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애국가 가사 '무궁화 삼천리' 바꿔야

설레임의 하루 2012. 9. 25. 23:20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성훈  2012.08.23. http://cafe.daum.net/dobulwonin/Nckk/119 

(원문 기사)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111§ion=sc6§ion2=

 

 

 

애국가 가사 '무궁화 삼천리'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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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를 누가 작사했느냐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아래는 8월 22일자 뉴스시의 보도 내용이다. 【서울=뉴시스】
애국가의 작사가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연구 자료들이 공개됐다.
흥사단은 22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애국가 작사자 규명발표회'를 열어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할 자료를

제시하고 "앞으로는 애국가 작사자가 명확히 표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흥사단은 "안창호 선생이 1907년 3월 평안남도 선천예배당에서 '백두산과 두만강물이' 찬미가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에

맞춰 부르는 것을 듣고 깊은 시상을 얻어 평양으로 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독립지사 윤형갑 선생의 증언을 종손 윤정경씨가 채록한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간 애국가 가사는 '안창호 작사설'과 '윤치호 작사설' 등 여러 주장이 대립해 '작자 미상'으로 남아있었다.
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측은 1908년 출판된 가사집 '찬미가'와 윤치호가 임종을 앞두고 쓴 육필 가사지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안용환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찬미가에 '윤치호 역술'이라고 표현된 부분을 들어 "역술과 작(作)은 분명히

다르다. 역술은 글을 다듬어서 내놨다는 뜻"이라며 "편집자가 하루아침에 작사가로 둔갑했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윤치호가 60년동안 쓴 일기에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속내는 물론 당시 시대상이 상세히 담겨 있지만 애국가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없다"며 "임종 직전에 육필로 남길 정도로 중요한 내용인데 왜 일기에는 쓰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또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할 관련자들의 증언과 언론 보도 내용을 제시했다.
안창호 선생의 비서를 지냈던 구익균(105) 선생은 "'과연 선생님이 애국가를 지으셨습니까?'라고 물어봤는데 빙그레 웃으면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지, 이 것은 나와 (도산)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얘기였어"라고 말했다.

또 1955년 자유신문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씨를 인용, "춘원이 도산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를 도산이라고 쓴 데 대해

윤치호의 자제가 문의하러 왔을 때에 춘원이 그 이유를 설명하자 납득하고 돌아가는 것을 봤다"고 보도했다.

오동춘 흥사단 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 위원장은 "안창호 선생은 언제나 겸손해 공을 남에게 양보했다"며 "자신이 설립한 평양

대성중학교 교장 자리도 윤치호에게 양보했고 심지어 자기가 지은 애국가 가사도 윤치호 이름으로 가르치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위원장은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황사성 목사에게 애국가 가사를 듣고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안호균 기자 ahk@newsis.com (이상)

 

▲ 애국가 가사를 안창호선생이 작사했다는 흥사단의 주장 © 편집부
아래 논지의 촛점은 누가 애국가 가사를 작사했냐가 아니라, 가사 후렴 중에 이상한 문구가 있어 후대에 조작되었을 개연선이 크다는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문제가 되는 문구는 후렴구의 ‘무~궁화 삼~천리’라는 가사인데, 이 가사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최초 내용과는 다르게 개사(改詞)  

되었거나, 아니면 1909년 일제와 청나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의 내용에 맞게 처음부터 작사되었거나 후대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먼저 무궁화가 한반도 전체를 상징하는 꽃(國花)으로 묘사된 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궁화는 원산지가 인도로 외래종이며, 온대지방에서는 7~10월 사이에만 피는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황해도 이남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또 이 애국가 가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해 역사왜곡을 자행할 때 그 이론에 맞게 개사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로 애국가 가사가 나왔을 때라고 하는 대한제국 때에는 조선의 영토 크기를 애국가 가사와 같이 삼천리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분명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100%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 나와 있는 조선왕조의 영토는 분명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였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여러 사서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천리라는 조선의 영토가 애국가 가사에서 삼천리로 둔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분명 일제의 장난이 아니고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를 표기하면 아래 지도와 같이 간도지역이 다

포함된다.


삼천리라 함은 약 1,200km로 南단으로는 땅끝마을 해남에서부터 北단으로는 함경도 온성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현재의 한반도를 말함이다.

