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거란,몽골,원,금.청,터기,요,왜,일본

[스크랩] 고조선의 適通 경쟁자 < 鮮卑 >는 어디서 왔나 ?

설레임의 하루 2012. 5. 2. 00:52

 

선비족  탁발씨 발상의 비밀을 간직한 천년 동굴의 神秘

서울대 朴漢濟 교수의 중국 中世로의 시간여행

 

호륜패이는 바로 고조선의 중심지 적봉과 요녕에 소속된 직할 통치지역에 속하는곳으로 비정된다 

 

호륜패이의 풍광  

http://blog.naver.com/rosebaby5203?Redirect=Log&logNo=40095025629  

역사자료방 120번글 우랑카이고원 지도 및 고조선방 오랑캐연원 참조.

(운영자 주)  

 

옛날 옛적 중국 동북방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興安嶺山脈 동쪽 기슭의 한 커다란 동굴에서 산돼지와 순록 등 야생동물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가난한 수렵민들이 있었다. 그 동굴이 그 유명한 알선동 (嘎仙洞) 이다. 산맥 너머 끝없이 펼쳐진 초원은 기마전사들의 말굽소리로 항상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하였지만 그곳은 뒤뜰처럼 조용하고 안락했다. 그곳의 생활에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백성, 작은 국가를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탁발 (拓跋) 이라고 불렀다.

세월과 더불어 영내의 주민이 늘어났다. 새로 편입된 사람들을 통하여 서남방 초원과 농경지역의 소식이 들려오고 화려한 물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정든 고향, 동굴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큰 호수와 초원이 있는 呼倫貝爾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정하였다. 고향을 떠난 이상 중소도시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듯이 큰물에서 그 기량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난관이 그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南遷을 계속하여 초원의 맹주였던 匈奴가 떠나버린 땅에까지 도달하였다. 남천 과정에서 수많은 종족들을 흡수하였다. 어느덧 대유목민족 鮮卑라는 명칭이 그들에게 붙어 있었다. 그들은 五胡가 中華世界를 뒤흔든 十六國시대 말미에 北魏(북위)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중국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들은 동굴을 떠난 이후 자기 종족, 자기 문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새로운 피를 輸血받고, 새로운 문화를 획득함으써 자기를 혁신해 갔다. 수혈 없는 문화는 부패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도를 다시 世界의 중심 洛陽(낙양)으로 옮겼다. 당시 세계의 모든 길은 洛陽(낙양)으로 향하여 뚫리기 시작했다. 北魏(북위)는 당나라(唐國)의 전신(前身)이다.

北魏 洛陽(북위 낙양)은 바로 화려한 長安(장안 지금 시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鮮卑 拓跋族(선비 탁발족)의 잊혀진 고향 嘎仙洞(알선동)을 찾았다. 자기 것에만 집착하는 帝國의 黃昏을 살피는 여행보다 帝國의 孕胎 현장이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던져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향 흥안령 산맥 동쪽 기슭에 위치한 자연동굴 알선동.

1000명 정도를 수용할수 있을정도로 규모가 비교적 큰 이동굴은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씨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20여 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이번처럼 유쾌하고 신나는 여행을 다녀온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 여행을 생각할라치면 괜히 설렌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사람 또 어디 갔다 왔길래 저렇게 흥분할까 하고 의아해할 분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동굴을 찾아갔던 것이다. 동굴의 이름은 알선동(嘎仙洞 ;중국발음 까센동)이다.

 현재 내몽고자치구 호륜패이(呼倫貝爾;호륜베이얼)() 아리하(阿里河;아리허)() 서북 9㎞ 지점의 높이 70m의 화강암 산 중턱(지상으로부터 24m)에 팬 알선동이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씨(拓跋氏)의 발상지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그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생을 보내다 정년퇴직한 후 본격적으로 이 동굴 발견에 나섰던 미문평(米文平)씨에 의해 평범한 하나의 자연 동굴이 유구한 중국 역사의 큰 강의 색깔을 바꿔버린 지류의 발원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미선생은 여러해 동안의 문헌조사와 2년여의 답사 끝에 알선동 입구에 음각된 축문(祝文)을 발견해 냄으로써 1,000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역사의 현장은 백일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미선생에 의해 탁발선비(拓跋鮮卑)의 발상지로 확인된 이 동굴의 재발견은 인민중국 성립후 중국 고고학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미선생은 이 동굴의 발견으로 일약 유명한 고고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필자가 이 동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북위 3대 황제 세조 태무제(太武帝) 443(太平眞君 4) 중서시랑(中書侍郞) 이창(李敞) 등을 그곳으로 보내 천지신명과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축문을 동굴의 벽면에 새기게 했다는 사실은 ‘위서’(魏書) ‘예지’(禮志)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축문의 소재지가 드러난 것이다. 이 축문을 흔히 ‘선비석실축문’(鮮卑石室祝文)이라고 부르지만 축문의 발견이 중국사에 던져준 파문은 매우 큰 것이었다. 무엇보다 선비족의 발원 지점이 명명백백하게 확인된 것이었다. 또한 새겨진 문구도 새로운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필자도 박사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축문에 나오는 문구 하나를 논지를 전개시키는 데 결정적 증거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중국에서 발행되는 고고문물 관계 잡지를 통해 그 축문의 전문도 확인했고 사진도 보았지만 그것만으로 목마름은 쉽게 해갈되지 않았다. 미선생이 1980 730일 오후 330, 축문의 글자 중 한글자인 ‘四’자를 발견하고는 ‘찾았다! 글자를 찾았다!(?到了! ?到了!)라고 외친 지 21 4일이 지난 2001 83일 오전 930분 비로소 나는 그 축문을 직접 손으로 만지며 글자 하나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달 가까운 기간 섬서-사천-호북성 일대를 답사한 후 북경으로 돌아온 다음날인 729일 오후 4시 후배·제자 등 7명과 함께 북경공항을 출발했다. 1시간50분 정도의 비행 끝에 호륜패이맹의 수도 해랍이(海拉爾;하이라얼)공항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이름은 몽고어로 ‘산마늘’(야생부추)이라고 한다. 흥안령산맥 서록에서 발원하여 도시 북쪽으로 흘러가는 해랍이하() 양안에 펼쳐진 목장에서 수많은 산마늘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미선생은 ‘복사꽃이 떠 있는 3월의 강물’(桃花三月之水)의 뜻이라는 설도 있다고 했다.

