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은 "안창호 선생이 1907년 3월 평안남도 선천예배당에서 '백두산과 두만강물이' 찬미가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에
맞춰 부르는 것을 듣고 깊은 시상을 얻어 평양으로 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독립지사 윤형갑 선생의 증언을 종손 윤정경씨가 채록한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간 애국가 가사는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 등 여러 주장이 대립해 '작자 미상'으로 남아있었다.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측은 1908년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와 윤치호가 임종을 앞두고 쓴 육필 가사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안용환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찬미가에 '윤치호 역술'이라고 표현된 부분을 들어 "역술과 작(作)은 분명히
다르다. 역술은 글을 다듬어서 내놨다는 뜻"이라며 "편집자가 하루아침에 작사가로 둔갑했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윤치호가 60년동안 쓴 일기에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속내는 물론 당시 시대상이 상세히 담겨 있지만 애국가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없다"며 "임종 직전에 육필로 남길 정도로 중요한 내용인데 왜 일기에는 쓰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또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할 관련자들의 증언과 언론 보도 내용을 제시했다.안창호 선생의 비서를 지냈던 구익균(105) 선생은 "'과연 선생님이 애국가를 지으셨습니까?'라고 물어봤는데 빙그레 웃으면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지, 이 것은 나와 (도산)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얘기였어"라고 말했다.
또 1955년 자유신문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씨를 인용, "춘원이 도산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를 도산이라고 쓴 데 대해
윤치호의 자제가 문의하러 왔을 때에 춘원이 그 이유를 설명하자 납득하고 돌아가는 것을 봤다"고 보도했다.
오동춘 흥사단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 위원장은 "안창호 선생은 언제나 겸손해 공을 남에게 양보했다"며 "자신이 설립한 평양
대성중학교 교장 자리도 윤치호에게 양보했고 심지어 자기가 지은 애국가 가사도 윤치호 이름으로 가르치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위원장은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황사성 목사에게 애국가 가사를 듣고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안호균 기자 ahk@newsis.com (이상)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
1) 선조 26년(1593년) 6월 29일(임자) 9번째 기사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조선은 국토의 넓이가 동서로 2천리이고 남북으로 4천리입니다. 대체로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일어나서 남쪽으로
전라도 경계에 이르러 서남쪽을 향하여 멈춰 있습니다.
(
朝鮮幅圓,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蓋從正北長白山發脈, 南至全羅道地界, 向西南而止)。2) 고종 34年(1897년 / 대한제국 1年) 9月 29日(양) 2번째 기사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또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왕」이나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 임금의 칭호이며 「황제」라는 것은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의 칭호이므로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통합하지 못하였다면 황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且論者曰: ‘王者、君者, 有一國之稱, 而皇帝者, 統轄衆邦之稱。 不有拓土廣民統合各邦, 則不當稱之’云。 然我邦統合三韓,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人口不下二千萬, 在今日爲陛下臣民者, 孰不望我陛下處至尊之位而膺至尊之號哉?)
3) 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9월 30일(양) 1번째 기사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각 나라의 약장(約章)에는 각 나라 황제의 칭호를 인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나라가 작고 군사가 약하여
나란히 나갈 수 없는 나라나 상스럽고 속되며 추하고 고루하여 개명(開明)한 세계로 진보(進步)할 수 없는 나라인 경우에도 각 나라가 반드시 인정하여 함께 교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토의 넓이가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예악과 문물이 세상에 표준이 됩니다. (澤曰: “各國約章, 有各國帝號認之之說。 此謂國小兵弱, 不足與方駕者及俚俗醜陋不能進步於開明者, 則各國未必認之而通行也。 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可以養百萬之衆, 禮樂文物, 表準於天下)
4)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10월 13일(양) 2번째 기사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及我太祖龍興之初, 輿圖以外, 拓地益廣。 北盡靺鞨之界, 而齒革?絲出焉, 南收耽羅之國, 而橘柚海錯貢焉。 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위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우리 영토는 분명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였다. 특히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인 1897년의
기록에서 여러 번 ‘사천리’란 기록이 나온다.
애국가 가사는 대한제국 때 지어져 전국에 보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가 애국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서 기록에는 ‘사천리’라고 해놓고 애국가 가사에는 ‘삼천리’라고 할 대한제국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따라서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라는 가사는 일제가 ‘간도협약’과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가사를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영토를 스스로 축소하는 이러한 가사를 아무런 검증도 없이 무조건 채택한 이승만정부에 가장 큰 문제가 있고 그걸 그대로
답습한 현 정부까지 역사인식의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조선왕조 이전의 우리 역사강역은 실로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하의 중심이었던 단군조선과 고구려는 중국대륙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최소한 감숙성 돈황 최대로는 터어키까지 연방 형태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애국가 가사는 쩨쩨하게 ‘삼천리’가 아니라 더욱 확대된 언어로 불리어져야 할 것이다.
불과 백년 전인 대한제국 때까지만 해도 ‘사천리’였던 우리의 영토를 ‘삼천리’로 축소한 애국가 가사를 어떻게 채택할 수 있단 말인가!!! 애국가 가사의 변경은 반드시 검토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민족정기가 살아 미래의 희망찬 대한민국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주 즉 간도는 분명 우리 땅이었다. 만일 간도가 원래 청나라 땅이었다면 일제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을 이유가 없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기네 땅을 가져오는데 반대급부로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을 일본에 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만 봐도 간도는 분명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 간도는 언젠가는 되찾아야할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 제시한 간도의 범위. 회색부분과 연해주지역 남부가 조선의 영토로 보인다. ©편집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