 조선사람 네 사람이 통치하는 조선사군으로 바뀐 것입니다.

 

위만조선 이전에는 그 곳이 기자조선의 땅이었습니다.

 

한국사를 논하면서 한반도는 언급하지 않고 왜 만주쪽을 가리키느냐 할 지 모르겠지만, 한국사의 본질은 반도사관이 아니라 이처럼

 

대륙사관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반도사관에 역점을 두어 반도라는 것이 우리의 운명적인 강역인 것처럼 강의했습니다.


 지금 국회의원들도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헌법개정하면서 반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의했는데, 지금의 헌법3조를 보면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로 되어있습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이것이 우리의 숙명적인 강역인 것처럼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왜인들이 우리의 머리속에 심어놓은 강역일 뿐입니다.

 

한반도라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가호적입니다.

 

고려 이전에는 모두가 대륙에서 생겨난 역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호적이 본호적으로 둔갑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사는 반도사관이 아닌 대륙사관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도 그 건국의 땅이 모두 대륙입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백제사는 더욱이 대륙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사학자들이 사기연표에 실려 있는 조선사군의 이름이나

 

강역 등을 연구해서, 지금까지 한사군이 점하고 있던 그 블랭크를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국사학계가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한사군과 관련된 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고 백제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百濟史

 

 대방이라고 하면 보통 황해도 사리원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쓴 김성호씨는 나름대로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글을 썩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잘못한 것은 사리원이 대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본사람들이 한 얘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믿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백제시건국어대방고지(百濟始建國於帶方고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백제가 처음 나라를 세운 땅이 대방이라는 뜻인데, 대방이 황해도 사리원이니까 사리원에서 백제가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흠이 있다고 해도 공격할만한 흠은 아니지만, 백제사 출발점은 대륙인데,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학계에서는 미추골을 미추홀이라고 합니다. 홀(忽)자를 역사에서는 골이라고 읽습니다.

 

밤골이다 무슨 골이다 할 때처럼, 고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성호씨는 이 미추골을 인천이 아니라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습니다.

 

미추골이 인천이라는 것도 마땅치 않은데, 거기에서 더 내려가 아산면 인주면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번역한 책 '한단고기'에도 미추골이 나오는데, 그 곳의 위치는 바로 하북성입니다.

 

하북성에 있는 미추골에서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백제라고 할 때의 비류수가 바로 거기서 흐릅니다.

 

우리 사학계는 정말 답답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제가 유신정권 때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였겠습니까?

 

국사를 바로 잡으라고 행정소송을 했을 때, 원고는 명지대 교수 임승국이 되고 피고는 박정희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학계에서는 저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요?

 

결과는 '피고 패소, 원고 승소' 이렇게 났습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 때 판결장을 들고 문교부장관을 찾아가 집행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피고가 억울하다고 대법원에 항고를 했습니다.

 

문교부에서는 아직 사건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집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판결 날짜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꼭 일주일 남겨두고 박대통령이 피살당해 버렸습니다.

 

조금 뒤 대법원에서, 그 재판은 피고의 유고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 때의 무기연기가 지금까지도 무기연기 중입니다.

 

대법원장이 몇 번이나 바뀌고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도 지금까지 무기연기라니, 이거 법이론상 맞지 않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번 국정감사 시, 모 국회의원에게 그것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그 국회의원이 하는 얘기인 즉, 그 재판은 판결하지 않은

 

폐기처분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폐기하려면 원고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하기야 뭐 5공화국시절이니까 법이 없었죠.


 저는 억울한 나머지 국회에 청원서를 냈습니다. 그래서 청원서에 입각한 공청회가 열렸지요. 앞서 강연한 박시인 박사,

 

안호상 박사와 함께 셋이서 공청회에 나가 열변을 토했습니다.

 

박시인 박사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투쟁형이 못되어 제가 대표격으로 싸웠습니다.


 제안 설명을 하면서 "낙랑현도진번임둔의 증거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문교부 장관이 하는 말이, 자기는 역사학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 

국무위원이 반드시 역사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 다음 앉은 사람이 차관인데,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은 사학은 고사하고 인문사회과학계통이 아닌 자연과학계통을 공부한 사람이라 내가 차관에게 질문하면, 그 사람은 속으로

 

'저 양반이나 망신줄려고 국회에 불러온 것 아니냐'할 것 같아서 그냥 뛰어 넘었습니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장이 나왔습니다. 3년동안 행정소송을 할 때 대통령 대리인으로 피고석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도 장관과 꼭같은 답변을 하길래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니 너무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 때 방청석에 있던 국회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권자인 문교부장관은 사임하라고 외쳤습니다.

 

목표는 국사개정인데 인사문제로 번지니 다시 한번 더 국사개정의 방향에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장차관과 국사편찬

 

위원장도 한사군 문제를 공부안했다고 발뺌하니 앞서 얘기한 대로 쭉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사개정을 하기로 결정하고 공청회는 끝났습니다.

 

 


이제 백제사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 전공이 백제사이고 백제사는 그야말로 저의 의중의 역사입니다.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중국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

 

(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 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 97권 백제전의 머릿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

 

(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한 예화가 될 겁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8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8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약 몇 천권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 騁티?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보내 온 사서는 모조리 식민사학에 젖어 있어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40-50년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고쳐야 할 事大主義

 

 시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 그럼 '똥되는 놈'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자꾸 똥되는 놈이라고 해서 미안하지만, 국호문제에 있어서 중국(united states of china)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똥되는 놈이 우주의 가운데, 즉 태양이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제  후국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원초적인 사대주의 발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중국이라 하지 말고 지나라고 해야 됩니다.