호륜패이 초원지역은 지질시대에는 망망대해(大海)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과학자들은 이 지역을 ‘몽고해조’(蒙古海槽)라고 부른다. 그 중심에 위치한 해랍이는 ‘초원 속의 빛나는 구슬’(草原明珠)이라는 애칭을 얻을 만큼 그 풍광이 빼어나다. 하늘에 폭신한 구름의 백원(白原)이 있다면 땅에는 그보다 더 포근한 무애(無涯)의 초록빛 초원이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모를 가느다란 강이 뱀처럼 이리저리 또아리를 틀고 있다. 집들이 그 초원 위에 진주처럼 박혀 있다. 초원에 있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활주로마저 그렇게 예쁠 수 없다. 하느님이 이런 절경을 선물했다는 것은 분명 인류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76세의 미선생이 공항까지 직접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초면이지만 정다운 얼굴이다. 알선동 축문을 직접 보기 위해 20년 가까운 세월을 기다려온 내가 그의 얼굴에서 특별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북위 4906´∼4932´, 동경 11932´∼12035´에 위치한 해랍이의 여름 해는 잔뜩 게으름을 피우면서 초원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미선생이 준비한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금방 보이던 빌딩은 가뭇 없이 사라지고 온통 하늘만 보일 뿐이었다. 무수한 별들이 떠 있는 바다와 풀을 뜯는 양과 말 등이 유랑하는 초원의 바다가 일직선으로 맞닿아 있었다.

초원은 역시 유목민의 것이어야 한다. 도시의 유목민이 그러하듯 유목지역의 도시인은 제격이 아니었다. 초원에서의 유목민 간의 싸움은 그래도 낭만적이다. 도시인들이 개입된 전쟁은 온갖 음모와 치졸한 술수가 난무한다. 그래서 이곳에 도시가 세워지면서 수천년 동안 계속되던 평화는 산산조각나 버렸다. 이 광막한 초원 가운데 도시가 세워진 것은 1734(淸 雍正 12)의 일이었다. 건설 당시 이곳 해랍이는 호륜패이 성()이라고 불렀다.

1903년 동청철도(東淸鐵道)가 부설됨으로써 이 성은 이 지역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만주국(滿洲國) 시대에는 흥안북성(興安北省)의 성도가 되었다가 1940년부터 정식으로 해랍이시()로 불렸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점차 만주지역으로 그 세력을 펼치다 결국 1932 1215일 해랍이를 점령한다. 13년 간의 일본 점령기간 동안 갖가지 만행이 자행되었다. 이곳은 러시아 세력을 상대하는 공격과 방어의 군사기지로 선택되었다. 일본제국주의는 1만명이라는 다수의 인력과 대량의 물자를 투입해 영구적인 지하군사시설(벙커)을 만들고 그 공사에 투입됐던 1만명을 살해해 묻어 버렸다.

비밀이 샐까 두려워서였다. 그 무덤이 바로 ‘만인갱’(萬人坑)이다. 1940 12월 이 지역에 주둔한 소위 ‘731세균부대 543지대(支隊)’가 저지른 만행은 유사 이래 이곳에서 가장 잔인했던 참사였다. 일제의 만행은 중국인에게만 가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곳 해랍이와 중·러 국경에 있는 만주리(滿洲里)시에는 수많은 조선족들이 아직도 힘겹게 살고 있다. 해랍이 어느 거리에서 보이는 초라한 조선식당 ‘설악산’(雪嶽山)과 만주리의 ‘국문’(國門) 근처 거리 양편에 줄이어 있는 ‘진달래식당’ 등은 우리의 이웃 부모 형제들의 애달펐던 유랑의 세월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호륜호의 전경. 호륜호는 주위가 400km의 엄청난 규모로,호수가 아닌 바다라고 착각할 정도다.   

