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국사교과서 고대사분야의 일제 잔재

설레임의 하루 2013. 6. 15. 11:28

*출처: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어쩌나 2012.09.02.  http://cafe.daum.net/kphpi21/6vEw/21 

 

국사교과서 고대사분야의 일제 잔재

 

 

1. 일제 식민사학자의 한국고대사 말살

 

한 나라, 한 종족의 역사는 그 나라, 그 종족의 정신을 결정하고 그 종족 구성원 개개인의 성품을 결정한다. 유구한 역사, 불굴의 역사를 가진 종족은 다른 종족에 굴복하지도 않고, 타종족의 지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무력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일시 굴복 당했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선다. 때문에 한반도를 침략하고, 한반도를 영구히 식민지배 하려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저항을 우려하였다.천조대신(天照大神)의 후손 신무천황(기원전 660~ 기원전 585)으로부터 시작하는 일본역사는 2600여년에 불과하다. 반면 조선은 42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일본문화를 조선문화의 아류문화미개문화로 멸시했다.

 

일본인에 대하여 이러한 역사문화적 자긍심을 가진 조선인들이 왜인(倭人), 왜놈이라고 멸시해왔던 일본인의 침략과 일본인에 의한 식민지배에 강력히 저항하지 않을 리 없다.이러한 문제점을 예견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이전부터 조선인에게 자랑이 될 만한 역사문화를 축소말살왜곡하고, 역사 초기부터 한강이북 지방이 중국()의 지배를 받는 등 타 종족의 식민지배나 받는 약소민족, 자립할 능력도 없는 정체된 민족으로 한국역사를 왜곡시키고자 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제병탄을 정당화하고, 한국인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이러한 불순한 목적에 의해 삼국유사』「고조선편의 기록을 부정하는 논문이 1984년에 2편이나 발표되었다.

 

나가통세(那珂通世)는 그 논문에서 환인(桓因)이 불교의 천신(天神)이라는 데 착안하여, 삼국유사』「고조선편의 기록이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후 승려가 날조한 것이라고 하였다. 백조고길(白鳥庫吉)은 나가통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삼국유사』「고구려편의 각주에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사통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하였다 하니, 부루와 주몽은 이모(異母)형제이다.” 라고 한 기록을 근거로 단군(檀君)은 주몽의 아버지 즉, 고구려의 선조라고 하였다.1910829일 대한제국을 강제 병탄한 직후 역사지리라는 학술지에 조선호를 임시증간본으로 서둘러 발행하였는데, 단군의 역사적 실존을 부정하는 금서룡(今西龍)의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은 나가통세와 백조고길의 논문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단군전설은 고려시기에 승려에 의하여 날조 된 것이고, 단군이라는 칭호도 단군의 제자인 박수무당이 지어준 이름이며, 단군은 평양지방의 박수무당이다. 단군은 해모수(解慕漱)와 동일인으로 부루(夫婁)와 고주몽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 은()나라 왕족 기자와 그 후손에 의한 한반도 북부의 지배, 중국 연() 지역에서 온 위만과 그 후손들에 의한 한반도 북부의 지배, 중국에서 온 기자의 후손에 의한 마한의 지배, 서기전 108,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 등의 군현을 설치하여 420년간 지배하는 등 140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가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등의 왜곡된 역사를 입증하고 고착시키는 데 광분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사관·식민사학을 계승하고 추종하는 학자들이 한국의 고대사학계를 지배하여 왔다. 때문에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은 지 65년이 지났지만 일제의 잔재가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그대로 남아서 한국인에게 역사·문화적 열등감을 주입시키고 있다. 한국의 국사교과서에 남은 일제의 잔재와 그 문제점을 간단히 소개하고, 필자가 객관적이고도 실증적인 방법으로 찾아낸 한국 고대사의 진실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2. 한국 국사교과서의 일제 잔재일제강점기의 일본 역사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의 영역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으로, 옛 중국 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왕이 되어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을 다스렸고, 그 자손들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900여 년 동안 그 땅을 다스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에 기자의 먼 후손인 준()이 중국의 연인(燕人) 위만에게 쫓겨나서 한반도 남쪽으로 천도하였다. 위만의 후손인 우거가 한()나라의 명령에 복속하지 않자, 한나라가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진번군,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의 4군을 설치하였다. 낙랑군에는 중국인 이주자가 많아서 그 세력도 확립하고 오랜 동안 존속했다. 임둔군 진번군은 곧 폐지되었고, 현도군은 압록강 상류유역에 존속했다.한반도 남부에는 한족(韓族)이 작은 나라로 나뉘어 살았는데,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으로 크게 나뉜다.

