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간도(백두산) 이야기

중국의 장백산(長白山)은 과연 현재의 백두산(白頭山)이 맞는가?

설레임의 하루 2013. 4. 12. 00:10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개마기사단 2013.01.08.  http://cafe.daum.net/mookto/GXe0/196 

 

 

 

중국의 장백산(長白山)은 과연 현재의 백두산(白頭山)이 맞는가?

중국 쪽 백두산(白頭山) 입구 이도백하(二道白河). 장백산(長白山), 중국인들이 백두산을 부르는 이름.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는 이름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가 되고 있었다. 2007년 2월 중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 한 공문서가 올라왔다.

 

장백산은 여진족(女眞族)의 발상지로서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인데, 지금 그에 대한 인식들이 모호(模糊)하다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들은 충격적이었다. 남·북한이 중국의 동북지구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중국의 역대 왕조를 침략자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휘탁 한경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이 원문을 읽어보면 지금 중국 정부가 백두산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금은 이 문건도 다 삭제해서 없어졌는데……”

 

북경감계담판(北境勘界談判) 당시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 이중하(李重夏)는 청나라 측 대표인 덕옥(德玉)·가원계(賈元桂)·진영(秦瑛) 등에게 이렇게 외쳤다. “귀관들도 몸소 가서 목격하라! 백두(白頭)와 장백(長白)은 이산(二山)인가, 일산(一山)인가?” 중국인들이 거론하는 장백산은 오늘날 만주 대부분 지역에 해당한다. 서유정 SBS-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연출자가 발견한 장백산을 그렸다는 의문의 지도 한 장, 이 단순해보이는 지도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1677년 병사만 2백명이 넘는 대규모 무리가 그들이 장백산이라 부르는 산을 향하고 있었다.

 

1684년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초(勒楚) 일행이 만주 일대에서 지형조사를 겸한 지도 작성을 하고 있었다.

 

1712년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이 조선 조정에 백두산 일대 사계(斯界)를 요구하고 있었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 청(淸) 성조(聖祖)의 황명을 받았으며, 현 백두산과 관련된 일이었다는 점이다.

 

청나라의 성조(聖祖) 황제. 그가 젊었을 때부터 만주 특히 자신들의 발상지와 백두산 일대의 지리정보에 보인 관심은 남달랐다.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집요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1677년에 무묵눌(武默訥) 일행은 청조(淸朝)의 발상지 장백산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문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장백산 등정기(長白山登頂記)를 남겼다(청사고(淸史稿), 성경통지(盛京通志) 권127, 성경통지 권57, 지북우담(池北偶談)).

 

늑초 일행의 활동은 이처럼 성경통지에 글과 함께 최초의 장백산도(長白山圖)로 남았다.

 

목극등은 지금은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로 불리는 강원비(江原碑)를 세웠다. 강의 원류를 기록한 비문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에는 ‘비(碑)의 서쪽으로 압록(鴨綠)이요, 동쪽으로 토문(土門)이라’ 하였으며, 두 강을 경계로 하여 조선과 청의 국경이 획정(劃定)됐다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 비의 위치와 그 내용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조선·청 양국간의 국경 문제가 시작됐다. 논란의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소장 “서로간에 공식적으로 공문이 오고 간 것이 아니다. 우리 쪽에는 전혀 문제를 제시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목극등을 만났을 때 문제점이 생긴다.”

 

공식적인 정계(定界)도 아니었으며, 정계비 논의도 사전에 없었다. 더구나 조선 측 대표인 접반사 박권을 연로하다는 이유로 백두산에 오르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상태 박사 “여기에는 통역관과 군관 이름만 나오는 거지 우리 나라 대표였던 박권과 이선부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외교문서의 기본도 안 되어 있는 것이다.”

 

299년 전 그 때 목극등은 정계문제를 조선 측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마음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진행된 정계였지만 당시 이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목극등이 두만강의 수원지(水源地)라고 믿고 건립한 정계비의 위치가 송화강(松花江) 상류의 발원지로 드러난 것이다.

 

현재 중국 측의 입장은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에 의해 대변된다. 최근 관련 책을 펴낸 한 학자는 SBS-TV 다큐멘터리팀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며 자신의 출판물을 참조하라고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목극등(穆克登)에게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豆滿江)이었다. 그러나 땅속으로 복류(伏流)하는 하천의 특징으로 인해 착오가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이 착오를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다. 시간이 흐르자 역사관이 바뀌어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라는 주장을 폈다.’

 

앞의 말은 일정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문제가 있다. 목극등에겐 당시 조선의 시각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조선의 역사관이 아니라 청나라의 역사관·국경관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1885년과 87년 감계담판(勘界談判) 당시 정계비 위치가 불리하자 청나라 대표들은 조선이 몰래 백두산의 동남쪽으로 정계비를 옮겼다는 억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신영길 한·일근현대사연구회장 “(이중하 대감은) 훌륭한 인물이었다. 소위 말하자면 내 목을 너희들이 자를 수 있어도 나는 우리의 국토를 단 한치도 적게 희생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조정의 무관심 속에 한 발 물러선 곳이 두만강의 지류 중 하나인 홍토수(紅土水)를 원류로 하자는 양보안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측의 주장은 서두수(西豆水)였다. 서두수는 백두산 최남단 지류였다. 그리고 다시 홍토수를 토문강의 첫 원류라는 궤변을 내세웠다. 담판은 결렬되었다.

 

윤휘탁 교수 “그러다가 1909년도에 일제와 청나라 조정 사이에 간도협약이 맺어지면서 국경문제가 일단락됐는데…”

 

이제는 석을수(石乙水)가 그 경계였고 백두산은 멀어졌다. 정계비에 의하면 토문강이라 표시된 곳이고 조선 측 대표인 이중하는 양보하여 홍토수로, 청나라 측 대표인 덕옥은 서두수로, 일제는 석을수로 타협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1931년 7월 28일 일본인 등산객들에 의해 백두산 정계비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다음날 정계비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일본군 혜산진 수비대의 짓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신영길 회장 “그건 뻔히 보이는 일이다. 일본 군인들이……, 수비대가 한 짓으로 봐야한다.”

 

1962년에는 북한과 중국이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을 체결하여 새롭게 국경선을 획정했다. 토사퇴적으로 변화가 심한 두만강 유역의 하중도들은 일일이 경위도를 표시하여 그 소속을 밝혀왔다.

 

윤휘탁 교수 “1962년 조중변계조약, 즉 국경조약을 통해서 천지(天池)의 54.5%는 북한 영유로 되어 있고, 나머지 45.5%는 중국 영유로 되어 있다. 국경선 개념이 거의 맞다. 이렇게 해서 올라가게 되면 여기서 다시 천지를 둘러싸고 이렇게 해서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이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위성 화면으로 확인한 결과 천지와는 달리 북한은 정작 백두산의 4분의 1만 소유할 뿐이고 4분의 3은 중국 소유다.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북한령이 하나, 중국령이 세 개다. 이것이 국경 관련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자리잡지 않은 이 누가 있으랴? 다만 국경과 관련한 현실 인식에서는 중국과 달리 우리 나라의 학계에서는 상이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윤휘탁 교수 “우리가 유리해진 것이다.”

 

이상태 박사 “두만강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그건 우리 땅 빼앗긴 거다.”

 

초점은 백두산 정계비의 인정 유무다.

 

육락현 간도 되찾기 국민운동본부 상임명예회장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이다. 토문강 줄기를 따라가면 송화강으로 해서 흑룡강과 합쳐서 동해로 빠진다. 이것이 정계비에 의한 근거 지도다.”

 

이상태 박사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경우에는 당연히 국경 회담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육락현 회장 “지금 당장은 못 찾더라도 우리 남한 정부가 중국 정부에게 간도는 미해결된 땅이고, 우리 민족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해야만이 다음 다음 세대에 되찾을 수 있는 근거가 남는다는 것이다.”

 

윤휘탁 교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만주라고 하는 공간을 영토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아마 향후에 한·중 관계는 파탄이 일어날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는 생각을 한다.”

 

통일한국에서 국경문제가 제기된다면 조중변계조약은 파기되고, 청·일 간도협약도 파기되고, 이중하의 감계담판이 결렬되었던, 그 원인제공을 했던 목극등의 사계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예측이다. 역사적 시각에 주목하는 바로 그 이유다. 실제로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시점은 목극등 이전이었다.

 

‘1909년 청·일 간도협약 청나라 측의 주장 제3항:양국의 경계는 (목극등 이전에) 이미 정해진 문제로, 이때 비로소 확정된 것은 아니다’

 

‘1885년 을유감계담판(乙酉勘界談判):도문강이 천연적인 경계라는 것은 아국의 전적(典籍)에 비추어 보아도 당연하다’

 

‘1712년 목극등 사계 당시:발원과 강북을 대국의 지경으로 하고, 강남을 조선의 지경으로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니 논의하지 않는다’

 

장백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다.

 

성조(聖祖) 또한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하는 것은 명백하다고 했는데,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그런데 아무도 이를 따져보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따져보려 한다. 출발점은 두 개다. 1677년 무묵눌의 최초의 장백산 등정기, 그리고 1684년 늑초(勒楚) 일행이 그린 장백산도(長白山圖)가 과연 지금의 백두산이냐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기의 두 사건이 지명과 그림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늑초가 그렸을 장백산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도의 남쪽과 북쪽 방향이 거꾸로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용강산맥(龍崗山脈) 부근은 SBS-TV 다큐멘터리팀이 임의로 확장한 것으로, 거기서 발원한 것으로 보이는 토문하(土門河)와 삼둔하(三屯河)·휘발하(輝發河)를 더 잘 알기 위해서다. 그리고 동쪽 끝에 다시 토문강(土門江)이 있다. 용강산맥의 납로와집(納櫓窩集)에서 발원하는 토문하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성경통지(盛京通志) 본문에 도문하(圖們河)란 이름으로 이 내용이 들어 있어 이 시기 그런 이름으로 존재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백두산 천지의 특징도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서유정 SBS-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연출자가 발견한 문제점들이 있다. 이에 대한 답을 전문연구자들에게 구했지만 명쾌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첫번째 의문은 1677년 무묵눌(武默訥)이 어느 방향으로 백두산을 올랐느냐 하는 점이다. 이도백하(二道白河) 쪽 이른바 북파로 올랐을 가능성은 애초에 배제됐다.