선비의 기원과 탁발부의 등장

탁발부는 원래부터 선비였던가. 소위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를 남조인들은 ‘색()로’(索頭虜)라고 낮추어 불렀다. 잘 아다시피 변발(?)이 이들 종족의 특징으로, 이것은 후세 중원에 진입한 후에도 지속된 탁발부 특유의 습속이 되었던 것이다. 찰뇌락이 고묘에서 출토된 여자묘에서 변발의 여인 시체가 발굴됨으로써 이 점이 확인된다. 이 변발의 습속은 모용부(慕容部) 등의 동부선비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습속이다. 따라서 탁발부가 처음부터 선비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국의 유명한 사가 마장수(馬長壽)도 ‘오환과 선비’(烏桓與鮮卑)라는 책에서 ‘몽고 동북부 지역에 분포하는 두가지 선비 문화유적에 대한 고고 발견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동쪽 요서 일대의 동부선비와 북쪽 호륜패이 일대의 탁발선비는 하나의 문화형태를 가진 것이 아님을 명백히 했다.

탁발부는 몽고초원으로 남천하는 과정에서 인근에 거주하는 무수한 선비 부락들을 흡수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탁발선비’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탁발부의 핵심 조직은 원래 부계혈연관계에 의해 형성된 팔족(八族;八姓 혹은 八氏라 칭하기도 함)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제실인 탁발씨를 비롯하여 흘골씨(紇骨氏)·보씨(普氏)·발발씨(拔拔氏) 8개가 그것이다.

헌제 인은 그의 형제들을 분파시켜 자기를 맹주로 하는 연맹에 가맹한 각 부락들을 각각 통할하게 하였다. 그후 2족이 합쳐 10(十族)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제실 탁발씨와 ‘백세동안 통혼하지 않았다’(百世不通婚). 북위 효문제 이전 시기에 국가의 소위 ‘상장사례’(喪葬祠禮)에 이들 외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10족이 바로 북위 창업의 핵심 세력인 셈이다.

이들 10족은 동일부락의 씨족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예컨대 흘골씨 등은 철륵(鐵勒) 혹은 고차(高車)족의 대표적인 성이다. 따라서 남천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세력을 헌제 인은 그의 형제들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을 뿐이었다. , 팔족은 소위 ‘국인을 일곱으로 재편하는’(七分國人) 과정에서 생겨 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탁발씨 시조 탁발역미(拓拔力微) 시기에 들어 탁발선비의 결합체는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북위 시대의 씨족과 관료조직을 서술한 ‘위서’ 관씨지(官氏志)를 보면 소위 ‘내입75성’(內入七十五姓)과 ‘사방35성’(四方三十五姓)이 탁발선비 성장 과정에서 등장하는데, 이들은 탁발씨 중심의 부락연맹에 새로 가입된 세력들이다. 이들 성씨를 살펴보면 먼저 내입75성은 흉노·정령·고차·유연(柔然)·오환 및 동부선비의 족성(族姓) 등 복잡한 종족성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각각의 부락 내부 구성원도 혈연에 의한 순수집단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러한 부락 내부 족속의 혼잡함은 각 부락간 군사적 이합집산의 결과인 동시에 탁탈부의 남방으로의 긴 이동의 결과와도 관련이 깊다. 유목민족은 자기 것에 집착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자기의 이름이나 성은 물론 혈연의 순수성 확보 혹은 자기의 독특한 문화 지키기에 급급하지 않는다. 탁발부가 탁발선비로, 다시 선비로 성장한 것은 이런 유연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면 선비인의 영웅 단석괴와 탁발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자치통감’에 주를 단 원나라의 대학자 호삼성(胡三省)은 호륜호로의 남천을 주도한 탁발족의 추인을 서부대인인 추연(推演)과 동일인으로 보아 탁발추인이 단석괴의 서부대인이었다는 학설을 개창했다. 그러나 그 활동 연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두사람은 전혀 관계가 없다. 단지 탁발부 위주의 부락연맹체의 역량이 증대되는 과정에서 이전 단석괴의 부락을 흡수해 그를 기초로 발전해 갔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흥안령산맥 속의 한 동굴에서 출발한 탁발부는 시조 역미 단계에 들어 큰 도약의 모습을 보여 준다. 즉 결합한 부락들을 연맹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종속적인 관계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역미는 재위 39년 정양(定襄)의 성락(盛樂;현재 내몽고 수도 呼和浩特 남방)으로 천도하고 바로 제천행사를 행하였다. 제천이란 흉노 묵특선우 이래 북방 유목민 세계에서는 군권신수(君權神授)의 관념에 기반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이때 대부분의 부락 군장들이 와서 제사를 도왔지만 오직 백부대인(白部大人)만이 사태를 관망하면서 오지 않았다. 역미는 그를 정벌해 살육해 버리니 그후 주위의 부락들은 그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당시 역미의 위상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역미에서 북위 태조 도무제(道武帝)의 조부인 십익건(什翼퀺)까지 156년간 탁발부의 수령으로 재위한 자는 모두 14명인데 그 통치권은 그리 공고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왕위를 한 계통의 집안에서 계속 이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부 대인의 형제나 자식들을 인질(質任)의 형식으로 탁발부 수령 아래 와 있게 하여 각부를 교묘히 통제하고 있었다.

