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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으로 알려진 고구리 비사성은 어디일까?

설레임의 하루 2012. 5. 28. 00:33

*출처:역사복원신문

대련으로 알려진 고구리 비사성은 어디일까? (23-4부)
중국 대륙 한가운데서 한반도로 옮겨진 해성, 해주, 옥저, 예, 맥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5/10 [16:01]
옥저는 또한 해성현(海城縣)으로도 불리었다.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해성현과 해주에 대한 연혁설명에서 해성현과 해주가 역사왜곡을 위해 현재 요녕성 요동반도로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성현이 바로 해주(海州)인데, 중국은 지명인 해주의 海자를 바다로 해석하는 역사왜곡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다.

참고로 사서 기록에 무수히 나오는 海는 해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황하 또는 큰 벌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번역) 해성현 : 주와 진나라 때는 조선(현)에 속했으며, 한나라 때 현토군에 속했고, 후에 바뀌어 낙랑군에 속해 동한 때 도위를 설치한

이래로 옥저에 봉해진다. 위나라 때는 모주에 속했으며, 진과 수나라 때는 고명려, 당나라 때 평고옥을 개주에 속했고, 발해로 들어가서는

남해부로 했으며, 요 때 해주남해군을 설치했다.

금 때 등주로 고쳤으며, 원 때는 요양로에 속했고, 명 때 소주위를 설치해 요동도지혼사사에 예속시켰고, 청 순치제 때 해성현을 설치해

요양부에 속하게 했다. 봉천부로 바꾸어 민국 때 요녕성 요심도에 속하게 했다.

(주: 민국 때 해성현이 요녕성으로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海城县 : 周秦属朝鲜,汉属玄菟,后改属乐浪,东汉置都尉,以封沃沮,魏属牟州,晋及隋属高名骊,唐平高玉,。

属盖州,入渤海为南海府,辽置海州南海军。金改澄州,元属辽阳路,明置少州卫,隶辽东都指挥使司,清顺治间置海城县,属辽阳府,

寻改属奉天府,民国因之,属辽宁省辽沈道。清置,详海原县条。

(번역) 해주 : 본 옥저국의 땅으로 고구리 때 사비성 또는 비사성으로 했는데 혹은 비사성으로 잘못되어 있다.

발해 때 남경산남해부, 도독옥청초삼주라 불렸으며, 요 때 해주남해군을 설치했고 임명현을 해주의 치소로 했다.

금 때 등주로 바꾸었고, 원 때 주와 현을 모두 폐했다. 명 때 이곳을 지키는 해주를 설치했는데 지금의 요녕성 해성현에서 다스렸다.

(이상은 요녕성으로 바뀐 연혁)

동위 때 청주를 해주로 고쳤으며 치소는 용저에 있었는데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 남쪽이다) 수 때 나라를 동해군으로 바꾸어 도로 해주로

복귀했고 치소는 구산에 있었다. (즉 지금의 동해현이다)

송나라 때 해주를 동해군이라 말했으며 일찍이 동해로 치소를 옮겼다. (지금의 강소성 동해현 동북이다) 후에 서해주를 구산으로 바꾸었고

다시 해주로 복귀했다가 원 때 해주로를 해녕부로 바꾸었다가 해녕주로 강등했다.

명나라 초기 성의 구산현을 해주로 복귀했다가 청 때 직례.강소성으로, 민국 때 동해현으로 바꾸었다.

(이상은 강소성으로 바뀐 연혁으로, ( )는 역사왜곡을 위한 설명이다)  

(원문) 海州 : 本沃沮国地,高丽为沙卑城,亦曰卑沙城,或讹为卑奢城,渤海号南京产南海府,都督沃晴椒三州,辽置海州南海军,

又置临溟县为州治,金改澄州,元州县皆废,明置海州卫于此,即今辽宁省海城县治。
东魏改青州为海州。治龙沮,在今江苏东海县南,隋改国东海郡,寻复为海州,治朐山,即今东海县治,宋曰海州东海郡,尝移治东海,

在今江苏东海县东北,后改置西海州于朐山,寻复改为海州,元升海州路,改为海宁府,又降为海宁州,明初省朐山县,复曰海州,

清直隶江苏省,民国改为东海县。

위 해성현과 해주의 역사연혁에서 보듯이, 옥저는 고대 동해로 불렸던 발해(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 부근 황하 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동남부에 있었는데, 명나라와 중화민국 때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예(濊)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래 수경주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었던 옥저, 해성, 해주, 예, 맥은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 되었다.  