 

윤휘탁 교수 “이게 이 부분이 다 밀림이다. 그런데 오히려 서쪽 지역의 밀림의 분포가 적다. 그리고 상대적으로는 남쪽의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내 추측으로는 아마 이 서쪽 코스를 향해서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판단이 된다.”

 

무묵눌은 이 두 눌은강의 합류지점을 장백산 등정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는데, 늑초의 장백산도에도 표시가 돼 있다.

 

‘눌인, 눌연, 액음, 액인음 모두 같은 말로 만주어 러인(강물)의 한역이다.’

 

여기에 의하면 분명히 서파 등산로다.

 

굳이 많은 사료를 뒤적이지 않더라도, 이 두 눌은강의 바뀐 이름이 나온다. 장백휘징록(長白徽徵錄)에 나오는 긴강과 만강이 그것인데, 긴강은 금강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학과 교수 “위성사진에서 보면 무송현(茂松縣)에서 백두산 서파에 이르는 지역 한 중간쯤에 만강진(滿江津)이라고 있다. 지금 만강진의 위치가 여기에 있다. 이 만강진이 긴강과 만강의 합류 지점에 있는 곳으로써…”

 

그렇다면 무묵눌(武默訥) 일행은 현재의 만강진에 온 것이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해석이 하나 존재했다. 만강진이 아닌 화띠엔시였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무묵눌 일행의 행적을 되짚어가기 위해 우선 장춘(長春)으로 날아갔다. 성조 황제의 명령을 받은 무묵눌 일행은 1677년 6월 2일 또는 3일에 당시 이미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장백산을 찾아가기 위해 지금의 지린시를 출발했다. 그리고 수많은 군소지역들을 거쳐간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갔을 지역들은 지금은 거대한 인공호수로 바뀌었. 송화호(松花湖)가 그것이다.

 

이때에 그들은 17척의 소선을 이용하여 3개월 분량의 식량을 실은 식량조와 육지로 가는 본진으로 나뉘어졌다. 기록에는 온덕형하(溫德亨河)·아호산(鵝湖山)·고륵눌림(庫勒訥林)·기이살하(祁爾薩河)·납단불륵(納丹佛勒)·휘발강(輝發江) 등 거쳐간 많은 지명들이 등장하지만 눌은 지방에 이르기 전 지린시에서 6백여리 떨어진 곳의 지명인 탁룡와하(卓龍窩河)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은 화띠엔시로 향하면서 두번째 의문이 들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현 지린시에서 백두산까지의 거리는 당시 1천 3백여리 정도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6백리 이후의 기록이 없었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은 이 화띠엔시에서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중국의 향토지인 길림지지(吉林地志)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이 청나라 시기에 백산 눌음부였으며, 무묵눌의 기록에 등장하는 대소눌음하가 있었으며, 액혁눌음의 들판으로도 불리웠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통지(盛京通志)에도 두 눌은강이 지린에서 남쪽 또는 서남쪽 5백여리 지점을 흐른다고 하였다. 긴강과 만강에 비정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새인눌인하(賽因訥因河)는 그 원류가 장백산이라고 하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왕쥐펑 화띠엔시 역사박물관장 “이 일대는 그러니까 원류는 송화강(松花江), 즉 장백산(백두산을 지칭)의 산맥이다. 여기는 장백산맥에 속한다. 전부 장백산맥이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정작 화띠엔시까지 이어지는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의 이름을 들어본 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갖고 있던 중국 지도를 다 보여주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고도 박물관장은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현지 중국인들이 길림합달령은 모르고 있으며, 산맥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곳까지 장백산맥(長白山脈)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백두산을 시작으로 용강산맥(龍崗山脈)을 거쳐 화띠엔시 부근에까지 이렇게 넓은 범위로 장백산맥이 확장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해서 서로 다른 위치의 같은 이름의 두 눌음하(訥音河)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이 되었다.

 

심지어 무묵눌 일행이 갔다는 장백산도 백두산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기점으로 한 모든 가능성이 열려 버렸다.

 

여기서 무묵눌 일행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기록을 보면 눌은 또는 액음 들판에서 장백산까지 오고 간 여정이 대단히 불규칙햇으며, 그 거리 또한 기록마다 달라 짐작이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정작 이상한 점은 한 기록에서 그들이 남쪽의 전망처로 되돌아왔다고 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백두산 남쪽에서부터 올랐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 조선·청 양국간의 국제정세상 사전통보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출전(出典)이 다른 사료에도 장백산 남쪽의 지세에 대한 묘사가 기록돼 있다. 백두산 천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대신 강 중간에 연못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압록강에 대한 언급은 한결같이 누락됐다. 그 7년 후에 나온 늑초의 기록은 더 이상한 점이 많다. 조선 변민들과의 충돌 사건으로도 유명한 늑초(勒楚)는 학계의 통설상 백두산의 남쪽을 오르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1684년경의 성경통지 초간본에는 늑초가 묘사한 장백산 남쪽의 형세가 나오며, 북쪽이나 서쪽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으로 보기 어려웠다.

 

1712년의 목극등(穆克登)의 사계(斯界)는 백두산 일대 특히 남쪽 지형에 대한 지리정보가 없었던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었다.

 

이상태 박사 “압록강과 그 두만강 일대의 그쪽에 관한 역사적 지리 인식, 산천에 관한 지리 인식이 부족하니까 그쪽 부분을 좀 정확하게 조사해 가지고 와라. 이게 이제 성조 황제의 기본적인 지시 사항이었다.”

 

근 30년에 걸친 집요함이었고 집착이었다. 조선 측의 반발도 무시못할 정도였지만 백두산(白頭山) 사계(斯界)에 대한 강압적인 언급만도 수차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목극등의 사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에서 두번째로 큰 산, 조대계산(肇大鷄山)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기록으로만 보이는 늑극산(勒克山)일 가능성 때문이다. 무묵눌(武默訥) 일행이 지나간 탁룡와하(卓龍窩河) 또는 찰륜과하(扎倫果河)가 늑극산에서 발원하여 두 눌음하에서 합류한다고 했으며, 지린시에서 6백리 남쪽에 있다고 했다.

 

조대계산은 1257미터 높이의 산이지만 평지에 산 하나가 우뚝 솟은 형세일 뿐이다. 산 아래 신융호(新隆湖)는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장관을 이룬다고 소개되고 있지만 메마른 저수지일 뿐이다. 산천은 다름이 없는데 옛 지명, 특히나 만주어로 남은 옛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현지 주민들 “길림합달령?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SBS-TV 다큐멘터리팀은 길림합달령의 중심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도중에 판스시가 있다. 우리 말로 반석(磐石), 실제로 인근 마반산에 반석이 있어 시(市) 이름이 됐다고 한다. 우리는 강 이름과 시 이름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한두세대로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러나 좀 더 긴 시단 단위로 보면 지명의 변천은 무쌍했다. 역사의 부침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마반산의 반석은 산 중턱의 평범한 암반이었다. 암반에 굴을 뚫어 일제의 만주 침략시 피난처로 사용됐다고 한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장백산(長白山), 이 넓은 만주 일대가 원래부터 다 장백산맥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원류가 어디일까?

 

새로운 가능성이 하나 더 제기됐다. 성경통지(盛京通志)의 장백산도(長白山圖)는 단 하나의 산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렇게 넓은 범위의 산맥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학과 교수 “중국인들은 산맥 이름을 ‘맥(脈)’자를 빼고 그냥 산이라고 붙인다. 그래서 중국 지도에 나와 있는 장백산은 장백산맥(長白山脈)을 이야기하고…, 이 정도 되면 굉장히 넓은 지역이다. 우리는 이런 지역을 대지(大地)라고 일컫는다. 이게 조금 높은 곳에 있으면 고원(高原)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도 다 이렇게 포함이 되는데……”

 

사료들에서 한결같이 나오는 장백산의 기류는 1천리에 걸쳐 있는 산맥이었다. 즉 장백산맥인 것이다.

 

이민부 교수 “횡으로 1천리는 이게 영 표현이 안 되는데……?”

 

현 백두산 일대 장백산맥이 길이 약 1천 3백여킬로미터, 청나라 때의 측정지수로 따지면 2천 2백리가 넘는다. 고대의 기록보다 장백산맥이 더 긴 산맥이었던 것이다. 늑초(勒楚)는 자신이 본 장백산이 명일통지(明一統志)가 말한 바와 같았다고 하였다. 그 명일통지에 두 개의 기록이 나오는데, 회녕부(會寧府) 즉 현 개원시 남쪽 60리에서 시작하여 1천리에 뻗어 있다고 하였으며 다른 부분에서는 삼만위(三萬衛), 역시 현 개원시에서 동복쪽 1천여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여 1천리에 걸쳐 있다고 하였다.

 

이 두개의 조건에 부합되는 산맥은 현재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뿐이다.

 

이민부 교수 “그렇다. 지금 현재 장백산지하고, 길림합달령 산맥하고는 상당히 평지로 이렇게 분리가 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들이 말하는 장백산은 상당히 북쪽에 올라가 있는 산지가 되겠고 그런 경우에는……”

 

그런 경우에는 늑초가 그렸을 이 장백산도(長白山圖)에는 현 길림합달령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지명들이 여전히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제 판스시를 지나 랴오위안시를 향해 가는 중이다. 길림합달령의 중간지대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 일대 산들을 기점으로 하여 곳곳에서 강들이 발원하는 중요한 분수령 지대이기도 하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이 길림합달령 일원의 산들 이름이 나열돼 있다. 안파화탁봉(安巴和托峯)·아제격화탁봉(阿濟格和托峯)·달양아령(逹揚阿嶺)·뉴혁령(鈕赫嶺) 등등… 모두 지린시에서 5백리 떨어진 산들로, 장백산도에 나오는 산의 지명과 비슷한 이름의 산들이 있고 액흑눌인(額黑訥因)과 새인눌인(賽因訥因)은 길림합달령과 백두산 두 곳으로 혼재돼 있다.