 

마한은 50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의 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점하였다.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서 마한의 왕이 되고 그 후손들이 계속 왕이 되었다. 후한(後漢;25~220) 말에 현도군은 고구려에게 침공당하여 쫓겨났고, 낙랑군은 한족(韓族)에게 남부(황해도)를 잃었는데 요동태수 공손씨가 낙랑군의 남부를 회복하여 대방군을 설치했다. (;265~317)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지자 고구려가 남하하여 낙랑군을 습격하고 동쪽의 현도군을 멸하였고, 백제는 대방군을 침공하여 멸하였다. 이로서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한 지 420년 만에 중국의 군이 전부 멸망하였다. 이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이렇게 한국고대사 영역을 요동지방과 한반도로 한정시키는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가 한국의 2010년판 중학교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음은 2010년판 중학교 국사교과서 내용이다.

 

고조선은 서기전 4세기경 요령지방(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서기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서기전194).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중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서기전 108). 고조선은 단군 조선 기자 조선 위만 조선으로 정치적 변화를 거친다.

 

2010년판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고조선은 요령지방(요동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서기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중국이 전국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지역에 살게 하였다.그 뒤 진()()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이주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서기전 194).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서기전 108).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고조선, 기자조선(한씨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가르치는 이러한 2010년판 국사교과서의 기술은, 한국의 역사교육이 아직도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학설을 추종하는 학자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고조선 국호

 

한국 역사상 '고조선(古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국가는 없다. 왕검단군이 건국한 조선을 기자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고 분류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왕검단군과 왕검단군이 건국한 조선을 가리키는 고조선 역사는 언급조차하지 않고 말살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왜곡하고 있다.

 

고조선의 영역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이다. 중국 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왕이 되어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을 다스렸고, 그 자손들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기자의 먼 후손인 준()이 중국의 연인(燕人) 위만에게 쫓겨나서 한반도 남쪽으로 천도하였다. 위만의 후손인 우거가

 

라고 기술하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왜곡하고 있다.이러한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는 2010년판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남아있다. 중학교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문헌에 나타나는 고조선은 단군 조선자 조선위만 조선으로 정치적 변화를 거친다.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194)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또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여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왜곡하고 있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중국이 전국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지역에 살게 하였다.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을 쳐들어가서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고조선이 멸망하자

 

필자는 2003년에 출간한 신시단군조선사 연구에서 왕검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건국된 조선(한씨조선)과 한씨조선을 멸망시키고 건국된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 ‘기자조선한씨조선위만조선 등을 고조선으로 지칭하는 것은 왕검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을 부정하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라는 것, ‘조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왕검단군이 건국한 조선만 고조선으로 칭하고, 나머지는 기자조선, 한씨조선, 위만조선 등으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이씨왕조인 근세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뜻으로 준왕의 조선과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왕검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4. 상상속의 국가 기자조선

 

일제강점기의 일본역사교과서에

 

"고조선의 영역은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으로, 옛 중국 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왕이 되어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을 다스렸고, 그 자손들이 서로 왕위를 계승하여 900여 년 동안 그 땅을 다스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에 기자의 먼 후손인 준()라고 하였다.

 

일제가 일본역사교과서의 한국사 부분 첫머리에 기자와 기자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가면서 90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를 통치했다고 기술한 이유는 조선인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열등한 종족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일제 식민사관을 한국의 역사교육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의 중학교 국사교과서에서는 조선은 단군 조선기자 조선위만 조선으로 정치적 변화를 거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는 2004년에 출간한 기자위만조선 연구에서 다음을 근거로 기자동래설과 기자조선의 실존을 부정한 바 있다.