즉 우리 영토에는 만주(간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일부러 간도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 삼천리라는 문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서의 기록대로 ‘남북 사천리’라 함은 남쪽 끝 해남에서부터 북으로는 흑룡강까지로 지금의 만주(간도) 지역이 거의 다 들어가게 된다. 그 만주지역에서 ‘동서 이천리’라 함은 동쪽 끝 연해주로부터 우리가 주장하는 서간도까지 모두 포함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애국가의 ‘삼천리’라는 가사는 ‘간도협약’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사서 기록은 ‘사천리’가 맞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중국의 사서 기록으로는, <도서편> <명사기사본말> <정계양잡저> <조선부> <흠정속문헌통고> <대청광여도> 등이 있다.

이들 내용에는 전부 조선의 영역을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로 명기하고 있다.

‘참고로 중국(명나라)의 1리는 560m이다.

그러므로 동서로 1,100km, 남북으로 2,200km 좌우가 조선의 영토인 것이다.즉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라 함은 만주

(간도) 지역이 거의 다 들어가는 것이다.

 

▲ 대표로 명나라때 사서인 <명일통지>에 "조선의 땅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라고 길고되어 있다. © 편집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

1) 선조 26년(1593년) 6월 29일(임자) 9번째 기사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조선은 국토의 넓이가 동서로 2천리이고 남북으로 4천리입니다. 대체로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일어나서 남쪽으로

전라도 경계에 이르러 서남쪽을 향하여 멈춰 있습니다.

(朝鮮幅圓,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蓋從正北長白山發脈, 南至全羅道地界, 向西南而止)。

2) 고종 34年(1897년 / 대한제국 1年) 9月 29日(양) 2번째 기사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또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왕」이나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 임금의 칭호이며 「황제」라는 것은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의 칭호이므로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통합하지 못하였다면 황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且論者曰: ‘王者、君者, 有一國之稱, 而皇帝者, 統轄衆邦之稱。 不有拓土廣民統合各邦, 則不當稱之’云。 然我邦統合三韓,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人口不下二千萬, 在今日爲陛下臣民者, 孰不望我陛下處至尊之位而膺至尊之號哉?)

3) 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9월 30일(양) 1번째 기사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각 나라의 약장(約章)에는 각 나라 황제의 칭호를 인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나라가 작고 군사가 약하여

나란히 나갈 수 없는 나라나 상스럽고 속되며 추하고 고루하여 개명(開明)한 세계로 진보(進步)할 수 없는 나라인 경우에도 각 나라가 반드시 인정하여 함께 교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토의 넓이가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예악과 문물이 세상에 표준이 됩니다. (澤曰: “各國約章, 有各國帝號認之之說。 此謂國小兵弱, 不足與方駕者及俚俗醜陋不能進步於開明者, 則各國未必認之而通行也。 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可以養百萬之衆, 禮樂文物, 表準於天下)

4)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10월 13일(양) 2번째 기사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及我太祖龍興之初, 輿圖以外, 拓地益廣。 北盡靺鞨之界, 而齒革?絲出焉, 南收耽羅之國, 而橘柚海錯貢焉。 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위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우리 영토는 분명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였다. 특히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인 1897년의

기록에서 여러 번 ‘사천리’란 기록이 나온다.

애국가 가사는 대한제국 때 지어져 전국에 보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가사가 애국가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서 기록에는 ‘사천리’라고 해놓고 애국가 가사에는 ‘삼천리’라고 할 대한제국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따라서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라는 가사는 일제가 ‘간도협약’과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가사를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영토를 스스로 축소하는 이러한 가사를 아무런 검증도 없이 무조건 채택한 이승만정부에 가장 큰 문제가 있고 그걸 그대로

답습한 현 정부까지 역사인식의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조선왕조 이전의 우리 역사강역은 실로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천하의 중심이었던 단군조선과 고구려는 중국대륙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최소한 감숙성 돈황 최대로는 터어키까지 연방 형태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애국가 가사는 쩨쩨하게 ‘삼천리’가 아니라 더욱 확대된 언어로 불리어져야 할 것이다.

불과 백년 전인 대한제국 때까지만 해도 ‘사천리’였던 우리의 영토를 ‘삼천리’로 축소한 애국가 가사를 어떻게 채택할 수 있단 말인가!!! 애국가 가사의 변경은 반드시 검토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민족정기가 살아 미래의 희망찬 대한민국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주 즉 간도는 분명 우리 땅이었다. 만일 간도가 원래 청나라 땅이었다면 일제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을 이유가 없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자기네 땅을 가져오는데 반대급부로 철도부설권이나 광산채굴권을 일본에 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만 봐도 간도는 분명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 간도는 언젠가는 되찾아야할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 '간도되찾기운동본부'에서 제시한 간도의 범위. 회색부분과 연해주지역 남부가 조선의 영토로 보인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