 

그런데 성경통지의 장백산도를 다시 보던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세 군데 지명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판본의 차이였다. 성경통지는 총 다섯 차례 속수(屬修)라고 하여 수정·증보·보완되었다. 그런데 달라질 이유가 없는 장백산도의 지명들이 바뀌거나 지워진 것이다. 휘발하와 휘발성이 지워지고 혼돈강은 압록강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민부 교수 “아! 이것은(3차본) 잘못된 것이 맞고, 이게(초간본)이 올바른 것이다. 압록강하고 이게 방향이 다른데…, 그렇군. 그런데, 이것은 의도는 모르겠지만 좀 인위적으로 변경을 시킨 그런 느낌이 많이 난다.”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소장 “오류가 아니고 일부러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명을 삭제하거나 바꿔 놓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과연 무슨 의도였을까?

 

성경통지에 수록된 또 다른 지도, 성경여지전도(盛京輿地全圖). 이 지도도 지금의 상식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도상의 장백산이 동가강이 발원하는 용강산맥 북쪽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민부 교수 “이 지도를 보면, 이 지도 자체는 분명하게 이게 백두산이 아니고 이거는……”

 

이번엔 청일통지(淸一統志)의 성경전도(盛京全圖)다. 여기에도 백두산 위치는 애매하지만 장백산은 뚜렷하다. 역시 같은 산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이상태 박사 “이쪽의 장백산은 분명히 백두산이라고 볼 수 없다. 이거는 백두산하고는 다른 산이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분명히 다른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지도에 나오는 지명을 좀 더 살펴보자. 길림합달령으로 보이는 장백산 위쪽에 휘발성과 휘발하가 그려져 있다. 현 학계의 견해로는 길림합달령의 동남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통지 등 사료상으로는 지린시를 기준으로 5백리 정도 떨어진 길림합달령 중심 산들보다 더 가깝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제작된 근대 만주지도를 보면 지금까지의 의문이 일시에 해결된다. 길림합달령 위에 휘발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도의 장백산은 백두산이 아니라 길림합달령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만주 일대를 포괄한 넓은 범위의 장백산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장백산은 그 좁은 범위에 원래의 장백산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의 차량은 이제 길림합달령을 넘는 중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수산호(壽山湖), 청(淸) 성조(聖祖)가 동북 지역을 순시한 후 귀로길에 들러 내린 이름이라 한다. 이 호수는 이통하의 최대 발원지다.

 

이통하는 지명변천의 유래를 거쳐갈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압자하(鴨子河)였으며, 요(遼) 성종(聖宗) 태평4년(1024년)에 이름을 고쳐 혼돈강(混同江)이라 하였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혼돈강의 최대 발원지다. 이후 혼돈강은 다시 지명을 옮겨갔다. 그렇지만 강의 흐름은 옛과 같으니 흘러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이제 우리는 늑초(勒楚)의 장백산도(長白山圖)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휘발하와 휘발성, 혼돈강의 그림을 다시 그려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성경통지의 3차 속수본에서부터 이 3개의 관련 지명을 지워버린 이유도 짐작하게 되었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역사왜곡이다.

 

이일결 한국간도학회장 “요동지를 보게 되면 (토문하가) 개원성 동북 5백리에 장백산 북쪽에서 송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가지고 송화강으로 간다는 것이거든요.”

 

장백산도에 그려져 있는 토문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현 용강산맥에서 발원하는 토문하가 있었다. 그렇지만 길림합달령 북쪽의 토문하도 있었다. 지도가 아니라 문헌에는 더욱 확실하게 기록돼 있다. 토문하가 길림합달령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휘발성과 나아불로성을 경유한다고까지 하였다. 이 성은 무묵눌이 청조의 발상지 장백산을 오기 위해 경유했던 곳이다.

 

길림합달령 북쪽으로 토문하까지 들어가게 되어 이제 이 장백산도의 장백산을 길림합달령으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을 정도다. 길은 이제 완연한 내리막길이다. 대체로 이 지점을 좌우로 하여 동요하 수계와 송화강 수계로 나누어진다. 산무리 단 한뼘의 발원지 차이로 인해 수만리의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동요하의 발원지로 유명한 랴오위안시다. 이 강은 여기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흘러 반대편 내몽골 지역에서 오는 더욱 큰 서요하로 흘러들어 대요하가 된다. 이 하천도 동요하의 지류로 수많은 옛 이름을 지녔을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저 동요하일 뿐이다.   

 

현지 주민 “여기는 동요하의 발원지다. 랴오위안 일대는 전부 구릉이다. 장백산의 여맥이다.”

 

여기서 장백산의 여맥이란 말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두고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길림합달령은 모르고 있었다.

 

이제 SBS-TV 다쿠멘터리팀의 여정도 그 끝을 향하고 있었다. 랴오위안시에서 서쪽으로 가면 시펑현이다. 길림합달령의 중심은 벗어난 것이다. 시펑현에 있는 빙립산을 찾아가는 중이다. 여기도 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 장백산 중의 하나다. 지명의 연원은 물론 잊혀졌다.

 

현지 주민 “청나라 때부터 빙립산으로 불리워졌다. 이곳도 장백산맥에 속한다. 어디까지인지는 우리도 모르겠지만 여기는 다 장백산맥에 포함된다.”

 

지금까지의 추적을 통해 SBS-TV 다큐멘터리팀이 추측한 장백산은 이런 것이었다. 장백산이 상징성으로서뿐만 아니라, 실제 여러 민족·종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산이라기보다 산맥의 개념이 더 강했었고, 때로 그 산맥 중의 하나의 산을 지칭할 때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산도 하나가 아니었을 가능성이다. 시대가 바귀면 변하지 않은 산천이 변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징들이 불과 두세시기 전까지 이곳 길림합달령 일대를 가리키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분명한 것은 산천의 지명들이 너무도 쉽게 사라지거나 옮겨 다녔다는 점이다. 역사의 부침이 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지 산악구조회원 “여기가 장백산, 즉 합달령의 여맥이다. 가장 마지막에 도달하는 위치다. 여기가 용의 꼬리고, 장백산(백두산을 뜻함)이 용의 머리라는 뜻이다.”

 

이 빙립산에서 남쪽으로 용강산맥(龍崗山脈)에 이른다. 늑초의 기록에 장백산의 남쪽 분수령이라 한 바로 그곳이다. 그 바로 밑이 흥경으로 청조의 진정한 발상지다.

 

진정한 발상지라 한 이유가 있다. 청조는 자신들의 발상지마저 이곳저곳 옮겨다녔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영고탑(寧古塔)이다. 영고탑이란 숫자 6을 뜻하는 만주어 임고타의 한역으로 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奴爾哈齊]의 6명의 조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영고탑이 원래 흥경에 있었는데, 성조(聖祖) 재위기에 지린을 거쳐 지금의 헤이룽장성 영안시로 옮겨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원래 이곳이 영고탑 지역인 것으로 둔갑됐다.

 

그 증거가 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재위 28년인 1595년 12월 후금 건립 이전의 누르하치의 정세를 탐문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은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자세한 견문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도성은 호란합달성으로 그 인근에 영고탑이 있다고 하였다. 그곳이 누르하치의 두번째 도성으로 지금의 흥경이다. 이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가 다시 재정리를 했다. 용강산맥 남쪽에 임고타로 지명표시를 했으며 인근에 같은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르하치의 조부들은 6개의 성을 축성했었는데, 서로간의 거리가 2·30리였음도 알 수 있다. 그들 6명의 조부 칭호가 영고탑패륵(寧古塔貝勒)이었다.

 

현재 청조의 발상지라 주장되는 곳들을 만주의 지도에다 표시해보면 만주 전역이 그들의 발상지 판도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이것은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 곳들이기도 하다.

 

자, 이제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로 들어가 보자. 서쪽으로 압록(鴨綠)이라 했다. 장백산도에는 그려넣지 않았지만 문헌에는 역시 서쪽으로 압록이라 했다.

 

남의현 강원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중국에서 연구된 변계사 책은 한국 고대부터 현재 북한까지 압록강의 국경선은 변할 수 없다는 것……”

 

과연 압록은 옮겨다닌 지명이 아니었을까? 여기서는 고대 기록에 나오는 압록의 특징 두가지만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우선 옛 고구려 영역에서 압록이 제일 큰 강이었다. 그 서쪽에 있었던 요수보다 강폭에 있어서는 세배나 차이가 났다. 그리고 요수와 더불어 압록수도 입해고(入海枯) 변천이 심한 강이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재위기와 말기 사이인 430년 동안 입해고가 무려 130리나 신장된 강이었다. 오늘날 압록강은 이런 특징을 찾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제 조심스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성경통지 초간본의 이 장백산도는 지금까지의 분석으로 보면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하나의 지명이 두 군데로 해석이 가능했던 시기로 지명이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지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시기의 편찬자 입장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우고 옮겼는데 엉뚱하게 압록을 백두산의 북쪽으로 옮겨 버렸다.   

 

성조의 황명을 받아 잊혀진 발상지 장백산을 찾아가던 무묵눌은 과연 백두산을 올랐던 것일까? 여기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다. 그 35년 후인 목극등(穆克登)의 사계(斯界) 당시 기록인 김지남(金指南)의 북정록(北征錄)에 의하면 목극등은 백두산이 조선의 것이란 말을 했다고 하였다.

 

이상태 박사 “목극등이 당시 그런 얘기를 한다. 대국의 산천은 비록 다 그려줄 수 없지만 백산(백두산)은 이미 너희 땅이니 (그림) 한 본을 주는 게 뭐 어렵겠느냐? 백두산이 우리 땅이라고 분명히 오라총관 목극등이 인정하는 내용이다. 여기 백산 말이다.”