 

서기전 1117년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 유민들의 반란과 반발을 제압하고 안정시키기에도 바쁜 주()나라 무왕이 자기 나라 영토도 아닌 조선에 기자를 봉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무왕에게 칭신하지 않는 은나라의 충신으로 은나라의 부흥운동을 할 수 있는 기자를 자기의 관할 하에 두어 감시하지 않고 국외로 나가게 할 리 없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왕의 아들에게까지 땅을 봉해주고, 그 주왕(紂王)을 비롯한 그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유화책을 사용하는 무왕을 피하여 기자가 조선으로 달아날 이유가 없었다.

 

기자가 조선으로 달아나서 조선의 기존 정치세력을 제압하고 왕이 될 만한 시간도 없었다.

 

서기전 1117년에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 1115년에 죽는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기자를 석방하고, 기자가 한반도(혹은 요하의 동부지역)의 조선으로 달아나서 조선의 임금이 되고, 그 소문을 들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이에 감사한 기자가 무왕을 찾아가서 홍범을 강론하기에는 시간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무왕의 아들인 성왕(成王)이 서동생인 숙우를 당에 봉하는 것을 보고 기자가 숙우의 후손들이 당당하고 크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 했는데, 만약 기자가 주나라 도읍인 호경이나 당(후에 진)나라에서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고 수천 리 이상 멀리 떨어진 조선에 있었다면 성왕이 숙우를 당에 봉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기자의 무덤이 양국 몽현에 있다고 했는데, 기자가 한반도(또는 요하의 동쪽)에 있는 조선의 군주였다면 수천 리 떨어진 양국 몽현(오늘날 하남성 상구시에 있음)에 가서 묻혔을 리 없다.

 

기자가 세운 나라가 춘추전국시대까지 존속했다면 사마천이 사기기자세가를 지어 넣지 않았을 리 없다.

 

사마천이 사기』「조선열전에 기자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주나라 건국의 1등 공신인 강태공에게 영구(營丘) 땅을 봉하면서 나라 이름은 제()라고 했고 그 작위는 공작이었으며,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에게는 곡부(曲阜) 땅을 봉하면서 나라 이름을 노()라고 했고 작위가 공작이었던 것처럼,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봉한 조선(朝鮮)은 고대 한국의 조선이 아니라 중국 하남성 상구시에 있던 조선이라는 50리 땅 이름이고, 기자(箕子)()’자는 나라 이름이며, ‘()’자는 기()나라 군주의 작위가 자작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이다.

 

기자의 후손들이 기()나라에서 유래한 성씨를 사용하였다.

 

기자가 세웠던 나라이름에서 딴 기()라는 지역이 춘추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그 기()의 위치를 산서성으로 고증하고 있다.

 

신기자동래설의 증거로 제기된 기후명 청동기는 기()자를 기()자로 조작한 학설이다.

 

 

5. 한씨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허구로 밝혀진 고조선한사군 한반도 실재설의 6대 근거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의 대전제가 되는 6대 근거이다.

 

고대의 요수(遼水)가 현대의 요하(遼河)이고 한국고대사 영역이 그 요하의 동쪽에 한정되었다는 것.

 

란하(灤河) 동쪽에서 요하의 서쪽까지가 산융(山戎)동호(東胡)의 영역이었는데, 동호가 연()나라 진개(秦開)에게 요서 지역 1,000리를 빼앗기고 북쪽으로 옮겨갔다는 것.

 

진개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음으로써 조선은 요하의 동쪽 땅을 잃고 청천강(혹은 압록강) 이남으로 위축되었다는 것.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 발굴되거나 출토되었다고 하는 한 대(漢代)의 유물유적이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을 설치하여 한반도 북부를 식민지배한 실증적 증거라는 것.

 

요하 서쪽의 발해 북쪽 요하 상류유역에서 발굴된 은대(殷代)주초(週初)의 청동기 유물들이 이 지역이 기자나 그 후손의 동래 지역, 연나라 영역을 입증해 준다는 것.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는 것 등이다.하지만 필자는 신시단군조선사연구』『기자위만조선연구』『한사군의 실제위치 연구』『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비정 연구등에서 이러한 대전제들이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다음과 같이 입증한 바 있다.

