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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까지 한반도로 끌어들인 일제식민사학

설레임의 하루 2012. 6. 7. 22:29

*출처:고구려 역사저널

 

 

 

 

 

만리장성까지 한반도로 끌어들인 일제식민사학 (8/8부)

 
편집부 기사입력  2012/05/24 [17:05]
 
중국은 중국의 상징이며 자부심인 현 만리장성을 진시황(秦始皇) 때 쌓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동쪽 하북성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서쪽 감숙성 자위관에 이르는 총 길이 6,352km라 했다가, 최근 중국 정부는

단동의 호산산성 유적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재해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학생들의 역사지리부도 상에는 한반도 청천강까지

만리장성이 그려져 있다.

중국은 1949년 하북성 동쪽 끝으로 요녕성과의 경계에 있는 산해관 근방을 진황도(秦皇島)시로 명명하면서 이 도시가 진시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곳이 진황도항이라 하며 역사유적을 만들어 놓았으며, 진시황의 장성과 관련 있는

맹강녀묘(孟姜女廟)라는 사당까지 만들어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성을 진시황 때 쌓았을까?

그리고 과연 진시황 때 쌓았다는 장성이 진황도시 산해관에서 시작해서 저 멀리 감숙성까지 가는 지금의 만리장성인가?

정말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이 발표한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한반도 청천강까지 들어와 있다. 과연 그럴까?



지금의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쌓았을까?

먼저 진시황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진시황은
b.c 247년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31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b.c 221년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황제가 되었고,
b.c 210년 37년간 재위 후 사망하였다.
진시황 즉위 후 통일 전 26년간은 여러 나라들과 전쟁을 하느라 장성을 쌓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고,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난 다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겨우 재위 11년 동안 저 어마어마한 규모의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

중국의 자료에 의하면 전국시대 진(秦),조(趙),연(燕),제(齊) 나라들은 북쪽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각 장성을 쌓았고, 통일 후

진시황 32년(b.c 216) 진시황이 북쪽변방을 시찰하고 있을 때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동해(東海)로 떠났던 노생이 돌아와

“도참설에 이르기를 진나라를 망치는 자는 호(胡)라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자 진시황은 이 호(胡)를 오랑캐 즉 북쪽 흉노로 알고 장성

보강을 명하게 된다.

이에 b.c 214년 장수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3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장성을 쌓도록 하였고, 이 장성이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는 장장 일만여 리에 이르는 장성이라는 것이다.

또 황하를 건너 음산(陰山)에 의거하여 구불구불 굽이를 이루며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진시황은 b.c 210년에 죽었다.

b.c 214년부터 쌓기 시작한 장성이 진시황 생전인 3년 만에 동단 산해관까지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b.c 216년 불로초를 구하러 간 노생이 돌아와 아뢴 후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이미 그 전에 진시황이 진황도항에서

불로초를 구하러가는 노생을 환송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원래 어디인가?

진시황이 보수해서 연결했다는 연나라와 제나라 장성의 위치가 밝혀졌으므로 진나라 장성의 위치도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즉 진시황이 쌓은 장성은 이 근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장군과 30만 명을 보내 북쪽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 서쪽 임조에서 일어나 동쪽은 요동까지이다. 길이가 만여리이다.

(《史记秦纪》“始皇并天下,使蒙恬将三十万众,北逐戎狄,收河南,筑长城,因地形开附制塞,起临洮至辽东,处袤万余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곳이 어디일까?

우선 북으로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에서 하남(河南)은 황하 남쪽으로 지금의 황하북부 하남성을

의미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따라서 진시황의 장성은 산서성 남부에 쌓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 하남을 지금의 하남성이 아닌 황하 남쪽으로 해석해 섬서성이나 감숙성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억지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연나라 장성과 제나라 장성이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시황 당시 북쪽에 있었던 흉노 즉 북부여의 핵심강역 역시 산서성 중부(태원)였기 때문에 산서성 남부에 장성을 쌓아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진시황 입장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적(흉노=북부여)이 산서성에 있는데 장성을 한가롭게 감숙성이나 섬서성에 쌓는다는 것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리고 <사기 진시황본기>에서 진장성의 정확한 위치를 기록한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까지(起临洮至辽东)”에서 보듯이 요동은 바로

산서성 남부의 동쪽을 가르키기 때문이다
 

▲ 중국은 산서성 최남부에 있던 진시황의 장성을 지명이동시켜 엄청난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그 이유는 당시 진시황의 영토는 섬서성과 하남성 뿐이었는데 동이족의 땅인 나머지 중국 땅을 모두

진나라 땅으로 편입시키기 위함이었다. 



진장성의 서쪽 끝인 임조는 과연 어디일까?

중국은 이 임조를 지금의 감숙성 민현(임조현)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 역시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임조현에 대한 역사연혁을 보면, “적도: 진나라 때 적도현을 설치해 롱서군에서 다스렸다. 서진 말기에 적도군치로 했다.

민국초기에 적도현으로 했다. 후에 임조로 바꿨다. 1929년 적도현을 임조현으로 바꿨다.”

즉 롱서군 = 적도군(현) = 임조인 것이다.
(狄道—秦置狄道县,(在今甘肃临洮),为陇西郡治。西晋末为狄道郡治。唐狄道郡、临州,宋熙州,均治狄道。清乾隆时改州。

民国初为狄道县,后改临洮。狄道的由来是因此地为狄人(古代少数民族)行经之道,故名“狄道”。

1929年 改狄道县为临洮县,以其地临洮河而得名。

그렇다면 진장성의 서단(西端)인 롱서(陇西)는 과연 어디일까?
<사기 권61 백이열전>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
(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 : 「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같은 기록에 전하길 “롱서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
(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라는 기록이 있으며,

2) 또한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

(集解馬融曰 :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라는 기록과

3) 또 백이의 노래에서 전하길 “그들은 서산에 올랐는데, 서산은 롱서와 가까운 곳이다.
(而《伯夷歌》云。登彼西山。則當隴西者近爲是也。)"라는 기록이 있다.

위 세 기록에서 보듯이,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 바로 롱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롱서가 바로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서쪽 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수양산이 있는 곳은 황하가 꺾이는 코너인 산서성 최남단인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서 백이.숙제의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사실들이 유물적 증거로 명확히 입증되었다 할 것이다.

▲ 북에서 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동쪽으로 꺾이는 지점인 산서성 영제시에서 발견된

백이.숙제의 묘는 이곳이 유주의 요서군을 밝히는 역사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