 

청나라의 성조 황제가 자신들의 발상지를 대단히 중시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장소도 이미 무묵눌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리고 나서 해마다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보내어 제사도 지냈다. 그곳이 백두산이라면 목극등은 결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따져보지 않았던 청나라 측의 주장, 국경선이 목극등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주장을 역사적 맥락에서 따져보았다. 그러나 국경선 그런 것은 그 이전에도 없었다. 아니 성조 이후 일정시기 동안에도 없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빈 공지만 남았다. 무인지대가 된 것이다. 그 무인지대를 경계짓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유조변(柳條邊)이다. 

 

남의현 교수 “이게 명나라 때 요동 변장선이다. 이것이 구변, 노변이 되는 것이다.”

 

유조변은 명나라 때 이미 설치되어 그 바깥은 조선과의 국경 중립지대였다가 청나라 시기에 약간의 변화를 겪는다.  

 

남의현 교수 “흥경이라는 곳에 자기네 조상들 묘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흥경을 이 경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성조 재위기에 지금의 장춘과 지린 사이로 그 선이 뻗어나갔는데 그것이 이른바 신계루다.

 

남의현 교수 “지금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늘 여기 압록강이 경계라고 하는데 그건 중국 측의 논리일 뿐이고, 우리 쪽 사료와 비교해보면 여기 이 지역은 국경 중립지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압록강 너머의 유조변과 유조변문의 모습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일정한 무인지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의현 교수 “빈 땅이라는게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양쪽 어느 국가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을 그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국경 지역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조 재위기에 청나라에서 활동했던 프랑스인 선교사 리지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추측컨대 만주는 중원을 공격하기에 앞서 조선과 싸워 이를 정복하고 무인지대를 두기로 이를 의정했다. 지도상에 점선으로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을 뒷받침해주는 중국 측의 기록들도 있다. 유변기략(柳邊紀略)에는 ‘성경장군 관할지역은 판도내로, 영고탑장군과 애헌장군 소관지역은 군현도 없으며 무판도’로 설명해 놓았다.

 

남의현 교수 “봉금지역은 청나라에게는 무판도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신의주 쪽 압록강과 북쪽 봉황성 변문 사이의 중립지대 거리가 120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북한과의 무역으로 번성하는 단둥시도 당시에는 사람들이 없는 무인지대였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지역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남의현 교수 “봉황성에서 압록강으로 나오면 초하하고 애하하고 만나는 지점이 있다. 그러니까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 쪽으로 오는 지점인 것이다. 조선 쪽으로 국경 중립지대를 넘어온 것이니까 당연히 조선에서는 저항에 들어간 것이다.”

 

청나라의 관리가 중립지대인 망우초 지역에 수로방지시설 공사를 하려 하자, 조선 측의 항의로 중단된 일이 있었다. 1731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정계비를 세운 직후인 1714년에도 두만강 너머로 들어와 살던 청인들이 쫓겨난 일이 있었다. 성조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남의현 교수 “이렇게 청나라 때도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서 ‘서위압록(西爲鴨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계비를 세운 이후에도 이 선이 국경선 역할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빈 땅으로 남아 있을수만은 없었다. 조선의 국력이 약해지던 그 시기 1870년대 어느새 만주는 양국의 민초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국경선 문제가 촉발됐다.

 

일제가 만주와 한반도를 이어버린 이 장백산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만일 지금 우리가 만주지역까지 손에 넣고 있었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산맥지도를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이러한 장백산맥 지도를 만들었다.

 

남의현 교수 “보통 우리가 미래를 준비한다면 하나는 역사적인 문제를 정립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국력을 키워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2007년 2월의 이 중국 사회과학원 문건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백두산이라 등록된 중국내 모든 상호를 취소시키고 여진족이 장백산, 즉 백두산을 발상지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극 선전하며 국경 밖 야심가들(남한과 북한을 지칭함)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SBS-TV 다큐멘터리팀은 다시 이름 모를 산길을 달렸다. 한국에서부터 여기에 오면 꼭 오르고 싶었던 산이 하나 있었다. 시골 민가들도 지나고 몇시간을 그렇게 이름 모를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 하나의 산이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산이었다. 산 중턱에 돌로 축성된 성벽이 나타났다. 고구려식 산성이었다. 어느 옛 기록에는 장백산에 작은 석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엔 그림같은 호수는 없었다. 작은 계곡수가 흘러내릴 뿐이었다.

 

오르막길이 가팔랐다. 그리고 한시간 남짓, 성경통지의 장백산도에 묘사된 것과 같은 돈대 형상의 암반이 솟아나 있었다. 거의 산 정상에 가까운 곳이었다. 산 정상도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주어로 된 길림합달령 안의 봉우리 암반화탁봉이 생각났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큰 대문 산쯤 된다. 여기도 길림합달령이고 장백산이기도 하다. 남서쪽으로 내려간 산줄기는 회령부로 뻗어 두 팔로 껴안는 형세라 하였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정착된 산들이 긴 여맥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의 상상을 허락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지명의 역사는 시간으로 연결되니까 만약 그 시간이라는 퍼즐조각 중 하나가 없으면 연결은 끊기게 된다. 여기 만주라는 공간은 여전하지만 하나의 시간대가 침묵하고 있다. 만주어가 사라진 것이다.  

 

{이상}

 

☞ 참조 사료 원문 해석

 

① 청사고(淸史稿) 권283 각라무묵눌열전(覺羅武默訥列傳)

 

十六年,命偕侍衛費耀色、塞護禮、索鼐, 瞻禮長白山,諭曰:「長白山祖宗發祥之地,爾等赴吉林,選識路之人,瞻視行禮,並巡視寧古塔諸處,於大暑前馳驛速往.」五月己卯,武默訥等發京師;己丑,至盛京,東行;戊戌,至吉林.詢土人,無知長白山路者.得舊居額赫訥殷獵戶岱穆布魯,言其父曾獵長白山麓,負鹿歸,道經三宿,似去額赫訥殷不遠.自吉林至額赫訥殷,陸行十日,舟行幾倍之.寧古塔將軍巴海令運米十七艘詣額赫訥殷,先發,並令協領薩布素護武默訥等行.六月丁未,武默訥等攜三月糧,陸行經溫德亨河、庫埒訥嶺、奇爾薩河、布爾堪河、納丹弗埒城、輝發江、法河、卓隆鄂河,抵訥殷江干,米亦至.乃乘小舟,與薩布素分道行,泝訥殷江逆流上. 丙寅,會於額赫訥殷.一望深林無路,薩布素率□前行,伐木開道.遣人還告:行三十里,得一山,升其巔,緣木而望,長白山乃在百餘里外,片片白光如積玉,視之甚晰.戊辰,武默訥前行.己巳,遇薩布素於林中.壬申黎明,大霧,莫辨山所向.聞鶴唳,尋聲往,遇鹿蹊,循行至山麓,見周遭密林,中間平迤圓繞,有草無木.前臨小林,盡處有白樺木,整若栽植,及旋行林外,仍瀰漫無所見.跪誦敕旨,拜畢,霧開,峯巒歷歷在目,登陟有路.遙望之,山修而扈,既近,則堂平而宇圜,向所睹積玉光,冰雪所凝也.山峻約百餘里,巔有池,環以五峯,其四峯臨水拱峙,正南一峯稍低,分列雙闕.池廣袤約三四十里,夾山澗水噴注,自左流者為松花江,右流者為大小訥殷河,繞山皆平林.武默訥瞻拜而下.峯巔羣鹿奔逸,仆其七,墜武默訥等前.時登山者正七人,方乏食,謝山靈賜.卻行未里許,欻然霧合.癸酉,還至前望處,終不復見山光.七月庚辰,至恰庫河,馬疲甚.甲申,自恰庫河乘舟還,經色克騰、圖伯赫、噶爾漢、噶達渾、薩穆、薩克錫、法克什、多琿諸河,至松花江.八月丁未,還吉林,巡視寧古塔諸處.乙丑,還京師.疏聞,詔封長白山之神,秩祀如五嶽.十七年,命武默訥齎敕往封,歲時望祭如典禮.

 