 

 

요수의 위치

 

전한(前漢) 말기의 류향(劉向)이 편찬한 설원에 제나라 환공(桓公)이 북쪽의 고죽국을 공격할 때 요수(遼水)를 건넜다는 기록

 

② 『회남자의 요수에 전한의 고유(高誘)요수는 갈석산을 흘러 나가서 변경 지대로부터 북동쪽 방향으로 흐르다가 똑바로 요동(遼東)의 서남부지역으로 흘러가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주석

 

갈석산은 대행산맥(太行山脈)과 항산산맥(恒山山脈)이 만나는 곳에 있다는 사기』「하본기한서』「지리지의 기록

 

요서군의 삼류수(參柳水)가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한서』「지리지의 기록요하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나는료사의 요()나라 회동(會同) 원년인 938년 기록 등에 대해 연구한 결과 고대의 요수는 현대의 요하가 아니라 산서성과 하북성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라는 것을 밝혀냈다.따라서 고대 중국과 고조선의 경계선이었던 요수를 현재의 요하로 비정하고, 한국고대사 영역을 요하의 동쪽으로 축소시킨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학설은 옳지 않다.

 

 

산융동호의 위치

 

소진(蘇秦)이 연나라 문후에게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한 사기』「소진열전의 기록

 

연나라 북쪽 계곡에 동호와 산융이 흩어져서 살았다는 사기』「흉노열전의 기록

 

조나라 동쪽에 연동호와의 국경이 있다고 한 사기』「조세가의 기록

 

조나라 혜문왕 26(서기전 271)에 동호에게 빼앗기었던 대() 땅을 조나라가 다시 탈환하였다는사기』「조세가의 기록

 

동호의 후손들인 선비족의 척발규(도무제)가 건국한 북위(386~534)의 수도 평성(平城)이 산서성 대동시(大同市)에 있었다는 기록 등에 대한 연구에 의하여 산융동호의 위치는 조나라 북쪽 연나라 서북쪽인 산서성하북성 북부와 그 북쪽의 내몽고 지역에 있었음을 밝혀냈다.따라서

 

산융동호가 요하 서부지방에 있다가 연나라 진개(秦開)에게 그 땅 1,000리를 잃고 북쪽의 내몽고 지방으로 옮겨갔으며,

 

요하 서부지방은 연나라 영역이 되었다는 전제하에 고조선 영역을 요하 동부지역으로 한정시킨 후,

 

진개의 동침으로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게 되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학설은 옳지 않다.

 

 

진개의 동호조선 침략

 

 

전국시대 당대의 국제관계를 자세히 기록한전국책2,000리 영토의 연나라가 동호 땅 1,000리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은 큰 전쟁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

 

전국시대 전 기간 동안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일 진개의 이름조차 없다는 것

 

그런 큰 공을 세운 진개에 대한 기록이 연나라 역사서인사기』「연소공세가에도 없고 2,000리 땅을 뺏긴 조선의 역사서인 사기』「조선열전에도 없다는 것

 

진개와 동시대 사람으로 3,000리 영토를 빼앗은 진개의 공로에 비하면 미미한 공을 세웠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악의, 염파, 인상여, 전단 등에 대하여 각기악의열전」「염파인상여열전」「전단열전등을 지어서 이들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는 사마천이 진개열전을 짓지 않았다는 것

 

사마천은 현장(賢將), 명장(名將), 맹장(猛將) 등을 사람 이름 앞에 붙여서 사용하지 않는데 사기』「흉노열전에 단 한번 현장진개(賢將秦開)”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

 

진개의 업적을 소개하는 사기』「흉노열전의 기록 중에서 진왕 즉 진시황을 암살하는 임무를 실패로 돌아가게 한 필부 진무양을 진개의 손자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

 

제나라에 대하여 2,000리 영토의 강대국이라고 한 사마천이 5,000리 영토의 연나라를 제조나라와 북방 종족들에 끼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최약소국이라고 사기』「연소공세가에서 말할 리 없다는 것

 

연나라 왕이 조선을 정벌하려 하였다는 위략의 기록은 연나라가 조선을 공략할 시간도 능력도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한 사람의 기록이라는 것

 

진개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위대한 승전 기록이 720여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난다는 것

 

⑩ 『사기』「조선열전에는 연나라가 진번조선이 연나라를 자주 침략하여 성을 쌓아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

 

진개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위략의 기록과 정반대로 염철론』「비호편에는 조선이 연나라를 자주 침략하였고 연나라 동쪽 땅을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반면 진개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위략의 기록을 실증해주는 사서가 없다는 것

 

 임둔군의 위치를 보여주는 임둔태수장봉니가 요녕성 금서시(錦西市)의 고대 성지(城址)에서 출토되었다는 것 등과 같은 연구결과에 의하여 진개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위략의 기록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밝혔다.따라서 진개가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위략의 기록을 근거로 고조선 영역이 요하 동부지역에 한정되었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학설은 옳지 않다.