군사역량도 크게 증대되어 역미 시기에 ‘공현상마(控弦上馬) 20만중(), 의로(?) 시에 ‘공현기사(控弦騎士) 40여만’, 욱율(郁律)시에 ‘공현상마 100만’으로 수적 증가를 거듭하고 있다. 만약 강력한 왕권이 성립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규모의 군사역량을 가진 세력의 출현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후 남방 중원세력의 조종과 개입에 의해 탁발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구조는 동요하기도 하고 중절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386년 태조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에 의해 북위가 건국된다. 알선동에서 출발한 탁발씨가 ‘선비탁발부’로, 다시 북위를 건국하고부터는 당당히 ‘선비’를 대표하는 부족으로 성장해간 것이다 

 선비 최고의 영웅 단석괴와 탁발부  

선비 탁발부를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북위(北魏)왕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적을 것이다. 북위를 모르는 사람은 간혹 있어도 수()나라와 당()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휘황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당제국(唐帝國)의 원류를 따져 올라가 보면 그들의 먼 조상은 동굴을 집으로 삼고 살았던 초라한 수렵민에 불과하였다. 대당제국의 잉태는 이렇게 의외로 조촐한 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북방 흥안령산맥 동쪽 산록의 울창한 산림 속에 위치한 동굴에서 바깥의 살인적인 추위를 피해 그 긴긴 겨울을 보냈던 것이다. 원래 수렵민이었던 이들은 남의 초원지역으로 이동하여 유목민이 되었고, 마침내 농경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국 고래의 문명의 땅인 중원을 정복하였다. 그들이 세운 북위 왕조는 드디어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중화(中華)의 맹주로서 세계를 호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세계 각국인들이 낙양을 향해 모여들었다.

148년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존속하다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히 사라진 왕조 북위. 그러나 이 왕조는 중국 역사상 수없이 명멸했던 뭇 왕조들 가운데 역사에 남긴 족적이 적지 않다. 그들이 남겨준 유산은 고스란히 대당제국에 인수되어 활짝 꽃피웠고, 현재 흔히 말하는 ‘중국적인 것들’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후 그들 일부가 한인(漢人)세력과 연합하여 서위(西魏)∼북주(北周)왕조, 그리고 수나라를 연이어 창업하였다.

다시 이들은 남조의 진()을 멸망시킴으로써 명실공히 통일제국의 주체로 등장했다. 선비인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이들 정치세력을 흔히 ‘관롱집단’(?集團)이라 지칭하는데, 이들이 바로 7세기 이후 세계를 호령하기 시작한 대당제국의 ‘킹’이 되거나 ‘킹메이커’ 집단으로 활약했다. 이후 선비라는 종족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대당제국의 힘은 바로 이 선비인이 추구했던 정치이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민족적 차별을 초월하는 대담한 포용성과 민족 고유의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이민족들이 가진 장점을 기꺼이 수용하는 개방성이 대당세계제국 형성의 기틀이 되었다면 그 공로는 바로 선비인이라는 유목민이 가진 특징에 기반했다고 할 것이다.

현재 중국의 특징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크고 또 많은 인종을 포괄하는 국가라고 한다면 그런 중국 형성의 원동력은 대당제국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당제국은 바로 북위왕조의 유산을 밑천으로 일궈 낸 대제국이었다. 현재 중국인의 92%를 차지하는 한족(漢族)도 사실 사서에 나타났다 사라진 선비 등 90여 민족의 혼합의 결과이고, 55개의 소수민족도 언젠가는 한족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가정이라면, 어찌 이 초라한 시작과 달리 위대한 끝맺음을 한 탁발부의 역사를 홀시할 수 있을 것인가?

소위 ‘중국’의 형성에는 진·한(秦漢)제국의 통일이 하나의 큰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원지역에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살던 여러 농경민족의 통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반면 당의 통일은 농경민과 유목민의 융합이요, 통합이었다. 인류가 생산해낸 가장 대립적인 두가지 문화유형을 하나로 혼일시켰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길은 대당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화제국 수천년의 역사 가운데 당대(618907)는 위대했던 시대 중 하나였다. 당대는 역사상 전례없는 물질적 풍요, 제도적 발전,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도약, 그리고 모든 예술부문에서의 창조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이러한 엄청난 활력의 내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첫째는 당 왕조의 절충주의(折衷主義), 이것이 바로 당이 이전 400년의 혼란스러운 역사로부터 다양한 문화의 흐름들을 한데 끌어모은 방식이었다. 둘째는 당의 국제성(國際性), 즉 모든 종류의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이었다. 이러한 특성들로 인하여 당 문명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인접한 주변민족들은 늘 그들 자신의 고유의 문화를 변형시킨 요인들을 당조로부터 수용하였다. 그리고 아시아 도처의 사람들이 당으로 몰려들었다. 당의 수도였던 장안은 단순히 거대한 제국의 수도로서만 기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도시였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전파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곳으로부터 최신의 불교교리, 최신의 시()형식, 각종 제도들의 권위있는 전범(典範)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장 새로운 복식과 헤어스타일까지 세계 각처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의 형성은 탁발씨가 알선동을 출발해 중원인 낙양에 이르는 동안 보여준 특유의 문화적 흡수성과 타 세력, 타 종족에 대한 포용성과 개방성이 그 기반이 되었으며 ‘거대한 다민족국가’라는 현 중국의 특징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중국적인 특징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답사반 일행은 해랍이에 도착한 후 시내 지역 답사와 호륜패이학원(呼倫貝爾學院)에서의 학술교류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 답사 코스로 호륜호 일대와 만주리를 잡았다.