강희16년(서기 1677년) (4월15일), 동 시위 비요색(費耀色), 새호례(塞護禮), 색내(索鼐) 등에게 명하여 장백산(長白山)을 첨례(瞻禮)토록 하고, 훈시하기를, “장백산은 조종(祖宗)의 발상지이다. 너 등은 길림으로 가서 길을 아는 자를 골라, (산에 이르러) 첨시행례(瞻視行禮, 살펴보고 예를 행함)하고, 아울러 영고탑(寧古塔)의 제지역들을 순시하되, 큰 더위가 오기 전에 역참들을 질주하여 속히 다녀오라.”고 하였다. 5월 기묘일(4일), 무묵눌(武默訥) 등은 경사를 출발하였다. 기축일, 성경(심양)에 이르러 동쪽으로 갔다. 무술일, 길림에 이르러 현지인에게 물었으나, 장백산 길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전에 액혁눌은(額赫訥殷)에 거주한 적이 있었던 사냥꾼 대목포로(岱穆布魯)란 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이르길, 자신의 아버지가 일찍이 장백산 기슭에서 사냥을 하여 사슴을 짊어지고 (액혁눌은으로) 돌아오는 중 길에서 3일을 묵었는데, (장백산에서) 액혁눌은과의 거리가 이와 비슷하며, 멀지 않다고 하였다[似去額赫訥殷不遠]. 길림에서 액혁눌은에 이르는 데는, 육로로 10일, 배로는 그 배가 걸린다고 하였다. 영고탑장군 파해(巴海)가 명하여, 17척의 배에 쌀을 싣고 먼저 출발토록 하고, 아울러 호위장(協領) 살포소(薩布素)에게 명하여 무묵눌 등을 호위해 가도록 하였다. 6월 정미일, 무묵눌 등은 3개월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육로로 온덕형하(溫德亨河), 고랄눌령(庫埒訥嶺), 기이살하(奇爾薩河), 포이감하(布爾堪河), 납단불랄성(納丹弗埒城), 휘발강(輝發江), 법하(法河), 탁륭악하(卓隆鄂河)를 경유하여 눌은강변(訥殷江干)에 도착하였는데, 쌀 또한 도착하였다. 작은 배에 올랐다. 살포소(薩布素)와는 길을 나누어 갔다. 강 흐름을 거슬러 상류로 향하였다. 병인일, 액혁눌은(額赫訥殷)에서 모여 깊은 산림을 바라보니 길이 없었다. 살포소(薩布素)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앞장을 서서, 나무를 베어 길을 열었다. (그가)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30리를 가면 산 하나가 보이는데, 그 산을 올라 나무위에서 바라보면, 장백산이 백여 리 바깥에 있으며, 군데군데 흰빛이 반사되는 것이 적옥 같고, 이를 바라보면 심히 눈이 부시다고 하였다. 무진일, 무묵눌(武默訥)이 앞장섰다. 기사일, 살포소(薩布素)를 숲속에서 만났다. 임신일, 날 밝을 무렵에 큰 안개가 끼어, 산이 어디를 향하는 지를 분별할 수 없었다. 학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다가 사슴이 다니는 지름길을 발견하여 순행하였다. 산기슭에 이르러 밀림으로 뒤덮인 사방을 바라보니, 중간부에 평탄하면서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지대가 있었는데, 풀은 나 있었지만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전면으로는 관목숲이 펼쳐져 있고, 흰자작나무(만주자작나무는 몸통이 눈처럼 희다. 이를 국내에 이식하면 약간 흰색이 발현한다)숲은 마치 사람이 심고 가꾼 것인 양 가지런하였다. 이를 둘러 숲 바깥으로 돌았다. 온통 안개로 가득차 시야가 트이지 않았다. 무릎을 꿇어 칙지를 낭송하고 재배하기를 마치니, 안개가 개었다. 산봉우리가 눈앞에 역력하였다. 산을 오르니 길이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세는 웅장하였고, 이미 가까워져서는 산세가 평평하고 또 원만하였다[堂平而宇圜]. 눈길이 미치는 곳은 다 옥을 쌓은듯 눈부셨는데, 빙설이 응결된 것이었다. 산 높이는 약 백여 리였다. 산 정상에는 못이 있어,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중 네 봉우리는 물에 연하여 한 아름씩 우뚝 솟아 있었다. 정남쪽의 한 봉우리는 차츰 낮아지며, 두 개의 능선으로 갈라졌다. 못의 넓이는 약 삼사십리였다. 산을 끼고 계곡수가 흘러내렸다[夾山澗水噴注]. 좌측으로 흐르는 것이 송화강이요, 우측으로 흐르는 것이 대소 눌은하(訥殷河, 강물)로 되었다. 산 둘레는 다 평탄한 숲이었다. 무묵눌(武默訥)은 우러러 절하고 하산하였다. 산정에서 사슴이 놀라 달아났는데, 그 중 7마리가 넘어져, 무묵눌 등의 앞으로 떨어졌다. 이때 등산한 사람이 정확히 7인이었는데, 다 식사를 거르고 있었다. 산신이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드렸다. 1리를 채 못가서 홀연 안개가 일어났다. 계유일, 앞서 전망하던 곳으로 돌아오니, 다시는 산빛을 볼 수가 없었다. 7월 경진일, 흡고하(恰庫河)에 이르니, 말이 심히 지쳤다. 갑신일, 흡고하(恰庫河)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색극등(色克騰), 도백혁(圖伯赫), 갈이한(噶爾漢), 갈달혼(噶達渾), 살목(薩穆), 살극석(薩克錫), 법극십(法克什), 다혼제하(多琿諸河)를 경유하여 송화강(松花江)에 이르렀다. 8월 정미일, 길림으로 귀환하였다. 영고탑(寧古塔)의 여러 곳을 순시하였다. 을축일, 경사로 돌아왔다. 소(疏)를 올리니, 조하여 장백산신으로 봉하고, 품계(秩)를 주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오악과 같이 하였다. 17년, 무묵눌에 명하여, 칙서를 지니고 가서 (장백산을) 봉하도록 하였다. 세시 망제함이 전례(典禮)의 규범과 같았다.

 

② 성경통지(盛京通志) 권127 국조예문(國朝藝文)13 대장백산기(封長白山記)

 

康熈十有六年四月望日, 上以長白山發祥要地, 特命内大臣覺羅武穆訥一等侍衛兼親隨侍衛費雅什一等侍衛塞護禮等於大暑前馳驛往. 五月四日啓行, 十四日至盛京, 二十三日至烏拉, 宣諭鎮守將軍等, 召村莊獵户, 皆無知長白者. 都統[曰]尼雅罕族祖岱穆布魯, 世採獵以老退閒, 自言祖居額赫額音, 聞其父嘗云獵鹿長白山, 負以歸四日可抵家. 以此度之, 長白與額音距當不遠. 因問額音路幾何, 獵户噶拉達額赫等曰, 陸行十日, 水路乗小舟二十日. 乃命獵人喀喇, 前導. 各持三月粮. 又慮食盡馬乏不能歸也. 期將軍巴海載米一舟候於額音. 於是噶拉達額赫等由舟, 覺羅武穆訥率薩布素由陸, 六月三日啓行. 經温徳亨河·防虎山·庫勒訥林·奇爾薩河·温都河·布爾堪河·納丹佛勒地方·輝發江·發河·穆敦林巴克坦河·納爾琿河·敦敦山·扎倫果河, 几數十處. 抵額音, 而噶拉達額赫等亦至. 葢自江逆溯, 由呼努瑚河, 至佛多和河. 復順流, 來會纔七日耳. 十一日發額音, 一望林莾迷不得路, 薩布素率旂甲二百人伐木開道. 十二日悉衆行. 是日薩布素遣顧愫等先後馳報, 前進約百數十里, 登一山, 升樹而望, 遥見遠峯, 白光片片, 殆長白山也. 因留噶拉達額赫等, 督米珠蚌. 十四日與薩布素等會, 密樹茂林揣摩開路. 十六日黎明, 聞鶴鳴六七聲. 雲霧迷漫, 不復見山. 乃從鶴鳴處覔, 徑得鹿蹊, 循之以進則山麓矣. 始至一處樹木環密中, 頗坦而圓, 有草無木, 前臨水. 林盡處有白樺木, 宛如栽植. 香木叢生, 黄花爛漫. 隨移駐林中然雲霧漫漫, 無所見也. 衆惶惑前誦綸音禮, 甫畢, 雲披霧捲, 歴歴可覩, 莫不歡呼, 稱異. 遂攀躋, 而上有勝地, 平敞如臺, 遥望山形長濶, 近視頗圓, 所見白光, 皆氷雪也. 山高約百里, 五峯環繞憑水而立, 頂有池, 約三四十里, 無草木. 碧水澄清, 波紋蕩漾. 繞池諸峯, 望之摇摇, 若墜, 觀者駭焉. 南有峯稍低, 宛然如門. 池水不流, 山間則處處有水, 左流為松阿哩烏拉河, 右流為大小額音河. 瞻眺之頃, 峯頂遊鹿一羣, 皆駭逸惟七鹿忽墜落. 衆喜曰神賜也. 葢登山適七人, 時正乏食, 拜而受之. 回首望山, 倐復雪霧. 遂於十八日, 南回至前登山高望處. 一氣杳㝠, 并不見有山光矣. 二十一日, 至二額音河合流處. 二十五日, 至阿嚕河則額音東流合處也. 二十九日, 由阿嚕庫河, 歷色克騰·圖畢赫·噶爾罕·噶達琿·薩滿·薩克錫·法克錫·松阿哩, 多觀大江險絶處凡九. 七月二日, 次烏拉. 十二日, 抵寧古塔. 遍閲會寧諸府. 八月二十一日, 還京.[盛京通志卷一百二十七 國朝藝文十三 記一

 