 

 

대동강 유역의 한대(漢代) 유물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 점선장인(秥蟬長印) 봉니, 영화구년명(永和九年銘) 벽돌() 등은 조직적으로 위조된 것이고

 

점제현신사비는 또한 조작된 것이며

 

평양 토성 등에서 전한(前漢)의 화폐인 반량전(半兩錢), 오수전(五銖錢)과 왕망()의 신()나라 화폐인 화천(貨泉), 대천오십전(大泉五十錢) 등을 주조하는, 반량전범(半兩錢范), 오수전범(五銖錢范), 반량전범(半兩錢范), 대천오십전범(大泉五十錢范)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세력은 한()()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정치세력이라는 것 등을 밝혀냈다.그러므로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거나 발굴된 한대의 유물들을 근거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실증하는 사료로 사용하는 것은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대릉하 유역의 은대(殷代)주초(周初)의 청동기 유물

 

 

은대(殷代)주초(周初)의 청동기들을 서기전 12~11세기에 연나라가 북경을 중심으로 하북성 북부와 요하 서부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는 실증적 사료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라 군주인 후작(侯爵)”이라는 뜻의 언후(匽侯)”라는 고문자로 새겨진 청동기를 ()나라 군주인 후작(侯爵)”이라는 뜻의 연후(燕侯)”라고 왜곡한 것이라는 것,

 

따라서 언후(匽侯)”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근거로 서기전 12~11세기에 이미 요하 서부의 대릉하(大凌河)유역까지 연()나라 영향력이 미쳤다는 학설은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고,

 

기후(㠱侯)”라는 고문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기자나 기자의 사손(嗣孫)을 가리키는 기후(箕侯)”라는 고문자로 왜곡하여 발해 북안, 대릉하 유역, 요하 상류지역이 기자의 동래(東來)를 실증해 주는 유물이거나 기자조선의 실존을 입증해주는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의 허구도 밝혀낸 바 있다.

 

 

명도전

 

 

연나라 화폐로 알려져 온 명도전(明刀錢)이 연나라 중심지인 북경(北京), 천진(天津), 역현(易縣)에서 단 1곳씩만 출토되고

 

연나라의 동족 국가들인 제(), (), (), ()나라 영역에서는 명도전이 단 한개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것

 

반면 한국고대사 영역인 한반도 북부로부터 요하 동부 요하 서부 내몽골 적봉(赤峰)과 그 인근지역, 그리고 길림성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많은 곳에서 다량의 명도전이 출토되었다는 것

 

이 명도전이 연나라 수도에서 수천 리 떨어진 요녕성 조양(遼陽)지역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 요녕성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는 주장은 진개가 동호의 영토 1,000를 빼앗고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았다는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인데, 진개가 빼앗은 동호 1,000리가 요서지역이 아니고 조선 땅 2,000리를 빼앗은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가 아니라 고대 한국인들의 화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밝혀낸 바 있다.

 

 

거리비교 방법과 수학적 위치고증 방법으로 고증한 한사군의 위치

 

 

그러나 이러한 사료 고증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연구자의 사상, 국적, 학맥, 연구목적 등에 따라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수학공식으로 찾아낸 정답처럼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방법으로 한사군 등의 위치를 고증하고자 했다. 그 방법이 필자가 창안한 '단순 거리비교 방법''수학적 위치고증 방법'이었다. '거리비교 방법''수학적 위치고증 방법'으로 고증한 결과 요하의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되어 온 요동군, 요하의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되어 온 요서군, 요동속국 등은 그 실재했던 위치보다 적게는 1천 수 백리에서 많게는 수천 리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되어 온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등 또한 실재했던 위치보다 수천 리 이상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왜곡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 낼 수 있었다. 즉 요서군요동속국요동군현도군 등은 천진북경하북성 동부에 있었음을 밝혀냈다. 또한 낙랑군과 임둔군은 발해북안 즉, 하북성 동부와 요녕성 서남부지방에 있었고, 진번군은 요녕성 서북부와 내몽골 동남부에 있었음을 밝혀 낼 수 있었다.필자가 창안한 이 '거리비교 방법''수학적 위치고증 방법'은 세계 모든 국가들의 역사 기록에 남겨진 지명의 위치를 찾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6. 중국의 동북공정이 불러온 한국의 역사교육과 문제점