이 지역이 탁발부의 활동지역이었던 것은 195060년대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확인되었다. 195963년에 걸쳐 호륜호 북방 찰뇌락이에서 300여좌()의 선비고묘군(鮮卑古墓群)이 발굴되었고, 이곳에서 40㎞ 떨어진 호륜호 동면의 완공 지역에서도 4좌의 선비고묘군이 발굴되었다. 이 지역이 바로 탁발씨의 선조들이 살았던 대택지역이다. 이들 묘군에서 기마선사(騎馬善射)의 용맹한 기마병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철모(鐵矛)와 환수철도(環首鐵刀)·목궁(木弓)·화피궁낭(樺皮弓囊)·철골전족(鐵骨箭鏃) 등 무기와 공구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방의 후한 왕조와 교류하여 얻은 사주(絲綢)·동경(銅鏡)·직금(織錦)·칠기(漆器)·옥기(玉器) 등 장식품이 나왔다. 중·러 국경도시 만주리를 둘러보고 바로 호륜호로 향했다. 중국의 전도(全圖)를 보면 마치 닭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닭의 뒤로 처져 있는 벼슬부분에 보이는 파란 반점 모양이 바로 호륜호와 패이호다.

영토에 관한 한 욕심 많기로 유명한 중국사람들이 이 지점을 확보하려 했던 노력의 흔적이 금방 드러난다. 호륜호는 주위가 400㎞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와 비슷한 거리이니 한바퀴 돌려면 자동차로 하루는 족히 잡아야만 한다. 그것은 호수가 아니라 바다였다. 거기서 산출되는 각종 어류의 종류뿐만 아니라 떠 있는 것들도 모두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풍력용 요트형 배들이다.

사진으로만 보면서 가보지 못해 안타까워만 했던 호륜호에도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찰뇌락이의 고묘군으로 길을 재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였건만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곳에서 해랍이까지는 300㎞로, 3시간은 잡아야 했다. 가는 길가 담벼락에 ‘남아를 낳든 여아를 낳든 매 일반이다’(生男生女都一樣)라는 표어가 눈에 들어온다. 사실 유목경제는 강한 근력(筋力)이 필요한 농경지역과 달리 젖짜기·털깎기 등 노동에서 남녀의 차별이 없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1998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해랍이 인구 중 남녀 비율은 공교롭게도 117,787:117,514로 극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목표인 알선동으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태초에 사람들은 동굴에 살았다. 중국인의 조상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는 논자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누차 들어왔던 북경 남쪽 주구점(周口店)이라는 동굴에 살았던 북경원인(北京猿人)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동굴은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필자도 한때 동굴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6·25 전쟁 때 우리 가족은 고향집 뒤 죽림 속에 파놓은 동굴에서 상당기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는 그곳을 방공호(防空壕)라 불렀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불편했다는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대로 지낼 만한 곳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돌로 만든 집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고, 석굴을 파 부처님을 그곳에 모신 것은 부처님을 위한다기보다 수행하는 스님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집 동굴의 역할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195060년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밀주(密酒) 단속을 피하기 위해 동네에 단속원이 ‘떴다’는 호각소리만 나면 식구 누구든 작은 방에 있던 밀주 도가니를 들고 그곳으로 마구 뛰었던 것이다.

후대의 선비인들, 북위를 건국한 직후의 탁발선비인들마저 그들의 조상이 동굴에 살았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파트생활에만 익숙한 필자의 두 딸이 아빠가 어릴 때 어떤 집에 살았는지에 별 관심이 없음이 분명하고 더욱이 동굴에서 살았는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된 데는 그 지역이 정치의 중심인 중원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이후 소수민족지구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동굴은 천고의 세월 동안 숱한 비바람에도 변함이 없건만 그들의 후손, 그들이 세운 왕조는 중국의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매몰되어 갔던 것이다.

북위 건국후 58년이 지난 태무제 태평진군 4(443) 3월 어느날 문득 수도 평성(平城)으로부터 4,500여리 떨어진 흥안령 동록 일대에 위치한 오락후국(烏洛侯國)에서 조공사를 파견해 왔다. 탁발씨가 알선동을 떠난 것이 22~55년이므로 북위 건국까지 35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그 사신은 그 나라의 서북에 북위 황제의 선조가 살던 옛터가 있다는 사실을 태무제에게 알렸다. 이 보고를 받은 태무제는 중서시랑 이창 등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창은 제사를 지내고는 그 석실 벽에 축문을 새기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 축문의 내용이 ‘위서’( 108-1) ‘예지’(禮志)에 실려 있다.