강희(康熙)16년 4월 망일(15일), 황제는 장백산이 발상요지이므로 내대신(内大臣)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 일등시위 겸 친수시위 비아십(費雅什), 일등시위 새호례(塞護禮) 등에게 특명을 내려, 큰 더위가 오기 전에 역참 사이를 달려 다녀오라고 하였다. 5월4일 출발하여 5월14일 성경에 도착하였으며, 5월23일 오랍(烏拉)에 도착하였다. 진수장군(鎭守將軍) 등에게 왕의 유지(諭旨)를 보이고, 촌락의 사냥꾼[村莊獵戶]들을 불러 물어보았지만 모두 장백산을 몰랐다. 도통(都統, 이전의 固山額真)이 이르길(의미상 원문 ‘都統尼雅罕族’에서 都統[曰]尼雅罕族으로 고친다), 니아한족(尼雅罕族)의 늙은이 대목포로(岱穆布魯)란 자가 대대로 수렵과 채집(採獵)을 하였었는데 나이 들어 은거해 있으며, 그가 스스로 이르길, 조상은 액혁액음(額赫額音)에 거주하였으며, 그 부친이 일찍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장백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여 짊어지고 돌아오는데 집에까지 4일이 걸렸으며, 이로써 보건대 장백산에서 액음(額音)까지의 거리는 당연히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길림에서) 액음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를 물었더니, 사냥꾼 갈랍달액혁(噶拉達額赫) 등이 이르길, 육로로는 10일이며, 수로로는 작은 배를 타면 20일이 걸린다고 하였다. 이에 사냥꾼 객라(喀喇)에게 명하여 길을 앞서도록 하였으며, 각각 3개월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또한 식량이 다하고, 말이 지쳐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장군 파해가 (따로) 한척의 배에 쌀을 싣고 액음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약조하였다. 이에 갈랍달액혁(噶拉達額赫) 등은 배로,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은 살포소를 이끌고 육로로 6월3일 출발하였다. 온덕형하(温徳亨河), 방호산(防虎山), 고륵눌림(庫勒訥林), 기이살하(奇爾薩河), 온도하(温都河), 포이감하(布爾堪河), 납단불륵(納丹佛勒) 지방, 휘발강(輝發江), 발하(發河), 목돈임파극탄하(穆敦林巴克坦河), 납이혼하(納爾琿河), 돈돈산(敦敦山), 찰륜과하(扎倫果河)를 경유하니, 무릇 수십 곳을 지난 것이다. 액음에 이르니 갈랍달액혁(噶拉達額赫) 등이 또한 도착하였다. (여기서) 강을 거슬러 오르니, 호노호하(呼努瑚河)로부터 불다화하(佛多和河)에 이르고, 다시 강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가서 다시 만나니 겨우 7일이 걸렸을 뿐이었다. 6월11일에 액음(額音)을 출발하여, 멀리 바라보니 숲이 우거져 길을 알 수가 없었다. 살포소(薩布素)가 기치를 든 갑병 2백을 이끌고 나무를 베어 길을 개척하였다. 6월12일, (뒤에 남은) 전원이 움직였다. 이날 살포소가 고소(顧愫) 등을 (무목눌에게) 보내었는데, 연달아 말을 달려 보고 하였다. (그 내용은) 약 백 수십 리를 전진하여 산 하나를 오른 다음 나무에 올라가 바라보니, 멀리 봉우리 하나가 보이는데, 흰빛이 곳곳에 반짝이니, 이것이 장백산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갈랍달액혁(噶拉達額赫) 등은 머물러서 쌀을 지키고 민물진주조개(珠蚌) 등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6월14일, 살포소 등과 만나서 무성한 밀림속을 어림짐작으로 길을 뚫었다. 6월16일, 여명에 학 울음소리를 예닐곱 번 들었다. 운무가 너무 짙어 다시 산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학 울음소리가 난 곳을 쫓아 길을 찾다가, 마침내 사슴이 다니는 지름길을 찾았다. 이를 좇아 나아가니 즉, 산기슭이었다. 막 한 곳에 이르니, 수목이 둘러싸 밀림을 이루는 중에 자못 평탄하고 둥근 곳이 있어 풀은 나 있는데 나무가 없었으며, 앞쪽으로는 물로 이어졌다. 숲이 끝나는 곳에 흰 자작나무들이 있는데 마치 식재(植栽)한 것 같았다(사람이 심은 것처럼 가지런하였다). 향나무(香木)가 밀생하고, 노란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 숲속의 빈 공간을 따라 가는 중에(隨移駐林中) 운무가 가득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이 황망하여 앞에서 왕의 칙서(綸音)를 읊는 예를 행하여 마치니 운무가 걷히어 앞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어찌 환호성을 지르지 않겠는가. 이변이라 하였다. 드디어 산에 오르니(攀躋), 산상에는 승지(勝地)가 있는데, 높고 평평한 것이 돈대 같았다. 멀리 바라보면 산의 형상이 장활하고, 가까이 보면 자못 원만한데(頗圓), 보이는 곳이 다 흰빛이니 모두 빙설이었다. 산 높이는 약 백 리이며, 다섯 봉우리가 물을 둘러싸고 솟았는데, 정상에는 못이 있어 (둘레가) 약 삼사십 리이며, 초목이 없었다. 벽수는 맑디맑아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못을 두른 여러 봉우리들은 이를 바라보면 (봉우리가) 흔들리는 것이(摇摇), 마치 떨어질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 남쪽 봉우리는 차츰 낮아지며 문(門) 형상이 완연하였다. 못의 물은 흐르지 않는데, 산 계곡 곳곳이 물이었다. 좌측으로 흐르는 곳이 송아리오랍하(松阿哩烏拉河)이며, 우측으로 흐르는 것이 대소 액음하(額音河, 강)가 되었다. 산을 조망하고 있을 무렵, (한) 봉우리 정상에 사슴 한 떼가 놀다가 다 해연히 놀라 달아났는데, 오직 7마리의 사슴이 홀연 추락하였다. 일행들이 기뻐하며 이르길, 신이 주신 것이라 하였다. 무릇 등산한 사람이 마침 7명이었는데, 이때는 식사를 거르고 있었다. 절하고 이를 받았다. (하산 중에)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니 갑자기 다시금 눈보라가 일었다. 마침내 6월18일, 남쪽으로 되돌아왔는데(南回), 이전에 산에 올라 (장백산을 찾기 위해) 높은 곳을 바라보던 곳이었다. 어둡고 아득한[杳口] 기운이 뻗치어, 산빛을 보지 못하였다. 6월21일, 두 강물(額音河)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렀다. 6월25일, 아로하(阿嚕河)에 이르렀는데, 즉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 합류하는 곳이었다. 6월29일, 아로고하(阿嚕庫河)로부터 출발하여, 색극등(色克騰), 도필혁(圖畢赫), 갈이한(噶爾罕), 갈달혼(噶達琿), 살만(薩滿), 살극석(薩克錫), 법극석(法克錫), 송아리(松阿哩)를 거쳤는데, 큰 강 험한 곳이 9개소였다. 7월2일, 오랍(烏拉)에 이르렀으며, 7월12일에는 영고탑에 도착하였다. 회령부(會寧府)를 비롯한 여러 부를 두루 검열하고, 8월21일, 경사로 돌아왔다.

 

③ 성경통지(盛京通志) 권57 명환오(名宦五) 국조(國朝)

 

聖祖仁皇帝, 以長白山為本朝肇迹發祥, 宜崇秩祀, 勅遣内大臣覺羅武穆納·侍衛費雅什·塞護禮·索鼐, 前往瞻視. 至吉林, 欲選曾往者導引, 弗可得. 寧古塔将軍巴海, 令薩布蘇率兵二百, 攜糧三月, 以隨循温徳亨河, 陸行七日, 至札倫果河, 復乗舟. 由斡穆呼河逆流二日, 至佛多和河, 順流一日, 抵額音, 陸路為林所阻. 翼日薩布蘇率兵伐木開路行三十餘里, 陟山巔升樹而望, 又行數里, 登高峯望之, 遣人還告. 武穆納等望見片片白光, 即長白山. 計相距止百餘里矣. 武穆納等後一日至復開路, 行一日. 詰朝又行, 雲霧塞徑恍惚. 有鶴鳴六七聲, 尋聲疾走, 因得鹿蹊. 密林叢翳, 進至山麓, 跪誦勅旨畢, 雲霧忽開, 有路可登, 半山石砌若平臺, 五峰環拱, 南一峯, 稍下如門, 山水左流有松花江, 右流為大小額音. 河中潭不流者周三十餘里. 由潭邊陟山五十餘丈, 香樹紛郁, 黄花燦爛徧地, 積雪即向所望見片片白光也. 薩布蘇曰, 此地人跡罕到, 不宜久留. 遂叩拜而返. 有羣鹿自山奔墜, 時竚立視者七人, 鹿適仆其七. 薩布納謂武穆蘓曰[薩布蘇謂武穆納曰의 誤記로 봄], 此山靈所贈也. 令從者縶之, 以行不數十步, 囬首瞻望, 已雲霧漫山矣. 仍由額音. 行十五日乃還吉林. 武穆納等還奏.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는 장백산이 본조 개창의 발상지로 마땅히 존숭되고, 책봉(秩)과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칙령을 내려 내대신(內大臣) 각라무목납(覺羅武穆納), 시위 비아십(費雅什)과 새호례(塞護禮), 색내(索鼐)를 파견하여, 먼저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길림에 이르러 이미 (장백산에) 가본 경험이 있는 자를 뽑아 길을 인도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영고탑장군 파해(巴海)의 명으로 살포소(薩布蘇)는 병사 이백과 3개월 치의 식량을 휴대하고 온덕형하(温徳亨河) 물줄기를 따라 육로로 7일을 가서 찰륜과하(札倫果河)에 이르렀다. 다시 배를 타고 알목호하(斡穆呼河)로부터 물길을 거슬러 가기를 이틀, 불다화하(佛多和河)에 이르러 물길을 따라 (하류쪽으로) 하루를 갔다. 액음(額音)에 도착하여, 육로로 길을 잡았으나 숲에 막히었다. 다음날, 살포소는 병사들을 이끌고 나무를 베어 길을 개척해 나가기를 30여 리, 산에 오른 다음 나무에 올라 바라보았다. 다시 몇 리를 가서 높은 봉우리에 올라 바라보았다. 사람을 보내어 (무목납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무목납(武穆納) 등이 멀리 바라보니 곳곳이 흰빛[片片白光]인데, 이가 곧 장백산이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니, 백여 리에 그칠 듯 하였다. 무목납 등이 다시 하루를 가니 복개로(復開路, 새로 개척된 길)에 이르렀고, 다시 하루를 갔다. 다음날 아침, 또 길을 가는데 운무가 빠르게 지나는 중에 언뜻언뜻 보이는 풍경이 황홀하였다[雲霧塞徑恍惚]. 학 울음소리가 예닐곱 번 나서 소리 나는 곳을 찾아 달렸더니 사슴이 다니는 지름길을 발견하였다. 밀림이 무성하였으나 전진하여 산기슭에 이르렀다. 무릎 꿇고 칙지를 낭송하는 것을 마치니, 운무가 홀연 개는데 길이 있어 가히 오를만 하였다. 반쯤 오르니 산석이 있는데 평평한 돈대 같았다[半山石砌若平臺]. 다섯 봉우리가 둘러싼 것이 손을 맞잡듯이 하였으며, 남쪽의 한 봉우리는 차츰 아래로 내려가며 문(門) 같은 형상이었다. (여기서) 산물(山水)이 좌측으로 흘러 송화강이요, 우측으로 흘러 대소 액음(額音, 물길)이 된다. 강 중간에 못(潭)이 있어 흐르지 않았는데 둘레가 삼십여 리였다[河中潭不流者周三十餘里]. 이 못(潭) 가장자리에서 오십여 장 산을 오르니, 향기 나는 나무가루가 분분하고[香樹紛郁], 노란 꽃들이 찬란한 것이 지천으로 깔렸다[黄花燦爛徧地]. 쌓인 눈은 바라보는 곳마다 여기저기서 흰빛을 반사하였다. 살포소(薩布蘇)가 이르길, 이 땅은 인적이 드물어, 마땅히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윽고 고두배(叩頭拜)를 올리고는 되돌아섰다. 사슴떼가 있어 산에서 도망가다 추락하였다. 이때 서서 쳐다본 사람이 일곱 명이었는데, 사슴이 마침 떨어진 것이 일곱이었다. 살포소가 무목납(武穆納)에게 이르길, “이곳 산신이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종자들에게 명하여, 이를 매고 수십 보를 못가 머리를 돌려 산을 올려다보니, 이미 운무가 온산에 가득하였다. 액음(額音, 강물)으로 인한 것이었다. 15일 걸려 길림으로 돌아왔다. 무목납(武穆納) 등이 돌아와 주하였다.