 

 

()나라 유민인 기자의 동래와 900여년 역사의 기자조선, 중국 연() 땅에서 온 위만의 무리가 기자조선을 멸하고 건국한 위만조선, 그 위만조선을 멸한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 현도군 등의 한사군과 대방군 등의 중국 군현이 42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왔다는 일제 식민사관과 그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한국고대사학자들의 학설들과 국사교과서 교육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불러온 것이다.,

 

3125년 이전에 기자의 무리가 한반도 북부로 와서 기자조선을 건국하여 900여 년 간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였고,

 

전국시대 이후 중국에서 유이민이 대거 한반도로 넘어 왔고,

 

()()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이주민 집단이 이주해 왔으며,

 

그 중에서 위만이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로 와서 준왕으로부터 나라를 빼앗아서 위만조선을 건국하였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중국()이 낙랑군, 현도군 대방군 등을 설치하여 420여년을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는 등 최소한 1,400년 동안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이 중국인들에 의하여 지배되었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 주민들의 피에 중국인의 피가 상당부분 섞여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일제식민사관, 일제식민사관을 추종하는 한국고대사학자들의 학설, 그러한 일제 식민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국사교육이 중국 한족의 피가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발해인의 피에 상당부분 섞여 있다. 그러므로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가 곧 중국사이다.”라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손진기, 장박천, 위존성 등은 중국 동북 지역의 고대역사를 종족문제로 접근하였다. 손진기는 기자가 인솔해서 간 상()나라 사람과 한반도에 토착 종족인 예인(穢人)과 결합하여 고조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한국과 중국 간에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중국의 이덕산란범은 이러한 중국 학계의 입장을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다.

 

, 한국학계의 단군조선고조선예맥,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계승 인식은 중국 동북지역 고대민족의 혈육 연계를 끊는 비학술적비역사적 연구결과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중국 동북의 고대 민족은 중원(中原) 내지(內地)의 민족구성의 일원으로서 중국민족이며 중국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 연구의 공동준수 원칙으로

 

중국 동북 고민족은 중국 역사범위에 속한다.

 

중국 동북 고민족 연구는 동이계와 관련을 중심으로 연구해야 한다.

 

중국 동북 고민족의 기원을 황제, 복희, 염제에 연결하여 연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화하족(한족)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입하여 동이이적과 통혼하고 교류하여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연결되었다고 강조하였다.

 

한강이북, 만주지역의 한국인들이 서기전 1117년 전부터 서기 316년까지 중국인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역사교육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노렸던 대로 한국인들에게 역사문화적인 열등감을 심어주고 숙명적 사대주의자로 만들어왔으며, 자국의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무관심을 심화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기자조선위만조선고구려발해의 역사가 중국사라는 논리적 근거도 제공하여 왔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71년간 고토수복 전쟁을 벌여왔고, 결국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이제 기자조선위만조선고구려발해와 요청나라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한 중국은 기회가 오면 한반도 북부가 2천 수백 년 이상 동안 중국의 고토라고 영유권을 주장하고, 한반도 북부에 대한 고토수복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무서운 전쟁의 원인이 될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일제 식민사관과 동일한 역사교육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객관적으로 연구 분석한 결과 기자조선은 실존한 적도 없는 상상 속의 국가이고, 한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은 한반도나 요하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하의 서쪽 지방과 하북성 동부지역에 있었다.이러한 필자의 연구로 한국 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이 바로 잡혀진다면 중국의 동북공정도 깨뜨릴 수 있고, 미래에 올 수 있는 중국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분쟁을 막을 수 있으며, 잃어버린 한국인의 역사문화적 자긍심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역사교육 바로잡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많은 애국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만이 교과서를 바로잡고 역사교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