‘위서’에서 이 사실을 전하는 곳은 모두 2곳이다. 그러나 ‘위서’의 찬자인 위수(魏收)는 같은 사실을 약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오락국전’에는 “그 나라(오락후국) 서북에 ‘국가선제의 구허’(國家先帝舊墟)가 있으며 그것은 남북 90보 ‘동서 40보’ 높이 90척의 ‘석실’(石室)로 석실 내에는 신령(神靈)이 있어 백성들이 자주 그곳에 가서 기청(祈請)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한편 같은 책 ‘예지’(禮志)에도 같은 내용을 기술하면서 “위나라 선조들이 북방에 살면서 돌을 파서(鑿石) 조종의 묘당(祖宗之廟)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석묘(石廟)가 옛 그대로 있으며 백성들이 항상 기청하니 효험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들 기록으로만 보면 석실이 구허, 즉 옛 거주지인지 조종의 묘당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송대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은 예지의 기술에 따라 “돌을 파 묘당을 만들었고(鑿石爲廟), ‘석묘’가 그대로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런 기술 영향 때문인지 후세에는 대체로 위나라 조상들이 북방지역(幽都·北荒)에 살면서 ‘동굴을 파 묘당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정리해 왔다. 즉 거주지가 아니라 천지신명과 조상을 제사지내는 사당이라는 것이다.

선비 석실이 정확하게 어디에 존재하는지가 문제였다. 그것을 찾으려면 먼저 오락후국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한다. ‘위서’ 오락후국전에서는 오락후국에 대하여 ‘그 땅은 지두우(地豆于)의 북방에 있고… 그 나라의 서북에 완수(完水)가 있어 동북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해지며, 그 나라의 작은 강들은 난수로 흘러 들어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또 서북으로 20일을 가면 우사니(于已尼)라는 큰 강이 있으니 소위 북해(北海)다’라 되어 있다. 그러나 지두우라는 나라의 정확한 위치도, 완수·난수 그리고 우사나 등도 구체적으로 어느 강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었다.

알선동의 발견자 미문평은 흥안령산맥 어느 지점엔가 있을 이 동굴을 찾아 나섰다. 미선생은 문헌을 검토한 결과 흥안령 일대라는 심증을 굳혔다. 내몽고 호륜패이맹은 자연지리에 의해 지금도 3개부분으로 나뉜다. 흥안령 서록의 호륜패이초원은 유목민의 요람이며, 대흥안령의 산림지구는 수렵민을 위한 천혜의 왕국이며, 동록의 눈강(嫩江)평원은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다. 따라서 선비석굴이 흥안령 산림지구에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대강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이미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이 지역이 탁발선비의 원주지일 것이라는 견해는 제시되었다.

 예컨대 전백찬(?伯贊)이 쓴 ‘중국역사강요’(中國歷史綱要)에서도 일찍이 ‘선비탁발부 선세는 눈강 서북의 대흥안령지구에 살았고’운운한 바 있다. 미문평은 말을 타고 흥안령산맥 일대의 동굴을 모조리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선동이 제1후보로 떠올랐다. 문제는 석실 벽에 새겨진 축문을 찾아내야만 확인되는 것이다. 알선동은 1,000명 정도의 사람을 수용할 정도로 매우 큰 동굴이다. 벽면을 샅샅이 뒤졌으나 글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알선동의 ‘알선’은 고향의 의미라고 한다. 알선동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수가 적은 악륜촌족 자치기(自治旗)의 중심도시 아리하진에 속해 있다. 악륜촌족의 설화에 의하면 9개의 머리를 가진 만개(滿蓋)라는 악마가 이 산동(알선동)에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잡아먹고 방화하는 등 악독한 일을 자주 저질렀다. 악륜촌족은 이로 인해 편안할 날이 없었다. 총명하고 용감한 영웅인 알선이 궁전(弓箭)을 들고 동굴에 들어가 만개와 싸워 결판내기로 결심하였다.

 

알선이 “너는 무엇을 믿고 대흥안령의 주인이 되었느냐? 내가 문제를 하나 낼 것이니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너를 대흥안령의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도전장을 던졌다. “좋다. 말해봐. 내가 만약 답을 못하면 산동을 너에게 주마”라고 만개가 대답했다. “대흥안령이 얼마나 많은 산봉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하천이 있는지?”하고 물었다. 만개는 “900개의 산봉과 450개의 하류가 있다”고 대답했다. 알선은 웃으며 “틀렸다. 악륜춘사람들은 5세만 되면 대흥안령에는 100개의 산봉과 50개의 하가 있다는 것을 안다.

 

너는 뇌가 9개라서 하나를 9개로 셈을 해 틀린 것이다”라고 반박하였다. 또 둘은 동굴 앞에 서서 전면 앞산 꼭대기 위의 돌을 화살 3발을 쏘아 많이 맞히는 자가 동굴의 주인이 되기로 하였다. 먼저 쏜 만개는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지만, 알선은 3발 모두 맞혔다. 그리하여 만개는 하는 수 없이 산동을 알선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이 동굴을 알선동이라 했다고 한다. 아리하진의 악륜촌민족박물관 앞에는 알선이 말을 타고 달리는 동상이 서 있다. 이 자그마한 도시는 온통 ‘알선’으로 먹고살고 있었다. 제일급 여관도 ‘알선빈관’이며, 술 이름도 ‘알선백’(仙白)이다.

