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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광개토태왕, "유주자사 진은 중국출신"?|♣

설레임의 하루 2012. 3. 7. 02:20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성훈 2012.02.29.  http://cafe.daum.net/dobulwonin/Nckk/105 

                       (원문 기사)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752§ion=sc7§ion2=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 역사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이상한 인물이 한명 등장하고 있다.

그는 바로 현재 태왕의 책사로 활약하고 있는 하무지라는 자인데 자막에는 ‘훗날 유주자사 진’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그런데 이 설정은 완전 허구로 작가의 100% 상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무지나 유주자사 진의 행적이 역사서의 기록으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1976년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무덤이 발견되자 동양사학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왜냐하면 덕흥리 고분의 천정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생전에 지냈던 벼슬이 적혀 있는 묵서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묵서명에는 진의 출생지는 신도(信都)현이고, 지낸 벼슬이 요동태수와 유주자사였다고 적혀있으며, 영락 18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3명의 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는 벽화도 같이 발견되었다.  

▲ 광개토태왕의 군사로 나오는 하무지가 유주자사 진이라는 작가의 상상까지는 이해하나, 하무지가 중원출신인 것은 맞으나 그 중원은 고구리 땅이었는데, 중국으로 생각하게 유도하고 있다.

 
북한사학계는 이 무덤의 묵서명을 근거로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북경까지 진출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주는 원래부터 중국 땅으로 지금의 북경 근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의 식민강단사학계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왜냐하면 덕흥리고분의 모든 명문이 기존 자신들의 역사이론인 반도사관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묵서명에 있는 영락 18년이라는 분명한 명문 때문에 유주자사 진이 광개토태왕의 신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중국사학계는 무덤의 주인공 진은 중국에서 유주자사까지 지내다 고구려로 정치적 망명(亡命)을 한 사람이라는 어불성설의 주장을

했다.
 
그러한 중국의 주장을 KBS 드라마에서 그대로 수용했는지, 하무지는 중원 출신이라는 설정을 해버렸다.

맞기는 맞는 말이나 중원을 중국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즉 KBS가 한국의 방송사인지 중국의 방송사인지 모를 정도로 중국의 억지대로 역사해석을 해버린 것이다.

이건 KBS의 분명한 오류로 사과 자막을 보내야 할 것이다.
(관련 장면 :  http://clip.kbs.co.kr/zzim/index.php?markid=2275588)

이 덕흥리고분이 우리에게 남겨준 아래 역사적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첫째. 군(郡)의 태수, 주(州)를 다스리는 자사 등의 벼슬이 중국에서만 쓰인 벼슬이 아니라, 바로 고구리에서도 사용한 지방장관의

 벼슬이라는 점이다.
둘째. 위대한 대제국 고구리의 강역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산서성 남단의 황하까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자사를 지낸 사람의 무덤이 공주 무녕왕의 무덤보다 1.5배나 커 당시 고구리의 국력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과연 그런지 다음과 같이 알아보기로 한다.
 

1) 덕흥리 고분의 묵서명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氏鎭仕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龍將軍遼東太守使持            
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卄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                       造欌萬功日煞牛羊酒 米粲
不可盡[掃]旦食鹽[豆]食一記             [之][後]世寓寄4)無疆

(번역)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였다.
진은 77살로 죽어 영락 18년 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의 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 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에 이르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 찾는 이가 끊어지 않기를...

우선 유주자사 진의 고향인 신도현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진은 산서성 임분(尧都) 출신이다. 식민사학계에서는 아무 근거도 없이 황해도 박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이 묻힌 평남 덕흥리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信都县) : 汉置,为信都国治,三国魏擅冀州治,晋立南宫王子玷为长乐王,因改国长乐国,其后石赵、慕容燕、苻秦皆置冀州于此,隋初析置长乐县,省信都入之,仍为信都郡治,唐初复曰信都,为冀州治,后改国尧都(요도=임분),寻复故,明省入冀州,即今河北省冀县治。

▲  1976년 평남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에 적혀있는 묵서명 (14행 154자)

2) 유주(幽州)는 어디인가?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되어 온 것이 무덤의 주인공이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기록이다. 즉 광개토태왕 시 요동군은 물론 유주 지역까지 다스리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고대 유주는중국의 주장처럼 하북성 일대가 아니라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을 (섬서성 북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는 대군,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등 7개 군이고 자사는 주(州)를 다스리는 지방장관이다.
 
그리고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를 드리고 있는 13태수의 지명을 살펴보면,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토(玄兎)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
이고 1명은 판독 불능인 상태이다.  

▲   무덤의 주인겅인 유주자사에게 13명의 태수가 하례를 드리고 있다.  
 
이 12 태수의 지명은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의7개 군의 지명과 일치하며 그 군에 속해있는 주요한 현(縣)은 다음과 같다.  
(상곡군) 거용, 창평, 탁록              (우북평군) 대갈석산
(요서군) 고죽성, 유성, 비여           (요동군) 안시, 요양, 서안평
(현토군) 서안평, 고구려                (낙랑군) 패수, 수성, 대방
(어양군) 어양, 천주, 로, 평곡

이중 위치 추적이 가능했던 몇 개 지명에 대해서 언급을 해보면,
상곡군 탁록은 치우천황이 황제헌원과 싸워 항복을 받은 곳으로 현 산서성 운성시 일대,
요서군은 고죽성이 있는 곳으로 산서성 운성시 서쪽 영제시 일대이다.
요동군은 평양성이 있는 임분시 일대 
현토군은 현 분하가 황하로 들어가는 곳인 서안평 즉 산서성 하진시 일대이다.
낙랑군은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 일대
어양군은 황하북부 하남성의 동쪽 일대

그리고 북평군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 남쪽 황하변인 운성시 예성현 영락진 일대이다.
우선 ‘永乐县’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검색을 해보면 아래와 같다.
(번역) 북주 때 치소로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가 황성현의 동북 2리에 있는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나누었다. 송 때 진으로 되고 고성은 산서성 영제현 동남 일백이십리에 있다. <환우기> 주 때 영락현이 되었고, 군으로 가진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만들어졌고 盖자는 오기다. 한나라 때 북평현이라 했으며, 북위 때 (5세기 후반 장수왕 때) 영락현으로 불렀다. 당천보원년(742년) 만성현으로 개칭했다.
(원문) 后魏置,故城在今河北省满城县西北鱼条山下,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
后魏置,故治在今河北省徐水县西。后魏置,故治在今山西祁县东
辽置,为锦州治,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
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汉为北平县,北魏称永乐县,唐天宝元年(742)改为满城县。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강역은 무덤이 발견된 한반도(덕흥리)와 무덤의 주인공의 벼슬인 유주 즉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 중북부(유주)까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만주 지역과 하북성/내몽고는 자연 광개토태왕의 강역이 아니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고구려 때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 북쪽 하남성 일부이다.    ©역사복원신문

▲ 유쥬자사 진의 무덤이 발견된 평안남도 덕흥리는 고구리 영토,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을 아우르는 유주도 고구리의 강역이고, 고구리는 티베트와 

위구르를 넘어 주앙아시아를 지나 터어키까지 연방 형태로 다스린 대제국이었다.