 

수경주 권10 탁장수(水經注 卷十 濁漳水) 

(번역) 탁장수는 상당군 장자현 서쪽 발구산에서 나오고, 장수는 발구산 남쪽 산기슭이 만나는 녹곡산에서 나온다.

탁장수는 동으로 진류현 남쪽을 흘러 그 성 동쪽을 지나면서 꺾여 동북쪽으로 흘러 강수가 있다.

강수는 동북쪽으로 흘러 둔류현 고성 남쪽을 지나고 동부쪽으로 장수로 흘러 들어간다. (중략) 

청장수는 장무현 고성 서쪽을 지나니 옛 예읍(濊邑)이다.

여기에서 한 지류가 나오니 곧 예수(濊水)로 동북쪽 참호정을 지나 두 지류로 나뉜다.

<위토지기>에 말하기를, 장무군에서 다스렸으며 옛 장무고성이다. 또 동북쪽에서 두 강으로 나뉜다.

한 물은 우측에서 나와 정이라 했고, 한 물은 북으로 흘러 호라 했다. 소위 예구이다. 청.장은 급하게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원문) 浊漳水出上党。长子县西发鸠山, 漳水出鹿谷山,与发鸠连麓而在南。东迳陈留县南,又屈迳其城东,东北流有绛水注之,

绛水东迳屯留县故城南,东北流入于漳,(중략) 清、漳迳章武县故城西,故濊邑也。枝渎出焉,谓之濊水。东北迳参户亭,分为二渎。

《魏土地记》曰:章武郡治。故世以为章武故城,非也。又东北,分为二水。一水右出为淀,一水北注呼池,谓之濊口。清漳乱流,

而东注于海。 

이번에는 위 탁장수와 발원지인 발구산과 청장수가 어디인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정확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번역) 발구산 : 산서성 장자현 서쪽 5지리에 있고, 고평현에 접한다. 일명 발포산, 녹곡산, 겸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 발구의 산은 장수가 나오는 곳이며, <회남자부형훈>에 탁장수가 발포에서 나온다 했다. 발포는 일명 녹곡이다.
(원문) 发鸠山 : 在山西长子县西五址里,接高平县界,一名发苞山,一名鹿谷山,一名廉山,《山海经》发鸠之山,漳水出焉,

《淮南子附形训》浊漳水出发苞,《注》发苞,一名鹿谷。

(번역) 탁장수 : 장하의 상류로 발원지가 두 군데이다.

북쪽 발원지는 산서성 심현 서북쪽 천봉령이고, 남쪽 발원지는 장자현 서남 발구산에서 나와 장치현치 동남까지 동류하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로성현과 양원현을 지나 북쪽에서 발원한 물길과 만나고 여성현까지 동북쪽으로 흘러 소장수에 합쳐진다.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흘러 로성과 여성, 평순을 지나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청장수와 합쳐진다. (이하생략)
(원문) 浊漳水 : 漳河之上游也,有二源,北源出山西沁县西北千峰岭,南源出长子县西南发鸠山,东流至长治县治东南,改北流经潞城、

襄垣二县与北源合,又东北流至黎城县与小漳水合,改东南流经潞城、黎城、平顺入河南涉县,合于清漳。《周礼职方氏》冀州,川曰漳,

浸曰汾潞。《后汉书郡国志注》“上党记曰:潞,浊漳也。”阚驷曰,潞水为冀州浸,即漳水也。世人亦谓浊漳为潞水。

위 탁장수와 만나는 청장수에 대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청장수 : 장하의 상류로 산서성 평정현 남쪽 대민곡이 발원지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의 경계로 흐르다 꺾여 남쪽으로 흘러 요현을 경유해 서장수와 합쳐져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탁장하와 만나

합쳐진다. (이하생략)
(원문) 清漳水 : 漳河之上游也,源出山西平定县南大黾谷,西南流入和顺境,折南流迳辽县,合西漳水入河南涉县,与浊漳河合,

《汉书地理志》沾县大黾谷,清漳水所出。

즉 탁장수는 산서성 남부에 있는 장치시 장자현에서 발원해 산서성 남부를 흘러 동남쪽에 있는 하남성 섭현에서 청장수와 합쳐지는 강이고,

청장수는 산서성 중동부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다 하남성 섭현에서 탁장수와 만나는 강이다.

따라서 청장수가 지나는 예읍(濊邑)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다고 하겠다.

더 넓게 보아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의 동부 일대가 바로 예와 맥과 옥저의 땅인 것이다. 

▲ <수경주>에 언급된 탁장수와 청장수는 아직도 그 이름 그대로

산서성 동남부에 남아있다.