 

④ 지북우담(池北偶談) 권4 담고(談故)4 장백산(長白山)편

 

康熙十六年四月十五日,內大臣覺羅武、一等侍衛兼親隨侍衛首領臣耀色、一等侍衛臣塞護禮、三等侍衛臣索,奉上諭:「長白山係本朝祖宗發祥之地,今乃無確知之人,爾等四人,前赴鎮守兀喇地方將軍處,選取識路之人,往看明白,以便酌量行禮.」臣等欽遵上諭,於五月初四日起行,本月十四日至盛京,十六日由盛京起行,本月二十三日至兀喇地方. 轉宣上諭於將軍等,隨查兀喇、寧古塔及兀喇獵戶所居村莊等處,俱無確知長白山之人,僉云:曾遠望見. 惟都統[曰]尼雅漢之宗族戴穆布魯,原係採獵之人,今已老退閑,口稱我輩原在額赫訥陰地方居住,我雖不曾躋長白山之巔,曾聞我父云,如往獵於長白山脚下,獲鹿肩負以歸,途中三宿,第四日可至家. 以此度之,長白山離額赫訥陰地方不甚遙遠. 我不知其他等語. 因訪問雖不曾至長白山,如赴額赫訥陰地方,水路幾日可至,陸路幾日可至,亦有知往額赫訥陰地方陸路之人否?據管獵戶噶喇大額黑等口稱:如乘馬由陸路前赴額赫訥陰地方,十日可至;如乘小舟由水路而往,途中全無阻滯,二十日可至;倘遇水漲阻滯,難計日期. 有獵戶喀喇者,知赴額赫訥陰地方陸路等語. 臣等隨議,每人攜三月糧而往,又思或三月糧盡,或馬匹倒斃,不能歸家,亦不可定. 隨語鎮守寧古塔將軍巴海,可載一船米於額赫訥陰地方豫備,倘我輩米盡,以便於彼處取用. 將軍巴海云:大船不能過松阿里河大險處,當即載米十七小船,至額赫訥陰地方豫備. 臣等即擬於六月初二日起行,又思由水路而往,倘遇水漲阻滯,稽遲時日,不能即至. 因與噶喇大額黑約:我輩乘此馬匹肥壯,速由陸路往看,俟看過長白山回時,再由水路逆流而上,前赴額赫訥陰地方. 約定,臣等帶領固山大薩布素,於六月初二日起行,經過文德痕河、阿虎山、庫勒訥林、祁爾薩河、滹沱河、沙布爾堪河、納丹佛勒地方、輝發江、法河、木敦林巴克塔河、納爾渾河、敦敦山、卓龍窩河等處. 及至訥陰地方江干,不意噶喇大額黑乘小舟而行半月程途,七日齊至. 因語固山大薩布素,我輩乘小舟,由江中逆流前赴額赫訥陰地方,汝帶領官兵馬匹由瓦努湖河逆流而上,由佛多和河順流而下,前來額赫訥陰相會. 約定,遣發去後,臣等於十一日至額赫訥陰地方,固山大薩布素等於初十日已至. 因前進無路,一望林木,臣等與固山大薩布素商議,令薩布素閒散章京喀達與識路徑之喀喇帶領,每旗甲士二名,前行伐木開路,并諭如望見長白山,可將行幾日方得望見、有幾許路程,相度明確來報. 我輩住二日,亦即起行矣. 隨於十二日遣發前行去後,本日據固山大薩布素差人顧素前來報稱:我等別大人們行三十里,至一山頂上,望見長白山不甚遙遠,似止有一百七八十里等語. 又續差艾喀來報稱:先差人來後,又至一高山頂上,望見長白山甚明,約有百餘里,山上見有片片白光等語. 臣等趁未有雨水之時,急往看驗長白山,因留噶喇大額黑督捕珠玤,於十三日起行,十四日與固山大薩布素等會於樹林中,揣摩開路前進. 十六日黎明,聞鶴鳴六七聲. 十七日雲霧迷漫,不見山在何處,因向鶴鳴處尋路而行. 適遇路蹊,由此前進,直至長白山脚下. 見一處周圍林密,中央平坦而圓,有草無木,前面有水,其林離住札處半里方盡. 自林盡處,有白樺木宛如栽植,香木叢生,黃花燦爛. 臣等隨移於彼處住札,步出林外遠望,雲霧迷山,毫無所見. 臣等近前跪誦綸音,禮拜甫畢,雲霧開散,長白山歷歷分明,臣等不勝駭異. 又正值一路,可以躋攀,中間有平坦勝地,如築成臺基,遙望山形長闊,近觀地勢頗圓,所見片片白光,皆冰雪也. 山高約有百里,山頂有池,有五峰圍繞,臨水而立,碧水澄清,波紋蕩漾,殊為可觀. 池畔無草木,臣等所立山峰,去池水約有五十餘丈地,週圍寬闊約有三四十里. 池北岸有立熊一,望之甚小,其繞池諸峰,勢若傾頹,頗駭瞻視. 正南一峰,較諸峰稍低,宛然如門. 池水不流. 山間處處有水,由左流者,則為扣阿里兀喇河;右流者,則為大訥陰河、小訥陰河. 繞山皆平林,遠望諸山皆低. 相視畢,禮拜下山之際,峰頭有鹿一,他鹿皆奔,獨有七鹿如人推狀,自山峰陸續滾至山下閒散章京畢楊武里等駐立之處. 臣等不勝駭異,因思正在乏食,此殆山靈賜與欽差大臣者. 隨望山叩謝,收其七鹿. 臣等上山之時,原有七人也. 自得鹿之處,退至二三十步,回首瞻望,又忽然雲霧迷山. 臣等因清淨勝地,不宜久留,於十八日言旋. 回見先望見長白山之處,因雲霧蒙籠,遂不得復見山光矣. 二十一日回至二訥陰河合流之處,二十五日回至恰庫河,此河乃訥陰東流會合之所. 二十八日正行之際,適遇頒到敕旨,臣等不勝歡忭,捧讀敕旨,感激靡盡,當經叩頭謝恩訖. 二十九日因馬瘦不堪馳驅,自恰庫河水路乘小舟而歸,經過色克騰險處、圖白黑險處、噶爾漢險處、噶大渾險處、薩滿險處、薩克錫險處、法克錫險處、松阿里大險處、多渾險處. 乘一葉小舟,歷此大江九險,得以無恙而渡者,皆仰賴皇上洪福之所致也. 七月初二日,回至兀喇地方,又往看寧古塔等處地方,於本月十二日至寧古塔,徧看會寧府等處地方畢,於七月十七日自寧古塔起行,八月二十一日抵京師. 臣等奉命於人跡罕到之處,創闢路徑,行於不見日色深林之內,無一日阻滯,得見長白山,皆我皇上敬念祖宗、誠心感格神明之效也. 緣係欽差事宜,謹疏奏聞.

 