 

미문평은 혼자의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원래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괜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책도 들었다. 고고학 및 역사학 관계 학회에 참석하여 의견을 발표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북경에서 애써 모셔온 유명한 원로 학자는 알선동 앞에까지 자동차로 왔다가 당시 동굴로 오르는 길이 정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m 위의 동굴에 올라가 보지도 않고 돌아갔다. 미문평은 이렇게 외로운 발굴작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미문평은 4차의 탐방만에 동남으로 향한 알선동 입구 북면에 잔뜩 끼어 있는 이끼를 걷어내는 순간 ‘四’자를 찾았던 것이다. 이 발견은 그를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차례 초청받는 저명한 고고학자로 다시 서게 했다.이창이 새긴 축문은 예지의 그것과 약간 다른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 다른 부분이야말로 역사학계에 새로운 사실을 제공한 것이다. 축문의 전문을 전재해 본다 

 

‘태평진군 4년 계미 725일 천자 신 (탁발)도는 알자복야 고육관과 중서시랑 이창과 부토를 시켜 마·우·양을 희생물로 하여 감히 황천의 신에게 명백하게 고하노라.(維太平眞君四年癸未歲七月卄日/天子臣燾,使謁者僕射庫六官, 中書侍郞李敞·傅?/用駿足·一元大武·柔毛之牲/敢昭告于皇天之神/)

 

개벽의 초기 우리 (탁발)황조를 그 토전(알선동지역일대)에서 도우셨고 억년을 거친 후에 마침내(대택, 즉 호륜호)으로 남천했다 

 많은 복을 받은 덕분으로 중원을 널리 안정시킬 수 있었다. 오직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만이 사변을 개척하여 안정시켰던 것이다.(?之初,祐我皇祖,于彼土田/歷載億年,聿來南遷/應受多福, 光宅中原/惟祖惟父,拓定四邊/)경사로움이 후대에까지 흘러내려 어리석은 저에 미쳐 현풍(도교)을 천양하고 높은 묘당을 더욱 구축하게 되었다. 흉악한 무리들을 이겨 없애니 그 위세가 사방에까지 미쳤다. 유인(즉 오락후국인)이 멀기를 마다않고 머리를 조아리고 내조하여 칭왕해 옴으로써 (조상의)구허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의 역사에 더욱 광명이 있기를 우러러 바라노라(慶流後胤,延及?/闡揚玄風,增構崇堂/?凶醜,威햘四荒/幽人忘遐,稽首來王/始聞舊墟,爰在彼方/悠悠之懷,希仰餘光/)왕업이 일어남이 황조로부터 시작되어 면면이 이어지기가 오이덩굴과 같게 되었던 것은 적시에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고, (그런 마음을) 밀어서 하늘에 바치는 제사음식을 차렸다.

 

자자손손에게 복록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노라.(王業之興,起自皇祖/???,時惟多祜/歸以謝施,推以配天/子子孫孫,福祿永延/)

 

위대한 하느님과 위대한 지신에게 (제품을) 진헌한다. 황조 선가한과 황비 선가돈께서는 차린 제사음식을 맛보기 바라노라.(薦于皇皇帝天,皇皇后土/以皇祖先可寒配,?先可敦配/尙饗/)

동작수사 염이 팠다(東作帥使念鑿)’이상과 같은 축문의 내용은 탁발부의 남천로와 그 과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자기록이다.

 

‘위서’ ‘예지’의 기술과 몇군데 차이가 나는데, 이것 또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있다. 우선 ‘현풍을 천양하고’ 운운 하는 부분은 예지에는 없는 것인데, 태무제가 폐불(廢佛)을 단행하고 도교를 국교화한 시기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복불 이후에 쓰여진 예지는 ‘어리석은 자가 외람되게 왕업을 이었으나 덕성이 드러나지 않고’(?人簒業 德聲弗彰)라 되어 있다. 또 ‘구허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는 것을 ‘예지’는 ‘구묘가 훼손되거나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소상히 알렸다’(具知舊廟 弗毁弗亡)고 되어 있다.

 

즉 ‘예지’는 ‘구허’가 아니라 ‘구묘’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이창 등이 제사지낸 사실에 의해 이후 ‘위서’찬술때 오해한 부분이다. 후세에 사마광 등이 구허 대신 구묘로 오해한 것도 ‘위서’의 찬자 위수(魏收)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필자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은 ‘예지’에 없는 ‘선가한’ ‘선가돈’이라는 부분인데, 이 문구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첫째, 종래 북방 유목국가 가운데 가한 칭호를 처음 사용한 자는 402년 유연(柔然)의 구두벌가한(丘豆伐可汗)이었다고 알려져 왔다. 이 축문의 발견으로 가한 칭호는 탁발부에서 시작되어 유연·돌궐·회흘·몽고 등의 민족으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둘째, 북위 황제의 조상이 가한 칭호를 칭하였다면, 그 황제들도 가한이라는 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전제된다. 잘 아다시피 당 태종이 농경지역과 유목지역을 아우르는 ‘천가한’(天可汗)을 칭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며, 북위 황제의 선조뿐만 아니라 이후 동위-서위-북주-북제--당으로 연결되는 북조 계열 황제들의 호한융합적 세계관은 이 가한의식에서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알선동과 이 축문의 현장을 보기 위해 새벽 645분 우리는 완행열차에 올랐다. 미선생은 호륜패이학원의 지리학과 두 여교수(敖·杜)에게 우리의 안내를 맡겼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도대체 나를 가만히 침대에서 쉬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해랍이 지역은 해발 603776.6m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약간 낮은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기차는 해랍이 동교(東郊)에서 90도로 북쪽으로 방향을 틀고는 계속해서 달린다. 노란 유채꽃이 온 벌판을 덮고, 철로변을 따라 보이는 인가는 어느 집을 막론하고 방목하는 가축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목책을 두른 채전을 곁에 두고 있다.