물길이 <수경주>의 기록과 한치의 오차도 없다.    



 수경주 권9 기수(水經注 卷九 淇水)에 나오는 예(濊)
 
(번역) 청하 역시 동북으로 흘러 예수가 나오는 예읍 북쪽을 지난다.

동북으로 흘러 향읍 남을 지나고, 청하는 동으로 흘러 두 물길로 갈라진다. 지류는 나룻터 우측에서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한무제의 옛 대북을 지난다. <위토지기>에 이르기를, 장무현 동쪽 백리에 무제의 대가 있고 남북에 두 대가 있다고 한다.

서로 60리를 가면 기단 높이가 6-장인데 한무제가 동순할 때 海(?) 위에 지었다는 속담이 전한다. 동으로 흘러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원문) 清河又东北,濊邑北。濊水出焉。又东北,过乡邑南。清河又东,分为二水,枝津右出焉。东迳汉武帝故台北。

《魏土地记》曰:章武县东一百里,有武帝台。南北有二台。相去六十里,基高六十丈,俗云,汉武帝东巡海上所筑。又东注于海。

위 기록으로는 기수(淇水)가 어디에 있는 강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중국고대지명대사전>과 <백과사전>에서 기수를

검색해보면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명대사전 번역) 기수 : 하남성 임현 동남쪽 임기진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흘러 기양을 경유해 석하에 합쳐져 동남쪽으로 꺾여 흘러

탕음현을 경유해 기현까지 흘러 위하로 들어간다.

 <시위풍> 기수 좌.우 <한서지리지> 공현 북쪽 산이 기수가 나오는 곳이고, 동쪽으로 려양까지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삼국지 위지무제기> 건안 9년 태조가 기수를 막아 백구로 들어가게 해 보급로가 통했다.
(원문) 淇水 : 源出河南林县东南临淇镇,东北流经淇阳合淅河,折东南流,经汤阴至淇县,入卫河,《诗卫风》淇水左右,

《汉书地理志》共县北山,淇水所出,东到黎阳入河,《三国魏志武帝纪》建安九年,太祖遏淇水入白沟,以通粮道。 

(백과사전 번역) 하남성 북부에 있다. 고대 황하의 지류로 남쪽으로 지금의 급현 동북쪽에 있는 기문진 남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갔다.

동한의 건안(헌제) 때 조조가 기수의 입구에 둑을 만들어 동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백구(현 위하)로 흐르게 했다.

그래서 운하로 배가 통하게 되어 위하의 지류가 되었다.
在河南省北部。古为黄河支流,南流至今汲县东北淇门镇南入河。东汉建安中,曹操于淇口作堰,遏使东北流,注入白沟(今卫河),

以通漕运,此后遂成为卫河支流

행촌 이암선생이 저술한 <단군세기>의 37세 마루단군 조에 “경오(B.C591) 56년 단제께서 남쪽 기수(淇水)까지 순행하시다가

붕어하셔서 태자 다물이 섰다.

 (庚午五十六年帝南巡至淇水崩太子多勿立)”는 기록이 있는데,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기수가 당시 조선의 남쪽에 있던 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인 것이다.

예, 맥, 옥저가 있던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는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인 치우천왕의 주 활동무대로 청구국이 있었던 곳이다. 치우천왕의 무덤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산동성 양곡현(옛 수장현) 십오리원진에 있으며, 우리 민족이 동이족 외에 예맥족(濊貊族)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바로 치우천왕이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활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옥저는 우리 역사에 아주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고구리 동천왕 20년(246년) 겨울 10월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도읍인 환도성을 함락시키자 동천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다 거의

사로잡힐 뻔했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조직해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고 유유가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을 찔러 죽여 사직을 구한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는 가로 X 세로 30cm 정도의 관구검기공비를 길림성 집안에 옮겨다놓고 그곳이 고구리의 도읍이라는 역사왜곡을 자행했다.

결론적으로 위 동천왕 기록도 황하 북부 하남성 또는 산서성 동남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예맥, 동예, 옥저가 한반도 북동부에 그려져 있는 것은 그야말로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반도사관의 이론일

뿐으로, 위와 같은 중국의 기록을 전혀 참조하지도 않고 일제의 주구 이병도가 임의대로 그린 것을 현 강단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통탄할 노릇이라 하겠다. 

▲ 중국대륙 한가운데서 옮겨져 길림성 집안에 전시되어 있는 관구검기공비.

관구검이 집안까지 왔다는 것은 역사왜곡으로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기사입력: 2012/05/10 [16:01]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