강희(康熙) 16년 4월15일, 내대신 각라무(覺羅武), 일등시위 겸 친수시위 수령 신 요색(耀色), 일등시위 신 새호례(塞護禮), 삼등시위 신 색(索)은 유지(諭旨)를 받들은 바, “장백산은 본래 조종 발상의 땅이다. 지금 이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너 등 4인은 진수올라(鎮守兀喇) 지방의 장군처소로 가서 먼저 길을 아는 자를 뽑은 다음, 가서 분명히 관찰하고 형편에 따라 판단하여 행례(行禮)를 올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왕의 유지(諭旨)를 받들어 5월4일 출발하여 같은 달 14일, 성경에 이르렀으며, 16일, 성경을 출발하여 같은 달 23일, 올라(兀喇)지방에 도착하였습니다. (길림)장군 등에게 왕의 교시를 전해주고, 올라(兀喇), 영고탑 및 올라의 사냥꾼 거주 촌락 등 지역을 탐문하였으나, 장백산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이르길, “일찍이 멀리서 본 적은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도통(都統)이 이르길, “니아한(尼雅漢) 종족으로 대목포로(戴穆布魯)란 자가 있는데, 원래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사람으로 지금은 이미 나이 들어 한거 중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하여 이르길, ‘저의 가족은 원래 액혁눌음(額赫訥陰) 지방에 거주하였는데, 저는 비록 장백산 정상에 올라본 적이 없지만, 일찍이 부친으로부터 들은 것이 있는데, 부친이 이르길, 장백산 기슭에 사냥하러 가서 사슴을 잡아 어깨에 메고 돌아왔는데, 도중에 3일 밤을 잤으며, 4일째 되는 날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장백산은 액혁눌음(額赫訥陰) 지방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저는 그 나머지 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등등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방문하여, 비록 장백산에는 가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액혁눌음 지방에 가기 위해서는 수로로는 며칠 걸리며, 육로로는 며칠 걸리는지, 또한 액혁눌음 지방에 육로로 가는 길을 아는 자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관리의 말에 의하면(據管), 사냥꾼 갈라대액흑(噶喇大額黑) 등이 전한 것으로, 말을 타고 육로로 액혁눌음 지방에 가는 데는 10일이면 족하며, 작은 배를 타고 수로로 갈 것 같으면, 도중에 장애로 인해 지체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20일이면 이를 것이며, 혹시라도 비를 만나 물이 불면 지체하게 될 것이니, 얼마나 걸릴 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사냥꾼 객라(喀喇)란 자가 있는데, 액혁눌음 지방까지 육로로 가는 길을 안다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 등은 의논에 따라, 한 사람 당 3개월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가기로 하고, 또한 생각하기를 혹여 3개월분 식량이 다하거나 혹 마필이 거꾸러져 죽으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또는 정해진 기일에 못미칠 수도 있어, 진수(鎮守) 영고탑장군 파해(巴海)의 말에 따라 배 한 척에 쌀을 싣고 액혁눌음 지방에 예비로 대기 하여, 혹시 우리의 식량이 다 떨어지면, 거기서 편의에 따라 취해 쓰기로 하였습니다. 장군 파해가 이르길, 큰 배로는 송아리하(松阿里河)의 대험지를 지날 수 없으므로, 마땅히 17척의 소선에 쌀을 싣고 액혁눌음 지방에 도착하여 예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즉시 6월초 이틀에 출발할 것을 결정하였고, 또한 수로로부터 갈 것 같으면, 혹시 물이 불어 지체되어 시일에 맞추어 이르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갈라대액흑(噶喇大額黑)과 약속하기를, “우리가 이 살찌고 튼튼한 말을 타고 육로로 빠르게 가서, 장백산을 보고나서 돌아올 때에는(俟看過長白山回時) 다시 수로를 거슬러 상류로 나아가 액혁눌음 지방으로 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약속이 정해지고, 신 등은 고산(固山) 대살포소(大薩布素)를 영솔(領率)하고, 6월초 2일에 출발하여, 문덕흔하(文德痕河), 아호산(阿虎山), 고륵눌림(庫勒訥林), 기이살하(祁爾薩河), 호타하(滹沱河), 사포이감하(沙布爾堪河), 납단불륵(納丹佛勒) 지방, 휘발강(輝發江), 법하(法河), 목돈림파극탑하(木敦林巴克塔河), 납이혼하(納爾渾河), 돈돈산(敦敦山), 탁룡와하(卓龍窩河) 등 지역을 경유하여 눌음(訥陰) 지방 강둑(江干)에 이르렀습니다. 갈라대액흑(噶喇大額黑)이 소선을 타고 보름의 여정으로 장도에 올랐었는데, 뜻하지 않게 7일만에 도착하였습니다. 고산(固山) 대살포소(大薩布素)에게 말하여, “우리는 소선을 타고 강을 역류하여 액혁눌음 지방으로 갈 것인즉, 너는 관병과 마필을 거느리고, 와노호하(瓦努湖河)로부터 강을 거슬러 상류로 가라. 불다화하(佛多和河)부터는 강 흐름을 타고 하류로 가서, 액혁눌음에 (네가) 먼저 와서 (기다렸다가)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약속을 정하고, (그를) 먼저 출발시켜서 가도록 한 후에, 신 등은 11일에 액혁눌음 지방에 도착하였습니다. 고산 대살포소 등은 초 10일에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전진하고자 하였으나 길은 없고, 멀리 바라보니 밀림뿐이라, 신 등은 고산 대살포소 등과 상의하여, 살포소와 한산장경(閒散章京, 청 관직) 객달(喀達), 식로경(識路徑, 청 관직) 객라(喀喇)가 매 기(旗)마다 갑사 2명씩을 인솔하여 앞서서 벌목하여 길을 개척토록 하였습니다. 아울러 가다가 멀리 장백산이 보이거든, 장차 며칠을 가면 산을 볼 수 있는지, 그 노정은 어떠한지, 몇 번이고 명확하게 와서 보고토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이틀을 머물다가 또한 출발하였습니다. 12일에, 앞서 출발하여 가도록 했는데, 당일 고산 대살포소의 차인(差人, 파견관리) 고소(顧素)가 와서 보고하여 이르기를, “저희 등은 대인(大人) 일행과 헤어져 30리를 가서, 한 산의 정상에 올랐는데, 멀리 장백산이 보였으며, 아주 멀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서) 백 칠팔십 리 정도 엇비슷하게 떨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또한 다음 차인(差人) 애객(艾喀)이 와서 보고하여 이르기를, “앞의 차인(差人)이 온 후에, 다시 하나의 고산 정상에 올랐는데, 멀리 장백산이 아주 분명하게 보였으며, (거리가) 약 백여 리 정도로 보입니다. 산상에는 군데군데 흰빛이 보입니다.”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신 등은 비가 오면 뒤따라 붙지 못할 수도 있어, 속히 장백산을 가서 눈으로 보고 확인(看驗)코자 하여, 갈라대액흑(噶喇大額黑)을 남겨 민물진주조개(珠玤)를 잡도록 하고 13일에 출발하여, 14일에는 고산 대살포소 등과 숲속에서 만나, 길을 개척하여 오르며 전진하였습니다. 16일 여명 무렵, 학 울음소리를 예닐곱 번 들었습니다. 17일, 운무가 가득하여 산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학 울음소리가 들린 곳을 향하여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 우연히 지름길을 만나, 이로부터 전진하여 곧바로 나아가니 장백산 기슭이었습니다. 한 곳을 보니 주위는 밀림인데, 중앙에 평탄하고 둥근 곳이 있어 풀은 나 있지만 나무는 없었으며, 전면으로는 물이 있었습니다. 그 숲과 이격된 작은 곳(住札處?)은 사방 반 리 정도였습니다(其林離住札處半里方盡). 숲이 끝난 곳으로부터 흰자작나무들이 있어 마치 사람이 심고 가꾼 것 같았습니다. 향나무(香木)가 총총이 자라고 있었고, 노란꽃들이 찬란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주찰처(住札處)를 따라 이동하며 걸어서 밀림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운무가 산에 가득하여 터럭 한 올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 등은 가까운 앞쪽에서 무릎을 꿇고 왕의 칙지를 읊었습니다. 예배(禮拜)를 마치자, 운무가 흩어졌고 장백산이 역력하고 분명하였습니다. 신 등은 놀라움과 신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다시 똑바로 한 길을 가니 가히 산을 오를 수 있었는데, 중간에 평탄한 승지가 있어, 축성하여 이룬 돈대 터 같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들의 형태는 장활하고, 가까이 보이는 지세는 자못 원만한데(近觀地勢頗圓), 보이는 곳곳이 흰빛이며 다 빙설이었습니다. 산 높이는 약 백 리이며, 산정에는 못이 있고, 다섯 봉우리가 이를 둘러싸고 물에 임하여 우뚝했습니다. 벽수는 맑디맑은데 파문이 일었습니다.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호반에는 초목이 없었으며, 신 등이 서 있는 산봉우리는 호수로부터 약 50여 장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호수) 주위는 광활한 것이 약 삼사십 리였습니다. 호수 북안에는 곰 한 마리가 서 있었는데, 보기에는 (거리상) 아주 작았습니다. 그 호수를 두른 여러 봉우리들은 그 자태가 기울어진 것이 무너질 것 같아 바라다보면서도 자못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정남쪽의 한 봉우리는 다른 봉우리들과 달리 차츰 낮아지며, 완연히 문(門)의 형상을 하였습니다. 호숫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산간 곳곳이 물이었습니다(山間處處有水). 좌측으로부터 흐르는 것이 즉 구아리올라하(扣阿里兀喇河)이며, 우측으로 흐르는 것이 즉 대눌음하(大訥陰河)와 소눌음하(小訥陰河)였습니다. 산을 둘러싼 것은 다 평평한 숲이었고, 멀리 보이는 여러 산들은 다 낮았습니다. 보는 것을 마치고, 예배를 한 다음 하산할 때에, 산봉우리에 한 떼의 사슴이 있었는데, 다른 사슴들은 다 달아났음에도, 유독 7마리 사슴이 마치 사람이 밀어서 그러한 것처럼 산봉우리에서 연결된 지점으로부터 튀어올라(滾) 산아래 한산장경(閒散章京)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죄다(?) 양무리(楊武里?) 등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신 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식사를 거르고 있어서, 이것은 산령이 흠차대신(欽差大臣)에게 사여한 것이라 여기고 산을 보며 고사례(叩謝禮)를 드리고 7마리의 사슴을 거두었습니다. 신 등이 산을 오를 때 원래 7명이었습니다. 사슴을 얻은 곳으로부터 이삼 십 걸음 물러나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다시 홀연 운무가 산에 가득하였습니다. 신 등은 여기가 청정승지여서 마땅히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8일에 말씀드렸던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먼저번에 장백산을 보았던 곳에서 되돌아보니, 운무로 뒤덮여 마침내 다시는 산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21일에 두 눌음하(訥陰河) 합류지점으로 되돌아왔으며, 25일에 흡고하(恰庫河)에 이르렀는데, 이 강은 눌음(訥陰) 동쪽으로 흘러 (눌음하와) 합류하는 곳입니다. 28일에 바로 나아갈 즈음, 마침 수여하신 칙지가 이르렀습니다. 신 등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칙지를 받들어 읽고 나서 감격에 겨웠습니다. 마땅히 고두사은(叩頭謝恩) 하였습니다. 29일에 말이 피로해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였습니다. 흡고하(恰庫河)부터는 수로로 작은배에 올라 귀로하였습니다. 색극등(色克騰) 험지, 도백흑(圖白黑) 험지, 갈이한(噶爾漢) 험지, 갈대혼(噶大渾) 험지, 살만(薩滿) 험지, 살극석(薩克錫) 험지, 법극석(法克錫) 험지, 송아리(松阿里) 대험지, 다혼(多渾) 험지를 경유하였는바, 일엽소주에 몸을 싣고 큰 강 아홉 군데 험지를 아무 탈 없이 지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앙복하는 황상의 홍복의 소치입니다. 7월초 2일, 올라(兀喇) 지방에 되돌아왔으며, 다시 영고탑 등지를 가서 감찰하였는바, 동월 12일에 영고탑에 도착하여, 회령부 등 지방을 두루 감찰하기를 마치고, 7월17일에 영고탑을 출발하여 8월21일에 경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신 등은 명을 받들어 인적 드문 땅에서 길을 개척하였으며,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삼림속을 지났습니다만, 하루도 지체됨이 없이 (가서) 장백산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황상 존념(敬念)의 조종(祖宗)이 성심으로 감응하여 신명(神明)을 드리운 탓입니다. 흠차(欽差)로 다녀온 일을 소상히 하여 삼가 주하여 가르침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