 

이웃 일본인도 지나라고 하고 서양사람들도 차이나라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 중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잘생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 나와있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구절도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아니 우리 역사가 몇년인데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우리 문화사가 500년밖에 안됩니까?

 

서양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까 한자를 중국글자(Chinese character)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서양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는 말이고, 이제부터의 세계는 우리 중심의 문화세계, 우리 중심의 가치관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알파벳을 가르칠 때 영문학 교수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백인종이 모여 세운 나라가 USA인데, 앵글로 색슨족이 주류족입니다. USC라고 하면 차이나를 말합니다.

 

똥되는 놈들 민족 가운데 주류족은 USA의 앵글로 색슨족에 해당되는 한족(漢族)입니다.

 

이 한(漢)은 민족의 이름도 나라의 이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한테서 표절을 해 갔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할 때의 '한'(桓, 원음은 '환')에서 한이라는 발음을 따 갔던 것입니다.

 

이 한(桓)은 한족(漢族)이 아닙니다. 동이족(東夷族)입니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 동이족입니다.

 

여기서 이(夷)자를 흔히 오랑캐라고들 합니다. 중국 25사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제목이

 

동이열전(東夷列傳)인데,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부 다 나옵니다.

 

그러면 그 후손인 우리는 전부 오랑캐가 되어 버립니다.

 

'나는 오랑캐 올시다'라는, 성은 오씨요 이름은 랑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고쳐야 할 사대주의 사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의 중국이라는 용어도 문제이지만, 이(夷)자를 오랑캐라고 훈을 붙인 옥편의 저자는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한문옥편의 원조가 되는 것은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인데, 이 옥편의 역사가 약 200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夷)자를 찾아보면,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그 다음에 '고문인동(古文仁同)'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랑캐란 말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이(夷)를 오랑캐로 말하면,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古文仁同'이라는 한마디로써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동양오행철학에 의하면 木은 東, 火는 南, 金은 西, 水는 北, 土는 中央에 해당됩니다.

 

오행을 색깔로 말하면 東은 靑, 西는 白, 南은 赤, 北은 玄이고 中央은 黃입니다. 오상(五象)을 방위에 배치하면 仁은 東, 禮는 南, 義는

 

 西, 智는 北, 信은 中央입니다. 동양철학 속에서 그 근거를 지니고 있는 글자인 仁을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동이족이야말로 중국대륙 가운데 가장 비옥한 땅에서 사는 민족이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을 백제가 경영했습니다.

 

따라서 중국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민족이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즉 우리 선조들은 지나라는 연합민족국가를 형성한 원료입니다.

 

우리의 5000년 역사가 중국문화의 지류를 따라 흘러서 겨우 마시고 살아 연명해 온 역사라고 붓놀리는 사람들이 그따위 수작을 해

 

왔지만, 우리 민족이 과연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목숨을 겨우 연명해 온 민족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양의 역사문화 속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군림한 역사문화민족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알맹이요, 핵심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는 지나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 글자입니다.

 

약 4만 3천여 자가 옥편 속에 獵쨉? 글자 하나 하나마다 대개 발음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學'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우리는 '學'이라는 발음기호를 적었을테고, 지나인은 한글을 모르니까 자기네 발음기호를

 

적었습니다.

 

즉 '轄覺切'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여기서 '切'은 '轄覺切'이 발음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읽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첫 글자에서는 자음(하)만 취하고 두번째 글자에서는 모음(가)과 받침(가)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轄覺切'로 중국옥편에는 2000년 동안 적혀 내려오고 있는데, 지나인은 '學'발음을 못하고 '쉬에'라고 합니다.

 

가,띵,밑으로 끝나는 글자를 사성 중

 

입성이라고 하는데, 지나인은 입성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문자(漢文字)는 지나인들이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것이고, 한민족의 발음으로서만이 완벽히 소리 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0% 우리말로 적혀있는 것이 지나인의 옥편이고, 따라서 우리가 표준어를 쓰고 있는 한문자의 주인공입니다.

 

한글만이 우리문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문자야말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금까지 전해준 고마운 글자입니다.


민족사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정말 우리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안다면 이제부터 한자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어떤 탕자의 비유마냥 말이죠.

 

백만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돈을 객지에서 다 써 버려서, 남의 돼지우리에 버린 밥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다가 하루는 탄식합니다.

 

'나의 아버지집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이 있었건만, 나는 객지에서 헐벗고 굶어죽게 되었구나' 하며 깊은 한숨을 쉽니다.

 

이런 탄식  끝에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다시 힘차게 뛰어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 앉고 맞으며, '내 아들이 다시 돌아왔노라'하며 양잡고 소  잡아 축제를 엽니다.

 

그래서 탕자는 또다시 백만장자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르네상스입니다. 옛집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용기가 있습니까?

 

옛집을 기억은 하고 있습니까? 옛집이라는 것은 상고사입니다.

 

이제 상고사를 재확인하고 민족사의 과제인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 마치 탕자가 자기 본래의 집을 향해 돌아가는 것처럼, 바로

 

이것이 한국사의 남아있는 과제입니다.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한문(漢文)을 알아서 민족의 전통을 확인하는 것이 첫 작업이 될 것입니다.

 

한국사는 목표가 뚜렷한 근원을 향해서 돌아가는 '민족사의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없었고 이를 기술한 고전(古典)이 없었더라면, 인류역사상 저 'Renaissance'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옛 정통(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그리스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아갈 고향의 영광과 위대한 추억이 없는 민족, 향수가 없는 민족에겐 르네상스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