 

채전에는 싱싱한 채소들이 비옥한 토양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을이 있는 곳에는 역사(驛舍)가 있고, 기차는 빠짐없이 정차했다. 그때마다 아쉬운 배웅과 반가운 만남의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느리광이 열차 속에서는 청춘남녀의 티없는 사랑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곳에도 역시 사람이 살고 있었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애틋한 사랑이 영글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두드렸다.

 

승객의 눈을 피해 사랑놀음에 열중하던 악륜춘 아가씨가 그곳 특산인 도시(都木市;산포도의 일종)와 송과자(松果홮;잣종류)를 맛보라며 살며시 건넨다. 뺨에 난 보조개가 예쁘다. 대학 시절 영동선을 타고 태백산맥을 넘을 때 어느 산마루 역에서 맛보았던 머루·달래·딸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 동행했던 깊은 보조개의 그녀도 지금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선비족의 ‘고향’알선동으로

 

오후가 되니 기차는 다시 머리를 동쪽으로 틀었다. 흥안령산맥을 넘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흥안령은 산맥이란 이름 값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터널 하나 없는 산맥이었다. 산맥 속으로 들어왔으나 산은 보이지 않고 대신 크고 작은 강들이 철로를 가로질러 흘러가고 있었다. ‘위서’ 오락국후전에는 ‘그 땅이 하습(下濕)하고 겨울에는 안개가 끼고 추워 백성들은 겨울이면 땅을 파 방으로 삼고, 여름이면 언덕(原阜) 위에 목축하는데 돼지()가 많고, 곡식으로 맥()이 생산된다’고 서술되어 있다.

 

1,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에 하나도 틀림이 없다. 저녁 무렵이 되니 강에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하였다. 물안개는 강가의 울창한 산림 속으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산맥 속의 강, 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양존하는 것이 바로 흥안령산맥의 모습이다. ‘위서’에 의하면 제사지내기 위해 알선동으로 찾아간 이창 등은 제사가 끝나자 화목(樺木)을 베어 동굴 앞에 세우고는 제사에 썼던 희생물을 걸어 두고 돌아갔는데, 이후 세운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루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지금도 당시 세웠던 백화수(白樺樹)가 흥안령산맥을 덮고 있고, 악륜촌족은 그 나무를 이용하여 그들 특유의 삼각형 집인 촬라자(撮羅子)를 지어 살고 있다. 15시간의 긴 열차여행 끝에 우리는 흥안령산맥 동록 아리하진역에서 하차하였다.

 

이튿날 9시 알선동행이 계획되었다. 아침식사후 갑자기 축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철책의 열쇠를 가진 두 직원이 대동(大同)과 호화호특(呼和浩特)으로 출장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축문을 보기 위해 20년을 기다렸고, 또 수천리를 멀다않고 왔는데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난처한 일이었다. 알선동에 들어서니 축문 부분에는 넓은 철판이 가로막고 그 바깥으로 무심한 철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천고의 신비에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옆에 모조한 축문석이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접대한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을 보기 위해 후배와 제자를 꾀어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정작 칼은 보지 못하고 칼집만 보고 가는 꼴이다. 오후 일정은 민속박물관 관람이었지만 눈에는 적갈색 철판만 어른거렸다. 견딜 수 없었다. 동행한 중국사회과학원 L연구원에게 “열쇠를 가진 자의 출장이란 말이 안되는 소리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으니 중국인인 네가 적극적으로 교섭해 보라. 관람료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겠다”고 부탁했다. L씨는 안내를 맡은 문화국 직원과 숙의를 거듭하였다. 마침내 저녁식사때 하리하진 진장과 문화체육국 국장 등 그곳 행정간부들이 합석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음날 9시에 개문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것이다.

 

‘세계적 문화유산의 보호 차원’ 운운하는 일장연설을 장시간 들어야만 했다. 또 취기가 오르자 악륜춘족 민가를 열창하던 문화국 백이(;바이)국장에게 나는 그저 “쉐쉐”(謝謝)를 연발할 뿐이었다. 순진무구한 L씨는 필자를 보고 ‘중국여행의 전문가(專家)’라고 간혹 놀린다. 열차표 구입, 싼 여관 잡기 등 여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행사의 주선 없이도 내가 제법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83 930분 알선동의 선비 축문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곳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1시간여 동안 만지고 또 만지고를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일본여행단이 도착했다. 그들은 뜻하지 않게 축문 실물을 관람하게 된 것이었다. ‘무임승차’도 유분수지…. 허탈했지만 우리가 이곳까지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그날 저녁 그곳에서 50여㎞ 떨어진 가격달기(加格達奇;자거다치)에서 출발하는 북경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틀밤을 열차 속에서 보내야 하는 33시간의 여행이었지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만약 축문을 보지 못했더라면 안중근 의사의 의거 터인 합이빈(哈爾濱;하얼빈) 역도 내려보지 않고 침대에 누워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